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이후 '국민의 정부'는 내수경기 진작을 위하여 다양한 신용카드 사용 촉진정책을 강력히 펼쳤다. 신용카드 현금서비스 한도를 철폐하고, 길거리 발급 제한 등 회원 모집방법 제한을 폐지하고, 신용카드 복권제를 시행하고, 신용카드 사용금액에 대한 소득공제 제도를 도입했다. 이에 편승하여 신용카드사들은 공격적인 영업확대를 꾀함으로써 소비신용이 급격히 증대하였다.
또한 2002년 이후 계속된 부동산 폭등기에 주택담보대출이 급격히 증가함으로써 2005년을 기점으로 가계대출 규모가 기업대출을 능가하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소비신용사회에 진입하였다. 이처럼 급격히 소비신용이 증대하게 된 것은 정부 정책의 잘못에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고,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우리나라가 소비신용의 증대 없이는 경제성장을 도모하기 어려운 사회로 진입한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반기업은 대량생산-대량소비체제의 유지를 위하여 소비신용의 증가를 적극 촉진하고 있고, 금융기관은 수익성 제고를 위한 영업전략으로 소비신용의 증가를 적극 장려하고 있으며, 개인은 지속적인 광고에의 노출과 소비수준의 향상, 고정지출의 증가에 따라 소비신용을 확대하게 된다. 우리 사회는 소비신용을 통하여 경제성장을 도모하는 신용사회의 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소비신용이 외형적으로 급격히 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여전히 금융기관 등 신용공여자의 입장에서 소비신용을 단순한 사적 채권·채무 관계로만 규율하려는 전근대적인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신용소비자들은 오직 채무자로만 취급되어 소비자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정보접근권, 부당한 채권추심에 대한 거절권, 사적 비밀과 평온의 자유 등을 거의 누리지 못하고 있다. 또한 신용소비자들은 채권자들의 형사고소와 유체동산, 임금 압류 등의 압박 아래 몇몇 단행법에서 인정되고 있는 최소한의 권리조차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나아가 파산상태에 처한 개인들에게 새출발을 위하여 법률적으로 허용된 파산신청이나 개인회생 신청을 이유로 해서도 각종 불이익을 가하고 있다. 신용카드사나 채권추심기관은 채무자에 대한 대량고소를 남발하여 사법기관을 채권추심의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파산·면책을 받은 채무자에게 채무이행을 구하거나 금융계좌의 개설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서민을 죽이는 시장만능주의
우리 사회에는 사회 전반에 걸쳐 시장만능주의 풍조가 만연해 있다. 2002년부터 신용불량자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하였을 때, 신용불량자의 양산은 여러 사회경제적 원인들로부터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신용불량자 문제를 단순히 사적인 금전거래의 문제로 파악해서 경기가 회복되면 채무자들이 돈을 갚을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이한 주장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대부업 시장에서 서민들이 200%가 넘는 살인적 폭리에 시달리고 불법채권추심까지 겹쳐 결국 범죄와 자살로 내몰리는 상황에서도, 시장경제 원리에 의하여 대부업 시장을 활성화하면 금리가 떨어져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식의 주장이 여전히 만연해 있다. 대부업에 관한 실로 황당한 주장에서 잘 드러나듯이, 이 나라의 시장만능주의는 노골적으로 반인간적이며, 심지어 살인적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나라의 시장은 약자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신용소비자인 서민들과 신용사업자인 금융기관 사이에서는 현격한 힘과 정보의 불균형으로 대등한 거래관계가 성립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서민금융에서는, 국가가 다양한 정책 수단을 통하여 서민들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펼치지 않는 한, 서민들은 금융시장에서 지속적으로 약탈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시장만능주의를 옹호하면서 서민들을 위한다고 말하는 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법률상 채권자는 채권이라는 권리를 가진 자이고 채무자는 채권행사의 상대방으로 정의되므로 채무자의 권리를 논한다는 것은 언뜻 형용모순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채권 채무 관계가 단지 개인적인 채권 채무 관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경제의 발전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면서 사회경제적인 문제로 나타나게 된다. 시장만능주의의 탈을 쓴 천민자본주의자들은 우선 이러한 사실에 대해 올바로 공부할 필요가 있다.
민법은 대등한 사인들 간의 거래를 상정하고, 어떤 거래에서 채권자가 되는 자가 다른 거래에서는 채무자가 되기도 하고, 채무자 또한 마찬가지로 지위의 가변성을 누린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금융거래와 관련해서는 이러한 지위의 가변성은 관찰되지 않고 있다. 오로지 금융기관만이 채권자의 지위를 누리고, 일반 국민들은 그저 채무자의 지위를 가질 뿐이다. 이처럼 일반 국민들이 금융기관에 대한 관계에서 그저 채무자의 지위를 가질 뿐인데도, 채무자를 단순히 의무를 부담하는 자로만 규정하는 것은 국민의 기본권을 소홀히 할 심각한 위험을 안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채권자가 우연적 지위의 산물인 채권자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업으로서 신용을 공여하는 금융사업자의 형태로 나타나듯이, 채무자 또한 단순히 채무자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제생활을 위하여 신용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신용소비자 또는 금융소비자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이처럼 채무자가 우연적 지위의 산물인 채무자의 지위를 넘어 신용소비자라는 사회경제적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기 때문에 채무자의 보호를 위한 각종 법적 장치들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서민금융의 개혁을 위한 노력
서민금융 분야의 개혁은 우선 신용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제를 정비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신용소비자의 권리장전을 마련하고 신용소비자의 방어권, 정보접근권, 새출발을 위한 권리, 사적 평온과 비밀을 유지할 권리를 광범위하게 인정하여, 바로 우리 국민들이기도 한 신용소비자들이 비정한 금융현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법적·제도적 장치를 갖추어야 한다.
채무자 우호적인 개인파산제도 및 개인회생제도를 확립하고, 과중 채무자들에게 채무의 재조정을 위한 다양한 신용회복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광범위한 법률지원을 해야 하고, 신용소비자들의 권리를 종합적·체계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신용소비자 보호법을 제정하고, 불법채권추심에 강력하게 대응할 수 있는 공정채권추심법을 시급히 도입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서민금융을 단지 시장에 맡겨 둘 것이 아니라 금융기관의 공공성을 확보하고, 서민금융에 대한 공적 지원을 강화하며, 서민금융을 담당할 수 있는 금융기관이 활성화되어 중층적 금융 생태계가 형성될 수 있도록 다양한 정책 방안을 마련하여야 한다.
지난 20년 동안 시중은행의 지점 수는 급격히 증가한 반면, 저축은행, 신용협동조합, 새마을금고 등 지역밀착형 금융기관들의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왔고, 중층적 금융생태계가 파괴되어 은행 문턱을 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과도한 금리를 부과하는 폭리적 금융거래가 만연하게 되었다.
2002년 사채업을 양성화하기 위하여 도입된 '대부업법' 제정 이후, 등록대부업체가 2006년 말 기준 1만7210개, 무등록대부업체가 2만5000개 내지 3만개에 이르게 되었고, 대부업 이용자 수는 328만 명에서 450만 명에 이르고 있으며, 대부업 시장의 규모가 18조 원에서 40조 원에 이를 정도로 대부업 시장이 급격히 팽창하였고, 대부업 이용자들은 평균 금리 연 200%의 살인적 폭리에 시달리고 있으며, 대부업체의 불법채권추심도 널리 만연해 있다. 한마디로 은행문턱을 넘기 어려운 우리 서민들은 고금리의 대부업체를 이용할 수밖에 없도록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서민금융을 주로 담당하여야 할 저축은행이나 신용협동조합, 새마을금고 등에서도 서민금융 규모를 지속적으로 축소해 왔을 뿐 아니라, 서민들을 상대로 대부업체에 버금가는 금리를 부과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정책당국의 비호 아래 저축은행이 대부업체를 설립하여 대부업자화하려는 시도도 이루어지고 있다.
올바른 서민금융을 확립하자
시장기능에 의하여 약탈적인 서민금융환경이 개선되기를 바라는 것은 폭풍우 치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1주일만 지나면 바람이 잠잠해 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과 같다. 언젠가는 시장에서 수요 공급에 따라 적절한 금리로 서민들이 금융을 이용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주장은 우리 모두는 언젠가 다 죽을 것이므로 100년만 지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지금 우리나라의 서민금융은 도저히 시장에만 맡겨 둘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금융기관의 공공성 확보, 서민금융에 대한 공적지원, 서민금융기관의 활성화, 대안금융의 활성화와 같은 다양한 정책적 수단들을 시급히 강구하여 서민들의 금융수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야 한다.
서민금융에 대한 공적 지원을 위하여 공사나 기금을 설립하는 방안도 유력하게 검토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금융기관의 공공성을 강화하기 위한 법률인 지역재투자법과 서민금융에 국가재정을 투입하는 '지역개발금융기금'(Community Development Financial Institutions Fund, 약칭 CDFI Fund)으로 서민들의 금융수요에 대응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국회를 통과한 '휴면예금법'에 의하여 휴면예금기금을 조성하여 서민금융지원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700만 명에 이르는 저신용자와 700조 원에 이르는 가계신용 규모에 비추어 휴면예금기금 정도의 규모만으로는 서민금융에 대한 원활한 공적지원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된다. 서민금융의 활성화를 위하여 추가적인 기금의 설치와 재정지원을 포함한 더욱 적극적인 정책을 펴야 한다.
시장경제 질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노동의 분화와 일상적인 화페의 사용, 사유재산의 인정, 거래참여자들의 최선의 노력과 합리적인 선택 등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조건들이 있다. 그리고 어느 한 시장 또는 일련의 시장도 사회 전체를 다 포괄하지 못한다는 한계도 엄연히 존재한다. 또한 법이나 정부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물건들을 교환할 수는 있지만, 지속적으로 시장이 운영되기 위해서는 사기나 폭력 등을 처벌할 법과 이러한 법을 집행할 정부가 있어야 한다. 이는 축구경기에서 심판이 필요한 것과 같다.
우리나라의 금융환경은 1997년의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급속히 무한경쟁체제로 내몰렸다. 그리고 앞으로 시행될 '자본시장통합법'이나 '한미 자유무역협정' 등에 의하여 금융시장의 자유, 보다 정확하게는 금융기관의 영업의 자유가 더욱 확대될 것이다. 이처럼 금융기관의 영업의 자유가 커질수록 그 상대방인 신용소비자들을 종합적 체계적으로 보호하려는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필요도 커진다.
비인간적인 금융시장질서를 인간적 금융시장질서로 전환하는 것은 사회의 안정적 발전을 위한 필수적 요건이다. 서민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시장경제를 위해서도 서민들의 금융수요에 대응할 수 있는 정책을 시급히 현실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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