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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 '모양내기'라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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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 '모양내기'라도 해야지"

[우석훈 칼럼] 이명박 정부, 너무 거칠다

철학에서 출발한 약간 어려운 용어 중에 '정당성(legitimacy)'이라는 용어가 있다. 하버마스가 많이 사용하면서 유행하게 되었는데, 어쨌든 논리적인 것 그리고 적법한 것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정당성'이라는 것이 사회적 행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좋은 행정 행위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정당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선진국에서 유달리 행정 절차가 복잡하고, 어지간하면 이미 정해진 절차를 지키려고 하는 것은, 바로 정당성의 일부가 이미 합의된 절차에서 생겨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절차를 지킨다고 해서 바로 사회적 정당성이 생겨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의 상식 범위 내에서 행정 행위를 하려고 하는 이유는 이런 추상적인 의미에서의 정당성을 가진 정책일 때, 더 잘 시행될 수 있을 뿐더러, 사회적 갈등 비용도 줄어들기 때문일 것이다. 경제 정책에서도 조세저항과 같이, 기계적인 조세 효율성 계산과는 또 다른 측면의 사회적 효과들이 발생하는 것도 이런 정당성 측면에서 일정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

최근 KBS 사장의 해임에 관한 일련의 행정 행위들에 대해서 여러 가지 분석들이 가능할 수 있겠지만, 일단 이런 '정당성'의 관점에서 보면, 한 마디로 너무 '거칠다'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한국에서의 행정은 아직도 초보적인 의미에서의 정당성에 관한 논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모양내기'라는 절차가 존재하고 있다. 물론 이 때의 모양내기는 '크게 만들기' 혹은 '대대적으로 홍보하기'와 같은 일반 기업의 모양내기와는 조금 달리, 법적으로 주어진 절차들 그리고 법적으로 강제된 의무 절차는 아니더라도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 당사자의 의견을 듣거나 혹은 조율하는 모양새를 갖춘다.
▲ 8일 친정부 성향의 이사 6명만이 참석한 이사회에서 정연주 사장의 해임제청안을 처리한 뒤 경찰의 호위를 받고 KBS를 빠져 나가는 유재천 이사장. KBS 내에 경찰 병력이 투입된 것은 지난 1990년 이후 18년 만에 처음이라고 한다. ⓒ뉴시스

이미 내부적으로는 결론이 나 있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최소한의 모양내기를 하는 것은 정당성 확보를 위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최소한 이런 모양내기 절차를 통해서라도 보다 많은 의견을 듣고, 또 다양하고 수렴되지 않는 갈등들을 행정 절차가 담아내게 된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최근 행정행위들은, 지나치도록 거칠게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는데, 그 절정에 한국방송(KBS) 사장 해임 건이 놓여있는 것 같다.

감사원의 이례적 해임 건의와 이사회에서의 해임 제청이 법적 권한 사항인가 혹은 개정된 공영방송법에서 대통령에게 해임 권한이 있는가라는 법적 논란은 차지하고라도, 급하게 그것도 군부독재에서도 없었던 경찰력을 동원하면서까지 이런 행정 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에 대해서는 두고두고 연구거리일 것 같다. 정말 거칠지 않은가? 이래서야 '준비된 정권' 혹은 '준비된 대통령'이라고 평가하기는 아주 어려울 것 같고, 아마추어 정권에 거친 행정 관료들의 독주 체계라고 평가하지 않기가 어려울 것 같다.

지금 한국은 10년 만에 정권이 바뀐 역사적인 순간을 보내는 중이고, 지금의 행정 행위 하나하나가 나중에 한국 행정사 혹은 한국 경제 정책사에 최소한 한 페이지로 기록될 그런 시간들을 보내는 중이다. 그런데 경찰력을 동원하고, 감사원을 동원하고, 밀실 이사회로 얼렁뚱땅 통과시키는 이런 행정은, 아무리 잘 봐 주더라도 '정당성을 잃은 행정'이고, 만약 그런 분류가 있다면, '지나치게 거친 행정 행위'의 대표적인 사례로 교과서에 실리게 되지 않을까? 아마 그럴 것 같다.

게다가 계산 방식은 차지하고라도, 4년간 누적적자 1000억 원이라는 이유로 공영방송의 사장을 해임하는 것은, 행정 원칙이라는 면에서도 지나치게 거칠고 조악하기만 하다. 그런 이유로 사장이 해임되어야 한다면, 지금 정권이 임명하고 있는 수많은 '고소영' 사장들도 정권 임기 내에 역시 해임되어야 한다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게다가 적자 운영이 그렇게 심각한 죄라면, 적자를 이유로 '부동산 연착륙 정책'을 요구하는 건설회사의 정책 요구도 들어주면 안 된다. 그들도 사실상 해임 대상들이라는 얘기를 지금 한 것이 아닌가?

어차피 지지율도 '턱걸이로 20%'인데, "우리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하는 최근의 거칠고도 거친 행정 방식에 대해서, 이명박 정권은 다시 한 번 고민해봐야 한다. 지지율이 낮을수록 행정 행위의 '정당성'이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는데, 어차피 잃을 것도 없다고 KBS 사장 해임 건처럼 점점 더 '거친 행정'을 고집한다면 정말로 심각한 민심이반으로 통치 자체가 불가능한 순간이 올 수도 있다.

오랫동안 사회적 논의를 하고, 기계적인 법적 의사결정자만이 아니라, 많은 국민과 소비자 그리고 시청자와 같은 다양한 이해 당사자의 희망들을 최대한 조율하고, 접합점을 찾으면서 진행되는 것이 좋은 행정이고, 선진국들의 행정이다. 생각이 다른 상대방에게도 설명하고 설득하면서 진행되는 최근의 다른 나라들의 행정 추이와 비교할 때, 이런 거친 행정들이 나을 부작용이라는 것은 너무 뻔하지 않은가? 되도록이면 경찰과 같은 폭력에 의존하는 비율을 줄여야 하는데, 경찰을 동원하지 않으면 거의 행정을 추진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은 아주 비정상적이다.

통치자의 결정은 최소화하고, 절차가 움직이게 하고, 가능하면 더 많은 사회적 정당성을 얻는 행정 행위가 누구나 말하는 좋은 행정이다. 얼마나 더 경찰과 폭력에 의존하며 거칠게 진행되는 행정 절차를 보아야 하는가? 최소한의 '모양내기'마저도 포기한 이러한 행정 절차가 반복되어서는 정말 곤란하지 않은가? 내용은 차지하고라도, 그 모양이 너무 꼴사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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