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후보님들, 문화가 뭔지 알고는 있나?"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후보님들, 문화가 뭔지 알고는 있나?"

[불도저에 깔린 문화①] '문화 비전'은 실종되고…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모두들 제대로 된 공약조차 없는 "최악의 대통령 선거"라고 말한다. 비전 대신 비난이, 정책 대신 정략이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우리의 미래를 위한 정책이 무엇인지를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투표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위해서다. '문화공약'은 이처럼 후보가 제시하는 삶의 질을 가늠하는 정책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사실 '문화'는 어느샌가 정책 앞에 붙이는 수식어가 돼 버렸다. 창조사회, 문화도시, 공공미술, 도시디자인, 지역문화 등 정책적으로 문화를 다루는 비중도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문화정책이나 문화공약을 선거에서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특히 국가 이미지부터 우리의 일상까지 좌우할 대선에서 문화공약은 전혀 검증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프레시안>과 문화연대는 우리의 일상에서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지만, 오히려 선거에서는 경제제일주의 속에서 점차 소외되고 있는 문화공약을 뜯어보고자 한다. 5회에 걸쳐 진행되는 이번 기획에서는 각 후보들이 공약집, 인터뷰, 단체 및 기관과의 질의응답에서 밝힌 공약들을 살펴본다. 문화비전, 예술, 문화산업, 미디어, 체육 분야의 전문가들이 각 분야별 공약에 대한 분석을 내놓을 예정이다.

이번 기획은 대통령 선거 후보자 중 보다 구체적인 문화공약을 발표한 후보들(정동영, 이명박, 권영길, 문국현)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편집자>

'경제'에 올인하는 정치

이번 대선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하지만 격한 흥분도, 설레는 희망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경제 하나만은 살리겠다"는 구호가 사람들의 표심을 움직이고 있는 실정에서 너도 나도 '좋은 경제', '진짜 경제' 등의 구호만이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신자유주의는 확실히 성공했다고 말해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무한경쟁질서는 거역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 질서 내에서 개인에게 부과되는 생존경쟁의 공포가 모든 사람의 관심을 붙들어 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후보 문화공약에서도 이런 전반적인 흐름은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문화 공약에서 후보 사이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 차이는 별로 크지 않다. "중요성을 알고 있다", "적극 지원 하겠다"는 선거철 메시지가 반복되고 있다. 전체 공약과 문화공약 사이의 연관관계 차원에 주목하면, 문화공약도 경제공약에 편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문화공약은 주로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도구적 가치를 부여받으면서 문화산업과 문화콘텐츠에 대한 관심, 혹은 문화가 창조력의 원천이라는 일반적 진술을 크게 넘어서지 않는다. 문화공약에 있어 총론적, 철학적 비전 실종이 두드러진다. 한 국가의 최고 책임자가 문화적 설계자여야 한다는 기대는 지금으로서는 난망한 실정이다.

'사회발전'과 '문화'의 관계
▲ 한국 사회는 사회적 소수자와 비주류 집단들이 사회문화적으로 경험하는 배제 논리를 극복하는 문화다양성의 과제 등 여전히 많은 면에서 문화적 낙후성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장애인들은 수년간 '이동권' 확보를 위한 운동을 전개해 왔다. 경기도 문화예술회관 공연장 로열석이 장애인 전용석으로 꾸며져 호평을 받았지만(사진), 아직 대부분의 공연장과 극장에는 장애인 전용석이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아 문제가 되고 있다. ⓒ연합뉴스

문화적 설계 없는 미래는 어떠한 모습일까? 문화적 설계 없이 사회발전이 가능할 것인가? 현재 한국사회는 이 질문을 우회할 수 없는 시점을 경과하고 있다. 현재 문화는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문화에 대한 정의는 그야말로 다양하다. 그렇지만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문화는 일반적으로 '가치와 행위의 지향성을 규정하는 한 사회의 토대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문화는 정치, 경제, 사회 등의 영역 구획 차원에 놓여진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토대를 형성하고 인간 사이의 관계를 구축하는 좀 더 근본적 차원에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문화 비전을 묻는 것은 새로운 사회의 전망을 구축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과 같다. 나아가 문화 비전에 대한 질문은 정치가 실무 수준 차원의 문제가 아닌 한, 정치 비전을 묻는 것과 거의 동일한 차원에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다양한 문제를 경험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사회적 양극화와 내적 분할 구조의 확대의 문제, 사회적 소수자와 비주류 집단들이 사회문화적으로 경험하는 배제 논리를 극복하는 문화다양성의 과제, 사회적 협업과 네트워크 확장을 방해하는 전반적인 낙후의 증상들을 극복하는 문제들을 심각하게 경험하고 있다. 사회 전반의 배제 논리와 낙후 증상들을 어떤 '문화적 변환'을 통해 치유하고 미래를 위해 처방할 것인가의 차원이 바로 '문화 비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술인 정책'을 문화정책으로 착각하는 후보들

하지만 그간 발표된 공약을 보면, 대선 후보들은 문화의 문제를 사회발전의 근본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 이명박과 정동영 후보의 문화 공약은 '국민의 정부'에서 추진하기 시작한 문화산업 정책의 연장선 상에 있다. 두 후보 모두 '미래성장동력', '창조산업', '지식서비스경제', '문화적 일자리 창출' 이라는 차원에서 '창의성의 저장고'로서 문화예술의 가치를 배치하고 있다. 물론 두 후보 모두 문화민주주의, 문화복지, 문화예술교육 등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이는 현재의 문화정책을 외삽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문국현 후보 역시도 지배적인 틀 내에서 크게 다르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사람의 가치에 투자하기 위한 평생학습 시스템 구축 등의 공약과 문화 공약이 통합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여지는 있다고 보여진다. 권영길 후보는 여가시간의 확대, 문화적 권리의 보장, 문화 공공성의 확대, 문화다양성의 과제 등을 범주화해서 공약화하고 있어 비교적 문화적 고민을 전개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문화 비전이라는 차원에서 후보들의 공약은 사회의 가치지향을 재구성하고 인간의 관계를 다면화할 능동적 정책 구성이라는 점에는 다들 미달한다. 문화 비전의 부재는 문화예술 공약의 대다수가 문화예술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예술인 정책'으로 수렴되고 있는 지점에서 명확해진다. 문화비전, 문화정책, 예술지원정책 사이의 범주가 구분되어 있지 않고, 각 정책 영역 간의 통합적이고 유기적인 관계 설정이 부재한 특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각 후보가 제시하고 있는 문화예술정책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예술인 대상의 표 확보를 위한 시혜성 공약 이상의 특성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평가할 수 있다.

'경제사회' 수준 이상의 리더는 없는 것일까
▲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서울시장 시절 이룬 청계천 복원 사업을 발판으로 대선에 진출했다.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문화적 가치를 체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대안, 사회적 소수자들이 문화적 접근에서 차별받지 않는 문화적 환경을 구축해내는 전망, 시민들이 일상창작과 생활예술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구체적이고 다양한 기회를 보장하는 공약은 언제쯤 찾아볼 수 있을까. ⓒ뉴시스

한국사회는 '하청사회'에서 '문화사회'로 나아가야 하고, '배제의 문화'에서 '생성의 문화'로 전환하지 않고서는 미래를 구상할 수 없는 결절점에 이르렀다. 공포에 기초한 경제사회의 생존우선주의 문화를 가지고서 현재의 문제에 대한 대안을 생성할 수 없을 뿐더러 다음 세대의 미래도 폐기처분할 수밖에 없다. '문화적 자생능력'을 갖지 않은 사회에서 '발전'이란 경쟁과 배제의 극단화를 의미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국정의 최고 책임자는 한 사회의 문화 설계자여야 한다.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문화적 가치를 체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야 하고, 사회적 소수자들이 문화적 접근에서 차별받지 않는 문화적 환경을 구축해낼 전망을 가져야 하고, 시민들이 일상창작과 생활예술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구체적이고 다양한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 나아가 문화와 예술 종사자들이 기획과 창작을 통해 미래의 전망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을 긍정하고 공공재를 생산하는 포괄적인 문화복지를 구현해야 하고, 종국적으로는 남북관계와 국제관계에서 문화적 소통을 설계하여 실질적이고 생산적인 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대다수의 시민들은 문화와 더불어서 산다. 하지만 정치 지도자들의 인식에서 문화는 잔여 영역일 뿐이다. 이 간극의 차이가 바로 한국 정치 리더쉽의 한계를 증명한다. 대통령선거 공약이 '우리 삶이 지속가능한 시공간을 만들어나갈' 비전을 창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렵게 만들어 온 '민주주의'를 전 사회 영역으로 확산시키지 못하고, 지금의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지속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마저 드는 것이 사실이다.

시민을 볼모로 한 막다른 골목의 정치는 그만

몇 년 전 월드컵에서 "공공장소를 유희화"하는 문화 축제를 경험했다. 지금은 대선이라는 국면을 각자 유희 장소로 만들고 자신들의 '환타지'를 만드는 일이 필요할 수도 있다. 스스로 정치를 구성하는 전위적 실험만이 정치를 구원할지도 모른다.

경제에 올인하는 정치는 사실은 전망을 상실한 막다른 골목의 정치일 수밖에 없다. 정치가 미래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적자생존 논리를 환기시키면서 시민을 볼모로 잡고 있는 현실은 문화적 비전뿐 아니라 경제적 비전도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래서 지금은 제도정치로 올인해서는 안되는 시점일 수 있다.

제도와 권력이 내 삶을 지배하고 통치하지 않도록 하는 실천적 결단이 필요하다. 그 결단은 무한경쟁으로 치닫는 한국사회의 자동회로에 문화적 가치와 시각을 대입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한국사회에 문화적 회로를 구성할 수만 있다면 전혀 다른 삶에 대한 상상이 가능해질 것이고, 삶의 새로운 차원이 열릴 것이기 때문에.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