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사실 이처럼 외국인에게 지문날인과 얼굴 촬영을 강요한 '선구자'는 미국이다. 최근 미국은 한발 더 나아가 자국 비자를 면제해주겠다는 조건으로 전과기록 등 보다 세밀한 정보를 요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입국하는 외국인들이 '미국의 안보와 복지에 위협을 주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정보까지 받겠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더욱 문제가 되는 건 한국 정부다. 정부는 현재 얼굴 사진과 지문 정보 등을 입력한 '생체여권(전자여권)' 도입을 추진 중이다. 세계적인 추세이자 특히 미국 비자 면제를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것이다. 현재 국회에는 생체여권 도입을 골자로 하는 여권법 개정안이 계류 중이다.
그러나 인권·사회단체들은 이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생체여권에 수록될 '생체정보'가 본인 모르게 전세계로 유통될 가능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실효성도 검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부가 미국 정책에 발맞추기 위해 미국법이 요구하지도 않는 지문 정보까지 입력한 생체여권 도입을 서두르고 있다는 비난도 거세다.
<프레시안>은 인권단체연석회의, 천주교인권위원회, 진보네트워크센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등과 함께 생체여권의 문제점을 짚어보는 '생체여권? 나쁜여권!' 기획을 4회에 걸쳐 연재한다. 그 첫번째 글은 인권단체연석회의 손상열 활동가가 보내왔다. <편집자>
최근에 미국이 비자면제프로그램의 요건을 완화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이르면 내년 7월부터 미국을 무비자로 쉽게 오고 갈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 그동안 사용하던 여권을 전자여권으로 바꾸기만 하면 한국도 미국의 비자면제프로그램에 포함될 수 있다며, 정부까지 나서서 이런 소문에 부채질을 하고 있다.
내년부터 미국 여행이 쉬워진다는 소문을 듣고, 미국 여행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계획을 내년으로 늦춰 버리는 바람에 요즘 여행사들이 미국 여행상품을 잘 팔고 있지 못하다는 웃지 못할 소식도 들려온다. 도대체 미국이 제시하는 비자면제프로그램(VWP)이 무엇이길래, 이런 난리법석을 벌이고 있을까? 유럽으로 여행할 때처럼 미국에도 진짜 무비자로 갈 수 있게 되는 것일까?
비자 '면제' 프로그램?
지난 8월 3일 미국은 비자거부율이 10% 미만인 나라를 대상으로 비자면제프로그램 가입대상을 확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동안 미국은 미국입국심사결과 입국 거부율이 3% 미만이 나라들에 한해 비자면제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그 요건을 3%에서 10%로 늘렸으니 비자면제요건이 완화되었다는 낭설이 돌 만도 하다.
그러나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비자면제프로그램 현대화방안'을 살펴보면, 비자면제프로그램에 가입하는 조건으로 한국정부가 추진해야할 것들이 상당수 제시되고 있다. 여기엔 전자여권 도입은 물론이고 ETA시스템(전자여행허가제) 도입, 여행자정보공유협정, 대테러전 협력과 같은 조건들이 포함돼 있다.
여기서 전자여권에 얼굴정보와 지문과 같은 생체정보가 수록되고 이 때문에 인권침해 논란이 많다는 이야기는 잠시 뒤로 돌리기로 하자. 우선 비자면제프로그램 가입필수요건으로 제시되고 있는 전자여행허가제와 여행자공유협정이 무엇인지, 그리고 문제는 없는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이름만 바뀌는 비자심사가 '무비자'라고?
우선 미국은 비자면제프로그램에 가입하는 조건으로 전자여행허가제 도입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자여행허가제란 무엇일까? CBS 워싱턴 특파원인 김진우 기자는 올해 7월 타전한 기사에서 이 제도를 명쾌하게 설명했다.
"전자여행허가제란 한국의 미국 여행자가 비행기표를 살 때 자신의 전과와 인적 사항등이 항공사의 전산으로 처리돼 미국 입국을 자동으로 허락하는 시스템이다. 이른바 미국행 비행기표가 미국 입국 비자구실을 하게 되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한국정부는 한국인들의 미국 입국에 필요한 인적사항과 전과기록등을 여행사에 제공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간단히 말해 그동안 미국대사관에 가서 하던 '비자인터뷰'나 '입국신고서'등의 비자관련 업무를 전자적으로 처리하겠다는 것이고, 이런 전자적인 방식으로 미국입국자격여부를 심사하고 통보하겠다는 이야기다.
비자가 면제되는 것이 아니라, 전자여행허가제라는 다른 이름의 비자제도가 도입되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유럽연합도 "미국의 전자여행허가제는 유럽연합의 시민들에게 새로운 스타일의 비자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 다른 이름으로 포장된 비자제도라면, 유럽연합도 미국여행자들에게 비슷한 요구를 할 수 있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기도 하다.
개인정보를 아무도 모르게 국가들이 거래할 수도…
비자면제프로그램의 또 다른 가입조건인 여행자정보공유협정은 더욱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우선 여행자정보공유협정에 대한 외교통상부의 설명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외교통상부는 여행자정보공유협정에 대해 "해당국은 미국과 협정을 통해 가입국 국민이 미국 여행시 미국의 안보와 복지에 위협을 주는 지 여부에 대해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여기서 "미국의 안보와 복지에 위협을 주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는 정보"란 도대체 무엇일까? 여행자 개인의 사법기록과 생체정보 말고는 다른 정보를 상상할 수 없다. 미국에 입국을 희망하는 사람이 미국에 반대하는 시위전력이 있는지, 또 범죄전력이 있는지 등등 대해 한국정부로부터 정보를 통째로 넘겨받겠다는 것이다.
이 협상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법기록과 같은 민감한 개인정보를 국가간의 협정을 통해 한국정부와 미국정부가 거래한다는 점에 있다. 한국에서도 개인의 사법기록은 매우 민감한 개인정보에 속하기 때문에 검찰과 경찰만이 조회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미국 비자심사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미국대사관에서 한국인의 신원이나 사법기록을 직접 조회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런 정보에 대해서는 미국 대사관 또한 미국입국희망자가 제출하는 개인의 제출서류에 의존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미국 정부가 한국가 한국인들의 사법기록을 조회해볼 수 있게 하는 협정을 맺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이러한 개인정보 교환/공유를 유럽연합에도 요청하고 있지만, 유럽연합은 프라이버시 문제를 이유로 거절하고 있는 중이다.
미국은 여행자들에 대한 더 완벽한 감시를 원한다
미국이 비자면제프로그램의 필수조건으로 여행자정보공유협정이나 전자여행허가제를 제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바탕에는 9.11이후 미국이 꾸준하게 추구해왔던 미국출입자에 대한 감시의 강화라는 정책이 깔려있다. 과거 9.11 테러가 항공기를 이용한 것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미국으로의 비행을 끝마침 후에 진행되는 입국심사가 아니라, 여행자가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전에 그들을 검사하고, 테러리스트가 있다면 색출해내는 방법을 끊임없이 연구해왔다.
현재도 미국은 미국으로 향하는 전 세계 여행객들의 항공기예약정보를 수집하고 있으며, 그들의 이동을 분석하고 범죄기록을 조회해 테러용의점수를 매기는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전자여행허가제와 여행자정보공유협정은 이런 감시를 더욱 체계적으로 하고자 하는 미국의 욕망을 발산된 것이다.
정부는 전자여권만 도입하면 미국의 비자면제프로그램에 가입할 수 있고, 또 이것이 미국으로의 여행을 더욱 자유롭게 만들 것이라고 선전한다. 그러나 이것은 국민의 개인정보를 미국으로 팔아넘기는 댓 가를 치르고서야 가능한 일이다.
미국으로의 여행이 과거보다 더욱 수월해지는 것도 아니다. 전자여행허가제와 여행자정보공유협정을 통해 이름만 바뀐 출입국심사가 여전히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비자면제프로그램에 한국정부가 가입한다면, 당장엔 비자업무 때문에 미국대사관을 찾는 수고를 덜 수는 있다. 그러나 내 개인정보를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권리, 즉 프라이버시에 대한 권리는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고 만다. 결국 소중한 자신의 인권을 찾는 수고는 더더욱 힘들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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