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에서 한 지지자 그룹이 발표한 지지성명 내용이다. 이 같은 지지성명을 읽는 순간 당연히 뉴라이트나 극우단체들의 지지성명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그 명단을 읽는 순간 나는 충격에 빠졌다. 5.18관련인사 57명, 5.18부상자 53명, 광주전남 지역 교수 158명이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자 및 광주전남지역 교수단의 이름으로 이 같은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먹물들이야 원래 그런 것이니 교수들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5.18관련자들과 5.18부상자들이 이명박 후보 지지라니, 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사실 범여권이 최후의 보루로 기대를 걸었던 BBK 사건에 대해 검찰이 면죄부를 준 뒤 더 늦기 전에 막차를 타기 위한 이명박 후보에 대한 지지선언이 봇물을 이룬 바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노무현 정부의 간판스타 중의 한 명이었던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이다. 특히 진 전 장관은 노무현 정부에서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장수했을 뿐 아니라 노무현 정부의 간판으로 지방자치선거에 출마해 한나라당과 싸우기까지 했던 당사자인데 이 후보를 지지하고 나섰으니 정말 쓴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진 전 장관이야 개혁성과는 원래 거리가 멀고 양지만 걸어온 기술관료를 노 정권이 잠시 빌려 온 것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
놀라운 것은 한국노총이 이 후보를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특히 이명박 후보가 내세우고 있는 반노동자적인 정책들을 고려하면 온건노선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노동자들의 대표인 한국노총이 이 후보를 지지한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한국노총의 전력을 생각하면 놀랄 일도 아니다. 87년 6월 항쟁 당시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요구를 묵살하고 유신헌법을 고수하겠다는 전두환의 호헌선언에 대해 지지성명을 발효하며 국민들의 민주화요구에 찬물을 끼얹었던 것이 바로 한국노총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5.18 세력이…
그러나, 그러나, 5.18 관계자들이라니? 물론 5.18관계자들이 전부 이 후보를 지지하고 나선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지지성명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 중에는 지지 사실을 모른다고 부정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 두 명도 아니고 100여 명의 5.18관계자들이 이 후보를 지지하고 나선 것은 정말 충격 중의 충격이다.
이 후보의 어느 면이 5.18정신과 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이야기인가? 그의 어느 정책이 5.18정신을 계승하는가? 서민들은 꿈도 꾸지 못할 엄청난 부를 가지고도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회사에 자녀들을 위장 취업시켜 공금을 빼돌리는 것이 5.18정신이란 말인가? 이 후보를 지지하고도 5.18묘역에 누워있는 윤상원 열사 등 200여 명의 원혼들에게 부끄럽지가 않단 말인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5.18관계자들만은 민주화정부 10년에 침을 뱉으며 정권교체를 이야기할 수 없다. 5.18은 민주화 덕으로 엄청난 보상까지 받는 등 학살 피해자 중에서 가장 대접을 잘 받아온, '학살귀족'이라면 '귀족'이기 때문이다. 정말 안타깝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5.18관계자들의 이명박 지지는 이해가 가는 면이 적지 않다. 아니 5.18관계자들의 이명박 지지는 어쩌면 민주화정부 10년, 그리고 민주화운동진영의 잘못된 대선 전략의 필연적 결과일지 모른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도덕적 타락과 진정한 개혁실패는 정치적 허무주의를 가져왔다. 또 이들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유례없는 사회적 양극화와 황금만능주의를 가져다주었다.
목숨을 바쳐 이들 정부를 만드는데 앞장선 적지 않은 민주화운동 관계자들은 서민의 정부를 내세워온 이들 정부가 한국현대사에게 가장 사회적 양극화를 심화시킨 가장 반서민적 정권이라는 망연자실한 현실에 충격을 받고 정신적 공황상태에서 심한 자책감에 빠지고 말았다. 특히 이들 신자유주의 정책은 최근의 펀드 붐으로 상징되는 금융신자유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바, 이는 한국사회를 하나의 거대한 투기공화국으로 변모시켜 놓았다. 정신적 공황상태에 가까운 정치적 허무주의와 자책감, 그리고 황금만능주의와 투기공화국이 결합하면 5.18관계자들의 이명박 지지라는 투기, 아니 확실한 투자는 별로 놀랍지 않은 어쩌면 필연적 선택이다.
누가 이 절망을 조장했나
자멸전략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민주화운동 진영의 대선 전략도 이 같은 선택을 부추긴 면이 적지 않다. 민주화운동 진영의 유일한 대안은 그간의 신자유주의와 단절을 하고 새로운 청사진을 국민들에게 제시하는 것이었다. 즉 한나라당을 포함한 신자유주의 세력을 대상으로 넓은 의미의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만드는 것이었다.
특히 집권 자유주의 진영의 경우 지난 10년 간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른 민생파탄 속에서 "민주화가 밥 먹어주느냐"며 박정희를 그리워하는 서민들에게 그간의 정책에 대해 사과를 하고 이 같은 반신자유주의 전선에 합류하는 것이 유일하게 부활할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BBK 한 방에 올인을 하다가 뒤통수를 맞고 말았다.
민주화 원로들을 비롯한 시민사회의 민주화운동 진영 중 상당 부분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민주화운동 진영이 하나로 뭉쳐 반수구, 반부패, 반한나라당 전선에 나서야 한다는 20년 전의 낡은 유성기나 틀고 있었다. 게다가 검찰이 이 후보에게 면죄부를 주자 거대한 음모론을 제기하며 구국의 광화문 촛불시위를 국민들에게 촉구하고 나섰다. 민심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이 같은 헛다리 집기는 5.18관계자들을 더욱 깊은 절망감과 허무주의, 정신적 공황상태로 몰고 갔을 것이다.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한국사회당, 그리고 노동자의 힘과 같은 제도정치권 밖의 진보진영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민주노동당 역시 코리아연방공화국이라는 헛다리나 짚고 있었고 다른 진보진영도 강력한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형성해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제시해주는데 실패했다. 이 같은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패배역시 5.18과 같은 민주화운동세력의 묻지마 식 이명박 지지에 일조를 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그나마 이명박의 50% 득표를 저지해 이명박 식 파시즘에 견제장치를 만드는 것, 나아가 긴 투쟁을 준비하는 것이다. 특히 16일 대통합민주신당이 공개한 이 후보의 동영상이 50% 저지에 상당한 역할을 할 것이다.
주목할 것은 손석춘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이 정확히 지적했듯이 이명박 후보의 집권은 정권교체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정권의 연장일 따름이라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너무 절망하거나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 5.18 관계자들의 이명박 지지가 잘 보여주듯이 지나친 절망은 지나친 낙관만큼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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