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이 창당 8년 만에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국민의 눈높이에서 대선패인을 분석하고 단결의 정신으로 혁신방안을 모색할 대신, 난데없는 '종북-분당' 소동으로 갈등과 내분에 휩싸이면서 이제 분당사태로까지 발전되고 있다.
분열-분당, 공멸해봐야 정신 차리나
보수언론은 때를 만난 듯이 '간첩을 비호하는 친북당'으로 매도하며 민주노동당의 대국민 영상을 사정없이 흐려놓고 있다. "너는 자주 파냐 평등파냐?"고 계파갈등을 질책하는 가족, 친척, 친구들의 물음이 계속된다. "뭘 나눠 먹을 게 있다고 싸우며 갈라지냐"는 현장사람들의 사늘한 시선을 피할 길이 없다. "이 꼴 저 꼴 다 보기 싫다"는 당원들의 실망과 탈당도 적지 않다.
이번 위기는 밖이 아니라 안에서 왔다. 지배세력의 탄압이 아니라 일부 기회주의자들의 분열 음모에서 비롯됐다. 56년 진보당은 이승만정권이 간첩혐의를 씌워 죽산 조봉암을 처형하고 당 조직을 파괴했다면, 오늘의 민주노동당은 일부 종파분자들이 '종복주의 청산'이란 매카시즘으로 당을 공격, 해체시키려 하고 이를 현명하게 차단하지 못해 탈당-분당사태가 초래됐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현상일 뿐이다. 본질은 무엇인가. 원내 진출 이후 지난 4년간 당 사업과 운영도, 이로 인한 대선 패배의 원인 분석도, 혁신과제 도출의 과정도, 노동자, 민중의 요구와 지향을 가장 중시하지 않고 밑으로부터의 당원들의 힘과 지혜로 풀어나가지 않은데 있다. 민중 보다 당을, 당 보다 정파나 개인의 주장과 이익을 앞세운 것이 민심으로부터 멀어지고 당이 분열된 근본원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이 위기상황은 정녕 극복될 수 없는 것인가. "어차피 단결하고 혁신해도 총선 전망이 어두운 판"인데, "모두 공멸해봐야 정신 차린다"고 민주노동당의 분열양상과 그 처참한 결과를 두 손 놓고 지켜 볼 것인가. 아니면 조상의 지혜가 응축된 속담대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라는 믿음으로 끈질기게 달라붙을 것인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뜻있는 사람들이 떨쳐나서 민의를 따르고 진심을 바친다면, 위기를 기회로, 화를 복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그런 취지에서 한국진보정당사의 교훈을 토대로 민주노동당 분열의 원인을 진단하고 분열의 폐해를 짚으면서 민주노동당의 단결과 혁신을 위한 원칙과 과제를 고민해보고자 한다.
한국진보정당사의 교훈
한국진보정당의 역사는 한마디로 좌절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지배 권력의 물리적 이데올로기적 탄압으로 모진 시련을 겪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안으로도 많은 난관과 장애가 있었다. 올바른 관점과 실력과 작풍을 가다듬은 주도세력이 형성되지 않아 패권주의와 분파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분열의 아픔을 겪기도 했고, 노동자, 민중 속에 튼튼한 대중적 기반을 구축하지 못하고 상층 명망가 중심으로 당을 운영하다가 실패하고 청산하기도 했다. 또 당의 성격과 해당 정세에 맞는 강령과 정책과 구호를 정확히 들지 못하고 좌우 편향을 겪다가 광범한 대중의 지지를 놓치고 사멸의 길로 들어서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광복 이후 지난 60여년 명멸해간 이 땅의 진보정당들과 오늘의 민주노동당을 개괄적으로 비교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우선 46년 해방정국에서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이 남조선노동당으로 합당할 때도 내부 헤게모니 싸움이 있었다. 그래서 완전한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남로당 이외에 사회노동당이란 별도의 좌파정당을 출현시키는 우려곡절을 겪었다. 당시 주도세력이었던 박헌영 일파는 미 점령군에 대한 오판으로 우경에서 좌경으로 왔다 갔다 하다 미군정의 폭압으로 당 조직이 결정적으로 약화됐다는 것도 공지의 역사적 사실이다.
56년 북진통일이 주창되던 살벌한 시절, 평화통일을 내걸고 태어난 진보당도 그 해 대선에서 216만 표를 얻었으나 당내 복잡한 파벌과 조봉암선생 개인의 정치력에 의존하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2년 만에 야만적인 탄압으로 문을 닫았다. 58년 1월 이승만 독재정권이 간첩혐의를 씌워 죽산 조봉암을 잡아가자 진보당은 두 달 만에 와해되었다.
60년 4.19혁명 직후 사회대중당으로의 통합과 분열도 마찬가지다. 7.29총선을 앞두고 단일 정당 결성이 중요하다는 공감대를 형성했음에도 보수 세력에 대항하는 혁신세력들의 선거대책협의회 구성조차 실패했다. 24개 선거구에서 2명 이상의 혁신계 후보들이 서로 경쟁했으며, 사회대중당의 경우, 혁신당 계열, 민주혁신당 계열, 사회당 계열 등 세파가 창당준비위 이름으로 총선에 참여했으나 5개 선거구에서 같은 사회대중당 후보끼리 경쟁하기도 했다.
반공이데올로기의 높은 벽이 크게 작용했으나 내부 파벌과 이념의 차이로 정강정책도 완성, 공표하지 못하고 민주당과의 차별성을 드러내지 못한 결과 120여명의 출마자중 민의원 4명, 참의원 3명밖에 당선시키지 못했다. 총선에 참패한 당시 혁신세력들은 구 진보당의 김달호를 중심으로 한 사회대중당, 구 근로인민당계의 사회당과 혁신당, 구 민주혁신당계 원로들의 통일사회당으로 분화해 갈등을 겪다가 5·16쿠데타로 불법화돼 소멸되고 말았다.
88년 민중의 당, 한겨레민주당도 총선에서 각각 16명, 50여명의 후보를 내고 90년 민중당도 한국노동당과 통합해 92년 총선에 51명의 후보를 내보냈으나 원내 진출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이들 진보정당들은 외부의 탄압으로 수명을 마친 경우가 아니었다. 기층민중 속에 깊이 뿌리박지 못한 상태에서 상층 명망가들에 의존한 당 운영과 그들의 출세주의, 청산주의 행보로 인해 결국 해산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2000년 1월 창당한 민주노동당은 이전의 진보정당들과는 전혀 달랐다. 민주노동당은 96년 말~97년 초 노동악법 날치기 통과에 맞선 6.25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총파업투쟁 성과, 97년 대선투쟁과 '국민승리21'의 경험을 기초로 자주적 민주노조의 전국적 구심인 민주노총의 결의에 따라 탄생했다. 여타 진보운동 단체와 활동가들도 참여했지만 민주노총이 곧 가장 중심적 조직기반이며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대중적 토대였다. 또 민주노동당은 다른 정당과 달리 당원들이 직접 당직-공직 후보를 뽑고 당원 1인당 1만원의 당비로 당 재정을 충당했다.
2000년 4월 16대 총선에서 21명의 후보를 내 평균 12.3%라는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으나 단 하나의 의석도 못 건졌다. 그러나 그 누구도 좌절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철새'가 되지 않았으며 민중당처럼 해산하지도 않았다. 2002년부터는 전농, 전여농, 전빈련, 한청, 한총련 등 노, 농, 빈, 청년, 학생의 대중조직이 민주노동당에 결합해 민주노총처럼 배타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4년 17대 총선에서는 마침내 10명의 의원(지역2명 비례8)을 배출함으로써 4. 19혁명이후 44년 만에 진보정당 원내진출의 꿈을 이뤘으며 한 때 정당 지지율이 20%에 육박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4년 대안의 정치세력으로서의 이미지, 인물 군과 정책과 비전, 조직기반을 튼튼히 갖추지 못하는 한편, 정파들의 패권주의와 분파주의, 이념의 차이를 민의에 기초한 기층당원들의 힘과 지혜로 제 때에 극복하지 못하면서 점차 민심으로부터 멀어지고 갈등과 분열을 겪게 되었다.
민주노동당 분열의 원인
민주노동당 강령 전문에는 '노동자와 민중 주체의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 '억압 기구, 법, 제도 완전 폐지', '직접민주주의 실현', '자주적 민족통일국가 건설', '민주적 사회경제체제', '인간과 자연의 공존',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 계승 발전' 등을 <우리가 만들 세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 당헌 전문에는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농민, 영세상공인, 도시빈민의 정당이며, 여성, 장애인, 청년과 학생, 양심적 지식인의 정당"이며, '이념정당' '대중정당' '투쟁정당'이자 '당내 민주주의'를 엄격히 실현하는 정당이라 표방하고 있다.
이러한 강령과 당헌의 정신을 압축한다면 '자주와 평등을 중심으로 다양한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는 노동자, 민중의 진보적 대중정당'이라고 민주노동당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입장과 처지만 고집하면, 모두가 불만을 가질 수도 있고, 조금씩 양보하면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민주노동당의 강령과 당헌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공동의 정치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사상과 신분의 차이를 넘어 어깨 걸고 함께 나아가는 정파연합당, 계급연합당이다. 최소강령과 연합적 성격의 민주노동당은 당원들의 토론과 절충과 합의의 산물이었다. 이것이 민주노동당의 창당 정신이다.
이러한 민주노동당의 임무와 성격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유신론자와 무신론자, 유물론자와 유심론자를 가리지 않고, 마르크스주의자, 레닌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모택동주의자, 김일성주의자 등 어떤 사상의 신봉자든, 사민주의, 사회주의, 자주적 또는 진보적 민주주의, 민족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 등 어떤 이념의 소유자이든, 또 노동자, 농민, 빈민, 청년, 학생, 여성, 영세상공인, 지식인 등 어떤 계급계층의 신분과 직업을 가진 사람이든 누구라도 당원이 될 수 있고 함께 갈 수 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의 이 정신이 대소 정파들의 패권주의와 분파주의로 위협받다가 오늘에 와서 일부 반당 종파분자들의 책동을 막지 못해 결국 분열, 분당사태를 맞게 됐다. 그 원인과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1) 당 파괴분자들의 '종북'소동과 분당 음모
일부 당 파괴분자들은 대선기간 중에 민주노동당의 분당 시나리오를 작성, 토론하고 당원들이 저마다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선거운동마저 해태, 거부하다가 대선이 끝나기도 무섭게 '종북-분당' 캠페인에 열을 올렸다. 분열 음모는 대선평가와 무관하게 일찍부터 치밀하게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대선시기에 색깔론이 등장하지도 않았고 6.15시대에 색깔론이 먹히지도 않는다는 점, 이미 1년 전의 당직자 공안사건 연루에 의한 부정적 친북이미지가 대선패인의 주요변수가 아니라는 점은 그들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대선평가 과정에 종북주의 청산을 키워드로 삼아 당의 방침과 노선의 적합성을 토론하기 보다는 다양한 사상과 이념을 용인해온 창당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북한식 사회주의로의 통일을 자기 임무로 삼는 세력" "그들에게 민주노동당은 그저 북한 정권을 보위하는 활동의 수단" "광신자, 사교집단" "기생충"이라 악랄하게 비방하며 "이번 기회에 친북세력과 결별해야 한다"고 외쳤다. 특히 희대의 악법으로 감옥에 끌려간, 이른바 '일심회' 공안사건에 연루된 당원을 영구제명으로 내치지 않는다고 분당을 협박했다. 그러나 이는 민주노동당을 깨고 나가기 위한 명분 쌓기에 지나지 않았다. 시대에 뒤떨어진 반북대결의식에 편승해 민주노동당 분열의 정당성을 찾으려 했고 보수언론과 합작해 온갖 모략을 일삼았다는 점에서 이들을 더 이상 진보주의자라고 볼 수도 없겠다.
그렇다면 이들이 분열, 분당을 획책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당 권력욕 때문이다. 당권 장악 실패에 따른 상실감, 향후 그 성공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자괴감 때문이다. '적록청 동맹' '진보의 재구성'이라고 요란하게 떠들지만, 다양한 진보적 가치를 포괄하는 민주노동당의 강령이나 진보대연합 노력으로 볼 때, 결국 주도권의식과 낡은 반북의식 이외에 분당-신당 추진의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다. 당의 윗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면 창당정신도 내팽개치고 언제든지 분당할 수 있는 당 파괴분자들의 무서운 음모는 이미 분당기획문건에도 소상히 나와 있다.
2) 비대위 사퇴와 탈당-신당 합의
어렵사리 출범한 심상정 비상대책위원회는 탈당을 최소화시키고 당의 혁신을 추진하려는 선의를 가졌으나 당 파괴분자들의 요구사항을 무원칙하게 수용해 사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민의의 초점도 아닌 '종북주의 청산'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여 편향적 친북행위로 이른바 일심회 공안사건을 집중 부각시키고 언론에 대북 항의 소동을 벌이며 관련 당원 제명 건을 당 혁신의 핵심 안건으로 올리는 우를 범한 것이다. 물론 다수파인 자주파에 대선패배의 더 큰 책임이 있고 민주노동당의 혁신이 절박하다. 하지만, 분열, 분당을 위한 마녀사냥 식 구실 찾기와 단호하게 선을 긋지 못한 것은 큰 실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물의를 일으켜 당에 피해를 준 일심회 관련 당원들은 정치도의적인 책임이 크다. 공당으로서 국민의 의식 수준과 정서를 감안해 필요하다면 처벌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이 일관되게 그 철폐를 위해 투쟁해온 국가보안법으로 탄압받아 감옥에서 고생하는 당원동지를 절차도 밟지 않고 출당 조치하는 것은 진보정당으로서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다. 또 한결 같이 부인하고 있는 동지들의 말은 믿지 않고 공안기관의 공소장과 법원의 판결문을 근거로 영구 제명하려 했다.
설령 당헌당규 위반으로 징계하더라도 당 대회에 양형까지 적시한 '제명' 안을 올릴 게 아니라 진상조사와 본인의 소명을 거쳐 당기위에서 처벌하면 될 일이었다. 특정정파만이 아니라 약65%의 압도적 다수 대의원이 반대한데서 확인되듯이 탈당파를 달래느라고 일심회 관련 당원 제명을 고집한 것은 누가 봐도 비대위의 무리수였다. "국가보안법을 반대하지만, 당헌, 당규 위반자는 절차에 따라 징계 한다"는 정도로 대다수 대의원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일심회 제명 건'이 삭제되자 심상정 비대위원장이 곧바로 퇴장, 다음날 사퇴하고 비대위를 해체했다는 사실이다. 이에 동조한 노회찬 의원의 탈당선언과 많은 당원들의 연쇄적 탈당으로 이어져 실제 분당사태로 발전하고 있다. 최근 심상정 의원을 지지하는, 민주노총의 일부 산별연맹과 대기업노조의 전 현직 대표자, 현장 활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민주노동당의 탈당을 추진하기로 해 노동현장까지 분열의 파장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심상정, 노회찬 의원 등 약30명이 모인 자리에서 탈당 후 신당을 창당키로 의견을 모으고 창당 시기를 총선 전이냐 총선 후냐를 저울질하고 있다고 한다.
심상정-노회찬 의원이 왜 이런 행동을 보일까. 이것도 결국 민심의 요구 보다는 자신의 입지를 앞세우는 패권의식과 출세주의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단결하면서 혁신하라"는 민심을 따르면, 거의 모든 당원들이 심-노 두 의원을 젊고 참신한 새 지도부로 인정하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종복 청산-분열, 분당' 프레임에 갇힌 자신의 고집이 100% 관철되지 않자, 민주노동당의 친북이미지가 부담스럽고, 자기를 지지했던 당원들이 대거 탈당할 것으로 보이며 다수파는 더 이상 자기를 밀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으로 딴 살림을 차리는 것으로 밖에 달리 해석되지 않는다. 이거야말로 민중정치, 진보정치가 가장 경계하는 자기중심적 사고, 출세주의, 소영웅주의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3) '자주파'의 패권과 무능
그러나 지난 4년간 민주노동당을 사실상 주도했던 다수파, 이른바 '자주파'에게 더 큰 원인, 더 많은 책임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당'으로서의 무한책임을 갖지 않으면 한국진보정치의 미래가 어둡다는 점에서, 자주파의 태도와 노선의 부족한 점과 문제점을 성찰해보자.
진보적 대중정당에 맞는 조직운영원리를 확립하지 못하고 패권주의적 과오를 범했다. 현재 민주노동당은 하나의 사상과 노선으로 통일되어 있는 혁명적 전위 당이 아니라 계급 연합적, 정파 연합적 진보정당이다. 물론 이런 대중정당, 합법정당에서 정체성을 지키고 단결을 강화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계급 계층적 요구나 정치사상적 신념을 지나치게 앞세우면, 항상 갈등과 대립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같이 제 잘난 맛에 사는 세상에서는 이를 단순히 다수결의 원리만으로 해결하기도 어렵다.
이럴 때, 당을 주도하고 책임지는 다수파의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다수파인 자주파는 당 사업과 운영에서 매우 미숙했고 무능했으며 패권적이었던 게 사실이다. 투쟁 현장이나 대중사업에서 헌신적이고 실천적이며 조직적이었으나 민심에 닿는 정책과 비전, 조사연구와 교육홍보에서 취약했다. '사전 정치사업'이나 '구동존이(求同存異)'는 말로 그쳤고 진심을 바치는 소통, 양보와 공존의 룰을 선도하지도 못했다. 실력과 모범, 설득과 타협으로 승복시키기보다 형식적 민주주의에 안주하는 경향도 많았다. 그래서 당원들과 지지자, 나아가 노동자, 민중의 통일단결을 높여야 하는 주도세력으로서의 역사적 책무를 다 하지 못한 것이다.
민주노동당 분열의 변곡점이랄 수 있는 2.3 임시 당 대회도 다수파인 자주파의 안목과 실력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계기였다. 심상정 비상대책위가 어처구니없이 일심회 제명 건을 분열, 분당의 잣대로 삼는 조건에서, 그 행위의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판단을 떠나 외세와 이명박 정권의 보수대연합에 맞설 진보정치의 구당, 구민, 구국을 위한 현실적 조정 노력을 사전 또는 당일에 집중적으로 기울였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사태의 심각성을 안일하게 바라보고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는 운동 논리를 지나치게 앞세운 나머지 민의에 부응하는 현실정치에 노련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사수하려는 일면에 치우쳐 당의 분열, 분당이 가져올 엄중한 결과에 대한 깊은 통찰이 부족했던 것이다.
신자유주의시대, 6.15시대에 맞게 민생문제와 밀접히 결합한 자주와 통일 운동을 전개하지 못해 진보운동, 진보정치의 대중적 토대를 확대하는데 지장을 주는 동시에 이것이 불필요한 정파 갈등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대중의 요구와 지향, 의식과 정서에 맞는 투쟁의제 설정과 투쟁방식을 올바로 구사하지 못해 민심을 많이 잃은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대체로 사전 의식화 없는 실무적 동원주의, 뚜렷한 메시지 없는 행동주의, 전투주의가 만연해 있다. 매시기 정세와 투쟁의제 설정, 투쟁방식을 놓고 깊이 연구하고 치열하게 토론하지 않고 경험주의적 관성적으로 임하고 있다. 물론 이는 자주파만의 문제는 아니나, 주도세력으로서의 모범을 창출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민주노동당 분열의 폐해
민주노동당의 분열, 분당은 상상보다 훨씬 심각한 폐해를 초래하리라 보인다. 지역과 부문 운동을 쪼개고 대중조직, 대중운동을 분열시키며 과도한 총선경쟁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절망을 야기하고 진보정치, 진보운동의 힘을 약화시켜 결국 서민대중의 삶의 보호막을 허무는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첫째, 대중조직, 대중운동을 분열, 약화시킨다.
이미 민주노동당의 분열, 분당은 민주노총과 그 산하 노동조합의 갈등과 분열로 확산되고 있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방침을 철회하라는 요구가 제기되고 이를 둘러싼 민주노총의 논란과 갈등이 예고되어 있다. 이미 몇몇 산별연맹이나 단위노조, 현장조직에서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을 통한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정치방침을 수정할 계획이다.
민주노조운동의 정치적 분열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치명상을 입힐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변혁운동의 계급적 진지를 약화시킨다는 점에서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것이 복수노조 허용과 맞물리면 제3노총, 제4노총이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고 보수대연합세력의 노동자 분할지배에 놀아나는 역사적 과오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각 정치조직에 따른 별도의 노총체계로 사분오열되어 있는 일본과 프랑스의 노동운동 경험을 단지 남의 문제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민주노동당 지역위원회별로 상당수의 탈당 자가 발생하고 이들이 진보신당으로 재조직된다면, 지역운동과 지역정치도 갈라져 투쟁력과 정치력이 약해진다고 봐야 한다. 점차 학생운동, 청년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 등 여타 대중운동도 여러 진보정당들의 편 가르기에 노출될 수밖에 없으며, 연대연합 질서도 교란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둘째, 4.9총선에서 공멸하며 재통합하기도 어려워진다.
그동안의 종북-분당 소동으로 민주노동당의 현재 당 지지율이 5%대로 추락했다. 진보신당도 '종북당과의 결별'만이 아니라 국민에게 호소력 있는 뚜렷한 명분이 없다. '생활 진보' '푸른 진보'를 외치더라도 구호에 그칠 뿐 짧은 기간에 인물 군, 정책과 실적, 조직력으로 뒷받침되기 어렵기 때문에 민주노동당의 기반을 잠식하는 것 이외에 외연을 확장해 지지율을 끌어올리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민주노동당의 분열, 분당은 당원과 지지자들, 특히 민주노총 산하 현장조합원 중에서 "진보정당도 보수정당과 똑 같네"라는 광범한 실망 층을 형성해 운동원 확보, 세액공제 모집 등 총선투쟁에 요구되는 인적 재정적 동력을 현저히 떨어뜨린다. 더 나아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4.9총선에서 '친북당' '매카시당'이라며 상호 비방하고 지역구 중복 출마 등 과도하게 경쟁한다면, 진보정당운동은 더 이상 구제받을 길이 없어지고 상당기간 재통합을 실현하기도 어렵게 될 것이다.
셋째, 노동자, 민중의 삶을 보호하기 어렵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의 분열, 분당은 외세와 이명박 정권의 보수대연합 공세 앞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비빌 언덕이 무너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명박 신 보수정권은 한미동맹 강화에 보다 폭력적인 신자유주의정책을 결합시킬 태세다. 남북관계도 미국의 손때가 더 묻을 것이고 미국 발 세계경제 위기조짐 속에서 한미FTA, 공기업 사유화, 출자총액제한과 금산 분리의 완화 또는 폐지를 강행할 것이다. 물가는 뛰고 올해 871만 명으로 늘어나는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의 50%로 떨어질 전망이다. 제국주의 독점자본과 재벌의 투자 확대와 이윤 보장을 위해서라면, 법과 질서를 앞세워 정당한 단체행동권까지 제약하고 '노사민정위원회'라는 신종 어용기구를 통해 민주노조를 포위, 압박할 작정이다. 그런데 단결해서 사생결단으로 싸워도 어려운 판에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쪼개져 무슨 힘으로 막아낼 수 있겠는가.
5. 민주노동당의 단결과 혁신 과제
그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다'고 했다. 어떻게 해서든 길을 찾아야 한다. 실망과 좌절과 청산은 죄악이다. 자주와 평등을 중심으로 다양한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는 대중정당이고 당원이 주인인 민주정당이며 노동자, 민중의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을 사수하고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민중의 힘과 지혜를 모아 제 진보정치세력을 규합하고 진보대연합당으로 발전시키자.
1) 단결과 혁신의 원칙을 지키자!
이를 위해 지난 60여년 진보정치운동사가 가르치는 교훈에 따라 다음과 같은 단결과 혁신의 원칙을 철저히 견지해야 한다. 첫째, 올바른 사상과 노선, 실력과 작풍을 갖춘 주도세력을 형성해 정파나 개인 보다 당과 당원을, 당 보다는 민중을 앞세워 패권주의와 분파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둘째,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 기층민중 속에 당 조직을 튼튼히 꾸려 계급적 기반을 강화하는 동시에 각계 진보민중세력을 총망라하는 진보대연합을 끈질기게 추진해야 한다. 셋째, 현 단계 한국사회변혁의 성격에 맞게 당의 강령을 정하고 해당 정세와 민중의 요구에 맞는 정책과 구호를 들어 좌우 편향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원칙에 따라 민주노동당의 단결과 혁신을 위한 몇 가지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2) 모든 정파 수장들은 기층으로 내려가자!
자주파는 대선패배의 책임을 지고 최고위원들이 총사퇴했고 비례후보 불출마선언을 했으며 소위 '전국모임'이라는 구조까지 해체했다. 또 일부는 그간의 패권과 무능에 대해 당원과 국민 앞에 진솔하게 반성하는 용기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 분열, 분당 위기와 광범한 당원들, 지지자들이 이반되는 소용돌이 속에서 지난 4년 주도세력으로서 보다 감동적인 자기희생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지적도 많다.
따라서 당의 단결과 혁신에 평당원들의 자주적 참여를 높이고 가슴 아파하는 탈당 당원들의 재결합 여지를 마련하며 특히 노동현장의 단결에 도움이 되도록,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 국회의원들, 그리고 모든 정파 수장들은 총선출마를 포함한 당직-공직에 나서지 말고 기층으로 내려갈 것을 제안한다.
3) 재창당 추진 기구를 통해 재통합을 모색하고 총선 공동대책이라도 마련하자!
탈당파들은 총선 전 진보신당을 유보하고 민주노동당과 함께 재창당 추진 기구를 구성해 총선대응과 진보대연합당 건설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재창당 추진 기구는 책임 있는 정파가 참여하지 않고 대중조직 파견 대표와 국회의원들, 외부 진보인사들을 중심으로 구성함으로써 노동자, 민중 중심의 통합력과 대중성을 갖도록 세심하게 배려하자. 만일 재창당에 합의하지 못하면, 상호비방 금지, 지역구후보 조정 등 총선공동대응이라도 반드시 실현하고 이후의 재통합을 약속하자.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상호 비방과 중복 출마를 허용하는 등 과도하게 총선경쟁을 벌이는 것은, 노동자 민중으로부터 버림받는 지름길이며 한국진보정당운동의 종언을 고하는 것과 같다. 더구나 총선 이후의 '재혼' 가능성도 없어지고 만다. 어떻게 해서라도 다시 만나야 한다. 재창당을 통해 통합하고 진보대연합당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이명박 정권 중반 이후 반전의 기회가 올 때, 대중투쟁을 비약적으로 활성화시키고 2010 지방선거, 2012년 청선-대선을 통해 대안의 정치세력으로 도약할 수 있다.
4) 감동적인 정책과 계급투표로 총선을 돌파하자!
지난해 보건의료노조는 정규직 임금인상의 일부를 비정규직에게 돌려 무려 3천명을 정규직 화하거나 동일노동, 동일임금에 따른 처우개선을 실현하는 훌륭한 모범을 보였다. 올해 예를 들어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협력해 모든 산별연맹 차원에서 정규직 임금인상의 50%를 비정규직을 위해 내놓겠다는 감동정치를 펴고 정부와 사용자측에도 그 이상의 비정규직 차별 철폐 및 정규직화에 노력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며 싸워야 한다.
지난 대선에 잃었던 20대 표심을 되찾아오기 위해 "88만원세대를 구출하라"는 구호로 청년고용문제를 집중 제기할 수도 있다. 또 선도적으로 "운하를 막아내겠습니다"라며 이명박의 운하정책을 반대하는 국민들이 민주노동당을 주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교육, 부동산, 의료, 평화와 복지, 남북경협과 민생 등의 의제에도 관심을 자져야 한다. 이와 같이 노동 계급적 연대와 전민중적 연대의 노력 없이는 총선 돌파도 어렵고 민주노동당의 단결과 혁신도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5) '비정규직 당', '정책 당', '대안 당', '대중 당', '연북 당'으로 혁신하자!
8년 전 창당 초심으로 돌아가자. 서민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서민들의 요구와 의견에서 배우고 서민들의 피부에 닿는 비전과 정책을 제시하며 실천적 모범을 세우고 이를 홍보함으로써 서민대중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이른바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민주노총 당', '데모 당', '반대당', '운동권당' '친북당' 등의 부정적 이미지를 극복하기 위해 '비정규직 당', '정책 당', '대안 당', '대중의 당', '연북 당'으로 혁신하자. 또 서민의 절박한 요구를 대변해 완강하게 투쟁하되, 요구의 정당성은 파묻힌 채 거친 투쟁형태만 부각되는 우를 범하지 말자. 보다 창의적인 민중참여 형 정치활동사례를 만들어 국민에게 선 보여야 한다. 특히 인구가 밀집된 수도권 20~30대의 요구와 정서에 맞는 당 활동을 개발하는데 역점을 둬야 한다. 이를 위한 혁신주체 형성이 선결과제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동네와 직장에서 서민들의 요구와 의식과 정서에 맞게 세련되게 활동할 수 있는 정치일꾼의 양성이 절실하다. 사람을 키워야 생산현장과 생활현장에 당 조직을 튼튼히 꾸리고 지지기반을 확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 사업의 기본은 사람농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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