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맥락을 염두에 둔다면 한반도 대운하 역시 더 넓은 맥락, 즉 신개발주의·신자유주의의 침투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번에 소개하는 <한국의 근대화와 물>(홍성태 지음, 한울 펴냄)과 <동북아의 근대화와 물>(홍성태 엮음, 한울 펴냄)은 바로 이런 물을 둘러싼 총체적 시각을 기르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한국의 근대화와 물의 기원
물의 기원을 좇는 데 왜 하필 근대화가 중요할까? 일제는 국내 농업을 수탈하고자 기술뿐만 아니라 이전까지 없었던 물의 비용을 지불하는 것과 같은 근대 수리 체계를 도입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일제 침략 이전 '전' 근대 농업 체계에서 통제받지 않던 물을 상층, 관료가 통제하기 시작했다는 것. 이것이 바로 한국 물의 근대화의 시초이다. 이 물의 근대화는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박정희는 강력한 물리력을 동원해서 물의 근대화를 밀어붙였다. 그러나 물리력만으로 물의 근대화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물리력만큼이나 중요한 구실을 한 것은 과학이었다. (…) 모든 물 정책은 과학적 연구를 전제로 해서 입안되고 실행되는 형식을 취한다. 이어서 전문가 집단이 물 정책을 온전히 떠맡는 '물 관리의 전문화'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해서 일반 시민이 물 정책의 결정 과정에 끼어들 수 없는 비민주적 구조가 만들어진다."
한국은 지형 특성 때문에 물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 침략기부터 민중을 착취하고자 새로운 근대 수리 체계가 도입되면서 물의 이용은 집중화, 권력화, 전문화로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댐 건설을 중심으로 한 물 관리 정책을 펼침으로써 이런 물의 근대적 이용을 본격적으로 구현한다.
최근 '녹색댐' 등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기존 댐을 허물자는 주장도 나오면서 전국 곳곳의 거대한 콘크리트 댐을 비합리적인 근대화의 유물로 단정한다. 하지만 과학을 강조했던 군사정부 또한 합리성을 강조하였다.
"1970~1980년대 한국의 댐 정책은 단기적이고 협의적 개념에서는 합리성의 범주에 들어갔으나 1990년대 들어 환경 인식의 확대와 NGO·지역 주민들의 참여에 따라 광의의 장기적 합리성으로 전환되고 있으며, 댐 건설을 둘러싼 정부와 시민단체의 대립은 이러한 '합리성'들 간에 괴리라고 진단할 수 있다."
군사 독재 시절에는 "물의 개발에 반대하는 것은 단순히 국가 시책에 반대하는 것을 넘어서 무소불위의 독재 권력에 맞서는 것을 의미"했고, 경제 발전에 기여한다는 막연한 국가주의에 사로잡혀서 강제 이주에 순응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오늘날에는 시민사회가 '광의의 장기적 합리성'을 인식하고 댐 건설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물론이고 이명박 정부도 여전히 '단기적인 합리성'에 머물고 있는 듯하다.
댐에 대한 집착, 운하에 대한 집착
글머리에서 한반도 대운하를 단순히 구조적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역대 대통령은 댐 건설에 집착을 보였는데, 같은 맥락에서 이명박의 운하 사업도 판단하는 게 가능하다.
"1970~1980년대 댐 정책은 국민의 필요에 의해서, 경제 개발을 위한 하나의 밑거름으로 그리고 경제를 부흥시킬 공공사업으로서 추진된 점도 있으나 이러한 댐 건설의 확장은 개발 연대를 키우게 된다. 이러한 개발 세력이 나타나게 된 원인은 대통령의 댐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대통령들의 댐에 대한 관심은 일정 정도 계속되었지만 특히 '경제 개발'보다 '건설'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했던 박정희 시대에는 그 정도가 더 강했다. 즉, 모리타키 겐이치로의 용어를 빌리면 '국가적 위신의 기념비 만들기라는 정치적 목적이 강했던 것이다."
댐과 운하에 대한 정치인들의 집착이 역사적 문맥에서 흐르고 있는 것을 조망했을 때 우리는 이러한 집착에 대한 저항의 구심점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즉, 알맹이는 '전'근대에 가까운 근대화(수자원공사 등의 조직을 포함한)에 '장기적 합리성'을 뿌리내리게 해야 한다.
물의 민영화, 자연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침투
이명박 정부의 성격을 단순히 한반도 대운하만을 보고 토건국가로 단정하는 것은 일면만을 보는 것일 수 있다. 노무현 정부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에 한나라당이 동조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명박 정부는 이전 정부처럼 강한 신자유주의 성향을 띄고 있다.
한미 FTA 안에는 물의 민영화(상품화)가 초래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제(ISD)'가 담겨있다. 물의 민영화를 분석한 이상헌은 효율성을 추구한다는 민영화의 논리가 권리로서 물을 이용하는 환경정의와 어긋난다면서 물을 권리의 관점에서 접근해야하고, 한국의 근대적 물 관리 체계의 문제점인 '물의 원거리 이동'에 대한 고려가 물 산업 구조 개편안에 부재한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현재 물 산업 구조 개편 방안은 근대적 물 관리 체계가 초래한 물의 원거리 이동에 대해서는 언급이 전혀 없다. (…) 경제 성장을 지원하고자 추진된 공급위주의 근대적 물 관리 정책은 가까이에 있는 물보다는 멀리 있는 물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이 과정은 생태계를 훨씬 많이 파괴하고, 에너지도 많이 사용하며, 수몰민의 이주나 댐 건설 반대 운동의 경우에도 보듯이 사회적 비용도 많이 든다. 즉, 물이 지리적으로 더 멀리 이동해 공급되고 소비되며 이 과정을 관리하기 위해 대규모의 관료조직이 필요하게 되며, 대규모의 자금이 운영에 소비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의한 물의 상품화는 기존의 한국의 물 근대화가 그려온 경로 의존성을 촉진하고 있다. <한국의 근대화와 물>은 향후 한반도 대운하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물 체계 전반의 한국수자원공사를 비롯한 물의 권력을 쥐고 있는 기관의 개혁, 토건 세력의 쇄신이 선행되어야 함을 제언하고 있다.
동북아의 근대화와 물의 위기
<동북아의 근대화와 물>은 <한국의 근대화와 물>에서 논의했었던 근대화라는 렌즈를 통해서 물의 문화와 정책, 운동을 살펴보던 것을 동북아시아(중국, 일본, 북한)로 확대해서 조망하고 있다. 이들 국가들은 이념이나 자연적 입지 등의 차이로 인해서 각기 다른 근대화의 틀을 그리고 있을 거 같지만 크게 보아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근대화라는 점에서 보자면, 사회체제의 차이보다 공업 국가의 공통점이 더 근본적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를 떠나서 공업화에 따른 생산력의 증대와 자연의 파괴는 오늘날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가장 먼저 근대화에 돌입한 일본은 개번 매코맥의 토건국가 분석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 한국이 걷고 있는 토건국가의 완성을 먼저 경험하였다. 국토가 섬인데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네 번째로 댐을 많이 건설한 국가(중국은 2만2000개로 세계 1위다)라는 사실에서도 한국의 물의 근대화의 전철을 밟고 있다.
중국은 세계 최대의 댐으로 주변국가 생태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되는 싼샤(三峽) 댐 건설이 한창이다. 북한은 인간 중심을 내세우는 주체사상이 결국 자연의 전유를 합리화 한다는 점에서는 자본주의와 차이가 없으며 각종 간척, 댐 건설로 인한 오염이 초래한 근대화의 위기를 맞고 있다.
한국의 댐 건설에서 볼 수 있듯이 댐 건설에는 각종 이익기구들이 연합한 개발 연대가 나타난다. 이들에 의해 생태 파괴, 난민 발생, 문화재 파괴가 일어나는 것도 공통적이다. 한국의 근대화와 물은 동북아의 근대화와 물이라고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일본에서는 근대화가 미래를 담지하지 못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대형 콘크리트 댐의 철거가 조금씩 시도하는 등 기존 근대화에 대한 시민사회의 저항이 커지고 있다. 한국과 중국에서도 저항의 움직임이 싹트고 있다.
근대화로부터의 탈피 혹은 마주침
차기 정부의 한반도 대운하라는 생태적 재앙을 짚어보는 데 <한국의 근대화와 물>은 신개발주의,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전략을 제시해준다. <동북아의 근대화와 물>은 한반도 대운하뿐만 아니라 중국의 싼샤댐이 동북아 생태계의 위기가 됨을 직시하고, 이에 대한 국제적 협력 또한 급선무임을 밝혔다. 결국 근대화로부터의 탈피냐 마주침이냐의 갈림길에 있어서 마주침을 통해서 근대화를 파악하는 자세가 본서를 통해서 강조되지 않았는가 싶다.
정치인의 댐과 운하에 대한 집착에서의 동일성만큼이나 댐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운하에 대한 비판 논의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면에서는 소개하지 못했지만 이 책들은 물의 정책에 대한 세부적 비판과 운동에 대한 전략적 측면에서 필독할 만한 부분들이 상당함을 밝힌다.
끝으로 아쉬움 하나를 지적하자. 홍성태는 <한국의 근대화와 물>의 머리말에서 "이른바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가 나름대로 토건국가의 문제를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라고 기술하였다. 그러나 서울시장 오세훈의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는 홍성태가 그간 비판했었던 신개발주의적 측면에서 본다면 껍데기만 녹색으로 칠한 한강종합개발사업의 재판이 아닌가 싶다. 이런 기술은 책의 일관성을 위해서라도 수정 또는 보충 설명이 필요할 듯싶다. (☞관련 기사 : '한강 르네상스 플랜', 누구를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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