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재벌이 많다. 한 개인 혹은 가족이 다수의 대기업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냥 많은 게 아니라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공기업과 민영화된 공기업 그리고 은행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대기업이 재벌기업이다. '경제력 집중'은 이처럼 소수의 개인이 다수의 대기업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가리킨다. 기업을 지배함으로써 경제를 지배하기에 사용되는 표현이며, 기업의 시장지배력을 가리키는 독점이나 과점과는 구분된다. 그리고 경제력 집중은 대기업이 아니라 대기업집단을 통해 나타난다.
소수의 개인에게 집중된 지배력과 경제력은 기업과 경제를 넘어 사회의 다른 여러 영역에서도 행사된다. 정부와 의회에서는 재벌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정책이 선택되고 법률이 제정된다. 감독기관과 사법기관에서는 재벌에 유리하게 조사가 이뤄지고 판결이 내려진다. 언론에서는 재벌을 옹호하는 보도가 넘쳐난다. 심지어 연구와 교육에도 재벌의 영향력이 미친다. 재벌에 의한 재벌을 위한 보고서가 작성되고, 강의가 개설되고, 교재가 발간된다.
우리나라의 재벌문제는 기업지배구조의 문제이기도 하다. 재벌은 적은 지분을 가지고서도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데, 이것이 대리인문제를 일으킨다. 재벌은 기업의 성장과 수익을 위한 투자보다는 자신의 지배력을 확대하고 강화하기 위한 투자를 선택할 것이며, 기업의 이윤과 가치보다는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지배력을 행사할 것이다. 회사의 재산을 빼돌리거나 회사의 기회를 편취하기도 한다.
재벌의 사익 추구 못지않게 지배력의 대물림도 기업과 경제에 심각한 위험 요인이다. 자신이 소유하는 주식의 가치보다 자신이 행사하는 지배력의 가치가 훨씬 크기에 재벌은 주식과 함께 지배력도 자녀에게 넘기려 할 것이다. 그러나 기업가의 자질이 유전된다는 보장이 없는 만큼 지배력의 대물림은 기업의 몰락으로 이어지기 쉬우며, 대기업의 몰락은 많은 이해당사자의 손해와 경제의 혼란을 가져온다.
경제위기와 재벌개혁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은 개발독재의 성공사례로 인용되기도 한다. 정부는 노동자를 억압해 기업의 노동비용을 낮췄고, 은행을 통해 국민의 저축을 자의적으로 기업에 배분했으며, 해외차관도 같은 방식으로 기업에 배분했다. 그런 과정에서 재벌이 만들어지고 정경유착의 폐단이 심해졌으나 고도성장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경제의 규모가 커지고 구조가 복잡해지면서 정부 주도의 자원배분은 효력을 잃어갔다. 투입 위주의 성장도 선진국의 기술과 시장을 넘겨받을 수 있던 시기에나 가능했다. 또한 정부는 재벌을 규율할 힘을 잃었다. 재벌 스스로 국내외에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재벌의 과도한 차입과 무모한 투자로 기업부실과 금융부실이 쌓여갔다. 마침내 외국의 금융기관과 투자자들이 한국에서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외환이 바닥나고 환율이 상승하면서 외환시장과 금융시장은 마비되었고 우리 경제는 공황에 휩싸였다.
경제위기는 개혁을 요구했다. 재벌도 당연히 개혁의 대상이었다. '국민의 정부'는 재벌개혁의 8개 원칙을 제시했으며 공정거래법과 상법을 비롯하여 많은 법률을 개정했다. 그 중에는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것도 있고, 변칙상속을 막기 위한 것도 있다. 그러나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기 위해 시행해오던 출자총액제한제도를 완화했으며, 같은 목적으로 금지해오던 지주회사를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금융보험회사의 계열사에 대한 의결권 행사도 허용했다.
'참여정부'도 재벌개혁에 나설 듯이 말했다. 출자총액제한제도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금융회사 계열분리청구제도를 도입하고 부당내부거래를 근절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공약을 실행하기 위해 '시장개혁 3개년 로드맵'과 '산업자본의 금융지배에 따른 부작용 방지 로드맵'도 만들었으며, 공정거래법을 개정해서 금융회사의 계열사에 대한 의결권 행사를 부분적으로나마 다시 제한했다. 그러나 금융회사 계열분리청구제도의 도입은 로드맵에 포함되지 않았고, 출자총액제한제도는 그 후 유명무실한 제도로 바꿔버렸다. 지주회사설립도 더 쉽게 만들었다.
재벌에 휘둘리는 정부와 정당
경제위기로 재벌개혁의 당위성과 필요성이 확인되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재벌개혁이 추진되기는 어려웠다. 재벌은 이미 경제와 사회의 많은 부분을 포획 또는 포섭했으며, 경제위기 이후 그 영향력을 더욱 강화했다. 그리고 그 대상에는 관료도 포함되었다. 재벌은 한편으로 '투기자본'에 의한 경영권 탈취의 가능성과 폐해를 과장하고 투자 부진의 실상과 원인을 왜곡하면서 관료를 압박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직 관료를 지원하고 퇴직 관료를 채용하면서 회유했다. 출자총액제한제도가 거듭 완화되어 유명무실한 제도로 바뀌게 된 뒤에는 이러한 압박과 회유가 있었다. 참여정부 초기에 금융회사의 계열사에 대한 의결권 행사를 부분적으로나마 다시 제한하게 되었으나 이 또한 정부 내에서 많은 반대와 저항을 거쳐야 했다.
재벌에 포섭된 관료의 행태는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의 시행과 개정에서도 드러났다. 금산법이라고 줄여 부르기도 하는 이 법의 제24조는 금융회사를 통한 계열사 확장과 지배를 막기 위한 것으로서 1997년에 신설되었다. 금융회사는 계열사 주식의 5% 이상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도 삼성카드 등은 이 조항이 신설된 뒤에도 계열사 주식을 한도를 초과해서 취득했고, 이에 대해 현 정부의 금융감독위원회는 위법으로 판정하면서도 제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재정경제부는 2004년에 금산법 개정안을 만들면서 부칙에 경과규정을 넣어서 삼성카드의 계열사 주식 취득을 사후적으로 승인하려 했다. 더욱이 2005년에는 개정안에 경과규정을 추가하여 법률 시행 이전에 금융회사가 취득한 계열사 주식은 계속 소유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삼성생명과 삼성카드의 계열사 주식 초과소유를 허용하려 했다. 그리고 그 시도는 2007년에 관철되었다.
정당과 의회는 더 노골적이었다. 열린우리당의 대표는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폐지해서 재벌총수의 지배력 강화를 도울 테니 재벌총수는 재벌기업으로 하여금 투자와 고용을 늘리게 하라는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재벌총수의 탈세나 횡령을 처벌하면 재벌기업이 투자와 고용을 줄일 테니 조사하지 말라고 하는가 하면, 탈세나 횡령을 하지 않고서도 경영권 세습이 가능하게끔 상속세법을 고쳐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경제력 집중도 어쩔 수 없고, 지배력의 대물림도 나쁠 게 없고, 기업지배구조의 개선도 필요하지 않다고 공언한 셈이다.
재벌개혁론 대 재벌강화론
재벌이 정부와 정당을 압박하는 수단의 하나는 여론이다. 이대로 두면 외국자본이 민족자본을 밀어내고 국내기업을 차지하리라고 말하면서 재벌문제를 민족문제로 덮으려는 것도 그래서다. 적대적 인수합병이 두려워서 자금이 있어도 자사주를 사들이거나 현금으로 보유하느라 투자를 하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투자 부진을 경영권 불안의 탓으로 돌리는 것도 그래서다. 그러면서 재벌이 요구하는 것은 출자총액제한제도의 폐지에 그치지 않는다. 사실 출자총액제한제도는 수차례에 걸쳐 완화되면서 그다지 유효한 제약이 아니게 되었다. 재벌이 요구하는 것은 독약조항(poison pill), 차등의결권, 황금주 등이다. 이는 모두 재벌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승계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재벌체제가 강화되면 재벌기업의 투자와 고용이 증대하고 우리나라 경제가 성장할 것이라는 주장은 논리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뒷받침되기 어렵다. 재벌 주도의 성장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미래라고 단정하기는 더욱 어렵다. 더욱 의심스러운 것은 외국의 투기자본에 의한 적대적 인수합병의 가능성이다. 총수일가와 계열사가 보유한 지분이 평균 40%를 넘는데 어떤 재벌기업이 적대적 인수합병의 대상이 될 수 있겠는가? 적대적 인수합병이 두려워서 투자를 하지 못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의심스럽다. 재벌기업이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현금 보유가 어떻게 적대적 인수합병의 대응책이 될 수 있는가? 재벌은 이러저러한 핑계로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승계하기 위한 수단을 확보하려는 것일 뿐이다.
또 하나의 의제, 금산분리
경제위기의 배경으로 지목되는 것 중의 하나가 엄격하지 못한 금산분리다.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가 필요한 이유는 두 자본이 수행하는 역할이 서로 상충되기 때문이며, 두 역할을 한 경제주체가 동시에 수행할 경우 경제적 비효율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재벌이 은행을 제외한 모든 금융회사를 소유할 수 있었고, 실제로 많은 금융회사를 소유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재벌의 은행 소유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참여정부의 금융감독위원장에 의해 거듭 공개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리고 이 주장은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공약이 되었다.
재벌의 은행 소유 제한은 금산분리의 핵심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금융지주회사와 그 자회사는 금융회사 이외의 회사를 소유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금산분리의 일부다. 금융회사의 계열사에 대한 의결권 제한도 금산분리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금산분리는 금융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경제력 집중의 억제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 말은 재벌에게는 금산분리가 불편하다는 것이다. 특히 삼성에게 그러하다. 은행을 설립하거나 인수하여 그룹을 확장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지금의 소유지배구조를 유지하기도 어려울 수 있다. 삼성에버랜드가 삼성생명을 소유하기에 조만간 금융지주회사로 지정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삼성생명이 더 이상 삼성물산이나 삼성전자를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총수일가가 소유하고 있는 삼성전자 주식은 3.2%에 불과한데, 이것만으로는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국민의 과제와 선택
지금 국회에는 정부가 제출한 상법개정안이 심의를 기다리고 있다. 이 개정안은 상법개정위원회와 상법쟁점사항조정위원회를 거쳐 만들어지긴 했으나 두 위원회에서 합의된 내용 중 이중대표소송제 등 기업지배구조의 개선을 위한 부분이 빠지거나 바뀌었다. 현 정부 초기에 '산업자본의 금융지배에 따른 부작용 방지 로드맵'이 만들어졌으나 주요 내용이 정부의 법률개정안에서는 빠졌었는데, 같은 일이 상법개정안에서 되풀이된 것이다. 국민의 감시가 소홀해지거나 판단이 흐려지면 재벌과 결탁한 관료가 어떻게 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다.
재벌개혁의 당위성과 필요성은 이미 확인되었다.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고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해야 한다. 불법과 편법을 동원한 지배력의 대물림도 막아야 한다. 그리고 당장은 독약조항이나 차등의결권과 같은 경영권 방어수단을 도입하려는 시도를 막아야 하고, 금산분리의 원칙을 훼손하려는 시도를 막아야 한다. 아울러 재벌 주도의 경제에 대한 대안도 모색해야 한다. 어느 것이든 국민의 각성을 요구하는 일이며, 재벌의 선동에 휘둘리지 않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용어설명 - 독약조항: 경영권 인수를 위한 주식 취득이 있을 경우 이사회의 의결만으로 신주를 발행하여 기존 주주들이 현저히 낮은 가격에 인수할 수 있게 하는 회사 정관의 조항. - 차등의결권 주식: 일반 주식보다 훨씬 많은 의결권이 부여된 주식. - 황금주: 주주총회 결의 사항에 대한 거부권이 부여된 주식. - 이중대표소송제: 모회사의 주주가 자회사를 대신해서 자회사의 이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하는 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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