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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기대주들, 드라마를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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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기대주들, 드라마를 부탁해

[베이징 2008] 스타탄생 예고하는 아시아 스포츠인들

동양 선수가 육상 트랙부문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 일은 살아생전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수영 금메달은 백인만 목에 걸 수 있으리라 여겼다. '체조는 동유럽 여자선수, 축구는 유럽이나 남미팀'이 머릿속에 공식처럼 새겨졌다.

'패배주의'는 점점 짙어졌다. 아시아 선수가 어느 순간 우스꽝스러워 보이기 시작했다. 번쩍이는 대머리에 우람한 근육을 가진 흑인 선수 옆에서 깡마른 아시아 육상 선수는 아무리 봐도 '간지'가 나지 않았다. 리듬체조나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은 모두 마리오네트처럼 어딘지 모르게 기괴한 '포스'를 풍기는 서양 여자에게 절대적으로 어울린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스포츠 열등 대륙' 아시아 선수들이 두각을 드러낼 수 있는 종목은 한정됐다고 여겼다. 권투, 레슬링, 유도 등 '악으로 싸우는' 종목이나 역도, 투포환 등 덩치와 힘으로 승부하는 종목 말이다. 육상이라 해봤자 아프리카 선수들과 주로 겨루게 되는 마라톤이 아시아 선수가 금메달을 노릴 수 있는 유일한 종목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김재엽의 환호에 들뜨지 않았다. 김수녕에게 붙은 '신궁'이란 칭호가 영 어색했다. 몬주익을 가장 먼저 통과한 황영조를 보며 든 생각은 '아니, 저렇게 힘든데 손을 흔들고 웃는단 말야?' 정도가 전부였다. 아무리 봐도 야오밍에게서는 포스가 느껴지지 않았다. 다니 료코는 귀엽기만 했다. 탁구나 태권도 등 특정 국가의 싹쓸이가 예상되는 종목에는 아무런 흥미도 생기지 않았다.

아니, 아시아가 어떻게 된 거야?

이런 등식이 서서히 깨지고 있다. 깡마른 류시앙은 긴 머리를 휘날리며 110m 허들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워버렸다. 옆에서 뒤쳐진 흑인 선수들은 불량식품을 많이 먹어 살만 찐 초등학생처럼 뒤뚱거렸다.

키가 180cm도 안 돼 앳된 애처럼 보이던 기타지마 고스케는 남자 수영 평영부문에서 금메달을 두 개나 따냈다. 키가 큰 선수가 유리하다며?

그러나 여전히 육상의 꽃 100m 달리기는 흑인 천지였다. 수영 자유형 부문을 휩쓴 선수들은 언제나 그렇듯 미국이나 호주 선수였다.

더구나 중국이 어떤 국가인가? 일명 '프로젝트 119'를 가동해 국가 차원의 스포츠 영재 교육을 한 나라다. 마치 우리나라 사교육 열풍을 보듯 어린 애들을 한 데 모아 혹독한 훈련을 시켜 스포츠 기계로 만들었던 국가다.

일본? 동네마다 국제규격을 만족하는 수영장이 있는 나라다. 웬만한 유럽 국가보다 스포츠 시스템이 더 잘 갖춰졌다고 평가받는 곳이다. 그래, 저런 결과는 충분히 나올 수 있지. 암!
▲박태환은 한국 수영 역사상 최초로 남자 수영 자유형 부문 금메달에 도전한다. ⓒ뉴시스

그런데 이보다 더한 드라마도 나왔다. 우리보다 한 수 아래라 여겼던 이라크 축구팀은 전란의 와중에도 강호들을 차례로 물리치고 올림픽 4강에 올랐다. 독재 체제에 신음했고, 폭탄세례를 받으며 제대로 된 훈련도 하지 못한 선수들은 크리스티아누 호나우두가 버티던 포르투갈마저 4대 2로 격파해 버렸다.

황영조가 몬주익에서 두 팔을 번쩍 든 그 해, 여갑순은 한국 최초로 사격에서 금메달을 땄다. 사격? 우리 활만 잘 쏘는 민족 아니었나? 한국은 여갑순 이후로 순식간에 사격 강국 중 하나로 떠올랐다. 강초현은 은메달을 따고도 세계적 스타가 됐다.

사격은 우리만 뛰어난 것도 아니다. 이름을 외기도 어려운 인도의 라자바르단 라토르는 더블트랩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의 메달 획득 소식에 열광한 인도는 국가적으로 2012년 런던 올림픽 준비에 나섰다. 연이은 인수합병(M&A)으로 세계 최대 철강회사가 된 아르셀로 미탈은 아예 인도 스포츠 선수를 후원하기 위한 '미탈 챔피언스 트러스트'라는 기구를 만들었다.

사격 만이랴. 중세 유럽 귀족의 스포츠 냄새가 물씬 풍기는 펜싱에서도 아시아는 유럽을 넘어섰다. 김영호는 시드니로 날아가 백인 선수들의 가슴팍을 마구 찔러대며 플뢰레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오똑한 콧날이 당장에라도 마스크를 뚫고 나올듯한 유럽 선수가 조그만 눈의 동양 검사 앞에 허우적대는 모습은 가히 문화적 충격이라 할 만했다. 아시아, 너 어떻게 된거니?

세계의 환상을 모두 깨주세요!

이번 올림픽에도 아시아 기대주들이 줄줄이 출전한다. 이제는 아줌마가 된 계순희와 다니 료코는 다시 덩치 큰 상대 선수들을 매트리스에 마구 메칠 것이다. 류시앙은 올림픽 2연패에 도전한다. 소문이야 아무려면 어쩌랴! 궈징징은 다시 다이빙대에서 세계 모든 관객이 넋을 잃게 만들 준비를 마쳤다. 영화의 주인공이 된 한국 여자 핸드볼팀의 언니들은 유럽 여자팀을 맞아 영화보다 더 멋진 승부를 펼칠 게 확실하다.

하지만 이들에게만 주목하면 아까운 보석들을 놓칠 수 있다. 이제껏 누구도 발을 딛지 못한 곳에 도전하는 아시아의 예비영웅들이 당신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기대 성적은 높지 않지만, 당신의 마음을 움직일 스토리를 한껏 안은 선수들도 아름다운 올림픽을 만들 채비를 끝냈다. 앞으로 소개할 선수들은 모두 이번 올림픽을 풍성하게 만들 예비 아시안 스타다. 아시아의 기대주들, 이번에도 우리의 환상을 깨주세요!

■ 박태환(한국) : 열아홉 살 소년이 수영 역사에 한 획을 그으려 한다. 박태환은 이번 올림픽 남자수영 자유형 부문 200m와 400m, 1500m에 출전한다.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의 자유형 우승은 아직 이뤄지지 않은 신기원이다.

물론 경쟁자들은 막강하다. 200m에는 세계 최강의 수영선수 마이클 펠프스(미국)가 버티고 있다. 400m와 1500m에서는 호주의 그랜트 해켓과 다시 한 번 겨뤄야 한다. 올해 이들이 세운 기록은 박태환보다 앞선다. 박태환이 백인 물개들을 제치고 단 하나의 금메달이라도 목에 건다면 그는 지난 올림픽에서 류시앙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 세이카 마이타 모하메드 라시드 알 막툼(UAE) : 아랍의 고귀한 공주님이 태권도 국가대표로 나섰다. 여자태권도 67kg급에 참가하는 알 막툼 공주(28)는 현재 아랍에미리트 태권도협회 명예회장이다.

공주님의 실력을 얕보면 안 된다. 알 막툼 공주는 2년 전 도하 아시안게임 쿠미테 종목에서 은메달을 딴 무서운 선수다. 처음 공수도로 시작한 공주의 격투기 인생은 지난 2004년 태권도에 입문하면서 새롭게 변하고 있다. 급기야 공주는 이번 올림픽을 앞두고 태권도로 종목을 변경해 와일드카드로 출전권을 따냈다. 하지만 여자 태권도 67kg급 메달 획득을 위해서는 아테네 올림픽 동메달리스트인 한국의 황경선, 프랑스의 에팡 등을 넘어서야 한다.

■ 사라 코슈자말(이란) : 또 다른 태권도 예비스타가 올림픽에 출전한다. 여자태권도 49kg급에 출전하는 코슈자말(19)을 알아보기란 매우 쉬울 것이다. 다른 선수와는 달리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고 경기에 나올 예정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사회 진출을 엄격히 통제하는 이란 사회에서 코슈자말은 올림픽 출전 자체로 이미 금기를 깨가고 있다. 채 스무 살이 안 된 이 소녀는 이란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면서 온 국가적 영웅이 됐다. 이 때문에 <타임>은 '베이징 올림픽에서 주목해야 할 선수 100명' 중 코슈자말을 22위에 올렸다.

▲북한 여자축구팀의 김경화가 6일 열린 나이지리아와의 첫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고 기뻐하고 있다. ⓒ뉴시스

■ 북한 여자축구팀
: 북한은 여자축구 세계랭킹 6위의 강호다. 하지만 올림픽 출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메달 획득을 호언하기도 쉽지 않다. 중국은 물론 지난 여자월드컵 우승팀인 독일과 준우승팀 브라질, 그리고 나이지리아와 함께 '죽음의 조' F조에 속해 있다. 지난해 월드컵에서 북한은 8강에 만족해야 했다. 일단 죽음의 조를 탈출해야 메달을 바라볼 수 있다.

출발은 좋다. 복병으로 여겨졌던 나이지리아를 1대 0으로 꺾었다. 독일과 브라질은 무승부에 그쳤다. 안방과 같은 중국에서 공격의 핵 리금숙과 골키퍼 전명희 등이 활약해준다면 올해 아시안컵 제패의 영광을 다시 한 번 조국 인민들에게 안겨줄 수 있을 것이다.

■ 인도 양궁대표팀 : 인도 양궁이 최강국 한국의 임채웅 감독을 모셔온 후 급성장하고 있다. 인도는 이번 올림픽에서 지난 올림픽의 사격에서처럼 양궁이 새로운 메달권 종목이 돼 주길 기대하고 있다.

임 감독이 대표팀을 맡은 후 팀 성적은 급성장하고 있다. 지난 1999년 세계챔피언십대회만 해도 22위에 머문 인도는 2005년 스페인에서 열린 같은 대회에서 남자 2위, 여자 4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따낼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 신수지(한국) : 17세 소녀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이번 올림픽 리듬체조 부문에 출전한다. 신수지(세종고)는 벌써부터 '리듬체조계의 김연아'로 누리꾼들 사이에 화제가 되는 선수다. 김지희 코치를 만나 리듬체조를 시작한 신수지는 체조선수가 갖춰야 할 필수요소인 유연성이 매우 뛰어난 선수다. 표현력도 매우 좋다는 게 중평이다. 특히 러시아 유학을 통해 연기력을 많이 늘렸다는 게 김 코치의 주장이다.

냉정히 말해 이번 대회에서 신수지가 메달을 따낼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하지만 외국과는 상대가 안 되는 우리나라의 열악한 훈련환경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유럽 선수가 독식해온 리듬체조계에 아시아의 매달 유망주가 출전한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가치는 충분하다.

■ 다나 후세인 압둘라자크(이라크) : 이라크는 이번 대회에 선수 4명, 임원 7명으로 구성된 미니 선수단을 꾸려 참가했다. 당연히 메달을 기대하기는 무리다. 지난 대회의 축구팀과 같이 기적을 연출할 가능성이 있는 선수도 없다. 사연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 유일한 여자 선수인 다나 후세인(21)은 관심의 중심에 있다.

이라크에서는 운동 선수라고 특별 대접을 받지 않는다. 괜히 인터뷰를 함부로 했다가는 테러 표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다나 후세인 역시 목숨을 걸고 운동했다. 2004년에는 코치가 괴한들의 습격으로 사망했고, 2006년에는 훈련장이 폭탄 테러의 표적이 됐다.

그러나 그의 운동을 향한 열정과 용기는 그를 베이징으로 이끌었다. 7일 <AP> 통신은 그의 참가를 비중있게 다루면서 "용기만 가지고 있다면 이라크와 같은 환경에서도 훈련을 할 수 있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그의 말을 전했다.

그의 최고기록은 11초7로 올림픽 기준기록 11초4에 못 미친다. 그는 와일드카드 출전권을 얻어 이 대회에 참가하게 됐다. 순위는 의미없다. 그가 조국의 기를 가슴에 두르고 멋지게 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 호케스 히로시(일본) : 이번 대회에는 노장 선수들의 활약도 기대할 만하다. 미국의 다라 토레스는 마흔한 살의 나이에 여자 자유영 국가대표로 출전한다. 우리나라 여자핸드볼 대표팀의 평균 연령은 34.7세다. 그리고 일본 승마 대표로 출전하는 호케스 히로시의 나이는 67세다. 내일 모레가 일흔이다. 당연히 일본 대표 선수 중 최고령자다.

승마는 다른 종목에 비해 선수들의 연령대가 높은 편이다. 40대 선수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렇다손 쳐도 호케스의 나이는 놀라울 따름이다. 알고보니 그는 아시아 첫 올림픽이었던 지난 도쿄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출전한 경험이 있다. 당시 나이는 스물셋이었다.

호케스는 대회에 임하는 각오로 "전 세계 노인의 희망이 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역대 올림픽 참가자 중 최고령 선수는 누굴까. 지난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에 스웨덴 사격 대표로 참가한 오스카 스완은 당시 나이 일흔 둘이었다. 스완은 당시 대회에서 은메달을 차지해 역대 최고령 메달리스트 기록을 세웠다.

이번 대회에는 호케스 외에도 60대 노인이 여럿 참가한다. 같은 승마종목에 출전하는 로리 레버(호주)와 이언 밀러(캐나다)의 나이는 예순한 살이다. 무더운 날씨 때문에 걱정스럽긴 하지만 이스라엘의 하일리 사타인은 쉰 셋에 마라톤 대회 참가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한국 선수 중 최고령자는 이봉주(38)로 역시 마라톤 참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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