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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여기서 우리 삶의 걸음을 멈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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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대선, 여기서 우리 삶의 걸음을 멈출 것인가

[기고]'88만원 세대' 구원자는 '경제대통령'이 아니다

언제부턴가 세상이 낯설다. 낯설음은 두려움을 낳는다. 왜 두려울까. 거기에는 이런저런 실존적 이유들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이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관계들이 자본과 권력에 의해 극단적으로 해체, 파편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단절과 고통은 너무도 광범위하게 일상화되어 그 누구도 고통스럽다고 외치는 타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단지 그 목소리는 그 혹은 그들만의 것일 뿐이다. 나의 것 또한 마찬가지이며 오직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인 것이다.

이렇게 단절된 관계 속에 있기에 그토록 정겹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파란 하늘과 땅도, 물소리도, 사각거리며 마음을 사로잡던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도 낯설다. 아니 시나브로 무섭기조차 하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 사이에는 어느새 감당하기 힘든 크고 작은 장벽들이 가로놓여 있다. 아! 어느 길로 가야 하나. 이 단절된 혹독한 세상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오직 살아 있는 그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승리하여 '자립'하는 길밖에 없는 것인가.

'한강의 기적' 이룬 '산업역군'의 후예, '88만 원 세대'

하지만 거대한 글로벌 자본이 사해평등의 지구촌사회가 곧 실현될 것처럼 얇은 입술을 놀려대며 일상의 모든 것을 이윤과 시장 아래 복속시키고자 하는 이 시대에, '공권력'이라고 하는 것이 이른바 최소한의 중립성마저 팽개치고 자본의 시녀임을 공공연히 표명하는, 그리하여 자신들의 역할을 양아치들이 의리를 지키는 것쯤으로 전락시켰음에도 한 치의 부끄러움도 내보이지 않는 이 시대에, 한 인간의 자립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또 그 자립은 얼마나 많은 또 다른 삶의 가치들을 포기하라고 요구할 것이며 설령 그 대가를 치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현될 수 있기는 한 것인가.

과거 자립이라는 그 매혹적인 말에 이 땅의 아버지와 형제들, 이웃, 그리고 친구들이 공장과 들판에서, 노가다 공사판에서, 희미한 사무실에서 밤낮으로 얼마나 많은 진을 빼고 욕망을 억누르며 일하였는가. 매년 초 국가가 제시한 경제성장률의 달성을 위해, 아니 더 빠른 시간 안에 거기에 도달해야 한다는 자기규율화된 그 어떤 강제된 힘에 쫓겨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마저 누리지 못한 채 얼마나 열심히 노동하였는가. 그리고 "산업역군"이라 호명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가늠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극찬의 담론' 아니었는가.
▲ 민주주의가 얼토당토않은 자들에게 한 표를 찍으며 그들이 당신들을 대표하여 밥상을 차려줄 것이라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들이 그 밥상의 메뉴를 결정하여 차리는 것이라는 점을 당신들 스스로 인식할 때까지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뉴시스

하지만 누가 그것을 기적이라 말할 수 있는가. 노동하지 않은 '하얀 손들'에게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전쟁 같은 노동에 질식되어 황폐한 삶을 살고 인간으로서의 자존과 권리를 짓밟혔는가. 얼마나 많은 누이와 동생들이 자신들의 청춘을 멈추지 않는 미싱 페달에 실어 날려 보냈는가. 그들에겐 지금 저 파릇한 청춘의 젊은이들처럼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나름의 욕망들이 없었겠는가. 그렇기에 그들에게 그것은 '기적'이라기보다 차라리 눈물겹고 고통스러운 일상의 삶이었다. 그럼에도 자의이든 타의이든 그것을 감수했던 것은 그 객관적 실현가능성 여부와 무관하게 언젠가 자립하여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 때문이 아니었는가.

그런데 새로운 세기에 들어선 지금 그 희망은 어찌 되었는가. 과거 그 산업역군들은, 그리고 '88만원 세대'로 호명되는 그들의 젊은 후예들은 지금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 그들 다수는 어느 영화의 제목처럼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이제는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 없는 그런 막다른 세상에 직면해 있다. 그렇다면 그 기적은 하나의 신기루였단 것인가. 그들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노동의 성과들은 모두 다 어디로 증발해 버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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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이러한데도 지난 역사와 정치가 함축하는 현재적 의미에 관한 성찰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은 시대에 뒤진 하릴없는 자들의 자기위안의 독백쯤으로 치부되기 일쑤이다. 그렇기에 세계 10위 안팎의 무역 규모를 지닌 나라가 되었다고 입이 아프도록 자랑하면서도 여전히 이 사회를 휩쓰는 것은 '더 많은 경제성장'에 대한 담론과 그에 대한 맹목적인 열광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블랙홀이 되어 여타 의미 있는 삶의 가치들을 모두 흡입하여 그 생명력을 분해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시대를 책임지겠다는 대선후보들이, 지금 대중에게 집권의 한 표를 호소하는 바로 그 정치엘리트들조차 "중요한 것은 정치가 아니라 경제"라고 역설하는 어처구니없는 일 또한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수많은 이들이 그 말이 함축하는 의미를 곱씹어보지도 않은 채 그 울림에 줄서고 박수치며 그 뒤를 따라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을 '백치'로 간주하지 않는 한 토해낼 수 없는 이 '오만한 선언'이 자신들의 또 다른 고통을 요구하는 전주곡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경제는 정치 없이 단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다

700만을 넘어서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이제는 이 사회의 실질적 구성원이 되어 있는 60만 이상의 이주노동자들의 고통이, 단지 구휼수준의 복지예산을 축내는 비생산적 존재로 취급받고 있는 장애인 등 소수자의 무거운 어깨가, 입시교육에 지친 아이들의 그늘진 모습이, 그리고 대규모의 무원칙한 개발에 의한 환경 및 생태의 파괴가 진정 그 '알다가도 모를 경제'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그리하여 신자유주의 수구정치세력을 대표하는 문제의 어느 대선후보가 말했듯이 경제성장만 되면 일자리가 증가하여 비정규직문제가 저절로 해결되고, 다른 한편 여타의 문제들도 덤으로 해소될 수 있는가.

어찌 그것이 경제 때문이라고 말하며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는가. 경제는 자기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손과 발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것을 움직이는 것은 지금 이 곳에 살아 숨쉬는 역사적 인간들의 긴장과 모순의 사회관계들, 그 속에 내재된 비대칭적 권력관계들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정치 없이는 단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이치가 이런데도 "중요한 것은 정치가 아니라 경제"라고 떠드는 저 신자유주의 정치엘리트들의 발언에 신뢰를 보내는 것인가.

지금 이 사회가 경험하는 고통의 중심에 이윤에 굶주린 거대 자본과 그것을 옹호하는 신자유주의 경쟁국가의 관료엘리트정치가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것을, 바로 그들이 이 파편화된, 분열된 현실을 재생산하고 있는 장본인들이라는 사실을 진정 모르고 있는 것인가. 그런데도 어찌 경제 때문이라는 말로 자신의 책임을 면피하고 어물쩍 넘기려는 그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가.

안타깝지만 어렵고 고통스러운 삶에 등이 휘는 것은 바로 당신들이지 그들이 아니다. 그들은 당신들과는 어울릴 수 없는, 또 다른 '별세계'의 사람들이 된 지 이미 오래다. 믿고 싶지 않겠지만, 넘쳐흐르는 부와 권력에 어쩔 줄 몰라 하는 10%의 그들과 그로부터 철저히 배제된 90%의 당신들 사이에는 도저히 어찌 해볼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고통스런 당신들의 삶을 이해할 수도, 아니 애초부터 이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일할 수 있게 해달라는 저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목소리에,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를 달라는 이주노동자들의 호소에 단 한 번의 의미 있는 시선을 주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애초 그들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기에 그런 것인가. 아니다. 그들도 피가 흐르는 인간인데 왜 정(情)이 없겠는가.

하지만 그들에게 오직 중요한 것은 당신들을 복속시켜 자신들의 지배를 지속가능하게 해줄 자본과 권력이라는 객관적 기제이지 당신들의 아픔, 고통에 대한 사사로운 연민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 '정'이 자신들의 지배회로에 조금이라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바로 그 순간 그것은 작동을 멈춘다.

그들이 '악어의 눈물'과도 같은 이런저런 명목의 기부금과 협찬금은 낼지언정, 비정규직노동자, 이주노동자, 그리고 당신들을 파트너로 하는 사회정치적 타협에 나서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배를 문제시하는 발상과 시도를 용인할 만큼 그렇게 헤게모니적이지 않다. 그런 그들에게 청원하고 짝사랑의 환호를 울리며 한 표를 찍어준다고 해서 당신들의 고통이 해결되겠는가. 수십 년 동안 그들에게 표를 준 결과 당신이 지금 손에 쥔 것은 무엇인가.

IMF 위기를 넘긴 '우리들'이 직면한 현실은…

10년 전 IMF위기 때, 이른바 '국난극복'을 명분으로 얼마나 많은 당신들이 구조조정의 칼날에 거리의 실업자로, 노숙자로, 비정규직노동자로 내몰렸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러운 것이 정'이라고 그 위기를 초래한 재벌과 권력을 구제하기 위해 당신들은 장롱 속 깊숙이 간직해 둔 돌반지는 물론 아이들이 돼지저금통에 한두 푼 모은 코 뭍은 돈까지 전부 긁어모아 그들 앞에 선뜻 내놓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 때 그들은 무엇을 하였는가. '고통분담'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그 거대 재벌과 정치권력은 얼마나 많은 것을 독식하였는가. 그들에게 흘러들어간 가공할만한 공적자금은 맨 하늘에서 떨어진 눈먼 돈이었는가. 혹 그것은 당신들의 피와 땀으로 조성된 세금은 아니었는가. 그 돈이라면 당신들이 겪고 있는 지금의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는 것 아니었는가.

그런데 그렇게 위기를 넘긴 지금, 당신들이 직면한 현실은 어떠한가. 자본과 권력이 서로를 희롱하며 밀월을 즐기고 있는 사이, 그리하여 이 나라에서 '민주공화국'이라는 최소한의 희망조차 사라지고 '삼성공화국'이 되어버린 지금, 700만 명을 넘어선 비정규직노동자들과 사회적 소수자들의 살려달라는 아우성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있다.

오히려 법을 어긴 자본과 그들의 뇌물에 놀아난 권력은 밝은 하늘아래 거리를 활보하고 국가대사를 좌지우지하는데, 그 불법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또는 그 삶의 아우성이 '죄 아닌 죄'가 되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른바 '민주개혁정권'의 저 차가운 감방 안에 갇혀 있는가. 사정이 이런데도 가당치 않게 '평화개혁세력'임을 자임하는 집권 신자유주의 좌파정치세력과 수구 신자유주의 우파정치세력들은 '되찾은 10년'이니 '잃어버린 10년'이니 하며 권력놀음에 혈안이 되어 있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그 두 세력이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며 강제한 '더 많은 규제완화', '더 많은 유연화', '더 많은 사유화', 그리고 '더 많은 시장화' 등 신자유주의 보수연합의 정치에 의해 그렇지 않아도 팍팍한 당신들의, 아니 우리들의 삶은 얼마나 찌들고 멍들었는가.

그런 그들의 수장들이 지금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경제대통령' 감이라고 역설하고 있는데, 결국 그것은 비정규직노동자들을 더 늘리고 이주노동자들, 소수자들로부터 더 많은 권리를 박탈하여 그들을 착취하겠다는 것 아닌가. '88만원 세대'의 저 싱싱한 노동력을 헐값에 사들여 마음대로 굴리겠다는 심산 아닌가.

'우리들'의 아들·딸 마저 '그들'에게 진상하려는가
▲ 지난 2일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 찬조연설을 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부산의 청년 백수 이영민 씨. ⓒKBS 화면 캡쳐

사정이 이러한데 그들에게 홑버선 한 짝 거저 얻어 신은 적 없는 당신들이, 오직 자신의 노동의 대가로, 세금 꼬박꼬박 내며 살아온 당신들이 왜 그 탐욕스러운 자본과 권력 앞에 다투어 머리를 조아리는가. 돈과 권력을 빼면 그 어느 것 하나 본받을 것 없는,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자들의 발에 왜 입 맞추려 하는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 삶과 자존에 대한 포기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그들에게 미래를 맡기려하는가. 그들에게 무엇을 더 내 놓을 것이 남아 있기에 그렇게 열광하는가. 혹 당신들의 아들, 딸, 형제자매를 '88만원 세대'의 목록에 올려 그들에게 진상할 요량은 아닌가.

하지만 현실이 고통스럽다고 자신의 아들과 딸, 형제의 미래를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조차 없는, 오직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무한경쟁에 승리한 자만이 존재 이유를 부여받는 신자유주의 투기장에 진상하는 그런 부모형제가 이 대명천지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여기에, 지금 이 한국사회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자신들의 그 환호작약이 '88만원 세대'에게는 죽음의 장송곡이라는 점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들인 사람처럼 외치고 있다. 신자유주의 만세!, 경제대통령 만세!. '88만원 세대'는 내 자식, 내 형제들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물론 당신들이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는가"라며 시니컬한 냉소를 보냈을 때, 이미 거기에 짙은 보수화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알지 못한 바 아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들의 걷는 그 길이 진정 밥 먹여 줄 것이라고 믿는가. 당신들의 운명은 지금까지 그랬듯이 그저 당신들의 노동력을 팔아서 밥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당신들이 저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는데, 누구에게 당신들을 먹여 살려 달라하고 누가 또 당신들을 먹여 살려 준다는 것인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어디 당신들만의 책임이겠는가. 여전히 신자유주의개혁세력을 진보로 호명하는 이른바 '진보언론', '진보지식인'이 지배적인 환경 속에서, 신자유주의세계화에 대한 반대를 세계화 그 자체에 대한 반대와 동일시하여 그 반대자들을 쇄국주의자로 매도하는 그들의 교묘한 이데올로기에 눌려 있는 당신들이, 민주주의를 선거와 동일시하는 그들의 발상에 오랜 동안 포획되어 온 당신들이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말 하는 것이 어디 쉽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언제까지 당신들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안타깝지만 지금 당신들이 보이는 역설적인 모습을 보면서 민주주의는 직선이 아닌 나선형의 발전을 한다는 진부한 테제를 떠올리며 그것을 합리화할 수밖에 없다. 누가 누구에게 조언을 하고 가르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진 이 '개성시대'에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당신들이 선택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선택이 당신 자신은 물론 당신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타인의 삶을 어떻게 일그러뜨릴 수 있는지 스스로 경험하고 깨달을 때까지, 민주주의는 당신들 곁으로, 우리들 곁으로 단 한치도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 누구인가, 미국의 온건한 민주주의자조차도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산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렇기에 그 피가 타인의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의 것이라는 점을 깨달을 때까지, 민주주의가 얼토당토않은 자들에게 한 표를 찍으며 그들이 당신들을 대표하여 밥상을 차려줄 것이라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들이 그 밥상의 메뉴를 결정하여 차리는 것이라는 점을 당신들 스스로 인식할 때까지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삶이 고통스럽고 두렵다고 여기서 정신을 놓을 순 없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고통의 현실을 직시하고 더불어 사는 희망을 놓지 않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용기 내어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나의 재미없는 강의에 귀 기울이는 사랑하는 제자들, 저 '88만원세대'에게 친구로서 말하고 싶다. 진정 현재의 삶이 고통스럽고 두려운가. 혼자라고 느끼기에 저 거대한 자본과 그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치세력들의 뻔뻔스럽기조차 한 당당함에 그처럼 작아지고 힘없이 무너지는가.

그렇다면 가만히 주위를 한번 둘러보라. 거기에 어렵지만 최소한의 자존을 지키며 살고 싶어 하는 당신과 같은 처지의 평범한 이들이 적지 않다. 다양한 방식으로 자본과 권력으로 짜여진 그물망에 무릎 꿇지 않으려 애쓰는, 바로 그렇기에 그들이 내심 더 두려워하고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이런저런 가치 있는 삶들이 있다. 바로 그런 그들이 당신의 옆에 있고 당신의 옆에 그들이 있다.

어렵겠지만, 그 경계를 허무는 것이 바로 당신들만이 할 수 있는 민주주의이고 그렇기에 저들이 항상 어두운 곳에 가두어 두고 싶어 하는 당신들만의 정치이다. 그것들의 복원만이 지금 직면한 고통을 서로 공유하며 해소해 나갈 수 있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우회할 수 없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 때 낯선 것이 되어 버린 저 사각거리는 나뭇잎 소리도 다시 당신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인 나도 당신들만큼이나 지금 이 세상의 관계들이 무섭다. 그렇다고 우리들의 꿈을 밟고 서 있는 저들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정신을 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친구인 '88만원 세대'에게 그들이 어떤 길을 걸을지 알 수는 없지만, 더불어 사는 세상에 대한 꿈을 접으라고 가르칠 순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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