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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의 이상수를 찾습니다"

[기자의 눈] 장관 이상수? 수필가 이상수? 인권변호사 이상수?

"김하영 팀장님이시죠? 노동부 장관님이 통화 원하십니다. 연결해드리겠습니다."

24일 오후 5시께.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갑자기 눈에 생기가 돌았다. '노동부 장관이 직접 통화를? 뭐지? 뭐 하나 건지는 건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걸려온 노동부 장관의 전화

장관실 비서로 보이는 직원이 전화를 연결하는 불과 4~5초의 시간 동안 많은 시나리오가 스치고 지나갔다. 'KTX승무원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동분서주 하더니만, 해결된 건가?', '이랜드 사건 때 헛발질한 게 있는데, 직접 나서 수습하겠다는 것인가?',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코스콤 농성장에 산타복을 입고 가는 건 아냐?', '정권 바뀌어 자리 뜨기 전에 인터뷰라도 하자는 것인가?'
▲ ⓒ프레시안

찰나였지만 이런 생각들이 순식간에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던 중 수화기에서는 이 장관의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김하영 팀장님. 이상수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27일에 <계간문예> 수필문학상을 수상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시상식 안내장하고 제 수필집 한 권 보냈습니다. 한 시간 안에 갈 것입니다."

찰나의 예측이 모두 빗나갔다. 교차로에서 좌회전 신호 다음이 직진 신호인 줄 알고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다 직진 신호 대신 적신호가 켜져 놀라 다시 브레이크를 밟는 기분이었다.

이 장관은 "수필집에는 제 지난 민주화투쟁의 역사가 다 들어 있습니다"라고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개인적' 일인 탓에 홍보실 대신 본인이 직접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수필상'을 받는 노동부 장관

그러나 한 시간이 넘도록 보냈다던 책은 오지 않았다. 기사 마감이 끝났고, 사무실 근처에서 저녁식사를 한 뒤 오후 9시가 다 돼 사무실에 돌아왔다. 그 사이 '수필가 이상수'는 까맣게 잊었고, 밀린 원고를 쓰기 위해 노트북을 폈다. 그 때 인터폰이 울렸다.

"택배 왔습니다."

무려 4시간이 지나서 안내장과 책이 도착했다. 대충 훑어볼 생각으로 안내장을 펼쳤다. 안내장에는 "수필문학 중흥을 위해 제정한 계간문예수필문학상 제2회 수상자로 이상수 씨가 결정됐다"며 "수상작 <분재의 철사를 풀며>는 '건강한 주제의식과 탁월한 은유적 수사학'이 돋보이는 근래 수작이란 평을 얻은 바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심사평에는 "지금 많은 우리나라 수필가들은 사색과 통찰력의 빈곤 때문인지, 우리들의 심금을 울려줄 수 있는 보편적인 주제를 발견하지 못하고 '신변잡기'나 일상적인 일을 감상적인 언어로서 진부하게 나열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우리 수필계가 처해 있는 이러한 상황을 고려 할 때, 예심을 거쳐 결심에 올라온 이상수 장관의 <분재의 철사를 풀며>가 던지는 미학적 충격은 적지 않은 것"이라고 평했다.

심사평을 보니 내용인즉슨 태백산에서 싱싱하게 자라는 주목을 생각하며 분재의 철사를 풀어주듯 자식을 사랑하지만 부모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내용인 것 같았는데, 기자의 흥미를 끄는 대목은 내용보다 "미학적 충격", "이 글이 지니고 있는 말의 경제성과 함께 구조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탁월한 균형미" 등의 평이었다. 이상수 장관이 얼마나 글솜씨가 뛰어난 것일지 '글'로 먹고 사는 기자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주저없이 시상식 안내장과 더불어 배송된 그의 수필집 <충무경찰서 초대가수>(서정시학 펴냄)을 펴들었다. 부제는 '인권변호사 이상수의 사색과 만남의 인생론'이다.

무엇보다 <분재의…>가 도대체 얼마나 뛰어난지 궁금해 목차부터 훑었다. '나의 세일즈맨 시절', '폐쇄공포증', '어머니가 보내주신 보약', '아내의 독립선언'…'권인숙 양 성고문사건 고발장', '서울시가 벌인 땅장사', '법정에서 본 노동사건'까지 샅샅이 글 제목들을 뒤졌는데, <분재의…>는 보이지 않았다.

책 맨 뒷장을 보니 이 수필집은 이미 2005년에 발간된 것이었다. 그래서 '작품도 읽어보지 않고 기사를 쓸 순 없지'하고 기사를 보류하기로 했다.

'노동문제에 관한 진정한 개안'을 했다는 85년 노동자 동맹파업 변론

그러다 눈에 밟히는 제목이 있어 잠깐 머리를 식힐 생각으로 수필집 마지막 부분의 '법정에서 본 노동사건'이라는 글을 읽기 시작했다. '인권 변호사'였던 이상수 장관이 글을 어떻게 썼는지 궁금했다. 법률가들이 글을 잘 못 쓴다는 얘기가 있다.

법조문 자체가 일본어식 한자와 비문 투성이인데다 법학 교과서들도 온통 독일과 일본책을 어설프게 번역한 경우가 많은데 이를 보고 공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다가 법률적 명확성을 요구하는 글쓰기를 하다 보니 문체나 어휘의 사용이 자유롭지 않은데다, 우리나라 재판 구조상 일반 대중을 설득하는 글보다는 법률전문가들끼리 공방하는 글을 주로 쓰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런 선입견을 갖고 글을 읽기 시작했다. 게다가 글이 작성된 시점은 1986년 6월로 그가 '정치인'이 되기 이전이었다. 내용은 1985년 6월의 노동자 동맹파업을 대우어패럴 사건을 중심으로 다룬 것이었다.

첫 느낌은 '변호사 답다'는 것이었다. 날짜와 구속 노동자 수 등을 정확히 기재했고, 사건의 전개 상황을 사실(fact)를 중심으로 일목요연하게 요약했다.
1985년 6월 24일부터 1주일 간에 걸쳐 서울 구로공단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노동자 동맹파업은 그 성격과 규모 등으로 말미암아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던 사건이었다. (중략) 이 사건으로 노동자 34명, 대학생 9명 등 총 43명이 대거 구속되었고, 200여 명의 노동자가 중경상을 입었으며, 3000여 명의 노동자가 집단으로 해고 또는 강제 사직되었다.

또 법정 진술을 토대로 당시 법정의 상황을 생동감 있게 전하는 글솜씨가 제법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글이 막힘없이 술술 읽혀졌다.
그래서인지 부흥사의 전 양은 "연탄가스의 중독을 감내하면서 닭장이라고 부르는 뚝방 아래 무허가 월세방을 월 4만 원에 얻어야 했고, 버스 토큰까지 아끼려고 한 시간씩 걸어 다녔으며, 얼굴이 터도 로션을 몰랐다"고 진술했다. 이와 같이 적은 월급을 받은 노동자들이 어떻게 동생의 학비를 위해 시골집에 송금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중략)

재판장은 증인심문이 끝나고 검사의 논고가 시작되기 전 안 군에게 불쑥 "안 피고인은 임금을 얼마나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순간 법정을 가득 메운 피고인 가족, 동료 해고근로자는 물론 30여 명의 교도관들 사이에 가벼운 긴장감과 함께 호기심이 일었다. "한국노총이 산출한 성인 남자 1인당 최저생계비는 16만 원입니다. 그 정도는 되어야겠습니다." 피고인의 적정 임금액은 다소 뜻밖이었다. 16만 원은 그가 실제로 받던 월임금의 두 배로, 그는 작은 욕심의 근거를 이렇게 설명했다. "하루 종일 일하고 쉴 수 있는 자취방이라도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다닌다는 대한민국에서 쉬는 날 가벼운 여행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부모님이 보고 싶을 때 고향에도 다녀와야 할 것이고요. 최소한 문화생활을 위해 매달 책 몇 권이라도 사서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16만 원이 필요합니다."

이런 식으로 그는 구속돼 재판을 받는 노동자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당시 열악한 노동조건을 기술했다. 사실만 전달한 것이 아니다. 그는 평가와 주장을 글에 자연스럽게 녹였다.
한마디로 말해 이제 이들 노동자들은 회사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어수룩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따라서 회사는 겸허하게 그들을 동반자로 인정하고 대등한 입장에서 그들을 대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변호인들에 대하여는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변호인들이 조금만 빈틈을 보이면 공격해 들어올 것 같은 긴장감을 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빼어난 글솜씨로 기록해둔 1986년의 노동현실 중 현재도 유효한 문제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노조위원장 김준용의 진술에 의하면 회사는 조합이 설립되자 조합 탈퇴 강요, 강제사직, 해고, 강등, 부서 이동, 차별 대우 등을 감행했고, 폭행, 미행, 납치, 감금, 회유, 매수, 기숙사 추방, 공포 분위기 조성, 유언비어 살포 등 온갖 부당 노동 행위를 자행했다고 한다. 회사는 우선 김 위원장에게 잘 봐달라고 하며 제주도 여행을 권하였고, 한편으로 "노동조합을 포기하지 않으면 공장 문을 닫아 버리겠다. 부산 본부로 승진 발령을 내었다가 3년 후 상경시키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중략)

단체교섭 시 회사의 냉대와 무성의도 문제였다. 제4차 임금 교섭 때 노사 간에 오고간 대화 한 토막을 옮겨 보겠다.

노조 측 주장: 전 대통령께서도 저임금 10만 원을 없애라고 하지 않았는가. 물가는 치솟는데 왜 임금은 안 올리는가.

회사 측 주장: 대통령한테 올려 달라고 그러지. 청와대 가서 그래. 가난한 근로자들이 국 끓일 때 왜 비싼 멸치를 넣어 먹느냐. 미원이나 조금 넣어서 먹으면 돈이 덜 들 텐데, 왜 비싼 것을 먹느냐. 처음부터 3만 원을 요구했으면 1000원은 올렸을 것 아니냐.

(중략)

동맹파업 시 회사들이 보인 태도도 문제였다. 파업이 일어난 원인에 관하여는 따져 보지도 않은 채 어떻게 해서라도 파업만 종식시키려는 자세였다. 음식 차단, 단전·단수로 5일 간 허기에 지치게 하여 농성을 해산시키려 했고, 노동자들의 부모, 형제에게 "당신 딸이 회사를 망치고 있다. 불순분자의 책동에 놀아나고 있다"라고 겁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농성 현장에 나오도록 하여 "엄마 왔다 빨리 나와라. 얼굴만 모자" 등 눈물겨운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재현시켰다.

(중략)

분쟁은 노사가 자율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바람직한 일이며, 그 자율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노사가 대등성을 견지해야 한다. 그러나 현행 노동관계법은 노사 간의 대등성을 보장하고 있지 않다. 제3자 개입금지 조항, 기업별 단위조합체계, 노조설립상의 제한, 직권중재제도 등 너무나도 노동자들에게 불리하게 되어 있다.

(중략)

구속된 노동자 중 8명이 대학 출신 노동자였다. 필자는 이들을 만나기 전만 해도 대학 출신 노동자들은 대부분 대학 재학 시 학생 운동을 하다가 제적되거나 형사 처분을 받아 정상적으로는 사회에 진출하기가 어려운 자들일 것으로 추측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8명 중 부흥사의 한 조합원을 제외하곤 누구도 학생운동을 한 전력이 없었다.… 대학 다닐 때까지만 해도 조용히 지내다가 졸업 후 노동 현장을 찾은 사람들이었다.

(중략)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언론의 편향적인 태도였다. 학생 시위 사건에 대하여는 굉장한 관심을 보이는 언론도, 노동 사건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학생 사건이나 정치인들 사건은 공판 때마다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는데 반하여 구로노동자 동맹 파업 사건을 비롯한 노동사건의 재판 과정은 언론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중략)

노사 간의 모든 관계에서 자주성과 대등성이 회복되어야 하고 노동자들에게 인간다운 삶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다시 심어 주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관계법의 합리적인 개정과 최저임금제의 도입 등에 더 이상 주저해서는 안 된다. 정부는 기업만을 너무 보호해 온 것 같다. 기업도 도덕성을 회복하고 개선된 분배를 위해 부담을 분담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저임금을 바탕으로 한 우리 경제의 경쟁력을 재편하는 차원에서 임금의 수준과 구조에 큰 수술이 있어야 할 것이다.

위의 글은 1986년에 쓰여진 글이다. 그리고 지금은 2007년이 거의 저물어 가고 있다. 1986년과 2007년의 노동조건이 월등히 나아진 것만은 사실이다. 노동법도 많이 바뀌었고 노조의 힘도 분명 세졌다.

86년의 노동, 2007년의 노동…86년의 이상수, 2007년의 이상수
▲ ⓒ프레시안

그런데도 여전히 도청과 미행을 당하며 삭풍 속에 1인 시위를 하는 노조원이 있다.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100만 원도 안 되는 월급을 받으며 힘겹게 생계를 꾸려가는 노동자들이 있다.

비정규직들을 사실상 대량 해고 하고서도 "모두 나라 탓(비정규직법)"이라고 변명하는가 하면 교섭 중인 노조 간부들을 해고하는 기업가들이 있고, 회사의 불법노동행위에 대해서는 행정 처분이나 벌금으로 솜방망이 처벌하며 파업다운 파업을 하겠다고 일터를 점거한 노조를 상대로 애당초 이들에게 불리하게 구조화된 '법치주의'를 들이대며 공권력 투입과 구속을 일삼는 정부가 있다.

'복수노조 금지'는 아직도 살아 있고 '직권중재 제도'도 '필수공익사업장 업무유지'라는 이름으로 수명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노조의 '노'자도 몰랐던 '근로자'들이 '노조원'이 돼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찬 바닥에서 노숙 농성을 벌이고 있으며, 여전히 주류언론들은 '노동 사건'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이 변하지 않은 현실 한 가운데 이상수 장관은 '노동부 장관'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다. 물론 86년 노동자들 편에 서서 변호하던 '인권변호사' 이상수와 2007년 통치자의 일원인 '노동부 장관' 이상수는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시 분기탱천하며 신념을 글로 써내려가던 이상수 본인은 여전히 그대로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단지 '참여정부 노동부장관'이라는 굴레 때문에 제 뜻을 다 못 펴고 있으리라 감히 넘겨 짚어본다.

글은 말과 달리 두고두고 오래 남으며 널리 퍼져 나간다. '수필가'로서 공들여 글을 쓰는 이상수 장관이라면 이 의미를 잘 알 것이다.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벌써부터 "노동부가 다른 경제부처에 편입될 것"이라는 소문들이 나돌고 있다. 어쩌면 이상수 장관이 마지막 '노동부 장관'이 될지도 모른다. 남은 임기 동안만이라도 86년의 이상수로 돌아가 부당한 대우와 억울함을 호소하는 노동자들의 편이 될 수는 없는가.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1986년 당신이 기술했던 것처럼만 하면 된다. 이 장관은 "노사 간의 모든 관계에서 자주성과 대등성이 회복되어야 하고 노동자들에게 인간다운 삶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다시 심어 주어야 한다"고 썼다.

사용자성을 회피하기 위해 교섭을 거부하는 원청 사용자들이 난무하고, 잘려도 하소연할 데 없고 대체인력 투입으로 파업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는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들에게 사 측과의 대등성을 회복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다운 삶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다시 심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홍도야 우지마라'가 18번이라는 '충무경찰서 초대가수' 이상수 장관에게 감히 부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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