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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 없는 과학, 중세 기독교와 다를 게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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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반성 없는 과학, 중세 기독교와 다를 게 뭔가요?"

과학과 종교의 대화 <4> '자연주의적 인간'과 '종교적 인간'

한국은 정교 분리를 엄격히 규정하는 나라다. 그러나 종교와 일상생활은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다. 세계적으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많은 신도를 거느린 대형 교회가 여러 곳일 뿐만 아니라, 각종 종교 집단을 거론하는 뉴스는 늘 사람의 눈길을 끈다. 최근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다니던 특정 교회 신도를 중용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과연 한국의 종교가 일반인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는지는 따져볼 일이다. 예를 들어 한때 한국 사회를 들썩이게 했던 생명공학을 둘러싼 윤리 논란이 그렇다. 외국의 기독교계가 생명윤리를 아주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한국의 기독교계는 사실상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다. 심지어 일부 불교계는 생명공학의 강력한 지지자를 자처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2007년에는 아프가니스탄으로 선교 여행을 떠났던 신도들이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되는 일도 있었다. 테러에 대한 비판과는 별개로, 이런 선교 여행이 '기독교 패권주의'라고 교계 안팎에서 강하게 비판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 사건과 맞물려 "신은 망상일 뿐"이라고 선언하는 외국 지식인의 책이 국내에서도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한국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21세기의 세계를 살펴보면 더욱더 상황은 복잡하다. 현대 사회를 과학기술시대라고 규정하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대 사회에서 종교의 영향력 또한 계속 커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프레시안>은 이 시대의 두 가지 화두라고 할 만한 '과학'과 '종교'의 대화를 통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런 의문을 해결하는 단초를 찾아볼 생각이다. 이 쉽지 않은 작업에
김윤성(종교학자,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 신재식(목사, 호남신학대 조직신학과 교수), 장대익(진화론을 연구하는 과학철학자, 동덕여대 교양교직학부 교수) 세 사람의 젊은 지식인이 나섰다.

이들은 이미 지난 2006년 말부터 과학과 종교를 놓고 여러 차례에 걸쳐 서신을 교환해왔다. <프레시안>과 과학 전문 출판사 사이언스북스는 공동으로 이 서신을 정리해 <프레시안>에 1주일에 한 차례씩 싣는 기획을 마련한다. 이 기획을 통해 독자들은 과학과 종교를 둘러싼 국내외 최신 담론을 접하는 것은 물론,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의 편지 서신 교환에 이어 신재식 교수가 다시 종교 방어에 나섰다. 신 교수는 "과학이 자신의 한계를 성찰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과학의 이름으로 재단하려는 시도는 마치 중세 유럽의 기독교의 모습과 겹친다"고 지적했다. 특히 신 교수는 종교 비판의 상징이 된 리처드 도킨스의 접근 방법 자체가 19세기 사회진화론자의 방법('종교의 기원을 알면 그 본질을 알 수 있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지적했다. 신 교수는 과연 그런 접근 방법이 종교를 둘러싼 오늘날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 의심한다.

신재식 교수는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원, 드루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존 템플턴 재단 '과학과 종교 교육 프로그램' 연구자, 풀브라이트 초빙 교수를 지냈다. <생태학과 기독교 신학의 미래>를 쓰고, <근대 신학의 이해>, <신과 진화에 관한 101가지 질문>을 옮겼다. 진화론을 비롯한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오래 전부터 깊은 고민을 해온 목사이다.

신재식 교수는 2006년 12월 26일부터 2007년 2월 8일까지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를 배낭여행했다. 볼리비아의 산타쿠르즈에서 시작한 여행은 코차밤바, 라파스를 거쳐, 칠레의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 산티아고, 푼타 아레나스, 토레스 델 파이네, 아르헨티나의 칼라파테, 부에노스아이레스, 이과수 폭포로 이어졌다. 그는 사막부터 빙하까지 이어지는 여행 중에 시장과 성당에 머무르면서, 남아메리카의 사람, 자연, 종교를 둘러보았다. 이 편지의 초고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작성된 것이다. <편집자>

김윤성 선생님과 장대익 선생님께

문명 세계로 돌아왔습니다. 이곳은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 도시가 '신선한 공기(Buenos Aires)'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저에게 이 도시는 문명 그 자체입니다. 파타고니아의 빙하와 이과수 폭포를 둘러본 뒤라서 이 느낌이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듯합니다.

선생님들께 편지를 띄운 후 강행군을 했습니다. 볼리비아에서는 라파스와 우유니 소금 사막을, 칠레에서는 산티아고와 파타고니아 지역의 토레스 델 파이네를, 아르헨티나에서는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모레노 빙하와 이과수 폭포를 둘러보았습니다. 도시에서는 시장과 성당을, 자연에서는 산과 빙하를 거닐었습니다. 이렇게 도시와 자연을 교대로 거쳤지만, 이번 여행의 백미는 소금 사막이나 빙하 같은 자연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연을 찾는데도 문명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오지의 자연을 방문할 때마다 문명에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비행기, 버스, 지프, 배와 같은 문명의 산물이 없었다면, 이번 여행은 거의 불가능했을 겁니다. 이들 덕분에 적도에서 남미의 남단까지 몇 천 ㎞의 거리를, 4000m의 고지대에서 해수면까지를, 사막에서 빙하까지를, 단 며칠 만에 또는 단 몇 시간 만에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10시간, 20시간이 보통인 중간 중간의 버스 여행은 한국에서 쉽게 얻을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남으로 향하는 버스 여행을 통해, 위도에 따라 변해 가는 자연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았습니다.

자연은 저에게 특별한 경험을 주었습니다. 라파스나 산티아고, 부에노스아이레스도 인상적이었지만, 사막과 빙하와 폭포에서 받은 감동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우유니 소금 사막, 굉장히 독특한 지형입니다. 해발 3653m에 높이에 있는 전라남도만 한 넓이의 땅덩이가 온통 소금으로 가득합니다. 동서남북 사방이 온통 하얗습니다. 고개를 들면 툭 트인 하늘, 정말 금방이라도 물방울이 쏟아질 것 같은 그런 하늘이 보입니다. 쨍하면서 갈라질 것 같은 하늘은 혼을 빨아들이는 듯합니다. 우기가 되어 비가 오면 소금 사막이 소금 호수가 되어, 하늘과 물과 소금이 어우러진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고 합니다. 푸른 하늘과, 하얗게 뒤덮인 소금 사막을 보면 마음은 '경이'로 가득 합니다. '장엄'한 자연 앞에 '외경심'마저 갖게 됩니다.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소금 사막이 있을까? 오래전에 바다였던 이 지역이 융기로 인해 안데스 산맥이 되고, 빙하기를 거치면서 거대한 호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건조한 기후 덕에 물이 모두 증발하고 소금만 남은 까닭에 소금 사막이 된 거지요. 소금의 양이 최소 100억 톤(t)이나 되고, 소금 층의 두께는 1m에서 최대 120m까지 다양하답니다. 과학자들 덕분에 소금 사막이 만들어진 과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학은 저를 경탄케 하고 외경심마저 갖게 했던 자연의 비밀을 들려주었습니다. 소금 사막뿐만 아니라, 파타고니아의 빙하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둘러본 곳은, 남부 파타고니아 빙원(氷原) 지역의 일부입니다. 이 빙원은 지구상에서 세 번째로 큰 거대한 얼음 덩어리로, 356개의 빙하들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빙원의 넓이는 1만4000㎢ 규모로, 숫자로만 따지면 남극 대륙과 그린란드보다 더 큽니다. 제가 본 페리토 모레노 빙하는 200만 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너비가 5㎞이고 높이가 60m나 되는 정말 거대한 얼음덩어리입니다.

과학은 그저 탄성을 자아내게 했던 모레노 빙하의 과거와 현재를 드러내 줍니다. 더 나아가 과학의 도움으로 이 빙하의 미래까지 볼 수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서 파타고니아의 빙하가 녹는 속도와 양까지도 과학자들이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없다면 제가 만난 자연의 중요한 사실들을 놓쳤을 겁니다. 과학이 제 시야를 무척 넓혀 주었습니다.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 사막. 해발 3653m에 높이에 있는 전라남도만 한 넓이의 땅덩이가 온통 소금이다. ⓒ프레시안

자연의 경험과 종교적 경험 사이에서

그런데 과학이 알려준 사실로 인해, 그때까지 장엄했던 자연이 갑자기 시시해진 것은 아닙니다. 이전에 알지 못했던 자연의 역사가 과학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났지만, 제가 가진 감동이나 경이감이 결코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자연은 가슴 속에 있는 무엇인가를 자극하면서 저에게서 경탄과 감탄을 이끌어 냅니다. 소금 사막을 거닐 때, 빙하가 무너지는 모습을 볼 때, 쏟아지는 폭포물이 내는 굉음을 들을 때, 제 온몸을 지배하는 것은 '경이감'이고 '경외감' 입니다.

이런 감정과 더불어 자연에서 얻는 또 다른 느낌이 바로 '평안함'과 '친밀감'이었습니다. 꼭 무어라 단언할 수 없지만, '참 좋다.', '참 편하다.'라는 느낌은 분명합니다. 물론 모든 자연이 친밀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지는 않습니다. 4000m 높이의 소금 사막이나 영하의 빙하에서는 육체적으로는 조금 힘이 듭니다. 그렇지만 숲이나 산과 호수를 접할 때마다, 아늑하다는 느낌이 온몸을 감싸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문명이 우리의 일차적인 환경이 된 지 이미 상당한 시간이 지났지만, 우리가 여전히 자연에서 평안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입니다. 자연에서 느끼는 평안함은 우리가 자연에서 나온 자연의 일부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소금 사막과 빙하를 걸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장엄한 자연을 접하면서 받은 느낌과 종교적 경험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 경험이 종교적 감동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그러자 질문과 생각들이 꼬리를 이었습니다. 자연에서 느끼는 '경이감'이나 '편안함'은 종교적 경험에서 얻게 되는 '경외감'이나 '평안함'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자연의 경험과 종교적 경험은 수월하게 이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닌가? '경이'에서 '경외'로, '편안함'에서 '평안함'으로……. 어쩌면 '우리 인간이 가졌던 최초의 종교적 경험도 이런 데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이렇게 자연에서 느끼는 감흥을 종교적으로 표현하거나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장엄한 자연에 대한 경험을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또는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라는 찬송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또 자연에서 느끼는 외경심은 '하나님의 창조'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다소 신학적 담론으로 이어지기도 하구요. 더 나아가서 '창조 세계의 보존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라는 다소 실천적인 논의로 전개될 수도 있습니다. 자연적 경험과 종교적 경험의 연관관계는, 두 경험의 경계선이 참 궁금합니다. 말미에서 다시 말씀드리면서 두 분 선생님의 의견을 구하도록 하지요.

'대자연'과 '피조 세계' 사이에서

이번 여행 내내 머릿속을 맴돈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호모 나투라우스(Homo Naturaus)'가 바로 그것입니다. '자연주의자로서 인간' 또는 '본래적으로 자연적인 인간'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지요. 자연에 대해 가지게 되는 경외감과 평안함, 친밀감은 우리가 본래적으로 '호모 나투라우스'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흔적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나, '호모 렐리기오수스(Homo religiosus)'나 '호모 무지쿠스(Homo musicus)'이지만, 어쩌면 그 이전에 이미 '호모 나투라우스'라는 생각이 듭니다. 문득 우리 인류는 본성적으로 '생물 호성(biophilia)' 즉, '자연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에드워드 윌슨의 말이 생각납니다.

이동 중에 윌슨의 <생명의 편지(The Creation)>을 손에 잡았습니다. 원래 이 책은 남미로 오는 길에 미국을 거치면서 '아마존'에서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등과 함께 구입한 책입니다. 도킨스 책만 가져오고 나머지는 귀국할 때 가져가려고 뉴저지 친지 집에 두고 왔는데, 두 분 모두 이 책을 언급한 터라 친지로부터 급히 받았습니다. 이 또한 문명의 이기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생명의 편지>는 윌슨의 책치고는 비교적 작고 얇은 책입니다. 그런데 책의 논의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이 책은 "지구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호소(An Appeal to Save Life on Earth)"라는 부제를 달고 있네요. 이번 여행에 딱 어울리는 책입니다. 자연이 주는 감동으로 가득한 저에게, 이 책이 생태계 보존을 위해 종교와 과학이 협력하자고 호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책에서 윌슨은 현재 지구에서 생명의 다양성이 급속도로 파괴되고 있고, 그 주범이 인류라는 사실을 지적하지요. 그는 생태계 보존을 위해서 우리에게 본래 가지고 있는 생명 사랑의 정신을 회복하고, 'the creation'에 대한 '청지기 정신(stewardship)'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생태계의 위기 현황과 원인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때, 저는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파타고니아의 빙하나 아마존의 열대 우림이 우리 때문에 얼마나 빨리 훼손되고 있는가를, 방문지의 관리 사무소나 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관련해서 제가 느낀 것을 말씀드리죠. 다소 편안한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생명의 편지>가 남침례교 목사를 수신인으로 하는 편지 형식인 것도 한 가지 이유입니다. 교파는 다르지만 장로교 목사인 저도 윌슨이 염두에 둔 수신인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하고요. 책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전반부에서는 현재 멸종 위기에 처한 생태계의 상황을 비교적 간결하게 설명하고, 후반부에서는 생물학을 중심으로 한 당면 문제의 해결 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윌슨의 이전 책들을 생각해 볼 때, 이 책은 주제는 다소 의외였습니다. 이 책이 생태계 문제 해결을 위해 과학과 종교가 '협력'하자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자들이 쓴 종교에 관련된 최근 저작들은 거의 대부분이 진화론적 관점에서 종교의 기원과 기능을 해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윌슨이 쓴 이전의 <인간 본성에 대하여>나 <통섭>과 같은 이전의 책들도 종교에 대해서는 이런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았고요. 게다가 도킨스를 비롯한 일부 진화론자들은 종종 종교에 호전적인 또는 적대적인 태도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선생님들도 언급하신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은 진화과학자 사회의 반종교적(반유신론적) 분위기를 그대로 드러내는 대표적인 책이었지요.

아무튼 <생명의 편지>에서 윌슨은 자신의 호소에 종교인들이 귀를 기울이도록 상당히 기술적인 수사법을 구사합니다. 그가 내세운 'The Creation'은 다양한 함의를 갖고 있는 말입니다. 이 용어는 생물학자에게 '대자연'이나 '생명계 전체'를, 그리스도인에게는 신이 창조한 '피조 세계'를 의미하겠지요. 생물학자와 그리스도인이 동일한 어휘를 각각 자기 맥락에서 쓰고 읽으면서 의미를 재구성하지만, 여전히 하나의 대상 'the Creation'에 묶여 있습니다. 진화의 산물인 대자연이건 신의 창조물이건 결국 동일한 대상이니, 이를 돌보고 구원하는 데 서로 이견이 없을 것이라는 주장에서, 이 단어를 책의 제목으로 채용한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중층적인 의미를 가진 'the Creation'은 윌슨의 논의에서 종교와 과학이 각자 세계관의 차이를 뛰어넘어 함께 활동하는 공동의 장(場)이자 함께 보호해야 할 대상이 됩니다.

장 선생님이 첫 편지에서 언급했다시피, 윌슨이 종교를 대화의 상대로 인정했다는 자체가 놀랍습니다. 윌슨은 종교인들이 머물러 있는 마당으로 살며시 건너와 미소를 지으면서 자연스레 인사를 건넵니다. 이어서 주변의 종교인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지만 완곡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합니다. 신이 창조한 세계를 돌보자는 데, 윌슨의 호소에 반대할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될까요? 굉장한 설득력입니다. 이 책만 보자면 윌슨은 더 이상 '완고한 훈장 선생님'이 아니라 '실용주의적 외교관'입니다.

사실과 당위 사이에서
▲<생명의 편지>(에드워드 윌슨 지음, 권기호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프레시안

그런데 책의 말미까지 읽다 보니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뭔가 중간에서 제대로 걸린 느낌입니다. 그가 제시한 생태계의 위기 현황과 진단한 원인에 대해서는 저도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런데 어디서 뭐가 걸렸을까요? 윌슨의 후반부 논지에 의문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가 제시한 생태계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에 제가 선뜻 동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윌슨은 생태계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대안이 '과학'이라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과학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생태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청지기 정신'의 의미를 바로 깨닫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이 청지기 정신의 핵심에 과학적 실천'만'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좀 까칠하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종교와 과학의 협력을 호소하겠다는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윌슨은 '과학적 일방주의'를 주입 또는 강요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본 윌슨의 '과학적 일방주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지구 생태계는 위기에 처해 있다. 인간이 야기한 종의 멸종은 환경 재앙을 가져오고 인류의 생존마저 위협하게 된다. 이 문제를 급히 해결해야 한다. 문제 해결은 첫 단계는 '청지기 정신'의 의미를 진정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본래의 자아상을 제대로 이해할 때에만 가능하다. 인간의 본래 자아상은 생물학을 통해서만 올바로 형성할 수 있다. 생물학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부터 생명을 사랑하는 자연주의자이므로, 생물학 교육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자연주의자 정신을 키울 수 있다. 원래 자연주의자로서 인간의 자아상을 회복한다면, 생태계를 돌보는 청지기 정신의 의미 역시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고, 행동에 나서게 된다. 전문가들과 시민들은 이런 생물학적 접근에 협력해야 한다. 자, 종교인 여러분도 여기에 함께 동참하길 바란다.

이렇게 해 놓으면 책의 논지를 너무 틀어서 이해한다고 할지 모르겠네요. 물론, <생명의 편지>는 두 가지 의도, 즉 생태계 문제 해결을 위해 서로 연대하자는 '호소'와, 이를 위해서 과학, 특히 생물학을 배우고 생물학적 해결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는 '설득'을 함께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생명의 편지>의 주목적이, 윌슨이 책을 시작할 때 말한 것처럼, 문제 해결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에게 '자문'과 '도움'을 '호소'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을 '설득'하는 데 있다고 보입니다.

저는 이런 태도가 우리가 논의하는 종교와 과학의 문제에 관련해서 여전히 해결해야 할 숙제를 남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종교와 과학의 대화와 협력을 호소하는 윌슨의 글에서조차, 여전히 일종의 '생물학(과학) 중심주의'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과학자의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또한 생태계 문제를 해결하는 '자원'이나 '방안'이 오직 생물학적인 것이거나 과학적인 것이라는 주장 역시 '생물학(과학)적 일방주의'를 선언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윌슨에 대한 제 의구심을 좀 더 풀어서 말하면 이렇습니다. 먼저, 윌슨은 현재 생태계의 상황에 대해 과학적 또는 생물학적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해결 방식도 마찬가지로 과학적이고 생물학적입니다. 문제의 현상과 원인 진단, 해결 방안 모두 생물학적・과학적 접근입니다. 비록 윌슨이 자상하고 쉽게 설명하지만, 그 행간에는 생물학과 과학에 대한 윌슨의 강한 확신과 완강한 자부심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윌슨은 역시 천상 생물학자구나' 하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윌슨은 검증 가능한 지식인 과학은 인류의 '유일한' 진보이며, 과학은 모든 인간 행위 중 가장 '민주적'이며, 과학'만'이 인류를 돌본다고 말합니다. 또한 생물학은 인류의 자아상을 재구성하는 역사적 흐름을 이끌고 있는 최고의 과학이며, 자연과학과 사회과학과 인문학을 잇는 논리적 다리라고 단언합니다. 여기까지 오면 어느 순간 '생물학 중심주의'가 제 앞에 버티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보기에, <생명의 편지>에서 생물학은 기술(記述) 과학이면서 동시에 규범(規範) 과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생명이 처한 위기 상황을 적절하게 서술하는 사실 기술과, 생태계 문제는 생물학적으로 풀어야 하며 종교는 마땅히 이에 협력해야 한다는 당위 주장이, 윌슨의 논지 속에 어우러져 있기 때문입니다. 윌슨의 또 다른 '통섭'을 봅니다. '생물학'을 핵심 고리로 한 '지식의 통섭'에서, 이제는 '실천의 통섭'으로 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생물학은 단순한 설명이나 기술을 넘어서서, 종교인을 비롯한 모든 인간이 실천을 할 때 따라야 할 규범이 되어 버립니다. 제가 볼 때 윌슨은 '사실'에서 '당위'로 슬그머니 넘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쩌면 그에게 사실과 당위는 구별되지 않는 하나일거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생태계의 보존이라는 목표를 공유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생물학 중심주의적 '실천의 통섭'에 종교인들이 어떻게 협력할 수 있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앞장서서 나가는 과학자의 발자국을 종교인이 그대로 밟아 따라오라는 말로 들립니다. 여기에서 과학자와 종교인이 함께 손잡고 나가는 동행은 없습니다. 그저 일방주의만 있을 따름이지요.

일방주의와 다원주의 사이에서

저는 생태계 문제를 위해 과학과 종교의 협력을 호소하는 윌슨의 뜻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를 더욱 확장시켜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이를 위해서 과학과 종교가 더 자주 만나서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폭과 깊이를 확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서로의 관심사와 영역의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런 인식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과학과 종교의 만남은 대화와 협력보다 독백이나 일방적인 설득에 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여기에서 장 선생님이 지난 편지에서 질문했던 것을 잠깐 언급하려고 합니다. 종교와 과학의 관계는 길항적 관계인가? 간단히 말하면, 본래부터 항상 길항적 관계는 아닙니다. 종교적 중심주의자나 과학적 중심주의자 입장에서 보면, 이 둘이 서로를 견제하고 시소와 같은 관계를 갖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종교와 과학의 관계는 어느 한쪽이 일방주의로 나갈 때 서로에 대해 길항적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길항적 관계는 아니라고 봅니다. 이에 관해서는 앞서 서신에서 말씀드렸기 때문에 이 정도로 그치지요.

다시 생태계 문제로 돌아가서 윌슨을 중심으로 한 종교와 과학의 관계 이야기를 마무리하죠. 생태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물학적 대안이 유일하다는 실천의 통섭을 주장한다면, 이것은 과학 중심주의를 넘어서서, 과학 일방주의라고 판단합니다. 생물학적 실천이 종교적 실천을 규범적으로 통제하는 상황이 온다면, 과학과 종교가 길항적 관계로 돌아갈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고요.

저는 생태 문제 해결에 그리스도교 전통에 근거한 신학적 실천과 과학적 실천이 함께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생태계 문제 해결을 위해서 종교적 실천이나 과학적 실천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실천 등을 포함한 여타의 실천을 함께 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고 효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생태문제 해결을 위해 보다 강력한 실천은 종교적 실천보다는 현대 자본주의를 통제할 수 있는 사회, 경제적 실천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생태학적 실천이라는 풀(pool)이 다양할수록 좋다고 주장하는 기능적 다원주의가, 종교 일방주의나 과학 일방주의보다 생태 문제 해결에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봅니다. 이건 진화생물학의 관점에서 보아서도 크게 벗어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통일성보다는 다양성이, 일방주의보다는 상호주의가 생명계에 훨씬 더 긍정적인 가치라는 것을 윌슨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저는 오히려 윌슨의 <생명의 편지>를 읽으면서, 과학의 한계와 역할은 무엇일까 궁금해졌습니다. 과학자들은 도대체 과학을 무엇이라고 말하는지요? 과학에서 기술적인 측면과 규범적인 측면이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 과학 작업의 특징은 어떻게 규정하는지? 주로 과학의 본질 자체에 관한 물음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다소 복잡하고 전문적인 논의들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다음 세 번째 서신 교환의 주제로 삼았으면 합니다.

종속과 독립 사이에서

김윤성 선생님이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참여하는 절대 다수가 서구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이란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 예, 맞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교 쏠림 현상이 무지 심하지요. 실제로 불교나 이슬람교는 이 문제를 그리스도교처럼 심각하게 관심 갖지 않습니다. 다른 종교의 미미한 참여를 고려하면, 종교와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와 과학의 문제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왜 유독 그리스도교만 이렇게 종교와 과학의 문제에 적극적일까요? 제 첫 번째 편지에서는 역사적 배경을 중심으로 말씀 드렸는데, 여기서는 그리스도교 담론의 인식론적 차원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종교와 과학의 문제에서 그리스도교의 쏠림 현상은 역사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랫동안 서구에서 그리스도교와 과학은 비대칭적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히 그리스도교 종교 담론과 과학 담론의 관계도 비대칭적이고 때로는 일방적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서구 사회에서 그리스도교 담론은 독립 변수로, 과학 담론은 종속 변수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근대 이후 과학이 자율성을 획득하고 독립 변수가 되면서 이 관계가 요동을 치며 새롭게 정립됩니다. 그리스도교와 과학의 관계가 근대 이전의 독립-종속 관계에서, 근대의 독립-독립 관계로, 이제는 역으로 종속-독립의 관계로 이행하게 되지요. 이런 상황 변화에서 그리스도교는 과학과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는 과제를 안게 되고, 이 결과는 현재의 종교와 과학의 관계 지형도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와 달리, 불교나 이슬람교가 영향을 미치던 지역은 담론의 역학 관계에 있어 서구와 같은 역사적 경험이 없습니다. 이들 사회에서 종교 담론은 과학 담론과의 역학 관계가 변화하거나 위상의 역전이라는 상황을 아직까지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불교권에서 과학이 기존의 종교 담론과 경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불교도들은 일반적으로 불교가 과학의 내용을 본래부터 포용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와 같은 유일신 종교인 이슬람교에서도 과학은 (정치까지 포함한) 총체적 이슬람 종교 담론과 경쟁하거나 위협하는 위상에 이르지 못합니다. 비록 중세 이슬람에서 과학이 서유럽보다 훨씬 발전하고 많은 역할을 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이슬람교 담론과 과학 담론의 역학 관계는 독립-종속 단계에 있다고 판단됩니다. 이슬람과 과학이 독립-독립 관계가 될 때는, 또 다른 상황이 발생할 거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서 그리스도교가 중심이 된 것은, 심하게 말해 유난을 떠는 것은, 두 담론 사이의 위상 변화를 직접 경험한 당사자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스도교와 과학 사이에 발생한 갈등이나 긴장은 이런 담론의 역학 관계가 변화하면서 생긴 결과들입니다. 예를 들어, 종교인과 과학자 사이에서 발생했던 갈등은 서구 사회에서 지식의 주도권 싸움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지식을 판단하는 최종적인 권위를 갖는가? 어떤 지식이 더 참된 지식인가? 이런 문제들은 과학이 주도권을 쥔 지금도, 과학의 본질과 한계에 관련해서 여전히 논쟁 중에 있습니다.

미토스와 로고스 사이에서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서 그리스도교로 쏠림 현상은 역사적 경험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담론의 성격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습니다. 로고스 중심주의는 서구 정신의 오랜 특징입니다. 이것은 사유 체계를 합리적으로 통일된 정합체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으로 표출되었지요. 서구의 종교였던 그리스도교도 로고스 중심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가장 궁극적인 진리라고 주장하고 절대화하는 종교 담론의 본질적 특성으로 인해 이 특징은 더 강화됩니다. 로고스 중심주의와 종교적 절대주의가 함께 발효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담론 체계의 인식론적 특성입니다.

그리스도교의 담론 체계는 본래부터 합리적이고 통일적이어야 한다는 생각들이 그리스도교 안에서 늘 잠재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스스로의 담론을 신(theos)에 관한 합리적 학문(logos)인 신학(theologia)으로 규정합니다. 그리스도교는 당시 경쟁하던 다른 종교와의 차별성을 드러내고자, 그 출발부터 신화(mythos)를 부정하고 이성(logos)을 택하고 스스로를 합리적 정신에다 자리매김합니다. 신화에 근거한 이방 종교와 이성에 근거한 그리스도교, 이런 도식이죠.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고 교회가 로마 제국의 사제가 되면서, 그리스도교의 체계화와 통일화는 급속도로 진행됩니다. 이런 궤적의 정점에 스콜라주의가 자리하고 있고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완성되는 중세 스콜라주의는 신학적 담론을 '자연의 영역'과 '은총(계시)의 영역' 모두를 포괄하는 장대한 체계로 구상합니다. 요새 유행하는 '통섭'이라는 말을 쓴다면, 아마 '중세적 통섭'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물론 윌슨식의 생물학적 통섭이 아니라, 신학적 통섭이지만.

이렇게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구에서 지식 체계는 종교적 진리(종교적 사유)에 기반을 둔 통일 체계에 포괄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종교와 과학은 신의 진리와 영광을 드러내는 데 상보적 관계라고 할 수 있지요. 물론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여기에서 과학은 종교에 대등한 위상이 아닌 보완적인 역할을 하는 부차적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고요. 이 비대칭적 위상 체계에 균열이 생긴 것은 과학 혁명과 계몽주의를 거치면서였습니다.

과학 혁명 이후 현대까지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서 그리스도교는 항상, 상보적 관계에서 길항적 관계로 위상이 변해 버린 과학을 다시 통일적 또는 적어도 상보적 위상으로 편입하려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달리 말하면, 종교와 과학을 다시 한 묶음으로 통합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가 제기하는 주류 과학의 과학 정의나 정당성의 문제 역시 이런 흐름에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독립 변수가 되고자 하는 근본주의 그리스도교의 줄기찬 시도로 말입니다.

서구 그리스도교는 오랫동안 로고스 중심주의 영향에서 통일된 완전한 진리 체계를 추구했습니다. 이렇게 인식론적 차원에서 종교 담론과 과학 담론의 균열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이런 역사적 궤적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통일과 체계에 익숙해져서, 그래서 다름을 용납하지 못하는 그리스도교의 관성이 여전히 현대에까지 지배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종교와 과학의 문제에 집중하는 것은 과학이 자기 전통 안에서 발생했다는 역사적 맥락 외에도, 이렇게 관련된 모든 영역을 인식론적으로 통일하고 체계화하려는 정신이 그리스도교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더불어 그리스도교 담론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에서 도킨스와 같은 과학적 무신론, 과학적 중심주의 역시 그런 로고스 중심주의의 영향 아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도 과학으로의 천하통일을 꿈꾸고 때문입니다. 과학적 토대주의, 인식론적 획일성, 체계적 통일성을 지향하는 윌슨의 '통섭'이나 도킨스의 과학주의 역시, 그리스도교 신학만큼이나 로고스 중심주의의 우산 아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적응과 부산물 사이에서

도킨스를 통해 진화론의 종교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도킨스는 우리 시대의 문화적 코드입니다. 그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이건 긍정적이건. 김 선생님도 지적했듯이, <만들어진 신>은 잘 정리된 책입니다. 이전의 여러 책에서 단편적으로 언급했던 종교에 대해 작심하고 싸움판을 벌린 책입니다. 논리적 측면뿐만 아니라 현상적이며 감성적인 측면에서도 (유신론적) 종교를 비판함으로써 독자의 시선을 끌고 있습니다. 유신론자들에게는 상당히 아픈 책이고, 종교의 현재 모습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통쾌한 책일 겁니다.

제가 보기에, 도킨스는 19세기 데이비드 흄 이래, 아니 흄보다도 더 강력한 유일신 종교 비판자입니다. 그 영향력 면에서 흄을 능가할 겁니다. 그는 흄을 비롯한 과거의 종교 비판자나 무신론자와는 궤가 다릅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그가 흄이나 그 이전 종교 비판가들이 가지지 못했던 강력한 무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론을 대신해서 과학적으로 생명 현상을 설명하는 진화론이 바로 그것이지요. 이로 인해 그는 이전의 단순한 형이상학적 무신론자보다 훨씬 강력한 종교 비판의 논거를 확보하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자유롭게 자신의 견해를 전달할 수 있는 현대화된 의사소통 수단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방송, 출판, 강연, 인터넷 등 발달된 의사소통 수단을 무기로 장착하고, 과거의 어느 종교 비판가보다도 자유롭게 자신의 견해를 유포합니다. 흄의 종교 비판이 서구 엘리트라는 독자층에 한정된 반면, 도킨스는 현대 대중문화 전체를 대상으로 합니다. 자신의 견해를 쉽게 풀어서 설명하고 설득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오늘날 도킨스 마니아라 할 수 있는 광범위한 독자층을 형성했습니다.
▲▲'세계무신론연맹(Atheist Alliance International)' 홈페이지. ⓒ프레시안

이제 도킨스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무신론 운동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세계 무신론 연맹(Atheist Alliance International)'은 종교에 대해 비판적 활동을 하는 사람에게 주는 상으로 '리처드 도킨스 상(Richard Dawkins Award)'까지 제정했습니다. 가히 도킨스 신드롬이라고 할 수 있지요. 아직 우리나라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영미 사회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는 이미 역사상 강력한 종교 비판자의 반열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도킨스를 비롯해서, 최근 들어 진화론의 관점에서 종교를 설명하는 것이 붐을 이루고 있습니다. 물론 종교에 관한 진화론적 설명이 처음은 아니지요. 19세기에도 진화론의 관점에서 종교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크게 유행했습니다. 물론 그 성격이 최근의 논의와는 달랐지만요. 당시 진화론적 관점을 수용해 종교 연구를 진행하는 사람들은 진화 생물학 훈련을 받은 생물학자나 심리학자 혹은 인류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럼 과거에 진화론이 종교를 보는 눈이 어떠했는지 살펴보지요. 19세기 서구 사회는 서구 이외의 문화권(주로 식민지)에서 종교(를 비롯한 다른 문화)에 대한 광범위한 자료를 수집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많은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수합된 자료를 일관성 있게 통일해서 파악하는 새로운 학문 방법으로 '진화론적 패러다임'이 등장합니다.

이 진화론적 패러다임은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과 18세기의 역사 철학의 진보 개념의 결합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즉 역사 철학계의 '진보(progress)' 개념과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evolution)' 개념이 만나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만들어진 것이죠. 이 과정에서 사회 진화론을 주장한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가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사회 진화론은 인류 문화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했습니다. 이것은 인류 문화의 여러 현상들이 "어디에서 기원하고, 어떻게 발전하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밝히고자 했습니다. 이런 사회 진화론의 시각이 종교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지요. 당시 시대 분위기상 진화론은 하나의 이론이라기보다는 모든 것에 적용해서 설명할 수 있는 '만능열쇠'였습니다. 그런데 종교에 대한 객관적인 학문 연구를 주장하던 '종교학'이 바로 이 시대, 진화론이 지배하던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종교에 대한 관심도 자연히 종교의 '기원'과 종교의 '진화'에 쏠렸습니다.

19세기 후반에 진화론적 관점이 종교를 연구의 주도권을 장악했습니다. 사실 이 시기 종교 연구자 가운데 진화론이라는 거대한 우산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종교의 기원과 진화를 설명하는 이론이 폭발적으로 등장하고 비슷한 종류의 종교 진화론이 유행하게 됩니다. 이런 종교 진화론은 종교 기원론과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이들의 구호가 바로 "기원을 알면 본질을 알 수 있다."입니다. 에드워드 타일러(Edward Tylor)나 제임스 프레이저(James Frazer) 등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타일러의 종교 진화론(종교는 애니미즘->다신교->유일신교의 단계를 거쳐 진화했다.)과 프레이저의 3단계 발전론(인간의 지식 체계는 주술->종교->과학의 단계를 거쳐 진화했다.)은 바로 이런 흐름의 산물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비판들이 후대 종교학자들에게서 쏟아졌죠. 이 문제는 김윤성 선생님이 더 잘 알고 계시고요. 당시 이들에게 가해진 비판 가운데 하나가 '과연 기원을 알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는가?'였습니다. 저 역시 '특정 사물의 기원을 알면 그 사물의 본질과 지금의 모습을 알 수 있다'는 생각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당시 이들의 지닌 '종교의 기원을 알면 종교의 본질을 알 수 있다.'는 전제에 대한 비판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최근의 진화생물학의 종교에 관한 담론을 보면서, 이들의 논의가 여전히 이런 전제를 바탕에 깔고 있지 않은지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의 이들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진화론은 20세기에 들어와 유전학과 분자 생물학, 생태학 등의 연구 성과를 통합하고 발전시켜 '신다윈주의'나 '새로운 종합'이라는 이름을 얻었지요. 19세기와 달리 이제는 진화 생물학 분야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종교를 비롯해 인간 성격, 심리, 더 나아가 마음까지 새롭게 해명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진화 생물학자들을 포함한 현대 과학자들은 종교를 '적응'을 위한 방편, 또는 적응을 하다 보니 얻게 된 '부산물'이라고 주장합니다.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도킨스 역시, 자신의 밈 이론을 통해서 종교를 해명하지만, 종교가 기본적으로 '부산물'이라는 입장에 동의하고 있지요.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장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새로운 지식의 통섭을 꿈꾸는 현대 진화론자들이 종교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또 가능하다면 마음의 비밀을 새롭게 밝히고 있는 인지 과학자들이 종교의 기원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도. 이들의 입장과 학문적 배경도 함께 들을 수 있다면 '진화론적 종교 담론 지형도'를 그리는 데 훨씬 더 도움이 될 것 같네요. 장 선생님께서 보스턴에서 데닛이나 윌슨을 만나셨을 텐데, 혹시 이런 주제에 대한 뒷얘기가 있다면 함께 풀어 주시고요.

일단 장 선생님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종교가 '적응'이나 '부산물'인가?"에 대해서, 또한 "기원에 대한 설명이 과연 종교에 대한 충분한 설명일까?"에 대한 우리의 논의를 더 진행하도록 하지요. 이러다 보면 과학이 무엇이고, 종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종교 경험과 다른 경험 사이에서

이제 편지의 처음에 언급한 여행 이야기로 돌아가면서 종교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본디 '자연주의자로서 인간'이 경험하는 자연의 경험과 종교적 경험의 관련성을 생각하다가 보니까, 그렇다면 '종교적 경험은 무엇인가?'라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앞 서신에서 김 선생님이 종교나 음악에서 얻는 감동을 이야기했지요.

목사로서, 신학자로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어떨지 모르겠지만, 음악이 주는 감동이 종교적 감동보다 덜하지 않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그런데 이들로부터 얻는 감동의 질이나 농도와 관계없이, 두 경험을 구별할 수 있는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자연을 보고 느끼는 감동, 음악을 듣고 느끼는 감동, 종교적 경험을 통해 느끼는 감동을 구별할 수 있을 겁니다.

빙하와 호수가 어우러진 토레스 델 파이네를 트레킹을 하면서, 같은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짧게는 1박 2일의 길을, 길게는 5박 6일의 길을 함께 걷는 사람들입니다. 다양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인데, 다들 진지한 표정들입니다. 마치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거룩한 산, 토레스 델 파이네를 걷는 사람들….

문득 김 선생님과 작년 여름에 함께 갔던 티베트가 생각나더군요. 티베트 사람들은 카일라스 산(수미산)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고 있지요. 그냥 걸어도 사흘길인 이 산을 오체투지로 순례하는 것이, 라싸의 조캉 사원 순례와 더불어, 이들이 살아서 꼭 이루고 싶은 꿈이라고 합니다. 티베트 사람들은 카일라스를 한 번 순례하면 이번 생의 업(業, 카르마)이 없어지고, 10번을 돌면 500년 전생의 업이 사라지고, 100번을 돌면 해탈한다고 믿는다지요. 예루살렘이나 라싸, 메카나 바나라시를 향해서 걷는 순례의 발걸음과, 산이나 빙하를 걷는 발걸음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교와 종교 아닌 것은 어떻게 구별할까? 자연에 대한 경험이나 종교적 경험 모두 '호모 나투라우스'로서 우리가 겪는 총제적 경험의 일부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진화론의 종교 담론과 별개로, 종교 연구자들이 말하는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다른 경험과 구별되는 종교의 영역이 있다면, 궁극적으로 과학과 구별할 수 있는 종교의 독특성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즉 '종교적인 것과 종교적이 아닌 것의 기준'에 대한 질문들이죠.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이런 질문입니다. "종교적 경험은 인간의 다른 경험과 구별되는가?" "종교적 경험을 규정하는 어떤 기준은 있는가?" "자연적 경험과 구별되는 종교적 경험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종교학자로서 김 선생님의 이야기를 기대합니다. 덧붙여서 생물철학 전공자로서 장 선생님은 종교적 영역의 독자성이나 독특성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도 궁금합니다.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돌아갈 시간입니다. 한 여름의 남반구에서 다시 한 겨울의 북반구로 돌아갑니다. 남미의 뜨거운 햇살도 좋지만, 한국의 흰 눈이 그립습니다. 한쪽에 머물다 보면 또 다른 한쪽이 그리워지는 것이 사람 사는 본래 모습인가 봅니다. 저에게 종교와 과학도 그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2007년 1월 31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신재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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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은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독자 여러분이 참여하길 희망합니다. 장대익, 신재식, 김윤성 교수가 주고받는 글을 보고 자신의 견해를 보내주십시오. 그렇게 보내준 견해는 한 달에 한 번씩 세 분 필자와 똑같은 비중으로 <프레시안>에 게재됩니다. (의견 보내실 곳 : tyio@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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