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는 한국은 물론 온두라스와도 인연이 있다. 올림픽 축구 첫 진출이었던 지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온두라스는 홈팀 호주를 꺾고 나이지리아와 3대 3으로 비기는 등 선전했지만 이탈리아에 패해 8강 진출이 좌절됐다. 온두라스는 이번 올림픽에서도 이탈리아에 3대 0으로 완패했다.
한국과 이탈리아, '그림 안 나오는' 라이벌
엄밀히 말해 한국이 이탈리아의 라이벌이라는 말에 공감할 사람은 거의 없다. 이탈리아는 월드컵 우승 4회를 자랑하는 세계 최강팀 중 하나다. 프로리그 활성화나 리그의 규모, 선수층 등도 한국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탄탄하다. 물론 세계 대회 성적도 한국을 앞선다. 하지만 한국도 결코 만만하게 물러서진 않았다.
한국이 큰 대회에서 이탈리아와 처음 상대한 때는 86년 멕시코 월드컵이다. 당시 한국은 분데스리가에서 '갈색폭격기'로 불리던 차범근과 국가대표 스트라이커 계보를 잇던 최순호 외에도 허정무, 김주성, 변병주, 조광래 등 역대 최강이라 평가받던 전력으로 월드컵 본선에 나섰다.
하지만 대진 상대가 너무 강했다. 전 대회 우승팀 이탈리아와 마라도나가 속한 본 대회 우승팀 아르헨티나가 한 조였다.
이탈리아와의 마지막 예선경기서 한국은 최순호와 허정무가 한 골씩 넣는 등 선전했지만 3대 2로 석패했다. 당시 이탈리아 감독은 82년 스페인 월드컵 우승의 주역이었던 엔조 베아조트였다. 선수진도 화려해 82년 대회 득점왕이던 파올로 로시, 80년대 '아주리' 포백 완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 안토리오 카브리니, 80년대 이탈리아 축구를 대표하는 알레산드로 알토벨리 등이 포진했었다. 알토벨리는 한국과의 경기에서 두 골을 넣었다.
이탈리아와 한국 축구의 본격적인 대결구도는 지난 2002 한·일 월드컵 때 이뤄졌다. 당시 세리에A 중하위권 팀에 불과했던 페루자에서도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안정환에게 결승골을 내줬다는 사실은 이탈리아 팬들의 자존심을 땅바닥까지 떨어뜨렸다.
숱한 기회가 왔음에도 크리스티안 비에리의 선제골 외에는 추가골을 기록하지 못하고 8강 진출에 탈락한 이탈리아 선수들은 당시 머물던 호텔 문을 쳐 구멍을 내는 등 잔뜩 화풀이를 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당연히 고국팬들의 비난은 하늘을 찔렀다. 종합일간지 1면을 축구 소식이 장식하는 나라니 당연할 지도 모른다.
이탈리아가 한국의 발목을 잡고 늘어진 적도 있다. '히딩크 열풍'이 불기 이전인 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비쇼베츠 감독이 이끌던 한국 올림픽 축구팀은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8강행이 가능한 전력"으로 분류됐다. 당시 올림픽팀은 '천재'로 불리던 미드필더 윤정환이 찔러주고 최용수는 반드시 해결한다는 등식을 세울 때였다. 본선 시나리오도 기대대로 흐르고 있었다. 한국은 강팀 가나를 맞아 윤정환이 패널티킥을 성공시켜 1대 0으로 승리해 8강 진출을 목전에 뒀다. 당시 이탈리아는 2연패로 8강행이 무산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탈리아가 한국의 발목을 잡았다. 지금은 '캐논 슈터'로 잘 알려진 수비수 이기형이 동점골을 넣는 등 선전했으나 마르코 브랑카에게 두 골을 내주며 한국은 아쉽게 8강행에 좌절했다. 마치 98년 월드컵에서 2연패 후 악착같이 덤벼드는 한국 대표팀 때문에 16강행에 좌절한 벨기에 대표팀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정부까지 팔 걷어붙여 성사시킨 매치
물론 한국이 몇 차례 이탈리아를 맞아 좋은 경기력을 보였지만 이를 두고 한국과 이탈리아가 라이벌 구도를 이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지난 월드컵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린 이탈리아는 세계 최강팀 중 하나다. 그에 반해 한국은 점차 격차를 좁혀오는 아시아 여러팀들과도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축구 밖으로 눈을 돌린다면, 60년대부터 이탈리아와 한국은 라이벌 구도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우길' 수 있다. 당시 한국과 이탈리아의 두 스포츠 스타는 상대방 얼굴에 주먹질을 하던 관계였다. 말 그대로 치고받고 싸우면서 두 나라의 스포츠 대결사가 시작됐다.
과거 한국의 최고 인기 스포츠는 단연 권투였다. 1960년 한국 최초로 배출한 동양챔피언 강세철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훗날 새천년민주당의 고문을 지낸 정치인 권노갑과 같이 권투한 것으로 유명한 그는 <황진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에 출연해 당시 최고 인기배우로 평가받던 도금봉과 스캔들을 내기도 했다. 권투 열기가 죽은 지금으로선 상상도 하기 힘든 시절이다.
이런 강세철을 KO로 누르고 당대 최고 주먹에 오른 이가 김기수다. 1939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난 그는 1951년 1.4후퇴 때 남으로 내려와 전남 여수에 정착했다. 전쟁의 화마가 할퀴고 간 국토에서 어린 김기수는 신문팔이, 엿장수, 구두닦이 등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다.
권투는 김기수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중학교 때까지 육상과 씨름을 하던 그는 권투를 시작한 후 서울 성북고로 진학했다. 그리고 2학년이 되던 1958년 도쿄 아시안게임에 참가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후 그는 아마무대를 초토화하며 87승 1패라는 놀라운 성적을 올렸다.
김기수가 기록한 유일한 패배는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다. 이 대회에서 김기수는 이 대회 금메달리스트이자 권투 최우수선수로 선정된 니노 벤베누티에게 패했다.
김기수보다 한 살 많았던 니노 벤베누티는 고국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세계 아마권투 최강자 자리를 확인하고 이듬해 프로로 전향했다. 그리고 1965년 12월에는 세계권투협회(WBA) 주니어미들급 챔피언 산드로 마징가를 15회 판정승으로 꺾고 세계챔피언 밸트를 거머쥐었다.
같은 해 김기수도 프로무대로 진출했다. 그리고 그는 당대 최고의 권투스타 강세철과의 두 차례 경기를 모두 이겼다. 니노 벤베누티가 세계챔피언에 오른 해 김기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타이틀에 도전, 가이즈 후미오를 KO로 꺾고 주니어미들급 동양챔피언이 됐다. 세계챔피언 밸트를 뺏기 위해 벤베누티와 다시 한 번 맞붙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문제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를 위해 체육관까지 지어줄 정도로 관심을 보였지만 벤베누티와 맞붙을 돈이 없었던 것이다. 김기수는 "진다면 한 푼도 안 받겠다"고 말했지만 벤베누티는 대전료로 5만5000달러를 요구했다. 당시는 압구정동이 뽕밭이던 시기였다. 결국 '국민의 사기 진작을 위해' 정부가 나서서 대전료를 대기로 하면서 김기수의 복수전이자 세계챔피언 도전 경기가 시작됐다.
마침내 6.25 전쟁이 일어난 지 16년이 지나 장충체육관에서 김기수와 벤베누티의 대결이 열렸다. 둘은 도저히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결국 15회를 마치는 종이 울리고 심판의 판정에 따라 밸트의 주인이 가려지게 됐다. 김기수는 2대 1 판정승을 거두고 6년 전 패배를 설욕했다. 한국 최초의 세계챔피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아쉽게도 김기수의 세계정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벤베누티에게 타이틀을 뺏겼던 산드로 마징기가 김기수를 상대로 타이틀을 되찾기 위해 나선 것이다. 김기수는 챔피언이 된 후 치른 세 번째 방어전에서 마징기에게 판정패해 타이틀을 내줬다. 공교롭게도 마징기 역시 이탈리아인이었고 이 경기는 김기수의 프로 생활 첫 패배였다.
영국을 뒤집어놓은 천리마축구단의 위력 축구팬이라면 누구나 알듯 이탈리아는 북한에도 큰 망신을 당한 적이 있다. 지난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에 1대 0으로 패한 것이다. 당시 월드컵에는 총 16개국이 출전키로 돼 있었는데 이들 티켓은 한 장을 뺀 나머지 모두가 유럽과 남미에 배정돼 있었다. 단 한 장만의 티켓이 아프리카와 아시아, 오세아니아에 배정됐다. 북한은 호주와의 지역예선에서 6대 1, 3대 1로 완승을 거두고 이 한 장의 티켓을 따내 잉글랜드로 갔다. 북한은 소련, 이탈리아, 칠레와 한 조에 편성됐다. 극동의 변방 국가에서 온 땅딸막한 선수들은 상대팀은 물론 잉글랜드 관람객에도 조롱거리일 뿐이었다. 예상대로 첫 경기에서 북한은 소련에 0대 3으로 대패했다. 그런데 칠레와의 경기에서 북한은 달라진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 골을 뺏기고 경기 막판까지 끌려다니던 북한은 종료 5분을 남겨놓고 극적인 동점골을 넣어 8강행 불씨를 살렸다. 영국인 감독 다니엘 고든(Daniel Gordon)이 당시 북한을 주제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천리마축구단>에는 이 경기를 중계하던 해설자의 흥분된 목소리가 생생히 전달된다. 이 경기로 북한은 당시 예선경기가 열린 미들즈브러 시민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미들즈브러 시민들은 북한 선수단의 훈련장은 물론 숙소까지 몰려들어 사인을 받아갔다. 드디어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이탈리아와 북한이 맞붙었다. 이탈리아는 경기 시작과 함께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땅딸막한 키의 박두익이 패널티 박스 오른쪽에서 날린 슛 한 방이 거함 이탈리아를 격침시켜버렸다. 경기가 끝난 후 극성스럽기로 유명한 영국의 축구팬들은 북한 선수들의 탈의실까지 몰려들었다. 세계 언론은 당연히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천리마'처럼 내달리는 북한 축구에 반한 미들즈브러 팬들은 8강전이 열리는 리버풀까지 북한을 응원하러 갈 3천 명의 원정응원대까지 만들었다. 쉼 없이 내달리던 북한은 8강전에서 최고의 골잡이로 불리던 에우제비오가 버틴 포르투갈에 3대 5로 역전패했다. 북한 선수들이 극적인 승부를 연출하며 잉글랜드의 영웅이 된 반면 이탈리아의 스타 선수들은 죄인이 된 듯 자국 공항에 내렸다. 변방의 약체팀에 패한 고국 선수단을 공항까지 마중나간 이탈리아 팬들은 그들의 얼굴에 썩은 토마토를 던져댔다. 벤베누티가 김기수에게 패한 지 한 달만의 일이었다. |
* 참고문헌 : 정희준, <스포츠로 읽는 한국 근대사> (가제, 근간 예정)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