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일종의 변형된 <허삼관 매혈기>다. 허삼관은 실제로 피를 뽑았지만 우리는 지식을 팔거나 육체를 판다. 정신적, 육체적 매혈행위로 매일매일 밥을 먹고 산다. 나도 그렇다. 20대에 집어넣은 지식의 부스러기와 거스름돈으로 아직까지 밥을 벌어 먹는다. 늙을 때까지 글을 써서 밥을 벌고 싶지만 때로는 내 글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해지고 도대체 어떻게 신선한 피를 수혈할 것인가 고민하게 된다." 다소 자학적이기까지 한 김영진의 이 글을 읽으면서 나 역시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리고 새삼 영화와 영화 글로 먹고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됐다. 김영진이 아무리 스스로를 '넘버3'같은 삼류니 매혈을 하며 사니마니,하는 엄살을 부려도 그만큼 지금의 영화저널, 영화평론 판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도 없다. 영화 글을 쓰는 분야에서 그는 엄연한 '빅 샷'이다. 거물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김영진의 글이 많은 사람들을 감명시키고 있는 이유는 그가 꼭 엄청나게 잘쓰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그의 글은 장중하면서도 수려한 맛이 있다. 그는 꽤나 저음의 목소리를 내는 인간인데(그래서 김영진을 처음보는 사람, 혹은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꽤나 건방지고 독선적이며 심지어는 잰 체하는 가부장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김영진의 글은 꼭 그렇게 자신의 목소리를 닮았다. 하지만 김영진이 사랑받는 진짜 이유는 그의 글에서는 늘 살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인간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휴머니즘이 짙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은 김영진이 좋아하는 미국의 대중적인(A.O. 스콧이나 리처드 콜리스와 비교할 때)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를 닮아 있다. 김영진은 실제로 로저 에버트에 대해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에버트의 글은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게 만든다. 그가 거론한 영화들이 보고싶어진다. 그는 보증할 만한 시네필인 것이다." 김영진이 로저 에버트에 대해 언급한 이 글은, 사실 김영진 자신에게 돌려줘도 될만한 얘기다. 김영진의 영화 글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결국 그를 통해 영화를 사랑하게 만든다. 진부한 표현이라고 하겠지만 '진정성'이란 단어를 다시 한번 써도 된다면 김영진의 글에는 영화에 대한 (지금 시대에는 거의 찾아 보기 힘든) 진정성이 뚝뚝 묻어난다. 하지만 그런 김영진도 요즘 글을 쓰기가 고역이라고 한다. 매혈하는 것 같다는 표현을 한다. 그런 얘기를 하는 김영진의 글을 보면서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짠해져' 왔다. 김영진 같은 걸출한 평론가, 글쓰기를 목숨과도 생각하는 사람들이 일상을 심란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는 지금의 세상은 뭔가 단단히 잘못된 구석이 있는 것이다. 그와 나는 비교적 자주 전화를 주고받는 사이다. 주로 내가 걸고 그가 받는 쪽이어서 마치 짝사랑을 하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꽤 오랫동안 전화를 안하면 영화에 대해, 세상에 대해 근질근질 얘기를 하고 싶어서 핸드폰을 열곤 한다. 통화의 대부분은 서로의 근황을 묻는 것이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학교의 교수가 되고부터 김영진은 서울로의 발길을 꽤나 끊어 버렸고, 두문불출 이런저런 연을 끊어버릴 작정인 양 군다. 이제는 그와의 스킨 십(소주마시는 일)이 거의 드문 일이 돼버린 탓인지 요즘 통화는 특히 안부를 묻는 내용일 때가 많다. 그에게 물었다. 당신, 은둔하기로 작정했군. 왜 그래? 김영진은 수화기 너머로, 특유의 느릿느릿한 말투로 이렇게 대답한다. "이제 우리 좀 숨고르기를 하고 살자고." 그는 스스로 영화 글을 쓰면서 격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아닐 것이다. 김영진은 자신 스스로가 숨고르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판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방향을 잃고 질주하는 자동차마냥 한국 영화계는 지난 몇 년 동안 널을 뛰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의미있는 영화가 올바로 대접받지 못하고 오로지 돈이 되는 영화만이 득세하는 형국이었고, 그것이 또 이 엄혹한 자본주의 사회에 맞는 영화 처세술이 되는 것인 양 받아들여져 왔다. 그 거친 호흡을 다스리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마도 김영진은, 영화를 만드는 쪽과 비교적 거리를 두고 살아가야 하는 자신과 같은 평론가 스스로 먼저 조용하게 침착한 태도를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평론가 김영진 ⓒ프레시안무비 | |
"바로 그점에서 난 한국영화의 미래가 찾아진다고 생각한다"고 그는 말했다. "극단적인 돈의 논리를 확대시키면서 한국영화는 한국영화 스스로 자신을 소홀하게 만들었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예전의 나처럼 영화를 많이 보지 않는 것, 영화를 제일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기성의 영화인들, 평론가들, 영화기자들이 만든 것이다. 지금의 질곡은 자초한 것일 뿐이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8,90년대의 시네필스럽지 않다고 얘기하는 건 넌센스다." 김영진은 특히 지금의 영화판이 그 같은 나락의 환경으로 빠져들고 있는 데는 미디어의 상황, 영화저널의 과도한 상업주의가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어떤 미디어도 이제 영화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미디어로 인해 영화는 어느 순간부터 하나의 소일거리로 전락했다. 이 부분이 바로 잡히지 않는 한에는 한국영화의 미래는 없다." 그는 그래서 앞으로 좀더 심드렁해지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되도록이면 짧은 글을 쓰지 않겠다고 했으며 방송에 나가서 몇 마디 떠드는 것 역시 올해 부산영화제 기간에 하기로 한 것외에는 더 이상 안할 작정이다. 그런 김영진의 결심이 백퍼센트 올바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도 오버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나는 그에게 말했다. 영화는 어차피 소통이니까. 크게 하든 작게 하든, 깊게 하든 얕게 하든 평론가가 그 소통의 터미널을 닫아 버리는 것 역시 책임회피이자 직무유기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미디어 환경에 큰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것 역시 평론가라면 '쓰면서' 돌파할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얘기는 다 필요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하면, 어찌 됐든 간에 영화에 대한 그의 번뜩이는 사유와 철학의 글, 곧 작금에 잘 만나기 어려운 진집한 글을 계속해서 보고싶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김영진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를 두고 쓴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후배가 모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 읽기 시작한 그의 두페이지짜리 글을 보면서 나는 두번인가 세번인가 뒷좌석으로 책을 집어 던졌다.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쌍소리를 섞어가며 욕을 하기까지 했다. 나 역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차마' 읽을 수 없는 때는 둘 중 하나의 이유때문이다. 너무 엉망인 글이기 때문이거나 너무 잘썼기 때문이거나. 김영진의 글은 바로 그 후자에 속하는 것이다. 그의 글을 보고 있으면 질투가 나서, 나는 결코 이렇게 잘 쓸 수가 없을 것이라는 자괴감 때문에 책을 몇번이나 집어 던지게 되는 것이다. 한편의 영화가 때론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다. 한줄의 영화평론도 그렇다. 김영진과 그의 글이 늘 소중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건 그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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