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 자리는 나에게는 잊지 못할 곳이다.
94년. 지금 중학교 2학년인 딸아이가 태어나던 해이다. 어느 가을날, 당시 <토지>를 출간한 솔 출판사 임우기 사장이 전화를 해왔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 완간 기념식장 준비를 도와달라는 거였다.
나는 딸아이 태어난 기념으로, 아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핑계로, 한동안 다니던 공사현장의 잡부를 멈춘 상태였고, 이제 막 알게 된 유용주 시인도 목수 노릇을 접고 막연한 대기상태였다. 한 마디로 둘 다 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유 시인과 나는
'문단의 고명한 선배, 지우들께서 박경리 선생 모시고 토지 완간 기념행사를 한다고 초청을 해오니 차마 거절할 수가 없구려, 그럼 내 다녀오리다.'
이런 소리 한 마디 못해보고 길을 떠나게 되었다. 초청장 대신 망치와 못 주머니와 수건을 싣고 원주를 향했는데, 멀리서 우러러보기만 하던 분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기대 하나만큼 차고 넘칠 정도였다.
원주시 단구동에 선생 댁이 있었다.
우리에게 떨어진 일은 간이 화장실 급조, 마당 평토작업, 야외 부엌 완공, 행사 무대 준비 따위였다. 문단노가다라는 직업군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잠은 시내 여관에서 잤고 밥은 계란프라이를 해주는 식당으로 정했다.
첫날.
3, 6 자 패널로 마당귀에 화장실을 만들며 자꾸 선생께서 계시다는 저택 쪽으로 신경이 갔다. 혹시 원고 쓰시는 중인가 싶어 망치질도 조심조심 했다. 고양이 여러 마리가 번갈아 가면서 우리를 구경했다. 선생께서 돌보시는 고양이들이라 해서 우리도 그 애들을 구경 했다. 오후쯤에 유 시인이 급하게 다가오더니 내 어깨를 쳤다.
"선생님 나오셨어, 선생님이."
돌아보니 현관문이 닫히고 있는 중이었다. 고동색 원피스 치마만 언뜻 보였다.
"봤어?"
"못 봤어. 형은 봤어?"
"난 봤지. 고양이 밥 주러 나오셨나봐. 텔레비전에서 보던 그 모습 그대로시네."
나는 망치로 땅을 치며 내 박복을 탓했다. 얼굴 한 번 뵙기가 참 어려웠다.
인사 드릴 기회는 다음날 찾아왔다. 훈련용 비행가 한 대가 시끄럽게 하늘을 날고 있을 때 임 사장이 찾아왔다. 그는 오자마자 하늘을 보며 혀를 찼다.
"유럽에서는 대작가가 사는 저택 위로는 비행이 금지되어있는데 이놈의 나라는."
오호라. 나는 그 말을 머릿속에다 담아두었다. 배울 만한 말 한마디 기다리고 있을 <지역 글패 후배> 들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우리도 하늘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저 놈의 비행기를 그냥 콱."
망치 손잡이가 짧은 게 한이었다. 우리의 충심이 전해졌는지 임 사장의 설명을 들은 선생께서는 깜짝 놀라며 다가오셨다.
"아이구, 무거운 것을 잘도 들고 다니길래 어디 인력시장에서 데리고 온 일꾼들인 줄 알았는데, 작가들이셨구만."
선생께서는 웃으셨다. 소박함과 감히 어쩌지 못할 품위가 자연스럽게 섞인 모습이었다. 유 시인은 이 순간을 기다리며 준비해 놓은 시집을 사인해 드렸다. 나는, 지금까지 책 하나도 못 내고 뭐했을까, 또다시 한탄을 해야 했다.
아무튼 그때부터 우리의 호강은 시작되었다. 날마다 새참을 해주신 것이다. 선생께서 직접 만드신 잡채나 빵을 먹어본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따님이신 김영주 선생이 오신 날은 같이 앉아 먹었다. 선생께선 자꾸 우리 쪽으로 먹을 것을 밀어주며 어디에서 사느냐, 열심히 쓰느냐, 물으셨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말씀만 하시면 오늘 밤 안으로 사층 연립주택도 만들어놓겠습니다' 복창을 마음속에 새겨 넣곤 했다.
하루는 당신의 손을 우리 앞으로 뻗으셨다. 손은 거칠었다. 마디가 굵고 크고 작은 흉터도 여럿이었다.
"일을 해야 돼요. 여기 제 손을 좀 보세요. 이게 사실은 일 한 손이에요. 원고 쓰다가 답답하면 무조건 호미를 들고 밭으로 나와요. 땀 흘리지 않으면 좋은 작품 안 나와요."
그러면 우리는 또 '돌아가는 대로 당장 현장 복귀하겠습니다.' 복창을 마음속에 새겨 넣었다.
원보 이야기를 자주 하시길래 아는 척 해본답시고
"원보가 어떤 고양인가요?"
이렇게 물어 난감해 하시기도 했다(원보는 김지하 선생의 장남, 그러니까 박경리 선생의 큰손자이다).
일주일 뒤 행사는 성대하게 치러졌다. 내로라하는 분들이 앞 다투어 선생의 문학세계를 칭송하고 실천하는 지성을 높이 받들었다. 민족 언어를 토대로 한, 식민지 시대 유장한 삶의 빼어난 형상을 놀라워하고 나아가 인류 전반의 고통과 희망을 고스란히 담아낸 대작 완결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우리는 신발 정리 하면서 고개 끄덕거렸다.
그러면서 나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대작가의 소박한 모습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인간의 존엄과 창조를 강조하는 간단명료한 언어, 호소력 깊은 눈빛, 화려함 하고는 한참이나 거리가 먼 차림새, 굵고 거친 손가락, 뒤로 묶은 반백의 머리카락.
선생을 그 다음에 뵌 곳도 원주였다.
김지하 선생 아버님께서 세상을 뜨셨고 또다시 유 시인과 나는 상가(喪家) 일을 도우려 그곳엘 갔다 (그래서 원주엘 가면 눈이 훤해지고, 뭔가 역사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와 있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우리는 일을 하며 박경리 선생을 기다렸다. 어스름 저녁에 오셨다. 쟁반과 행주 들고 있는 우리를 발견 하고는 또 깜짝 놀라셨다.
"아이구, 이걸 어째. 맨날 머슴처럼 일만."
우리 셋은 분향소에서 만난 동네 할머니와 청년들처럼 서로 손을 잡았다. 여전히 손은 거칠었고 눈매 가장자리 주름도 더 깊어져있었다. 그날 밤 선생은 오래도록 조용히 앉아 계셨다. 여전히, 소박함과 감히 어쩌지 못할 품위가 함께 있었다.
그런데 선생께서 세상을 뜨셨단다. 끝내 눈을 감고 마셨단다. 높거나 낮거나, 배우거나 못 배우거나 똑같이 대하셨던 모습을 이제는 볼 수가 없단다. 우리에게 삶의 자세와 정신을 가르치던 입 닫혀버렸단다.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지난 4월 현대문학에 발표하신 시 <옛날의 그 집> 전문)
박경리 선생님.
이 시를 쓴 이유가 가시려고 그랬던 것입니까? 홀가분하다더니,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더니, 정말 홀가분하셔서 그런 겁니까? 아닐 겁니다. 나라의 미래를 포크레인에게 맡기겠다는 세상인데, 강물을 없애버리겠다는 세상인데, 진정으로 받들어 모셔야한다고 당신께서 평생 호소하시던 생명들을 단칼에 쳐내버리겠다는 세상인데 말입니다.
이렇듯, 선생님의 곧은 정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지금도 도처이고 넓고 깊은 품을 원하는 이들이 아직도 부지기수인데 이렇게 홀연히 가버리시는 뜻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이제는 알아서 하라는 말씀이겠지요. 거듭 땀 흘리라는 소리겠지요.
문득 고개 들어보니 서쪽 바다로 유난히 하얀 구름 하나 흘러가고 있습니다. 혹시, 선생님이신가요? 염치없어서 차마 붙잡을 수도 없습니다. 이제는 평화로운 곳에서 편히 쉬셔야죠. 부디 진정으로 홀가분하게 쉬셔야죠. 그 이유 하나로 허전하고 아픈 가슴을 애써 달랩니다.
소설가 한창훈은 1992년 대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1996), <가던 새 본다>(1998), <홍합>(1998. 제3회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 <청춘가를 불러요>(2005) 등이 있다. 그는 2003년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사무국장을 지내는 등 문단의 '마당발'이자, 이야기꾼으로 통하기도 한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 완간 기념 행사를 도운 일을 계기로 가까이에서 선생을 뵌 젊은 작가 중 한 사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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