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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드라마 작가들은 어떻게 TV를 멈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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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드라마 작가들은 어떻게 TV를 멈췄나

[TV와 수다] 한국 작가들이 파업을 한다면?

상상해보자. 때는 2008년 12월 31일. 텔레비전에서 신작 드라마를 못 본 지 두 달이 넘었다. 월화수목금 <태왕사신기> 재방송을 보는 것도 지겨워 죽을 거 같다. <무한도전>, <황금어장>이 방송 중단된 지도 한 달째다. 영화 쪽도 마찬가지다. 이미 대종상, 청룡영화제 등 주요 영화 시상식은 줄줄이 취소되었고 내년 상반기에 한국 영화를 한 편도 못 볼지 모른다는 소문이 돈다.

그리고 한 해의 마지막 날, 지상파 방송 3사 대표가 합동 기자회견을 열었다. "작가들의 파업과 배우, 연출자들의 동참으로 모든 연말 시상식을 취소하게 돼 유감으로 생각한다. 내년에는 더 성대하고 화려한 시상식을 열 것을 약속한다."

한국에서 작가들이 파업해 드라마가 중단된다면?

과연, 한국에서 이런 상상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하지만 미국에서는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 1월 13일 개최 예정이던 65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이 취소되고 수상자 발표는 1시간짜리 기자회견으로 대체되었다. 지난 2007년 11월 5일 시작된 미국작가조합(Writer Guild of America, 통칭 WGA)의 파업은 세계적 관심을 모으는 시상식을 '파투'(破鬪) 내며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국작가조합의 요구는 간단하다. '돈'을 더 달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 일한 만큼 돈을 더 받아야 하고, 작품에 공헌한 만큼의 '공정한 대가'를 인정해달라는 요구이다. 이런 요구는 일종의 '노예계약'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한다. 2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미국작가조합은 1985년, 미디어 대기업들과 비디오테이프에 대한 판권 계약을 맺었다.

당시에는 일반 가정에 비디오 보급률을 높이는 게 우선이라는 공감대가 있었다. 미국의 영화, 드라마, 텔레비전 쇼 작가들은 시장 확보를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그들이 애초에 요구하던 2.5% 지분에서 '통 크게' 80% 정도를 삭감하는 계약을 맺었다.
▲ 미국 작가조합 홈페이지(www.wga.org) 화면의 일부.

문제는 20년이 지났음에도 이러한 계약에 전혀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애초에 미디어 기업들은 작가들에게 비디오의 지분 양보를 요구하며, 비디오 기술이 좀 더 발전해 기술적 위험성이 줄고 시장이 넓어지면 재협상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현재 파업 중인 작가들이 요구하는 지분은 고작해야 0.6%에서 0.7% 정도이다. DVD 한 편이 대충 20달러라 치면 작가들이 원하는 액수는 12센트 정도이다.

우리 돈으로 110원이 조금 넘는다. 이러한 요구에 제작사는 DVD 시장의 안정성이 아직 확보되지 않았고 투자액을 회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지분 상승 요구를 거부했다. 시간은 20년이 지났지만 방어 논리는 여전히 똑같다. 미디어 시장은 비디오를 지나 DVD 시대로 접어들었고, DVD 시대도 조만간 블루레이 등의 신매체와 함께 끝날 기미를 보이고 있다. 기술은 끝없이 진화하며 기업은 이러한 기술의 진화를 빌미로 여전히 '불안한' 시장을 되뇌고 있다. 아마, 이것은 앞으로 20년이 더 지나도 변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제작사 측 논리는 인터넷 다운로드 서비스 등의 뉴 미디어 콘텐츠 협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미국작가협회는 텔레비전 드라마, 쇼 등의 인터넷 서비스 확산과 증가를 고려해 약 2.5% 정도의 지분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응하는 기업 측 논리는 뉴미디어 콘텐츠에 대한 시장이 아직 명확하지 않고 그 시장성에 대해 이야기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하지만 온라인 방영 서비스에는 광고가 붙는다. 거기에 아이튠이나 아마존 등에서는 유료 다운로드 서비스를 시행중이다.

파티에 초대 받지 못한 미국 작가들

이러한 수익은 해마다 증가 일로에 있으며 조만간 시장 규모는 40억 달러를 넘어설 거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기존의 콘텐츠를 '재활용'해 기업은 막대한 부가 수익을 올리면서도 작가들의 최소 지분 요구는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지금 작가들이 뉴미디어 수익으로 얻는 돈은 0원이다. 작가들이 기업의 변하지 않는 논리에 더 이상 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만도 하다.

문화 산업은 노동 유연화가 가장 심한 업종 중 하나이다. 미국작가조합의 경우도 실직 상태인 사람이 대략 46% 정도이다. 특히, 작가라는 직업에 가장 중요한 '창의성'은 시도 때도 없이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당장은 일이 있어도 몇 년 뒤에는 완전한 실직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작가 한 명이 훌륭한 영화나 드라마, 쇼를 집필하는 건 어쩌면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들에게는 인생 한 철을 불태워 만든 작품의 지분 수입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잘 만든 영화나 드라마는 몇 십 년을 간다. <벤허>, <카사블랑카> 등 헐리우드 고전 영화들은 아직도 DVD나 재방송 등으로 끝없이 소비되고 <마이애미 바이스> 같은 80년대 히트 드라마는 21세기에 영화로 리메이크 되어 전 세계적으로 수백억을 벌어들인다. 이러한 작품의 성공을 제작사가 독점하는 것이 공정한 일일까. 한쪽에서는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는 작품의 근간을 만들어낸 작가들이 생활비가 없어 쪼들리고 주택 대출금을 갚지 못해 전전긍긍 하고 있는 데 말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파업 장기화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지지가 당연해 보인다. 3분의 2 이상의 미국인이 이번 파업을 지지하고 있으며 연출자, 배우 상당수도 적극적 지지를 표하고 있다. 특히, 작가들의 작품을 바탕으로 돈과 대중적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헐리우드 스타들이 이번 파업에 적극적으로 지지를 보내고 있다. 골든 글로브 시상식 취소가 대표적 결과다.

배우들의 작가 지지 선언
▲ 골든글로브 수상자 발표 모습. ⓒ로이터=뉴시스

미국배우조합(Screen Actors Guild, 통칭 SAG)은 "작가의 생존권이 걸린 파업을 지지한다"며 골든 글로브 시상식 불참을 소속 배우들에게 권고했다. 영화 뮤지컬/코미디 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조니 뎁 등 수상이 유력시되던 배우들이 소속된 SAG의 불참 선언은 결국 시상식 취소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만들어냈으며 그 파장은 단순한 시상식 취소에 그치지 않고 있다.

골든 글로브 시상식은 에미상과 함께 미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시상식 중 최고의 인기와 권위를 지니고 있다. 영화 쪽에서는 아카데미상의 전초전으로 많은 주목을 받는다. 이런 시상식이 취소되었으니 이번 파업의 심각성이 미국 전역에 한층 더 자세히 알려진 것은 당연하다.

이는 작가조합의 주 협상 대상인, 미디어 대기업으로 구성된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듀서 연맹(Alliance of Motion Picture and Television Producers, 통칭 AMPTP)'을 압박하는 훌륭한 수단으로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비욘세 등 유명 가수들마저 이번 파업에 지지를 표하며 다음 달 10일 열릴 예정인 그래미 시상식 불참이 예상되고, 다가올 아카데미 시상식 역시 파행이 불가피해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몇몇 미국 방송사에서 파업에 참가한 작가들을 해고했다는 소문이 흘러나오고 있다. AMPTP는 미국작가조합이 내건 조항 대부분을 삭제해야 재협상 할 것이라는 태도를 고수하며 여전히 단 한 발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이고 있다. 작가조합의 요구를 들어줄 경우 6월에 있을 배우조합, 감독조합과의 재계약 협상에도 영향을 미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재방송이나 리얼리티 쇼 등으로 수익을 일정하게 보전할 수 있는 제작사 측이 협상을 장기화시켜, 작가들을 경제적 압박으로 몰아넣은 후 백기를 받아낼 거라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거기에 더해 제작사 측은 작가들의 파업으로 경제적 손실이 막대할 뿐만 아니라 다른 스탶들의 생계가 위협받고 있다는 고전적인 '우회적 파업 때리기' 논리를 펼치고 있다.

물론, 미국의 작가들 중에는 막대한 연간 수입을 올리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단순히 '노동자'로서의 삶이 아닌 '유명인(celebrity)'으로서의 삶을 살며 대중들의 인기와 주목을 한 몸에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번 파업은 상위 20% 작가들의 이익 확대보다는 하위 80% 작가들, 즉 자주 실업 상태에 놓이고 생계를 위한 충분한 소득을 얻지 못하는 작가들의 지속적 생계 보장을 위한 성격이 더 강하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는 항상 보호되어야 한다. 일부의 화려함이 이면의 고통을 가리는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의 작가들은?

한국의 작가들은 어떨까. 한국 작가들의 경우 고용 불안정과 최소 임금 지급 등에 끝없이 시달린다. 과로로 인한 건강 악화, 여성 작가에 대한 성희롱 사건 등이 심심치 않게 터질 정도로 노동 조건도 열악하다.

대체 가능한 공급이 넘치는 현실에서(그것도 무보수로 일하겠다는 '지망생들'이 넘치는) '메인 작가'로 올라 안정된 수입을 올리기 위해서는 똥이든 된장이든 피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열심히 작품을 쓰고 자료조사를 위해 하루 종일 뛰어다녀도 크레딧에 이름이 오르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름이 안 나오니 자기 작품이라며 권리를 주장할 수도 없다. 그나마 '메인 작가'가 되면 '한국방송작가협회' 소속으로 2차 저작권에 대한 수익을 얻는다. 4.5% 정도의 지분을 인정받기 때문에 오히려 미국보다 나은 상황이다. 하지만 메인 작가가 되더라도 퇴직금이 없고 4대 보험도 받을 수 없다. 게다가 아무리 잘 나가는 작가라도 제작사에 밉보이면 단 번에 잘리는 게 또 다른 현실이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집단행동을 할 수 있는 노동조합 혹은 단체가 없다. 한국방송작가협회는 사단법인으로 고용 구조 가장 아래에 있는 '서브' 작가들을 보호해주지 않는다. 영화 쪽에서는 2005년에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이 생겼지만 이들이 단체 행동을 하기에는 '관행'이라 불리는 '악습'이 너무 많고 이를 타파할 힘도 없다. 제작사는 시나리오 한 편당 원고료 지불로 저작권과 판권 일체를 소유한다.

2차 부가수익에 대한 대가는 단 한 푼도 건지지 못한다. 2002년 영화제작자협회와 2차 저작권에 대한 지분 4%를 협의했지만 분배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나마 제작사 측에서도 투자와 배급을 담당하는 대기업이나 대형 기획사에 저작권 일체를 넘긴다고 볼멘소리를 하는 실정이다. 이 일방적 계약들이 모두 '관행'이라는 이름 아래 묵인된다.

특히, 한국의 경우 방송이든 영화든 한번 찍히면 두 번 다시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부가 수익의 권리를 요구할 경우 같이 일 안하면 그만이라고 으름장을 놓기 일쑤이다. 이러한 '고용주'의 횡포를 막을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고 이러한 것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공동의 이익으로 뭉칠 수 있는 단체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한번 찍히면 두 번 다시 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조합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 작가들 자신의 미약한 의식도 문제다. 작가들은 스스로를 노동자로 정체화 하기를 꺼린다. '견습생' 시절에 받는 부당한 대우를 당연한 '통과의례'로 여기기도 한다. 수시로 아이디어를 빼앗겨도 미래를 생각하며 참는다. 모두가 김수현 작가처럼 드라마 두 편 계약에 33억을 받을 수 있는 날을 꿈꾼다. 흥행 결과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방송과 영화 정글 속에서 다른 작가는 밟고 일어서야 하는 경쟁자일 뿐이다. 연대 의식에 기대기에는 생존 게임에서 살아남기가 너무 힘들다.

'석호필'도 작가 파업 지지

어렵게 작가들이 연대 해 파업을 한들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작가들은 창작 작업을 함께 하는 형제, 자매다"며 파업 지지를 선언한 <프리즌 브레이크>의 '석호필' 웬트워스 밀러 같은 스타급 배우들의 사려 깊고 적극적인 지지를 한국 배우 중 몇이나 해줄까. 시상식 취소는 고사하고 '참석한' 배우들만 상을 주겠다고 말할 게 뻔한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현실에서 배우들이 마냥 작가들 편에 서기는 부담스럽다. 언론은 어떤가. 그들은 또 '경제 손실 몇 천억', '평균 연봉 몇 천만 원의 귀족들, 파업이 웬 말?' 등의 상투적 파업 때리기를 들이밀 것이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결국 권리는 스스로 지킬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전해오는 작가들의 파업 소식이 한국의 작가들에게 희망과 연대의 필요성을 불러냈으면 좋겠다. 작가들은 마냥 '을(乙)'이 아니다. 그들은 작품의 근간을 제공하는 생산자이며 이런 생산자로서의 위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운 투쟁과 물샐 틈 없는 연대 의식이 필요하다.

유명 작가들의 경우 그들의 사회적 힘과 발언권을 이용해 자신들이 예전에 겪은 불합리한 대우를 후배들에게 물려주지 않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일조해야 한다. 작가들 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놓인 계약직 스텝들과 연대해 발언권과 사회적 정당성을 확대하는 것도 중요하다.

작가들이 일한 만큼의 정당한 대가와 생존권 보장을 주장한다면, 그래서 한국의 열악한 문화 산업 시스템 개선의 토대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덕분에 훗날 더 창의적이고 재미있는 작품들을 볼 수 있다면, 사랑해마지 않는 '길동이'나 '무릎팍 도사'를 몇 달 못 보는 것 정도, 참아줄 수 있다.

※ 미국작가조합 파업 관련 자료는 미국작가조합 홈페이지(http://www.wga.org)와 파업지지 팬 사이트(http://www.fans4writers.com)를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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