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수리 서울종합촬영소를 빠져 나온 어스름한 저녁길, 한참 운전을 하고 있는데 문자가 떳다. 좀 아까 막 인터뷰를 마친 여균동 감독으로부터였다. 오늘 인터뷰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얘기 아닐까라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아주 다른 내용이었다. 오늘 한 인터뷰, 당분간 쓰지 않았으면 하는 내용이었다. 이건 웬 말,일까 생각했고 조금 뜨악한 마음으로 전화를 돌렸다. 이유를 물어봤지만 속시원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편하게 얘기했다. 그러시자구. 아직 시간이 있으니 저도 천천히 생각하겠다고. 예전같으면 그런 게 어딨어, 그냥 먼저 쓰는 사람이 임자지,라고 생각했겠지만 적어도 이번만큼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랫만에 메가폰을 잡은 사람이다. 감독이긴 해도 아마 제작사의 마케팅 일정에 꼭 죄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요즘은 다 그러니까. 감독 계약서에 마케팅 일정에 잘 따라야 한다는 조항이 있을테니까. 여차직 하면 감독이고 뭐고 달달 볶을 수 있는 게 요즘의 영화제작 시스템이니까. 하지만 뭐, 그렇게 제작사의 마케팅 일정을 '알아서 기는' 심정으로 받아줬다기 보다는 아까 얘기한 것처럼 오랫만에 현장에 나온 중견감독의 개인사정을 더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가뜩이나 힘들 것이다. 감독이나 영화판이나 한참 추울 것이다. 남보다 인터뷰 먼저 낸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세상은 그런 일로 바뀌지 않는 법이다.
|
|
<1724 기방난동사건> 촬영현장 |
여균동 감독이 대중앞에 다시 나선 건 2000년 <미인> 이후 8년만이다. 아니다. 그렇게 얘기하면 틀린 얘기다. 그의 전작은 그때 것이 아니라 2005년의 <비단구두>가 맞다. 그러니 3년만에 메가폰을 잡았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있어 여균동은 8년만에 전선에 다시 나온 사람인 것처럼 인식된다. 어렵게 저예산으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비단구두>는 일반극장에서 제대로 상영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03년에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옴니버스 영화 프로젝트였던 <여섯개의 시선> 중 '대륙횡단'이란 작품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 작품을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사람들이 얼마나 알까? 알고보면 감독들이 꾸준히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관객들에게 실로 '오랫만'이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는 그때문이다.그에게 지난 8년의 세월은 고단하고, 추운 시기였다. 그렇게 저렇게 본다면 그래서, 8년만의 재기작이라는 표현이 더 옳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신작 제목은 <1724 기방난동사건>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1724년을 시대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아마도 무대는 조선시대 사대부 혹은 사대부가 되려 했으나 서출이라는 이유로 권력을 갖지 못했던 남정네들이 놀던 기생 방안인 모양이다. 1724년이라면 조선조 제20대왕 경종이 불과 재위 4년만에 삶을 마감하고, 영조 시대가 막 시작되려는 때이다. 유난히 당쟁이 치열했던 혼란기였던 만큼, 영화는 과거를 통해 지금의 권력암투기를 시대적으로 은유하려는 것이 아닐까?
|
|
<1724 기방난동사건> 촬영현장 |
여균동 : (손을 휘휘 저으며) 제발 좀 영화를 정치적으로 해석하지마. 당신은 그게 문제야 늘.
오동진 : 근데 왜 꼭 시대가 그때요?
여균동 : 그래서 영화에서는 그 시기가 잘 나타나지 않아. 이 영화엔 정치는 없어. 싸움만 있어.
오동진 : 싸움? 내용이 뭔데요?
여균동 : 마포 저자거리의 건달이 뜻하지 않게 당시 최고의 주먹 패거리, 양주파라는 이름인데, 하여튼 그 두목을 쓰러뜨리고 결국 전국구 최고의 주먹이 된다는 이야기야.
오동진 : 그러니까 그게 뭔데요?
여균동 : 그게 뭐냐니?
오동진 : 뭘 얘기하려고 하는 거냐니까요?
여균동 : 의미부여는 당신이 안해도 돼. 보는 사람이 하면 돼.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조폭영화라고 보는 사람도 있을 거야.
|
|
여균동 감독 |
오동진 : (근데 그게 왜 꼭 영조시대의 출발점인 1724년이야?) 아 그러니까 시대를 좌절한 인간들 얘기 아녜요. 이것저것 개혁도 다 깨지고 관념이고 이데올로기고 나발이고 다 집어치우고 몸으로 시대를 깨부수면서 살자는 그런 얘기 아닌가요?
여균동 : 당신같은 사람때문에 영화가 다 망해. (아예 얘기도 꺼내지마,라고까지는 얘기 안했으나 분위기는 정말 그랬다.)
오동진 : <비단구두> (가 제대로 개봉못한 것)때문에 이번 영화 찍으면서 뭐 영향받은 게 있나요?
여균동 : 영화는 무조건 재밌어야 한다는 거.혼자 얘기하지 말고 사람(관객)들하고 무조건 얘기할 자세가 돼있어야 한다는 거.그래서 이번 영화는 무조건 재밌게 찍을 생각이었고 또 그렇게 찍고 있어.
오동진 : 진짜 재밌어요?
여균동 : 진짜 재밌어. 돈도 들일 만큼 들였고, 그런 면에서 책임을 다할려면 재밌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러니 정말 기대해도 좋아. 여균동이가 재밌는 영화를 찍는다고! 그건 안다. 여균동 감독은 재밌고 발랄하며 발칙한 영화를 만들었던 인물이다. <세상속으로>가 그랬고 <(포르노) 맨?>이 그랬으며 <죽이는 이야기>가 그랬다. 그는 종종 다른 사람 영화에도 특이한 인물로 출연을 하기도 했는데 장선우 감독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같은 영화에서 그랬다. 그에게 약점이라면 다른 사람보다 좀 앞서갔다는 점이고, 더 나아가 좀 특이했다는 점 뿐이다. 그가 오랜 시간 대중들 사이에서 '침묵맨'처럼 느껴졌던 건 그때문이다.
|
|
<1724 기방난동사건> 촬영현장 |
하지만, 지금 몇년 차가 되지 않은 기자들은 모르겠거니와, 좀 오래된 기자들이라면 그가 '재밌다 재밌다'하면서 영화의 재미를 강조하는 모습이 솔직히 별로 믿기지 않는다. 그는 한때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적이 있으며(그는 그 얘기를 하는 것을 무지무지하게 싫어하며 인터뷰 때의 약속도 정치얘기는 빼자는 것이었다) 여전히 그의 머릿 속에는 '정치적'인 무엇이 자리잡고 있을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근데 영화감독이 한때 정치판을 기웃거린다는 게 뭐가 어때서? 방송연예인이 줄지어 총선에 나간다는 것보다 훨씬 더 낫게 느껴진다고 하면 그것도 편견일까. <1724 기방난동사건>은 이정재와 김석훈, 김옥빈 등 스타 시스템으로 제작되는 작품이다. 스타들이 나오고, 전설을 지닌 감독이 만들고, 조선시대 조폭 운운하며 재미를 강조하고, 다 좋지만 이 영화가 지금 시대의 울분을 병풍처럼 휘감았으면 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바람이다. 여균동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다. 적어도 여균동은 그럴 사람이다. 하지만 벌써부터 여 감독이 소리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 얘기 할거면 기사쓰지마! 그래도 <1724 기방난동사건>은 그렇게 기록돼야 할 영화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