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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불러내길 기다리는 소망들이 있다"

[나도원의 '대중음악을 보다'] 민중가요에서 시민음악으로 (上)

노래는 삶에서 나오고, 삶은 세상과 따로 떼어지지 않는다. 중립이나 방관도 사회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음악은 어떤 식으로든 세상과의 대화일 수밖에 없다. 민중음악은 사회와 역사 그리고 공동체로서의 세상과 적극적인 대화를 시도해왔다. 1970년대에 자생적으로 형성되어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전반기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력을 가졌고, 많은 이들이 노래운동에 투신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민중음악의 불꽃은 작아졌으며, 일각에서 소멸위기까지 거론될 정도로 창작활동은 위축되었다. 합법공간에서 성공적인 대중적 활동을 펼친 단체와 민중음악인들이 회상과 함께 호명되곤 하지만, 재생산 없이는 2000년대 대중음악계의 추억마케팅과 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없다.

그 주된 이유에 대한 견해는 대체로 일치한다. 세상이 변했다는 것이다. 전선도 이동했다. 민주와 반민주 구도에서 이어진 개혁과 수구 구도, 그리고 진보와 보수 구도가 혼합되거나 혼동되는 양상이다. 지난 시기에 방관했던 자들은 그간의 성과를 성공적이었다고 뒤늦게 상찬하고, 실제로 몸을 실었던 이들은 실패라 말한다. 용서를 말하기도 하지만, 용서는 고통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담론과 의식이 은폐되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고, 또 일부에선 허영과 유행에서 비롯된 진보적 태도가 계절풍처럼 일었다 잦아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음악의 역할축소는 역량약화로 이어졌다. 어떤 이들은 마치 공연이 끝난 뒤의 쓸쓸함을 느끼듯 주로 후일담을 읊조리는 퇴행성까지 내보였다.

그 수준은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높았다
▲ 민중음악 노래패 '꽃다지' ⓒ꽃다지

그런데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음악뿐 아니라 문화예술운동의 위기와 전망에 대한 심도 있는 의견들이 제시될 때마다 의아할 정도로 논외가 되고 있는 작품으로서의 설득력에 대한 부분이다. 예술순수주의로 재단될 대상이 아니며 다른 각도에서 봐야한다는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일부 맞는 말이다. 민중음악은 비판의식을 공유하는 집단이라는 수용층과 독자적인 제작·유통·소비구조라는 존재방식을 공유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독자적인 영역을 만들기 위한 지식인 논리가 결과적으로 스스로 영토를 제한한다는 것이다.

단지 언어사용법만이 다를 뿐이라는 악의 없는 농담을 듣기도 하는 지식인을 혹자는 간단하게 '남 걱정하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민중음악이라는 용어에 대한 문제제기도 이와 관련이 있다. 한 음악인의 표현대로 "민중의 음악이 아니라 민중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음악"의 창작은 자신이 아닌 대상의 눈높이를 의식하고 있었다. 또는 그렇게 합리화되었다. 어떤 기준을 '민중의 문화적 수준'으로 상정하고, 그들이 듣고 따라 부를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민중음악의 창작이 활발했던 시기, 민중이 즐긴 대중음악의 전반적인 수준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높았다.

가장 대척점에 있는 듯 보이는 기독교 대중음악, 즉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이 걸어온 길에서 흥미로운 점을 찾아볼 수 있다. 공식적인 찬송가와 복음성가(gospel song)와는 구분되는 새로운 기독교음악이 1980년대 중반 무렵부터 호응을 얻었다. 그 이전까지 교회는 전기기타나 드럼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고, 신성한 교회에 소비적이며 향락적인 대중음악의 잔재를 들이는 행위는 금기시되었다. 그러나 최덕신이라는 걸출한 작곡가가 제시한 완성도 높은 CCM은 청소년과 청년층에게 자극을 주었고, 찬양집회의 활성화와 함께 전기를 마련했다.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기타연주자 함춘호 등 유능한 음악인들이 이 방면에 기꺼이 투신한다.

투철한 의식과 태도가 중시된 민중음악진영의 흐름과 유사하고, 결과는 상이하다. 의식적인 관성이 일반의 눈높이를 따라가기 벅찬 상황을 만든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실제로 다수 현역 음악인들과 일부 비평가들에게는 민중음악을 폄하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기교주의에 함몰되어 완성도와 대중성을 혼동하게 되어버리는 것 역시 위험하다. 이러한 착각은 주류대중가요에서 흔히 발견되고, '잘 만든 것'과 '훌륭한 것'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한다. 하지만 그러한 낮은 차원이 아니라 지금 말하는 것은 전달력과 설득력의 문제이다. 지금까지 비평적으로도 거론되는 민중음악 작품들은 당시 어떤 식으로든 비판받았던 것들이라는 역설적인 상황은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여전히 버릴 수 없는 가치들이 있기에…
▲ '노래를 찾는 사람들' 2집 ⓒ프레시안

물론 민중음악은 수용자 개인에게 '체험'으로 의미지어진다. 시대의 기억과 공유의 경험을 불러오는 매개체이기에 예술적 기준만으로 말해지는 것은 부당하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도 그렇듯이, 한계의 인식이 의의의 계승일 수 있다. 더구나 1990년대 후반부터는 공교롭게도 일부 주류대중음악을 제외하고 록, 포크 등 대부분의 대중음악 장르들이 함께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처럼 다른 이유들도 개입되었음을 암시하는 정황이 있음에도 태도와 존재방식만을 말한다면 새로운 움직임의 근거는 마련되지 않는다. 여전히 버릴 수 없는 가치들이 있기에, 과거형이 아닌 현재의 민중음악에 주목하고 창작활동을 조명해야 한다.

최근 '탄핵송'이 인터넷을 타고 전파되었다. 이와 같은 전례로 'Fucking USA'가 있었다. 환경변화에의 적응이 관건이 되자, '송앤라이프(www.songnlife.com)'를 운영하는 윤민석처럼 인터넷에 기반을 두고 음반이 아닌 파일을 배포하는 방식이 대두되었다. 또한 상식이 기준이 되고 사안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는 분위기에 대한 반응이었다. 새로운 매체의 활용과 이슈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성의 확보였다. 그러나 새로운 매체 역시 기성질서로의 편입이 예정되어 있었고, 양심과 행동에 호소하는 개별적 사안대응의 한계 또한 명확하다. 68혁명은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었다고 극적으로 과장되기도 하지만, 실제로도 그러했는가.

사회를 직시하는 시민과 삶을 긍정하는 생활인의 모습이 함께 녹아든 음악
▲ 민중음악 가수 연영석 ⓒ연영석 홈페이지

연구자로서 관찰하는 현상이 아닌 비평적 관점에서 주목하는 경향은 집단에서 개인으로, 역사에서 생활로의 이동이다. 그리고 다시 공동체의 회복으로 이어진다. 이는 일원에서 다원으로, 그리고 다시 다원에서 일원으로 이동하는 지적 흐름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일상성의 발견도 중시된다. 영화 <트루먼쇼>에서 평생을 갇혀 지낸 트루먼이 이상함을 발견한다는 설정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일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그 속에 은폐된 것을 어떻게 폭로하는가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점차 민주화 이후의 흐릿한 희망을 발견하고, 실패에서 배우고, 비극성과 엄숙주의를 낙천성과 일상성이 대신하게 되었다. 그렇게 손병휘의 노래처럼 사회를 직시하는 시민과 삶을 긍정하는 생활인의 모습이 함께 녹아든 음악이 태어났다.

사실 이러한 변화는 음악인으로서의 자의식이 자연스럽게 표출된 결과이다. 기본적인 음악적 요건이 충족될 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음을 인식했고, 유인혁에게서 보이듯 기성 음악과는 방법상 차이가 있으나 보다 음악에 집중하려는 노력들이 많아졌다. 동시에 의식의 저변으로 자연스레 흘러들어가 공감으로 적시면서도 독자성을 지켜내야 한다는 요구가 공존한다. 고독을 말함으로써 동료를 만들고, 부재를 노래함으로써 충만하게 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강렬한 에너지까지 겸한 연영석의 예가 있지만, 사실 문장으로는 쉬이 쓰여도 실제로는 풀기 어려운 문제이다.

어디에선 명예를 위해, 영생을 위해 죽지만, 이 땅에선 생존을 위해 죽는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시대에서 아버지를 잃은 가족의 시대로 변했을 뿐이다. 움직이지 않으나 팽팽한 긴장이 계속되는 세상에서 여전히 말해지지 못한 채 불러내주길 기다리는 소망들이 있다. 이 속에서 "어떻게 바꾸어야하는가"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함께 노래하고, "무엇을 말한 것인가"와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연구하며 나름의 답을 적어내고 있는 음악인들이 있다. 이제 그 이름들을 써내려가고, 돌아보고, 기억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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