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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말살해야 할 정신의 '바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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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말살해야 할 정신의 '바이러스'?"

과학과 종교의 대화 <5> 과학은 종교를 어떻게 보는가?

한국은 정교 분리를 엄격히 규정하는 나라다. 그러나 종교와 일상생활은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다. 세계적으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많은 신도를 거느린 대형 교회가 여러 곳일 뿐만 아니라, 각종 종교 집단을 거론하는 뉴스는 늘 사람의 눈길을 끈다. 최근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다니던 특정 교회 신도를 중용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과연 한국의 종교가 일반인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는지는 따져볼 일이다. 예를 들어 한때 한국 사회를 들썩이게 했던 생명공학을 둘러싼 윤리 논란이 그렇다. 외국의 기독교계가 생명윤리를 아주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한국의 기독교계는 사실상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다. 심지어 일부 불교계는 생명공학의 강력한 지지자를 자처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2007년에는 아프가니스탄으로 선교 여행을 떠났던 신도들이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되는 일도 있었다. 테러에 대한 비판과는 별개로, 이런 선교 여행이 '기독교 패권주의'라고 교계 안팎에서 강하게 비판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 사건과 맞물려 "신은 망상일 뿐"이라고 선언하는 외국 지식인의 책이 국내에서도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한국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21세기의 세계를 살펴보면 더욱더 상황은 복잡하다. 현대 사회를 과학기술시대라고 규정하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대 사회에서 종교의 영향력 또한 계속 커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프레시안>은 이 시대의 두 가지 화두라고 할 만한 '과학'과 '종교'의 대화를 통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런 의문을 해결하는 단초를 찾아볼 생각이다. 이 쉽지 않은 작업에 김윤성(종교학자,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 신재식(목사, 호남신학대 조직신학과 교수), 장대익(진화론을 연구하는 과학철학자, 동덕여대 교양교직학부 교수) 세 사람의 젊은 지식인이 나섰다.

이들은 이미 지난 2006년 말부터 과학과 종교를 놓고 여러 차례에 걸쳐 서신을 교환해왔다. <프레시안>과 과학 전문 출판사 사이언스북스는 공동으로 이 서신을 정리해 <프레시안>에 1주일에 한 차례씩 싣는 기획을 마련한다. 이 기획을 통해 독자들은 과학과 종교를 둘러싼 국내외 최신 담론을 접하는 것은 물론,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편지에서도 종교의 존재 이유를 심각하게 회의했던 장대익 교수가 이번에도 종교를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특히 장 교수는 종교를 일종의 정신 '바이러스'로 보는 리처드 도킨스 등의 견해를 소개하면서 "그동안 종교가 독점해온 '가치'와 '의미'를 지금 과학이 빼았아 오는 중"이라고 최근 종교와 과학 간 갈등의 의미를 짚는다.


장 교수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를 졸업하고 서울대 과학사및과학철학협동 과정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런던정경대학(LSE) 과학철학센터에서 생물철학과 진화심리학을 연구했다. 최근 한국 지식사회에서 큰 관심을 모은 <통섭>(사이언스북스 펴냄)의 역자이기도 하다.

장대익 교수는 2006년 7월부터 1년간 미국 보스턴에 있는 터프츠대 인지연구소에서 대니얼 데닛 교수와 함께 연구를 했다. 이 편지는 그 당시에 초고가 작성된 것이다. <편집자>

신재식 선생님과 김윤성 선생님께,

신 선생님 편지 잘 받았습니다. 우선 좋은 소식부터 전합니다. 지난 가을에 대니얼 데닛이 갑작스럽게 큰 수술을 받았다는 말씀 드렸지요. 그것 때문에 반 학기를 쉬어야 했던 그가 드디어 이번 새 학기에 건강한 모습으로 학교에 복귀했습니다. 언제 쓰러졌나 싶어요. 오히려 더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입니다. 심장에 무리가 가는 스쿼시는 더 이상 못 칠 테지만요.

며칠 전에 과 사무실에 들렀더니 비서가 저더러 그러더군요. "너 참 운이 좋다."라고요. 왜 그러냐고 했더니, 데닛이 수술 후에 성격이 더 좋아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까칠하지 않은 대가도 있나 싶었을 정도로 제겐 아주 친절한 할아버지였었는데, 비서 말로는 수술 후에는 더 살갑게 대한다나요. 하기야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으니 주변 사람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요. 하여간 저는 운이 좋은 사람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특이한 경험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데닛은 이번 학기에 '문화 진화(cultural evolution)'에 관한 대학원 세미나를 시작했습니다. 회복을 핑계로 한 학기를 쉬어도 뭐랄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굳이 맡아서 하네요. 게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 저를 데리고 하버드 대학교 철학과 대학원 수업에 청강하러 갑니다. 덕분에 저도 바빠졌습니다.

"Thanks God"이 아니라 "Thank Goodness"
▲미국 터프츠 대학교 대니얼 데닛 교수. ⓒ프레시안

데닛이 9시간의 대 수술을 받고 깨어난 이후에 쓴 에세이가 있어요. 병상에 누워 있는 사진과 함께 엣지 사이트(☞바로 가기)에 올려놓았는데, 혹시 읽어 보셨는지요. 데닛이 쓰러졌다는 소식에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그의 친구, 동료, 팬들이 쾌유를 비는 연락들을 보내왔었나 봐요. 물론 저도 그중 하나였지만요. 그런데 그중에 그를 위해 신께 기도하겠다는 사람들이 좀 있었나 봅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으면 좀 너그러워질 만도 한데, 역시 데닛답게 그런 '눈치 없는' 친구들을 무안하게 만드는 에세이를 썼던 것이죠. 그것도 공개적으로.

그 글의 제목은 "Thanks God"을 패러디한 "Thank Goodness"였어요. 그 글에서 그는 자신이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누군가의 기도 덕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의학의 발전과 의료진의 선한 도움 덕분이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는 '신(神)'이 아닌 '선(善)한 것'들에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무신론자의 자존심을 지킨 것이겠죠. 그거 아십니까? 무신론자를 위한 기도는 기도를 하는 사람에게는 만족감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정작 기도의 대상이 되는 무신론자에게는 불쾌감을 줄 수 있다는 점 말입니다. 왜냐하면 무신론자들은 기도가 어떤 일을 일으킨다고 믿지 않거든요. 물론 무신론자도 기도를 하는 사람의 선의를 모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기도를 하는 행동 자체가 기도하는 사람의 심정과 신체에 변화를 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일종의 '마인드 컨트롤'이나 '플라시보 효과' 같은 것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신이 정말로 기도의 내용을 듣고 그에 맞는 사건을 일으켜 그 기도에 응답하는 것일까요? 다시 말해 기도에 정말로 인과율을 바꿀 힘이 있는 것일까요? 두 분 선생님은 기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신재식 선생님은 목사님이시니 적어도 정기적으로 기도를 하시겠지요? 기도에 정말 인과율을 바꿀 힘이 있다고 보시는지요. 그렇게 보시지 않는다면 종교에서 기도 행위는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종교 현상을 연구하시는 김윤성 선생님의 대답도 듣고 싶습니다.

기도에 정말로 힘이 있을까요?

선생님들의 대답을 듣기 전에 기도의 효력에 관해 제가 알고 있는 연구 결과를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도킨스의 책에도 언급이 되어 있더군요). 심장 질환으로 수술을 받은 환자들을 위한 중보 기도(기독교에서 중보 기도란, 다른 사람을 위해 신의 도움을 간구하는 기도를 뜻한다.)가 과연 효과가 있는지를 과학적으로 검증해 보는 실험이었는데요, 피험자 집단을 셋으로 나눴습니다. 그중 두 집단에 대해서는 중보 기도를 하고, 한 집단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지요. 그리고 중보 기도의 대상이 된 집단에서도 한 집단의 환자들에게는 자신들을 위한 중보 기도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다른 집단의 환자들에게는 중보 기도를 한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때 중보 기도는 한 곳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미국 곳곳에 흩어져 사는 기독교인들에 의해 동시 다발적으로 이뤄졌습니다.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중보 기도를 받은 집단들과 아닌 집단 사이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발생했을까요?

연구 결과는 싱거웠습니다. 아무런 차이가 없었지요. 오히려 좀 당황스러운 결과도 있었습니다. 중보 기도를 받는다는 사실을 안 집단이 몰랐던 집단에 비해 오히려 건강이 악화되었거든요.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고 있다는 사실에 부담감을 느낀 사람들 때문에 이런 '엉뚱한' 결과가 나온 것이었겠죠. 어쨌든 종교인들 입장에서는 허탈하게 끝난 연구가 되긴 했지만, 요즈음 이런 식의 연구들이 심심치 않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종교의 효용성과 순기능에 대한 '과학적' 연구 말입니다. 짐작하시겠지만, 그 배후에는 미국의 템플턴 재단과 같은 후원 기관이 있습니다. 기도의 효능 문제 같은 것은 우리에게 대개 <추적 60분>이나 <PD수첩> 등의 소재로 끝나 버리기 쉬운데, 외국에서는 과학자들이 정식으로 연구를 하네요.

이왕 기도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몇 마디 더 하고 싶어집니다. 인지 심리학에서 밝혀낸 인간의 추론 실수들 중에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에 반하는 사례들보다 그것을 확증하는 사례들을 더 재빠르게 취합한다는 이론입니다. 한마디로 증거를 모으는 데 공평하지 못하다는 것이죠. 반대 사례가 나오면 무시하고 확증 사례가 나오면 얼른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제 관찰에 따르면 기도를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이 확증 편향이 더 심합니다.

소위 '기도의 응답'이란 것을 찬찬히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발 물러나 천천히 듣고 있으면, 정말 그게 응답인가 싶을 때가 많습니다. 어떻게든 신의 응답과 연결하려는 듯한 느낌이 강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찾아봐도 기도의 효력을 입증할 만한 사례가 나오지 않으면, 히든카드가 등장합니다. '신의 뜻이 이게 아닌가 보다!' 그래서 저는 기도의 인과력(因果力)을 믿지 않습니다. 믿건 안 믿건 객관적인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거든요. 기도를 통해 기도하는 사람 자신의 마음가짐이나 심지어 신체 상태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기도가 신에 도달하여 그의 특별한 개입을 초래하고 그 결과 현실 상황이 달라진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한편, 종교인들이 더 행복하고 병에도 더 잘 견딘다는 통념도 과학적으로는 받아들이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연세대학교 심리학과에서 행복에 대해 연구하시는 서은국 선생님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지요.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다문화적 통계 자료를 갖고 계시더군요. 제가 종교의 유무가 행복의 변수인지에 대해 여쭤 보았더니 거의 영향이 없다고 하셨지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결혼 여부랍니다. 나머지 변수들, 종교는 물론, 가령 직업, 돈, 지위 같은 것들도 행복 지수와 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가 건강에 좋다'는 믿음도 곰곰이 따져보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구석이 있습니다. 최근 들어 종교와 건강 사이의 상호 관계에 대해 연구한 사례들이 쏟아지고 있는데요, 상당수가 이 둘 사이에 긍정적인 상관관계가 있다는 쪽으로 결론이 나옵니다. 설명을 들어보면, 신앙인들은 다른 이들에 비해 매사를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각종 사건, 사고, 질병에 더 잘 대처한다는 식입니다. 이른바 신실한 신앙인들은 불행을 당해도 '신의 깊은 뜻'을 묻고 긍정적으로 대처하는 경향이 있지요.

이런 설명이 억지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것이 신앙과 건강이 늘 함께 간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도 암에 걸릴 수 있고, 암에 걸린 신앙인이 암에 걸린 비신자들보다 항상 더 오래 사는 것도 아니지요. 종교와 건강의 관계를 탐구한 위의 연구들은 기껏해야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더 건강하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일 뿐, 종교가 건강에 좋다는 것을 입증하지는 못합니다. 다시 말해,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은 '긍정적 사고'이지 종교 자체는 아니라는 뜻이지요. 물론 종교는 긍정적 사고를 만들어 내고 확산시키는 하나의 원천이긴 합니다.

종교와 건강의 상관관계 연구에 관해 또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그런 연구의 상당수가 과학 재단 같은 중립적인 기관이 아니라 탬플턴 재단처럼 종교의 순기능을 어떻게든 입증하려는 단체들의 지원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기도의 문제로 돌아오겠습니다. 만일 신이 우리의 기도를 다 듣고 그에 맞게 조치를 취하는 존재라면, 한국인들의 신은 틀림없이 차 한 잔 마실 여유도 없을 겁니다. 입시철에 선거철까지 겹치게 되는 시기라면 기도의 폭주로 얼마나 정신이 없을까요? 불안의 계절에는 온갖 기도들이 치열한 생존 투쟁을 벌이죠. 고3 학부모는 자녀의 입시를 위해 절이나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고, 취업의 문턱에서 고전하는 청년들은 길거리 점쟁이에게 운명을 묻습니다. 또한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은 용한 점쟁이를 찾아 당선 가능성을 타진합니다.
▲미국의 대표적 사이비 과학 비판가 마이클 셔머. ⓒnoneuclideancafe.com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그 인과적 효력이 입증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드리는 걸까요. 저는 인간이 뭔가 '이유'를 찾는 동물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언가가 우연히 일어났다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 사건이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 스토리를 알고 싶어 하는 거지요. 본질적으로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인과율로 엮어 하나의 '이야기'로 설명할 수 있는 인간의 본능적・본성적 능력은 틀림없이 인류가 진화의 역사에서 살아남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사이비 과학이나 비과학적 믿음과 타협 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는 잡지, <회의주의자들(Skeptics)>의 편집장인 마이클 셔머는 이 능력을 "믿음 엔진"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이 믿음 엔진은 자연과 초자연을 넘나들며 폭발합니다. 기도는 그나마 이 엔진의 정상적 출력에 해당되겠지요. 하지만 그 엔진이 과열되거나 오작동을 할 때도 많습니다. 가령, 극히 일부의 암환자만이 민간요법의 효과를 보는데도 그 효력을 신봉한다든지, 출퇴근 방향이 비슷해 마주칠 개연성이 높았을 뿐인데 그 만남을 운명으로 착각한다든지, 본인의 부주의로 생긴 교통사고를 신의 깊은 뜻에 의한 사건으로 돌린다든지, 장로 또는 불자가 대통령이 되어야 나라가 잘 된다고 믿는 것 등이 그런 예일 것입니다.

평소에 멀쩡한 사람들도 입시, 취직, 결혼, 건강, 자녀 등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엄습해 오는 불안감으로 인해 믿음 엔진을 폭발 직전까지 과열시킬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폭발을 막으려면 순정품 냉각수가 필요할 것 같은데요, 저는 믿음의 근거를 돌아보게 하고 합리적 생각을 북돋아 주는 회의주의 정신이야말로 그런 냉각수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의 기도에 대한 불효자의 변명

'어머니의 기도'에 관해서만 조금 더 말하고 기도 이야기는 그만하고 싶습니다. 두 분 선생님들도 비슷한 처지가 아닐까 합니다만, 저희 어머니도 새벽 기도를 거르지 않고 다니시는 신실한 기독교인이시지요. 그런 어머니께 제가 얼마 전에 큰 불효를 했습니다. 제가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선언했거든요. 리처드 도킨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장롱 속에 숨어 있다 커밍아웃한" 무신론자, 혹은 회의주의자였던 셈이지요. 그렇지 않아도 '의심 많은' 아들 때문에 늘 걱정이셨는데, 이 선언에 '드디어 올 게 왔구나.'라고 실망하시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무척 섭섭해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러시더군요. "내가 새벽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을 테니 잠시 방황하다 곧 돌아올 거라 믿는다."라고요.

그런 어머니께 저는 또 한 번 실망하실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 일은 이제 없을 것"이라고요. 하지만 어머니의 기도 자체를 못 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건 어쩌면 그분의 생활 방식이고 삶의 뿌리일 테니까요. 방황하는 아들을 위한 어머니의 새벽 기도는 기독교계에서는 아주 전형적인 스토리입니다. 왜 '돌아온 탕자' 이야기도 성경에 있지 않습니까?

저는 어머니의 기도가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신에게 전달되어 제 마음을 변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가 나를 위해 매일 새벽마다 기도를 드리시는데 내가 잘못된 길로 가면 되겠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함으로써 저 자신을 끊임없이 되돌아보게 만든다고 믿습니다. 이 기도의 힘은 신의 힘이 아닙니다. 바로 살아 계신 어머니의 사랑이 가진 힘입니다. 저는 이제 돌아온 탕자가 되지 않고도 어머니께 효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합니다.

상상해 보세요. 예수가 부활했다는 기적이 사실이 아니라고

기도 이야기가 좀 길어졌는데요, 내친 김에 종교의 단골 소재인 '기적'에 대해서도 한두 마디 덧붙일까 합니다. 기도나 기적에 대한 믿음은 원래, 초자연적 세계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 세계가 자연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지 않겠습니까? 기독교의 경우에는 천지창조, 동정녀 마리아의 예수 잉태, 예수의 부활과 재림 등이 기적의 대표적인 사건들일 것입니다. 기독교의 창조론에 대해서는 나중에 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테고요, 마리아와 예수에게 일어났다고 하는 초자연적 사건들은 제가 보기에 문자 그대로 믿기에 힘든 일들입니다. 과학자의 눈으로 보면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어떻게 처녀가 애를 낳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경우에는 처녀 생식의 사례가 단 한 건도 보고된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까?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애초에 완전히 사망한 경우는 아니겠지요. 제가 지금 말씀드리려는 것은, 성서와 같은 경전에서는 이른바 초자연적 사건들이 일상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과학은 그것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런 사건들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고 그것들이 일종의 신앙의 신화적 표현이라고 재해석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한다고 해도 문제는 남습니다. 경전의 어떤 부분은 이렇게 신화적 상징으로 해석하고 어떤 부분은 역사적 사실로 해석하고 그렇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이현령비현령(耳懸玲鼻懸玲)일 뿐입니다. 이런 식의 해석 기준은 너무 자의적이거나 기회주의적인 것은 아닐까요? 저는 솔직히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가 존립할 수 있을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이탈리아 피렌체 마르코 미술관). ⓒ프레시안

온건한 기독교인들 중에는 성서에 기록된 초자연적 사건들, 즉 기적을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실존적 의미와 신앙적 가치의 차원으로만 받아들이는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마 두 분 선생님도 그러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솔직히 이런 식의 분리가 정직한 태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림 : 수태고지 성화)

종교는 가장 큰 세계관입니다. 사람들의 일상적인 경험에서 시작하여 우주와 세계의 본질이라는 가장 추상적인 의미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 해명하려는 지식 체계입니다. 종교가 세계관으로서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지식 체계 안에 '사실'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되살아났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인들이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갖는 것이고, 석가모니가 부처가 된 것이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뭇 중생 역시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발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세요. 최초의 사도들이, 최초의 나한들이 기적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면 이 종교들이 세계 종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종교는 삶의 의미와 가치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고 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해명하려는 '사실 체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실 체계가 과학자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황당한' 것들이란 점입니다.

저는 이런 이유들 때문에 기도와 기적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선생님들은 어떠신지요? 신 선생님께서 앞의 편지에서 질문을 던지셨죠? "그럼 과학이 이해하는 종교는 도대체 무엇"이냐고요. 선생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종교의 기원에 대해 진화론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 하셨지요. 저는 이 편지의 나머지 부분에서 '과학의 시각에서 본 종교'에 관해 제 생각을 말씀드려 보려고 합니다.

물론 제가 과학자의 대변인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잘 아시겠지만 과학자라고 해서 종교에 관해 한목소리를 내는 것도 결코 아니지요. 진화 생물학자이면서도 신실한 가톨릭 신자도 있고, 도킨스나 데닛처럼 진화론이 유신론을 몰아낸다고 믿는 이들도 있고, 진화를 부정하는 기독교인 물리학자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선, 진화론적 관점에서 종교의 본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크게 세 진영으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종교를 인간 마음의 적응(adaptation)으로 보는 견해이고, 두 번째는 종교가 다른 인지 적응들의 부산물(byproduct)이라는 견해이죠. 적응과 부산물의 차이는 이런 것입니다. 가령, 온몸을 돌아다니며 산소를 운반해 주는 피는 적응의 사례이지요. 그런데 피의 '붉은 색깔'은 산소 운반을 담당하는 헤모글로빈 때문에 생기는 일종의 부산물입니다. 즉 피는 적응이지만 피의 색은 부산물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종교 현상을 밈(meme)의 역학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여기서 '밈'이란 도킨스가 문화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 낸 용어인데요, 문화 전달의 단위, 혹은 모방의 단위를 뜻합니다. 유전자의 gene과 운율이 맞도록 meme이라고 지었지요. 종교를 밈으로 설명하는 견해는 마지막에 소개하겠습니다.

종교는 생존 전략이었다? 종교 적응론자의 견해

우선 종교가 적응이라는 견해부터 보죠. 다음 달에 만나기로 되어 있는 하버드 대학교의 사회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종교에 대한 진화론적 이해의 가능성을 현대적 의미에서 거의 처음으로 제기한 학자입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신과 같은 초월자를 믿게끔 진화했지요. 예컨대 그는 동물 집단에서 나타나는 서열 행동(열위자가 우위자에게 복종하는 행동)이 종교와 권위에 순종하는 인간의 행동과 매우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동물들이 서열 행동을 통해 각자의 적응적 이득을 높이듯이, 인간도 종교적 행위들을 통해 자신의 번식 성공도(reproductive success)를 높였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종교 행동 자체가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진화했다는 주장입니다.

윌슨처럼 종교의 적응적 이득을 주장하는 이들은 종교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고 사후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 주며 불확실한 상황에서 판단을 도와주기 때문에 진화했다고 말합니다. 즉 초월자를 믿는 것이 그렇지 않는 것보다 개인의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죠.
▲미국 빙햄턴 대학교 데이비드 윌슨 교수. ⓒ프레시안

어떤 진화 생물학자들은 종교가 개체의 생존과 번식에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 집단의 생존과 유지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진화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데이비드 슬론 윌슨(David Sloan Wilson, 빙햄턴 대학교 교수로 집단 선택 이론을 주장하는 진화 생물학계의 또 한 사람의 윌슨이죠.)은 종교를 가진 집단이 종교를 가지지 않은 집단에 비해 더 응집적이고 자원을 공유하거나 전쟁을 치르는 데 있어서 더 협조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종교가 집단 간 경쟁을 이겨 내는 무기로 기능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주장에는 몇 가지 약점이 있습니다. 먼저 개체 수준이든 집단 수준이든 종교가 일종의 적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종교를 가짐으로써 생기는 이득뿐만이 아니라 그로 인해 생기는 비용(cost)도 계산해 넣어야 합니다. 예컨대, 비현실적인 초자연성을 계속 믿고 따르다가 손해만 보는 상황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즉 종교가 일종의 적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종교가 어떤 측면에서 어느 정도로 개인 혹은 집단에 이득과 손해를 안겨 줄 수 있는지를 정확히 모형화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가령, 종교 지도자를 믿고 따르다가 경제적 파산과 가족 관계의 파탄을 경험하는 경우도 적지 않고, 종교 집단의 이념을 전파할 목적으로 타 집단을 살육하거나 자살 테러를 감행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한편 집단 적응주의는 집단 내 배신자들의 창궐이 저지되는 메커니즘을 제시해야만 합니다. 가령, 집단 내 다른 구성원들은 종교적 성향을 발휘하여 이타적인데 오직 한 사람만 이기적이라고 해봅시다. 이 경우에 그 집단 내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은 그 이기적인 사람이겠지요. 이런 사람이 하나만 있어도 장기적으로 그 집단은 내부로부터 붕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성은 진화할 수 없겠지요. 예수를 배신했던 유다 같은 인물의 출현을 막을 수 없는 한, 집단의 이득을 위해 종교가 진화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자연 선택의 수준 논쟁에서 늘 언급되는 이른바 '배신의 문제'로서 집단 선택론자(group selectionist)들이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죠.

하지만 종교가 일종의 적응이라는 이론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그것이 종교의 진화와 이념(또는 가치)의 진화를 구분해 주지 못한다는 점일 겁니다. 예컨대 이 이론은 종교의 진화와 이타성의 진화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반영하지 못합니다. 종교 진화론이 진정으로 풀어야 할 과제는 '초자연적인 존재자를 상정하는 반직관적이고 반사실적인 믿음들의 집합'이 어떻게 진화할 수 있는가입니다. 따라서 초자연적이지 않은 이념이나 가치들(가령, 이타성, 민주주의 등)이 개체나 집단에 적응적 이득을 안겨줄 수 있는 진화 경로가 밝혀졌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종교의 진화론에 적용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종교는 스팬드럴이다? 종교 부산물론자의 견해

종교 진화론의 두 번째 진영은 종교를 다른 적응들의 '부산물' 혹은 '스팬드럴(spandrel)'로 간주합니다. 적응과 부산물의 차이를 쉬운 예로 말해볼까요? 가령 피는 몸속에 산소를 운반하는 기능을 하게끔 진화된 하나의 적응입니다. 하지만 그 피의 붉은색은 적응이 아니라 피 속에 헤모글로빈 때문에 생긴 부산물이지요. 다시 말해 피는 붉기 때문에 자연 선택된 것이 아니라 산소를 운반하는 기능 때문에 선택된 것입니다.

아시겠지만, 진화 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와 리처드 르원틴은 1979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당시의 사회생물학자들이 부산물과 적응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생물의 거의 모든 형질들을 적응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비판했지요. 그러면서 부산물을 '스팬드럴'이라는 건축 형태에 빗대지 않았습니까?

스팬드럴(좀 더 정확히는 펜덴티브)은 돔을 지탱하는 둥근 아치들 사이에 생긴 구부러진 역삼각형 표면입니다. 중세 때 지어진 유럽 성당들에 가 보면 이 스펜드럴이 성화 등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언뜻 보면 성자들이나 천사들을 그려 넣기 위해 특별히 설계해 만든 공간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돔을 만드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긴 부산물인 거죠. 그래서 굴드와 르원틴은 적응처럼 보이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스팬드럴과 같은 부산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여담입니다만 이 학자들이 사용한 비유들을 한번 보십시오. 정말 놀랍지 않나요? 요즘 '통섭'이라는 용어가 한국 지식계의 화두가 되어 가는 듯한데요, 진화의 어려운 개념을 건축으로 풀어낸 그들의 솜씨가 통섭의 한 사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종교는 그 자체로 진화적 기능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며, 다른 목적 때문에 진화된 인지 체계의 일부가 작동하는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종교는 무엇(들)의 부산물이요 스팬드럴이란 말입니까?

진화사의 관점에서 보면, 인류는 99.9%의 시기를 수렵 채집을 하며 매우 어렵게 보냈습니다. 이 시기에 인류를 계속 옥죄던 적응 문제(adaptive problem)들을 해결하기 위해, 인류는 포식자의 존재를 탐지하고 추론하는 능력, 자연적 사건들에 대한 인과적 추론과 설명 능력,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능력 등을 진화시켜야 했습니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이것들을 차례로 행위자 탐지(agent detection) 능력, 인과 추론(causal reasoning) 능력, 그리고 마음 이론(theory of mind) 능력이라 부르지요. 종교가 부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종교가 이런 인지 능력들 사이에 만들어진 스팬드럴이라고 봅니다. 다시 말해 종교는 더 중요한 이런 적응 장치들 때문에 생긴 부산물인 것이지요.

예컨대, 행위자 탐지 능력은 그 행위자가 심지어 초자연적 대상인 경우에도 작동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우연적' 사건에 만족하지 못하고 인과적 스토리를 원하는 인간의 인과 추론 본능은 초자연적 존재자를 최종 원인으로 두려는 것을 부추깁니다. 마지막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정상인은 '나의 정신 상태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초월자의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 창조해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 부산물론은 종교적 믿음 체계가 다른 적응적 인지 체계의 등에 업혀 있는 정도를 넘어서 마치 자율적으로 '자신의 이득'을 좇아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을 잘 설명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종교 현상들 중에는 마치 고삐가 풀려 제 멋대로 행동하는 듯이 보이는 광신적 형태들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빈번히 발생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종교 행위는 다른 세포의 운명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복제만을 수행하고 있는 암세포에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는 정신의 바이러스? 종교 밈 이론의 견해
▲종교를 일종의 정신 바이러스 혹은 고등 미신으로 비판하는 도킨스. ⓒ프레시안

종교 진화론의 세 번째 진영은 종교를 하나의 밈(meme)으로 이해함으로써 그러한 종교의 자율성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밈'이란 <이기적 유전자>에서 리처드 도킨스가 인간의 문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로서 "기억(memory)이나 모방(imitation)의 m"과 "gene(유전자)"에서 따온 "eme"의 합성어입니다. "대물림 가능한 정보의 기본 단위", 혹은 "문화와 관련된 복제의 기본 단위"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도킨스와 데닛은 밈이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복제자의 한 사례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밈에 대한 이런 견해가 종교 진화론에 중요할까요? 그것은 밈이 유전자와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종교 진화론의 대다수 논자들은 이 '동일한 방식'이라는 문구를, 밈의 행동을 유전자의 행동에 '유비하는 방식'으로만 이해해 왔습니다. 그리고 유비가 만족스럽게 이뤄지지 않는 부분들 때문에 곤란을 겪었지요.

하지만 다행히도 그 '동일한 방식'을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습니다. 데닛의 '지향적 자세(intentional stance)'가 바로 그 대안입니다. 지향적 자세란 무엇입니까?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서 공을 던진다고 해보지요. 그가 던진 공의 움직임을 이해하기 위해 그 공이 마치 믿음과 욕구를 가진 양 생각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물리법칙만 잘 알고 있으면 그만입니다. 데닛은 이것을 '물리적 자세'라 부릅니다. 또한, 매일 아침에 울려대는 알람시계의 작동을 이해하기 위해 시계의 마음을 읽으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떻게 설계되었는지를 알면 그만이지요. 이는 '설계적 자세'입니다. 하지만 우리 집 강아지가 갑자기 껑충껑충 뛰는 행동, 옆집 아기가 자지러지게 우는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자세가 필요해 보입니다. 물리법칙 혹은 설계원리만을 들이댄다고 해서 이해되는 행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데닛은 바로 이 대목에서 '지향적 자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마치 행위자가 어떤 믿음과 욕구를 가지며 그에 따라 행동한다고 보는 그런 자세 말입니다. 데닛의 용법으로는, 유전자와 밈은 지향체계(intentional system)이고 우리는 지향적 자세로 그것들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유전자와 밈의 비유비적 요소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지향성 이론을 종교 현상을 이해하는데 사용해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이런 접근에는 크게 두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종교를 "정신 바이러스(virus of mind)"로 이해하는 도킨스의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를 "길들여진 밈(domesticated meme)"으로 해석하는 데닛의 견해입니다.

종교가 정신 바이러스 같은 고약한 복제자의 일종이라는 도킨스의 도발적인 주장부터 살펴볼까요? 바이러스는 어떤 놈입니까? 생물계에서 바이러스는 자신을 복제하는 데 필요한 핵산(DNA 또는 RNA)과 같은 유전 물질을 제외하고는 세포로서 어떤 특징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때문에 바이러스는 살아 있는 세포에 기생하지 않고는 대사 활동도, 증식도 할 수 없죠. 바이러스는 숙주 세포의 핵에 침투해 세포의 DNA 사이에 자신의 DNA를 끼어 넣습니다. 세포의 사령부를 점령한 바이러스는 세포 안에 있는 분자 기계들이 세포가 가진 영양분을 이용해 바이러스를 복제하도록 명령을 내립니다. 세포가 파괴될 때까지 말이죠. 겨울철에 유행하는 독감은 바로 이런 바이러스가 사람 몸의 세포에 기생하면서 자신을 마구 복제하기 때문에 생기는 병입니다.

바이러스는 생물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제자가 있는 세계라면 어디에나 있습니다. '트로이목마', '웜', … 이것들은 세포에 기생하는 대신에 컴퓨터 운영 체계나 프로그램, 혹은 메모리 내부에 기생하여 감염된 파일에 접촉하는 다른 파일에까지 자신을 복제합니다.

정신 바이러스도 작동 원리는 동일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을 숙주로 삼아 자신의 정보를 복제하는 기생자이지요. 인간의 정신은 세포와 컴퓨터만큼이나 바이러스에 쉽게 감염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와 컴퓨터가 본래의 작동을 멈추고 그 바이러스의 명령에 따라 엉뚱한 행동을 하듯, 정신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간은 그 바이러스를 더 많이 퍼뜨리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바이러스의 DNA에 침투, 장악, 복제의 명령어가 내장되어 있는 것처럼 종교의 가르침 안에도 침투, 장악, 복제의 명령이 담겨 있습니다. 가령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같은 예수의 명령이나,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여러 사람들에게 일러 주면, 한량없는 공덕을 이룰 것"이라는 <금강경>의 가르침은 바이러스의 DNA 명령과 다를 바 없습니다.

도킨스는 종교적 믿음 체계가 주로 부모에서 자식으로 전달된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말이면 대개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언어와 사회적 관습 등을 배우고 익혀야 하는 아이들에게 어른의 말에 순종적인 아이들의 태도는 진화론적으로는 다 이유가 있는 행동입니다. 예컨대 이른바 '엄마의 잔소리'들, 즉 "뜨거운 데에 손을 얹지 마라"라든가, "뱀을 집어들지 마라"라든가, "이상한 냄새가 나는 음식은 먹지 마라" 같은 명령들은 아이들이 생존하기 위해 지켜야 할 필수 지침들입니다. 도킨스는 이런 상황에서 자연 선택이 아이들의 뇌 속에 다음과 같은 지침을 장착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른들이 하는 말은 무엇이든 믿어라."

이것은 물론 효율적인 규칙이며 대체로 잘 작동할 것입니다. 하지만 도킨스는 그런 지침이 정신 바이러스가 침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 있다고 봅니다. 이는 모든 입력을 올바른 것으로 받아들이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그만큼 바이러스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뇌에는 "뜨거운 불이 이글거리는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아무개를 믿어야 한다"라든지, "무릎을 꿇고 동쪽을 바라보며 하루에 다섯 번 절을 해야 한다" 등과 같은 코드들이 쉽게 기생할 수 있습니다. 도킨스는 이 코드들이 대개 부모의 가르침에 의해 자식에게로 전달된다고 말합니다. 즉 이슬람교도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결국은 대개 이슬람교도가 되듯, 부모와 자식의 종교가 일치할 개연성은 실제로 상당히 높다는 것이지요. 진화론을 발판으로 삼아 무신론으로 도약하길 원하는 도킨스에게 종교는 현대 과학으로 치료받아야 할, 전염성이 강한 고등 미신일 뿐입니다.

반면 데닛은 도킨스의 밈 이론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임에도 불구하고 도킨스의 정신 바이러스 이론이 밈의 무법자적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했다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그는 종교 밈(religious meme)을 '야생 밈(wild-type meme)'과 '길들여진 밈(domesticated meme)'으로 구분하고 현대의 고등 종교는 후자에 해당된다고 분석했습니다.

즉 현대의 고등 종교는 경전, 신학교, 교리문답, 신학자 등과 같은 기구들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길들여져 있는 밈입니다. 그렇다면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 밈의 작동, 확산, 대물림, 진화 메커니즘을 밝혀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그의 지향성 이론이 들어옵니다. 그 역시 종교 밈은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복제자이기 때문에 복제자의 전달 및 진화 메커니즘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는 종교 밈의 활동이나 작동 메커니즘이 꼭 병리적이라고 전제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이것은 유전자가 행동적 측면에서 '이기적'임에도 불구하고 상위 수준에서는 협동적이거나 이타적일 수 있는 이치와 동일합니다. 특정 종교 밈의 행동 자체는 '이기적'이지만 수많은 종교 밈들로 구성된 상위 수준의 종교 현상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이런 논의는 도킨스가 처음으로 제안한 밈 이론보다 더 발전된 형태의 논의이며, 오히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이론과 더 일관적인 형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데닛은 도킨스와는 달리 종교의 병리성 문제는 경험적 질문이라고 열어 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 밈 이론에도 문제점은 있는 것 같습니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은 어떤 밈이 다른 밈들에 비해 더 선호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종교 밈 이론에 만족스러운 설명이 없다는 점이지요. 즉 밈의 자율성 측면을 더 잘 설명하려다 보니 밈의 제약성―다시 말해, 특정 유형의 밈을 선호하게 되는 인지적 편향(cognitive bias)―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은 꼴이라고나 할까요. 앞서 살펴보았듯이 종교의 인지적 제약성은 부산물 이론에서 가장 잘 설명되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종교 진화론을 제대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부산물 이론과 밈 이론을 동시에 포괄하는 새로운 통합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요즘 밈 이론의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그동안 진화 심리학만으로는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설명하는 데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여기 와서 데닛하고 공부하다 보니 밈 이론의 가능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지요. 이런 기회를 이용해 종교를 포함한 문화 현상 전반에 대한 밈 이론을 발전시켜 볼까 궁리하고 있습니다. 위의 논의들이 종교의 진화에 대한 신 선생님의 질문에 어느 정도 대답이 되었나 모르겠습니다. 종교 진화론을 이야기하다 보니 생각보다 좀 길어졌습니다.

종교는 가치와 의미에 대한 독점을 풀라!

그래도 선생님의 편지에서 제게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만은 언급하고 펜을 놓으려 합니다. 선생님은 경이와 경외, 편안과 평안, 자연 경험과 종교 체험, 대자연과 피조 세계, 로고스와 미토스, 사실과 가치를 대비시키셨지요. 저는 이 구분들을 보면서 오히려 종교와 과학이 얼마나 가까운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더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 종교가 거의 독점하다시피 한 의미와 가치 영역을 과학도 노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중세까지만 해도 종교는 가치와 의미뿐만 아니라 사실까지도 모두 통제하는 독점적 지식 체계이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계몽 시대와 과학 혁명기를 거치면서 서양의 과학은 그동안 종교가 품고 있었던 사실 영역을 야금야금 파먹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과학 기술이 사실의 영역을 점령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의미・가치 영역에서는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저는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는 여전히 가치와 의미의 독점 기관입니다. 좀 더 정확한 표현을 쓰자면, 종교가, 사실의 영역은 과학의 손에 넘겨주었지만 가치와 의미만큼은 꽉 쥐고 놔주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굴드 같은 과학자들도 과학은 사실에 관한 지식이고 종교는 가치에 관한 언어이기 때문에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겠지요. 반면 도킨스, 데닛, 윌슨 같은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종교를 향해 가치와 의미에 관한 독점을 풀 것을 주문합니다. 그래서 최근의 과학적 무신론 운동이 마치 헤게모니 싸움처럼 보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 간에도 온도 차이는 좀 있습니다. 가령, 도킨스는 종교에게서 가치와 의미를 모두 다 뺏어오려고 합니다. 즉 종교를 말살하자는 이야기죠. 반면 데닛은 종교가 그동안 발전시켜 온 가치와 의미 체계는 나름대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독점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즉 가치와 의미에 대한 일종의 다원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요? 가장 흥미로운 것은 윌슨의 입장입니다. 신 선생님께서 날카롭게 지적하셨듯이, 윌슨의 머릿속에 늘 생물학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이번처럼 화해의 몸짓이 아무리 매혹적이라 하더라도 윌슨의 과학자로서의 표정은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의 속내는 이럴 것입니다. '종교가 그동안 신주단지처럼 모신 가치와 의미 체계는 과학에서 귀결되는 가치와 의미 체계와 수렴한다. 과학에서 주는 가치와 의미를 실현시키는 일이 매우 중요하니 그런 가치 체계를 공유한 무엇이든 이용하자. 이것이 내가 종교와 손잡는 이유이다.'

어떻습니까, 제 해석이? 모두가 종교의 (가치와 의미에 관한) 독점을 지적하지만 그 방법과 대안이 다르지 않습니까? 무신론자 입장에서 어떤 전략이 가장 좋다고 판단하기는 힘들 것 같군요. 하지만 최근의 과학적 무신론 운동은 무신론자의 싸움이 종교로부터 가치와 의미를 되찾아 오기 위한 것임을 상기시켜 주는 듯합니다. 경이감은 경외감과 겨우 한두 획 차이 아니겠습니까?

과학이 종교가 만들어 온 가치와 의미의 철옹성을 부수려는 시도를 하고 있으니 종교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발끈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입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다 보니, 종교의 미래가 정말 궁금해집니다. 가치마저 내준다면 결국 빈손 아니겠습니까? 두 분 선생님의 대답이 궁금해지네요.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이 부분(종교의 미래)에 대해서도 서신 교환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일 세미나에서 토론할 논문을 아직 못 읽었는데 벌써 새벽 1시입니다. 아무래도 내일은 귀동냥이나 해야겠습니다. 점심 맛있게 드십시오.

2007년 2월 15일

보스턴에서

장대익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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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은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독자 여러분이 참여하길 희망합니다. 장대익, 신재식, 김윤성 교수가 주고받는 글을 보고 자신의 견해를 보내주십시오. 그렇게 보내준 견해는 한 달에 한 번씩 세 분 필자와 똑같은 비중으로 <프레시안>에 게재됩니다. (의견 보내실 곳 : tyio@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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