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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특검 60일'…'요란한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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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특검 60일'…'요란한 침묵'?

[왜 삼성은 프레시안을 겨냥했나 ⑤] '김용철 고백'과 삼성

지난해 10월 29일, 서울 제기동 성당에 모인 기자들은 50여 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다음날 신문을 꼼꼼히 뒤져야만 만날 수 있었다. 삼성 구조조정본부에서 오랫동안 법무팀장을 맡았던 김용철 변호사의 고백에 대한 언론의 첫 반응은 냉랭했다.

하지만 푹 곪은 종기는 툭 건드리기만 해도 터져 흐르는 법. 주요 언론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삼성의 비리 의혹은 불길처럼 번져갔다. "선거 무렵, 삼성이 거액의 금품을 제공하려 한 적이 있다"는 추미애 전 의원의 고백이 뒤따랐다. 이어 이용철 전 청와대 비서관이 삼성으로부터 금품을 받았던 증거 자료를 공개했다. 이처럼 구체적인 증언이 이어지자, 언론도 삼성 관련 의혹을 계속 외면할 수만은 없었다.

당시까지 언론이 집중적으로 다뤘던 사건은 신정아 씨 관련 스캔들이었다. 광주비엔날레 예술 감독으로 선임된 신 씨의 학력이 의심스럽다는 보도가 발단이었다. 이후 언론은 신 씨의 연애편지와 누드 사진까지 보도했으며, 결국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의 관계를 밝혀냈다. 학력 위조 의혹에서 출발해 권력형 비리 혐의까지 언론이 찾아낸 것이다.

그런데 신정아 씨 사건에 대해서는 이처럼 치밀한 추적 보도를 했던 언론이 삼성 비리 의혹에 대해서는 영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신정아 씨 사건과 삼성 비리 의혹은 수평적으로 비교할 사안이 아니다. 의미와 영향력의 규모와 질이 근본적으로 다른 사안이다. 언론의 상식대로라면, 신정아 씨 사건보다 삼성 관련 의혹에 대해 압도적으로 많은 노력이 쏟아졌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신정아 씨 사건은 언론이 끊임없이 새로운 의혹을 제기하고, 이를 확대해간 끝에 권력형 비리 혐의까지 다다랐던 경우다. 당시 언론은 신 씨 관련 의혹에 대해 독자들이 짜증스러워 할 정도로 집요하게 추적하고, 샅샅이 파헤쳤다.

반면 삼성의 비리 의혹에 대해서는 언론이 새로운 의혹을 제기한 경우가 많지 않았다. 대부분 김 변호사의 발언 내용을 소개하는 수준을 넘지 않았다. 삼성 비리 의혹을 규명하기 위한 조준웅 특별검사 팀이 출범한 뒤에는 특검의 수사 내용을 소개하는 게 거의 전부였다. "왜 언론이 취재는 하지 않고, 내 입만 보고 있느냐"라는 김 변호사의 한탄은 자연스런 반응이었다. '중계방송' 수준의 보도에 머무른 언론에 대한 질책인 셈이다.

그래서 지난해 10월 29일 이후 쏟아져 나온 삼성 비리 의혹 관련 보도는 건수만 많았을 뿐, 내용은 천편일률적이었다.

삼성이 오랫동안 저질러온 조직적인 불법 행위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혀온 노동 탄압에 관한 보도도 드물었다. 또 '비자금'이라는 낱말이 숱하게 반복됐지만, 정작 삼성 계열사들이 어떤 방식으로 비자금을 조성하는지를 파헤친 보도도 거의 없었다.


김용철 변호사, 특검 관계자 등의 진술에만 의존하는 취재가 낳은 한계다. 이들은 삼성 계열사의 현업 실무자가 아닌 까닭에, 노동 탄압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어떤 업무 과정을 통해 비자금이 만들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따라서 이런 내용은 기자들이 현업 실무자들에게 접근해 취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언론은 이런 노력 없이 특검의 수사를 그저 중계하기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특검의 1차 수사가 지난 9일 끝났다. 특검의 수사는 앞으로 45일 더 연장된다. 하지만 언론이 새로운 의혹을 계속 찾아내 보도하지 않는다면, 특검 수사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특검의 수사의지를 탓하는 게 아니다. 총 105일에 불과한 수사기간 동안 제대로 된 수사를 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언론이 계속 새로운 단서를 포착해서 보도하고, 이를 수사하도록 채근했다면 조금 나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매체는 아직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인터넷 검색창에 '삼성', '의혹' 등의 단어를 입력하면, 숱한 기사가 쏟아지지만 그 내용은 대부분 비슷한 상황이 됐다. 요컨대 떠드는 목소리만 높을 뿐, 사실상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은 것과 같은 상황. 가히 '요란한 침묵'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깨는 것 역시 <프레시안>을 포함한 언론의 몫이다. 우선 삼성 비리 의혹에 대해 김용철 변호사가 그동안 폭로한 내용들부터 정리했다. 최근 출간된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원고 일부를 요약하고, 수정한 것이다.


물론 이 내용은 삼성 비리 의혹을 규명하는 여정의 출발점일 뿐이다. 2차 수사 기간에 접어든 특검이 출발점을 벗어나 힘차게 질주할지, 아니면 출발점만 맴돌지, 아예 출발점에서 뒤로 물러나 버릴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45일 뒤, 특검이 서 있을 위치를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출발점을 찬찬히 살펴보는 것은 필요한 일인 듯싶다. <편집자>

차명계좌를 통한 비자금 조성과 관리 의혹

김 변호사에 따르면 입사 시 제출한 주민등록증의 사본과 도장을 이용해 삼성 측에서 계좌를 개설해 관리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 변호사는 삼성이 이런 식으로 차명계좌를 관리하는데 은행이 결탁해 있다고 주장했다. 금융실명제법에 따라 본인 확인 없이는 계좌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추가 폭로도 계속 이어졌다. 차명으로 관리하는 재산은 주식이나 현금을 보관하는 차명계좌는 물론, 부동산으로도 관리되는데, 간혹 삼성그룹 내에서는 차명계좌로 인한 '사고'가 터진다는 것이다. 차명계좌에 보관된 비자금을 탐내는 임직원이 자신의 돈이라며 반환하기를 거부해 삼성 측에서 협상 끝에 절반만 회수했다거나, 차명 부동산의 명의 주인인 임직원이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그 유족들이 부동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김 변호사는 삼성에서 관리하고 있는 차명계좌가 수천 개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삼성 비리 의혹에 대한 수사도 차명계좌에서 시작됐다. 검찰 특별수사본부는 삼성증권에 대해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벌였다. 차명계좌 의혹을 수사하기 위한 것. 검찰은 삼성그룹 임직원 명의의 계좌에 대해 집중 수색을 벌였고 상당한 양의 자료를 확보해 계좌를 추적 중이다. 검찰의 수사를 이어 받은 특검팀도 삼성화재 등에 대해 압수수색을 벌이며 차명계좌 존재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특검팀은 현재 3800여개의 차명 의심계좌를 뒤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차 수사를 통해 특검은 삼성이 전·현직 임원 명의로 1300여개의 비자금 계좌를 관리해왔다는 심증을 굳혔다.

'샘플비'와 고가 미술품

해외 지점을 통한 비자금 조성 의혹에 대한 수사도 특검이 풀어야 할 중요한 숙제다. 김 변호사가 폭로한 문건에 따르면 삼성SDI처럼 해외 거래를 많이 하는 계열사에서 삼성물산을 통해 해외에 주문을 할 때 이른바 '샘플비'라는 이름으로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100원짜리 물건을 구매할 때 해외 지사에 수수료를 포함해 120원을 지급한다. 그러면 해외 지사는 1원만 구매 대행 수수료로 이용하고 19원은 비자금으로 만들어 본사로 보낸다는 것이다.

김 변호사는 이런 업무를 하던 사람이 관련 서류를 들고 퇴사해 삼성을 협박한 사례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김 변호사는 당시 "범죄를 저지르면서 근거를 남기냐"고 김인주 사장에게 한마디 했다고 한다.

비자금을 어떻게 관리하느냐는 특검이 밝혀내야 할 수사의 본류인데, 그 중 고가 미술품 구입 의혹도 있다. 김 변호사의 폭로로 세간의 주목을 받은 작품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가격만 700만 달러가 넘는 세계적인 작품이다.

삼성에는 미술관이 두 곳 있다. 호암 미술관과 리움 미술관. 이건희 회장 일가가 개인적으로 미술품을 좋아할 수는 있다. 문제는 그 취미를 어떤 돈으로 즐겼느냐다. 김 변호사는 재무팀에서 관리하던 비자금을 이용해 미술품들을 구입했다고 했는데, 김 변호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는 범죄 행위다. 해외 갤러리에서 직접 작품을 구매할 때 갤러리에서는 구매자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는다. 게다가 카피 작품이 아닌 원작을 국내에 들여올 때는 관세와 부가세를 한 푼도 내지 않는다. 창작 활동 보호라는 취지에서다. 이런 이유로 부유층의 재산 은닉과 편법 증여 수단으로 미술품 수집이 주목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현재까지 '비자금 미술품' 수사는 제자리 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 수백억 원대 미술품 30개 가운데 '행복한 눈물'의 존재만 확인했을 뿐이다. 다른 작품들의 행방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결국 '비자금 미술품' 관련 의혹 규명을 위해서는 이건희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씨에 대한 조사가 불가피하다.

〈중앙일보〉 위장계열 분리와 에버랜드 사건 조작

〈중앙일보〉가 삼성에서 '독립'하는 과정도 석연치 않다. 김 변호사는 "위장 분리였다"고 주장했다. 명의만 홍석현 회장에게 넘기고 의결권은 이건희 회장이 갖는 명의신탁 계약서를 자신이 썼다는 것이다. 김 변호사는 "공개할 수도 없는 계약서를 왜 만드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물론 삼성이나 〈중앙일보〉 측에서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가 뭐가 중요하냐고 할 수도 있지만, 국내 굴지의 언론사를 여전히 재벌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 여론을 의식해 위장 분리 방식을 이용했다는 것은 재벌의 '여론 조작' 가능성을 의심할 수 있는 부분이다.

또 삼성그룹의 지배권 이양에 결정적 역할을 한 '에버랜드 편법 증여' 과정에서 이재용 씨에게 돌아간 에버랜드의 주식을 갖고 있던 인물 가운데 홍석현 회장도 있었기 때문에 홍석현 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특수 관계'를 밝혀내는 것은 에버랜드 사건 진실의 자물쇠를 푸는 열쇠 중 하나다.

고등법원까지 배임을 인정한 삼성 에버랜드 편법 증여 의혹 사건. 그러나 처벌을 받은 사람들은 이건희 회장 일가가 아니라 박노빈, 허태학 등 에버랜드 경영진이었다. 재판의 결론을 간단히 말하면 "두 경영진이 회사의 손해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으로 판단해 이재용 씨에게 지배권을 넘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문제는 에버랜드 사건의 피고인으로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씨를 세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고발인 측과 시민 단체들은 끊임없이 이 둘에 대한 직접 수사를 촉구했으나 검찰은 차일피일 미뤘고, 여전히 이들에 대한 직접 수사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 와중에 김 변호사는 "에버랜드 사건에 김앤장 법률사무소가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허위 사실을 조작하는데 적극 가담했다"고 주장했다.

최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특검의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상의 의혹을 모두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은 기간 동안, 특검이 의혹을 입증할 증거를 확보할 수 있을지가 관심사다.

검찰이 삼성 앞에서 작아지는 이유

에버랜드 사건에서 이어지는 수사 대상은 금품을 통한 불법 로비다. 이른바 '떡값' 의혹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미 '안기부 X파일' 사건으로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내용이기도 하다. 삼성에서 조직적으로 수백~수천만 원씩 검사들에게 금품을 주며 관리를 했다는 의혹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의혹은 '검찰이 삼성 앞에서만 작아지는 이유'로 지목됐다.

'대가성 입증'이라는 까다로운 문제 때문에 언론이 '뇌물'이라는 표현을 잘 쓰지 않고 있지만 사실상 '뇌물 제공'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이처럼 뇌물 제공을 통한 불법 로비 의혹은 대중의 분노를 자극했다.

'무전 유죄, 유전 무죄(無錢 有罪, 有錢 無罪)'라는 말이 통하는 사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검찰이 뇌물을 받고 재벌을 비호했다면, 누구나 분노할 수밖에 없다. 김 변호사는 떡값 제공 대상과 액수를 적어놓은 리스트가 삼성의 비밀금고에 보관돼 있다고 폭로했다. 이어 청와대 법무비서관을 지낸 이용철 변호사가 "삼성에서 500만 원이 든 쇼핑백을 받았다"고 양심선언을 했다. 그러나 여전히 검찰 쪽에서는 아무도 이런 선언을 하지 않고 있다. 감찰 조사에서도 드러나지 않았다.

사제단은 김 변호사의 증언을 토대로 두 차례에 걸쳐 삼성에게서 금품을 받은 법조인과 공직 후보자의 명단을 발표했다. 사제단은 지난해 11월, 임채진 검찰총장, 이종백 국가청렴위원장, 이귀남 대검 중수부장 등이 삼성에게서 돈을 받았다고 발표했으며, 지난 5일에는 이종찬 대통령실 민정수석, 김성호 국가정보원장 내정자, 황영기 전 우리은행장 등이 삼성의 관리 대상이었다고 밝혔다.

이들 가운데 황영기 전 우리은행장을 제외하면, 모두 법조계 인사다. 하지만 김 변호사는 재경부를 비롯한 경제 관련 부처 관료 역시 삼성의 금품 로비 대상이었다고 밝혔다.

김 변호사는 "국세청에 가는 돈은 '0'이 하나 더 붙는다"라고 밝혔다. 이런 의혹을 뒷받침하듯 국세청과 금융감독원은 삼성 특검의 수사에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시민 단체의 조사 요구도 묵살했으며, 특검의 자료 제공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다.

삼성의 비리 의혹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는 곳이 국세청과 금감원이다. 따라서 이들 기관이 수사에 제대로 협조하지 않는다면, 뇌물 수수를 통한 불법 로비 의혹은 증폭될 수밖에 없다.
▲ 5일 서울 노원구에 있는 천주교 수락산 성당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사제단은 이종찬 대통령실 민정수석, 김성호 국정원장, 황영기 전 우리은행장이 '삼성의 관리 대상'이었으므로 공직을 맡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프레시안

기상천외한 분식회계 기법들

취재 중 만난 이들 가운데 "'비자금'이 뭐지"라는 질문에 정확한 답을 내놓은 이들은 흔치 않았다. "나쁜 짓 하려고,현 수사팀에 맡겨도 될 일을 굳이 특검에 맡길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검찰 수뇌부를 향한 로비에 대해 수사해야 하는데, 검찰 고위직 출신이 수사를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검찰 고위직 출신이 지휘한 수사 결과에 대해 삼성이 불법 로비를 했다는 의혹을 품고 있는 국민들이 납득하겠는가. 제대로 된 특검이 아니면, 없느니만 못하다. 따로 빼돌린 돈 아니냐"라는 대답이 주로 나왔다. 하지만 이런 답변은 좀 애매하다. 좋은 일을 하기 위해 빼돌린 돈도 '비자금'일 수 있다. 물론 재벌이 좋은 일을 하기 위해 돈을 빼돌리는 일은 흔치 않다.

비자금을 굳이 정확하게 정의하자면, 회계 자료에 드러나지 않은 돈이라 할 수 있다. 기업을 생명체에 비유하면, 돈은 혈액이다. 혈액처럼 흐르는 돈을 완벽하게 숨길 방법은 없다. 다만 회계 자료를 조작할 따름이다. 시민들은 기업이 공시한 재무제표를 보고 기업 경영의 건전성에 대해 판단한다. 평범한 시민이 기업 안팎에서 일어나는 모든 거래를 꼼꼼히 감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업이 공시한 자료가 얼마나 믿을 만한지가 중요한 것은 그래서다.

하지만 기업들이 회계 자료를 조작하는 경우는 꽤 흔하다. 대표적인 이유가 비자금을 조성하기 위해서다. 투자자들이, 혹은 사법부와 언론 등 공적 기구가 납득할 수 없는 용도를 위해 돈을 쓰려할 때, 기업은 회계자료를 조작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설령 좋은 일을 위해 썼다 해도 돈이 오간 내역 회계에 정확히 반영돼 있지 않다면, 기업은 분식회계를 작성한 것이다. 혹은 세금을 덜 내려고 외부에 드러난 수입 규모를 축소하려 할 때, 더 많은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수입 규모를 실제 이상으로 치장하려 할 때도 회계 자료는 조작된다.

이처럼 조작된 회계를 '분식회계'라 부른다. 한자로 옮기면 '粉飾會計'다. 화장한다는 뜻이다. 기업의 매력을 실제 이상으로 과장한다는 말이다. 분식회계를 작성하는 목적이 다양한 만큼, 방법도 다양하다. 그리고 이 방법은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한다. 삼성의 분식회계에 유명 회계법인이 가담했다는 의혹이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따라서 분식회계 여부를 밝히기 위한 수사 역시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삼성 비리 의혹 대해서는 수사팀의 전문성 역시 중요한 변수다.

김용철 변호사가 소개한 삼성중공업의 분식회계 수법은 기상천외하다. 삼성중공업 거제 조선소에 배가 없는데도 건조 중인 배가 수십 척 떠 있는 것으로 분식회계를 했는데, 삼일회계법인은 이를 알면서도 넘어갔다고 한다. A라는 배를 건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용 가운데 일부를 B라는 배를 건조하는 비용으로 계산하고, B라는 배의 건조비는 다시 C로, 이렇게 계속 옮겨가다가 결국 가공의 배를 설정해서, 옮겨온 비용을 모두 이 배를 건조하는 비용으로 계산했다는 것. 김 변호사는 "(삼일회계법인이) 룸살롱 접대를 받는 등 향응을 제공받고 사실과 다르게 적정 의견을 줬다"고 말했다.

또 <프레시안>이 지난해 단독 보도한 삼성전자 운임 관련 의혹도 있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 측은 관련 의혹을 전면 부인하면서, 10억 원의 손해 배상 소송을 냈다.

이런 다양한 의혹들이 제대로 밝혀진다면, 한국 기업의 전반적인 투명성을 한 단계 높이는 계기가 되리라는 게 경제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삼성자동차 청산 과정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가 있기 전까지, 소위 '삼성맨'들에게 최고의 악몽을 꼽으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 삼성자동차를 입에 올렸다. 삼성 관계자들은 이병철 회장 당시의 '사카린 밀수 사건', 이건희 회장 당시의 '삼성 자동차 실패'를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와 함께 '삼성 역사상 3대 악몽'으로 꼽는다. 김 변호사가 폭로한 내용, 그리고 사카린 밀수 사건은 삼성의 도덕성에 관한 것이라면, 삼성 자동차 실패는 이건희 회장의 독선과 삼성 경영진의 무능에 관한 것이다.

이건희 회장은 관련 업계와 주변 인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동차 산업에 진출했다. "삼성은 선박이나 자동차와 같은 '중후장대형 산업'에 약하다"는 인식을 씻겠다는 의지, 이건희 회장 개인의 관심 등이 반영된 결과였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한 실패.

삼성자동차에 돈을 빌려준 채권단은 '단군 이래 최대 규모 소송'을 소송을 제기했고, 1심 법원은 채권단의 손을 들어줬다. 판결에 따르면, 이건희 회장과 삼성 계열사는 채권단에 약 3조 1500억 원을 물어줘야 한다. 금액의 규모만 문제가 아니다. 삼성 지배 구조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판결이다.

판결에 따르면, 이건희 회장은 갖고 있는 삼성생명 주식을 팔아야 한다. 이를 위해 삼성생명을 상장해야 한다. 이에 따라 삼성생명의 대주주인 삼성에버랜드는 금융지주회사로 바뀌게 된다. 삼성 에버랜드의 대주주는 이건희 회장의 외아들인 이재용 씨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금융지주회사법이 문제가 된다. '금융과 산업의 분리(금산분리) 원칙'이 반영된 금융지주회사법이 적용되면, 이재용 씨가 대주주로 있는 삼성에버랜드는 비금융 사업을 정리해야 한다. 에버랜드의 자회사인 삼성생명 역시 '비금융계열사'인 삼성전자의 주식을 보유할 수 없게될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금산분리 관련 법령들이 현행대로 존재하는 한, 삼성생명의 상장과 이건희·이재용 부자의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권 유지는 양립할 수 없다.

결국 이건희 회장은 자동차 산업에 욕심을 부리다, 전자 산업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됐다. 물론 이명박 정부가 금산법 규정을 완화하면, 삼성은 여전히 삼성생명과 삼성전자를 동시에 장악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가 금산법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지에 대해 관심이 쏠리는 것도 그래서다.

그런데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자동차의 청산 과정에서도 막대한 규모의 분식회계가 저질러졌다고 밝혔다. 특검이 이런 의혹을 규명한다면, 삼성자동차 채권단과 삼성 간의 2심, 3심 재판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삼성 의혹 푸는 열쇠, 국세청·금감원이 쥐고 있다.

특검이 밝혀야 할 일은 산더미 같다. 하지만 수사 기간은 최대 105일로 제한돼 있다. 이 기간 안에 삼성에 제기된 모든 비리 의혹을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수사의 핵심은 '비자금' 부분으로 모아질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비자금, 즉 공식적인 회계 자료에 반영되지 않은 돈의 흐름을 포착하려면, 국세청과 금감원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들 기관은 특검 수사에 대해 대체로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해 왔다.

삼성전자가 <프레시안>을 상대로 낸 소송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10억 원이라는 소송가액 때문에 논란이 확대되고 있지만, 의혹을 풀 수 있는 핵심 단서를 쥐고 있는 국세청은 계속 침묵하고 있다.

따라서 특검이 국세청·금감원 등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가 향후 수사 의지를 가늠하는 지표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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