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교수·교직원, 그리고 '용역'
모든 대학엔 교훈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서울대는 '진리는 나의 빛'이라고 했고, 연세대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고, 고려대는 '자유·정의·진리'라고 했다. '진리', '자유', '정의'라는 말들은 얼굴에 솜털이 뽀송했던 청춘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가치들이었다.
입학을 하니 대학은 세 가지 구성원으로 이뤄져 있다고 했다. 학생, 교수, 교직원이 그것이다. 대학을 다닌 지 1년이 지났을까, 또 하나의 구성원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교직원으로 알고 있던 이들이 교직원이 아니라 '용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내가 거닐던 대학 곳곳을 걸레로 훔치던 청소부가 바로 '용역'이었던 것이다. 얼마 후 단과대학 건물의 경비원들도 '용역'임을 알게 됐다.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던 '용역'이라는 말은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재화와 용역'할 때의 그 용역뿐이었다. 그 용역이 현실에서 처음으로 나와 대면한 것이다.
정운영 교수의 수업과 예수님의 예화
그 무렵, 훗날 <MBC 100분토론>의 명사회자로 이름을 떨친 고(故) 정운영 교수가 가르치던 마르크스 경제학 수업을 듣게 됐다. 청바지를 즐겨 입고 구내매점 커피 한 잔에 담배피기를 즐겼던 그가 어느 날 질문을 던졌다. "대학교수의 1시간 노동과 대학청소부의 1시간 노동 가운데 누구의 임금을 더 높게 쳐주어야 하는가?" 그의 결론(사실 정 교수의 결론이라기보다 마르크스의 결론)은 둘 다 똑같이 쳐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교수 사회를 두고 '3T 교수'라는 말이 있을 때였다. 학교에 오면 차(Tea)를 마시고 테니스(Tennis)를 치다가, 퇴근해서 텔레비전(Television)을 보는 게 교수의 일과라는 비아냥거림이 인구에 회자되던 때였다. 그래서였을까. 교수와 청소원의 1시간 품삯이 같아야 한다는 주장도 그럴 듯하게 들렸다.
세월이 많이 흘러 깨닫게 된 것이지만, 대학교수가 1시간 일해 받는 급여와 청소부가 1시간 일해 받는 급여가 왜 똑같아야 하는지는 <신약성경>의 예수가 분명하게 가르쳐주었다.
<신약성경>의 포도밭 주인과 일꾼
포도밭 주인이 아침 일찍 일꾼을 찾아 나섰다. 아침에 만난 일꾼들에게 하루치 임금을 열 냥 쳐주기로 하고 일을 시켰다. 낮에 보니 시장에서 빈둥거리는 사람들이 있어 역시 포도밭에 보내 일을 시켰다. 오후에도 일하려는 사람들이 있어 일을 시켰다. 해 질 무렵 역시 할 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주인이 물었다. "하루 종일 일 없이 서 있었느냐?" 서 있던 일꾼들이 말했다. "아무도 우리를 고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이들에게 밭에 가서 일하라고 시켰다.
해가 지고 일당을 줄 때가 되었다. 포도밭 주인이 하인을 시켜 "마지막에 온 일꾼부터 처음 온 일꾼 순으로 임금을 주라"고 말했다. 해질 무렵 와서 일한 일꾼들이 열 냥을 받았다. 처음부터 온 일꾼들은 속으로 그보다 더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도 열 냥을 받자 주인에게 불평하기 시작했다. "해질 무렵 온 자는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땡볕에서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한 우리와 평등하게 대접합니까."
주인이 말했다. "친구여. 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있다. 열 냥 받고 일하기로 합의하지 않았느냐? 너희들의 일당을 챙겨 갈 길을 가라. 내 것을 갖고 내가 바라는 걸 하는 게 불법이냐? 나는 마지막에 온 자들에게도 너희들과 똑같이 주고 싶다. 내가 선한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들 눈에는 내가 악마로 보이느냐? 그래서 나중 된 자가 처음 되고, 처음 된 자가 나중 된다고 하는 것이다. 불리어 온 사람은 많지만 그 중에 택할 사람은 적구나."
예수가 바랐던 세상의 임금 체계
<신약성경>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예수의 예화다. 여기서 포도밭 주인은 하늘의 왕국, 즉 천국을 뜻한다고 예수는 말했다. 천국은 어떤 곳인가, 예수가 바라는 세상은 어떤 곳인가 하는 것을 예화를 통해 빗대고 있는 것이다.
예화에 나오는 포도밭 주인의 말은 한마디로 "얼마를 주건 내 마음"이라는 것이다. 이를 두고 두 가지 풀이가 가능하다.
첫째는 정말 내 마음이라는 것이다. 돈 주고 일꾼을 부리는 사람은 나인데 돈 받고 부림을 당하는 일꾼인 네가 왜 따지느냐는 것. 마음에 안 들면 딴 데 가서 일하면 되지 왜 대드느냐는 전형적인 한국 악덕 자본가의 논리다. 하지만,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예수의 속뜻이 진정 이러했을까.
두 번째 뜻은 정운영 교수 수업의 결론과 이어져 있다. 11시간을 일하든, 1시간을 일하든 일꾼, 즉 노동자가 받는 임금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11시간을 일한 사람이나, 일하려 했으나 고용하는 자가 없어 하루 종일 기다리다가 늦게나마 1시간을 일한 사람이나 하루 세끼 먹는 것은 같고, 그들에게는 먹여 살려야 할 식솔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한 예수였다.
'저급' 노동, '육체' 노동은 차별해도 되나
물론 정운영 교수가 11시간 일한 자와 1시간 일한 자가 같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과격하게 결론짓진 않았다. 그는 이른바 '고급' 노동을 하는 교수의 1시간과 '저급' 노동을 하는 청소부의 1시간이 사회경제적으로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함을 강조했을 뿐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일인당 국민소득이 높으며 사회복지가 잘 돼 있는 선진국일수록 '고급' 노동과 '저급' 노동, '정신' 노동과 '육체' 노동에서 대우의 차이가 작다는 점이다.
2006년과 2007년에 간접고용 비정규직, 즉 사내하청 노동자에 대한 차별이 심각했던 프랑스 외자기업 라파즈한라시멘트의 문제를 언론에서 다뤘을 때 네덜란드 체류 경험을 가진 이가 댓글을 올린 적이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원청'이냐 '하청'이냐를 떠나 라파즈한라시멘트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했던 수준의 일을 할 경우, 잘하면 1억 원 가까이 번다는 내용이었다.
네덜란드에 안 가봤으니 시멘트 공장에 필요한 지게차를 운전하는 노동자가 1억 원을 버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원청에서 지게차를 운전하든지 하청에서 지게차를 운전하든지에 상관없이, 혹은 원청의 정규직 노동자이든지 하청의 비정규직 노동자이든지에 상관없이 임금과 노동조건의 차별이 한국만큼 사회경제 체제를 흔들 정도로 심각하지 않다는 것이다.
경비가 하찮은 일이라면, 군대와 경찰은?
ⓒ프레시안 |
이틀 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다국적기업 노동조합들을 상대로 한 토론회에 참석했었다. 국제노동기구(ILO)에서 나온 발표자가 노동시장 유연화를 설명하면서 불가피한 외주화·하청화도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핵심 사업(core business)으로 간주할 수 없는 경비직(security)이라고 했다. 그러자 인도네시아 라파즈시멘트의 노조간부가 "경비원이나 시멘트를 생산하는 노동자나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 다 같은 노동자다. 경비원을 외주용역으로 돌려야 하는 이유가 뭐냐"며 따지고 나섰다.
두 사람의 논쟁을 지켜보던 필자는 라파즈 노조 간부의 주장이 일리 있는 항변이라고 생각했다. 회사의 보호와 안정을 책임진 경비원이 핵심 사업이 아니라서 비정규직으로 돌린다고 치자. 그렇다면 국가 보호와 사회 안정을 책임진 군대와 경찰(national security)을 외주용역으로 돌리지 않을 이유는 뭔가.
이 토론회에 참석한 독일 홀침 시멘트 회사의 중간 관리자급 정규직 노동자는 우리 돈으로 100만 원을 월급으로 받는다고 했다. 1년 전 만난 인도네시아의 라파즈 루핑(roofing, 지붕자재) 회사의 생산직 정규직 노동자는 우리 돈으로 9만 원을 월급으로 받는다고 했다. 이 라파즈 루핑의 노동자는 생계비 걱정에 16살짜리 딸을 학교 대신 시집을 보내야 했다. 프랑스 기업인 라파즈는 세계 제1위의 건설자재 생산회사로 2007년 순이익 증가율이 35%를 넘어선 세계적인 다국적기업이다.
적자라서 비정규직 증가, 흑자라도 비정규직 증가
인도네시아 토론회에는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기업의 노조 간부들이 많이 참석했다. 라파즈(Lafarge), 홀침(Holcim), 굿이어(Goodyear), 하이델베르그(Heidelberg), 아사히글라스(Asahi Mas), 엑손모빌(Exxon Moi) 등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한결 같은 얘기는 회사가 흑자를 연속해서 냄에도 불구하고 정규직을 줄이고 비정규직을 늘린다는 것이었다.
노동조합이 단체협상에서 비정규직 증가의 문제를 제기하면 사측은 한결같이 "적자를 볼 때는 적자라서 비용절감을 위해 비정규직을 늘려야 하고, 흑자를 볼 때는 적자를 대비해서 비용절감을 위해 비정규직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말했다.
외주용역 노동자의 '진짜 사용자'는 누구인가
그들에게 질문을 하나 던져봤다. "일을 할 때 오다(job order)는 누구한테 받느냐. 하청업체나 외주업체 관리자냐 아니면 원청회사냐?"
"원청회사한테서 받는다"는 한결같은 대답이 돌아 왔다. 한마디로 원청회사의 관리감독이 없으면 작업이 이뤄질 수 없는 일들을 외주하청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비정규직 문제와 관련해 심각한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이른바 '사용자성(使用者性)'의 문제가 인도네시아에서도 쟁점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사내하청과 외주업체 노동자의 진짜 사용자가 누구냐 하는 '사용자성' 문제는 한국과 인도네시아, 베트남,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은 물론 심지어 미국과 유럽에서도 심각한 사회 쟁점이 되고 있다.
연세대에서 일하다 임금 떼먹힌 비정규직들
토론회를 진행하는 숙소에는 인터넷이 안 되어 저녁에 읍내까지 나가 어렵사리 인터넷에 연결해보니, 연세대에서 청소부와 경비원으로 일해 온 '용역'들이 용역업체의 체불임금에 대한 대학 측의 책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사진 기사가 보였다.
연세대에서 청소·경비 업무를 해온 '용역' 170여명이 용역업체(인력파견업체)의 갑작스러운 폐업으로 임금 3억5000만원을 떼일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이 업체는 지난 3월 3일 "감당할 여력이 없으니 노동부를 통해 민원을 제기하라"며 폐업 신고를 했고, 원청회사 격인 연세대는 "용역업체와 해당 노동자들 간의 계약이라 학교에서 책임질 일이 아니다"라는 입장이라고 했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연세대는 폐업신고를 낸 업체로부터 2007년 9월 대학 발전기금 명목으로 3억5000만원을 받았는데, 공교롭게도 이 돈은 '용역'들의 체불임금과 같은 규모였다.
연세대가 청소·경비 업무를 외주용역으로 쓰는 것은 경비를 절감하고 학생들에게 더 나은 학업 분위기를 제공하기 위해서겠지만, 연세대는 '등록금 천만 원 시대'를 도래케 한 선봉장 가운데 하나다.
연세대가 말하는 '진리'는 무엇인가
"가장 약하고 작은 자에게 잘하라"는 성경의 핵심 가르침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ILO핵심노동기준, OECD다국적기업가이드라인, UN 글로벌콤팩트처럼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을 규율하고 있는 국제기준들은 하청·용역업체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원청회사가 노력할 책임을 언급하고 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기독교의 핵심 가치를 교훈으로 삼고 있는 연세대의 공식입장이 "용역업체와 해당 노동자들 간의 계약이라 학교에서 책임질 일이 아니"라니 놀부도 이런 놀부가 없다 싶다. 어려움을 당한 노동자들이 그 동안 서울대나 고려대에서 경비를 서고 청소를 한 것도 아닌데 연세대가 이 문제에 책임이 없다는 항변은 옹색하기 짝이 없다.
이 문제가 과연 미국의 기독교도가 설립했고 한국의 기독교도가 운영하고 있는 연세대만의 문제일까. 민족 자본이 설립했다고 자부하는 고려대나 "조국의 미래를 묻는 자 눈을 들어 관악을 보라"고 자부하는 한국 최고의 대학 서울대는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울까.
진리가 자유케 하는 '너희' 안에 비정규직이 포함될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비정규직을 위해서도 '자유', '정의', '진리'를 외칠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조국의 미래를 묻는 자'가 서울대가 있는 관악산 언저리가 아닌 비정규직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보게 될 날은 언제일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
빈익빈부익부가 날로 악화되는 오늘날의 우리들을 위해 2000년 전 예수님이 들려주신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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