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27일부터 시작된 제17대 대통령 선거가 벌써 후반에 들어서고 있다. 이번 대선은 국가운영 비전을 놓고 대선 후보 사이에 바람직한 국가정책을 둘러싼 논의와 검증이 진행되지 못하고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도덕성과 대선 후보들 사이의 짝짓기 여부를 핵심으로 진행됐다.
특히 대선 초반은 김경준 주가조작 사건에 연루된 BBK 회사에 대한 이명박 후보의 소유 여부를 둘러싼 정치권의 격렬한 공방이 처절했고, 소위 범여권 후보의 단일화 가능성 여부도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이명박 후보를 둘러싼 논쟁은 검찰이 이명박 후보에게 제기된 BBK 소유와 주가조작 연루 의혹에 대한 무혐의 판정과 김경준 측이 제시한 한글 이면계약서가 조작된 것이라는 발표로 일단 마무리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명박 후보에게 유리하도록 검찰이 수사를 유도했다는 김경준의 또 다른 의혹 제기와 이를 기정사실화한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 측의 격렬한 반발(무소속 이회창 후보측과 민노당 권영길 후보 측도 일정하게 보조를 맞춤)로 인해 새로운 대선 쟁점으로 비화되고 있다.
정동영 후보와 이회창 후보 측의 '검찰 때리기'는 현 대선 국면에서 이명박 후보를 이길 수 있는 다른 방안의 부재에 주로 기인한다. 이는 이명박 후보의 도곡동 땅 소유 실체 규명 미흡 등 검찰 수사 결과에 대한 일부 국민의 불신으로 인해 일정한 휘발성을 띠고 있으며, 대선 후의 정치일정과도 연계되어 있다.
또 후보들 사이의 합종연횡인 '짝짓기'로 이회창 후보와 국민중심당 심대평 후보 사이의 단일화는 성사됐지만, 관심을 끌던 정동영 후보와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 사이의 단일화는 각기 다른 정치적 이해 때문에 무산되고 있다. 이로 인해 정동영 후보와 민주당 이인제 후보 사이의 단일화 유산에 이어 정동영 후보에게 절실히 필요한 대선의 국면전환 계기가 사라지게 됐다.
국민적 정책위임이 가능할까?
아직까지 유력한 대통령 후보사이의 합동 TV 토론이 두 번 남아 있어 다른 후보들이 토론회에서 이명박 후보를 압도해 대선 국면의 반전을 꾀하는 가능성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6명의 후보가 2시간 동안 여러 분야에 걸친 정책을 돌아가면서 토론하는 방식은 여론조사 선두 주자에게 아주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 진행되는 대선에서 후보들 사이의 정책 논쟁은 이미 실종됐고 각 후보와 그 소속 정당의 행위에 대한 상호비방이 난무하는 부정적(네거티브) 선거운동이 횡행하고 있다. 특히 검찰의 BBK 의혹에 대한 중간수사 발표는 11월 중순 김경준의 한국 송환으로 잠시 30% 중반까지 떨어졌던 이명박 후보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다시 40% 초반까지 올려놓았다. 반면 이회창과 정동영 후보는 상당한 고전이 예상된다. 문국현 후보와 권영길 후보도 아주 낮은 지지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요컨대 현재 대선은 이명박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태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후보들의 국가 비전과 정책에 대한 국민적 토론이 부재한 채 상호비방만이 난무하는 현 대선에서 과연 당선자에게 국가를 책임지우는 '국민적 정책 위임'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즉 지금 진행되는 대선에서 한 후보에 의한 압승은 있을 수는 있겠지만, 국가의 미래 방향까지 과감하게 바꿀 수 있도록 국민이 그의 정책에 얼마나 동의하는지 알 수 없는 '정책 논의 실종' 상태이다.
대선이후 민주주의는?
이처럼 상당한 상호불신 속에 격렬한 비방이 횡행하는 현 대선 결과가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어떠한 의미가 있겠는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선 상황은 정치에 관심 있는 유권자조차 실제로 투표를 할지 우려를 낳게 한다.
우리나라는 1997년 대선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여야 사이에 선거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실현하여 민주주의 발전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 이론적으로는 만약 이번 선거로 정치권력이 다시 교체된다면 한국에서 민주주의제도는 더 뿌리를 내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선거에 의한 여야의 정권교체는 승자만이 아니라 패자에 의한 선거결과 승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1997년, 2002년에는 아슬아슬한 대선 결과에도 불구하고 당시 선거에 승복하였던 패자가 있었다. 선거 결과에 대한 후보의 승복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의 최종 판단이다.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에게 패한 김영삼, 김대중은 처음에는 선거결과에 불복하였으나 국민의 호응이 없자 결국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번 대선에서 주요 후보사이의 짝짓기는 1997년 김대중-김종필, 2002년 노무현-정몽준의 단일화와 달리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번 대선에서 범여권 후보 단일화로 인한 '결합 효과'에 대한 의문이 단일화의 추동력으로 이어지지 못한 큰 원인이다.
그러나 보다 뿌리 깊은 원인은 국민의 태도변화에서 찾아야 한다. 국민은 더 이상 정치지도자를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정치인과 정당의 행태를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즉 이제는 선거에서 대선후보가 국민을 일방적으로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후보가 국민의 참된 의사를 대변하는 존재로 정치가 바뀐 것이다.
여야간 정권교체가 실현된다면 새로 야당으로 변할 범여권의 정치적 향배도 한국 민주주의 발전과 관련해 중요하다. 1997년, 2002년 대선에서 패한 한나라당은 1997년 외환위기 책임론,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대북정책과 관련된 수구냉전세력 논란, 2002년 대선에서의 '차떼기' 논란, 그리고 2004년 노대통령 탄핵 파문 등에도 불구하고 크게 분열하지 않고 당을 유지하며 일정한 자기 쇄신에 성공했다. 그것이 현재 이명박 후보에 대한 수많은 도덕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집권에 다가선 원동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신당으로 대표된 현 집권세력의 향배를 점치기란 쉽지 않다. 특히 이번 대선은 이념적 대립보다는 실생활과 관련된 문제 해결 능력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신당은 1년여에 걸쳐 열린우리당에서 여러 차례 변신하면서 여러 정파가 혼재된 불안정한 상태로 뭉쳐있다. 신당은 정동영 후보의 낮은 국민 지지도만이 아니라 당 자체에 대한 국민 지지도 아주 낮은 상황에서 대선과 내년 4월 국회의원 선거를 목전에 둔 셈이다. 이 상태에서 신당이 대선뿐만이 아니라 대선 후 전개될 급격한 정치판에서 어떻게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쇄신해 국민의 판단을 받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신당의 변신 과제는 민주주의 운영에서 중요한 한국의 정당정치와도 연결되어 있다. 노무현 대통령 집권 5년 사이에 여러 정당이 명멸하였으며 이번 대선을 통하여 그 흐름이 더욱 강해지고 있다. 이번 대선 결과는 내년 총선과 더불어 민주당과 창조한국당의 사활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또 국민중심당을 바탕으로 대선 후 신당 창당을 모색하는 무소속 이회창은 지역으로는 충청을, 이념으로는 선명 보수우파를 지향하려고 한다. 그러나 선거에서 지역 대결구도가 점차 완화되는 상태에서 인물중심으로 결성될 이 정당이 내년 총선에서 한나라당이라는 원심력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지켜봐야 한다. 그리고 민노당은 정당 지지도에도 못 미치는 권영길 후보의 대선 득표력에 따라 내부 파동이 결정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새로 대통령에 선출될 사람은 역대 대통령이 집권 때마다 매번 반복하였던 여당의 재창당 유혹을 벗어나야 한다. 과거처럼 '권력을 매개'로 한 재창당이 한국에서 정당제도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한 가장 큰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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