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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전체주의에 맞서 '인간의 문화'를 되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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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시장전체주의에 맞서 '인간의 문화'를 되찾자"

[민주화 20년, 한국사회 어디로?⑥] <문화> 도정일 교수

6월민주항쟁 20주년을 맞아 <프레시안>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민주화 20년, 한국사회 어디로 가나?' 연속 강연회 여섯 번째 강연자로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가 나섰다.

지난 10월 17일 서울 정동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강당에서 '문화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열린 이 강연에서 도정일 교수는 "지난 20년은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토양으로 '민주주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뿌리내리게 하는 데 바쳤어야 할 세월이었다"며 "그러나 그 작업을 사회도, 정부도 충분히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도 교수는 "문민정부 이후 겨우 15년간 민주주의를 해놓고, 민주시민의 역량을 키우는 정책이나 교육에는 이토록 투자를 게을리 하는 사회는 대한민국 밖에 없다"며 "그 결과로서 지난 10년간 한국 사회는 시장의 가치, 시장의 원리가 사회 내 거의 모든 영역을 침투해 시민적 자유를 심대하게 위협하고 있다"고 밝혔다.

도 교수는 "비인간화, 경쟁, 비인간적 목표를 추구하는 시장 전체주의가 만들어낸 '공포의 문화', '선망의 문화'를 대신할 수 있는 긍정적인 가치를 제시하고 옹호하는 일이 필요하다"며 "그것은 시민단체는 물론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날 토론자로 나섰던 여건종 숙명여대 교수와 정희섭 문화정책연구소 소장 역시 각각 문화연구 및 문화운동의 입장에서 도 교수의 지적에 대부분 동의했다.

다음은 이날 진행됐던 도정일 교수의 강연 원고 및 토론 전문이다. 사회는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맡았다. <편집자>


심광현: 오늘 강의를 맡은 도정일 선생님은 경희대 영문학과에서 강의 맡아오다가 최근 정년퇴임을 하셨다. 도 선생님은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서 문화비평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주도적으로 개척해왔다. 문화연대 같은 새로운 NGO 활동에서도 앞장섰고, 많은 글과 저서를 남겼다.

토론자로 나선 여건종 교수는 숙명여대에서 교편 잡고 있고, 최근 계간지 <비평>의 주간으로 있다. 정희섭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은 80년대부터 민족문화운동의 중요한 이론가, 정책입안자로 활동했다.

도정일: 오늘 우리는 성찰과 전망을 위한 자리에 모였다. 성찰은 '돌아보기'이고 전망은 '내다보기'다. 1987년 6월의 민주화 대항쟁 발발 20주년을 맞는 현재 시점에서 지난 20년 우리 사회에 발생한 중요한 변화들을 '문화의 관점'으로 되돌아보고 또 한국 사회의 가까운 미래를 문화의 관점에서 내다보는 것이 오늘 우리가 할 일이다.

문화는 정치발전, 경제발전과 별개가 아니다. 그 토대다
▲ ⓒ프레시안

'문화'는 100가지 모양과 아흔 아홉 개의 목소리를 가진 괴물과도 같다. 문화야말로 '스핑크스'다. 괴물의 특성은 "정의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러나 정의할 수 없는 것을 정의하는 것이 인간의 버릇이다. 신은 정의하지 않고 인간은 정의한다. 인간이 무언가를 계획하면 신이 웃는다는 말이 있다. 정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듯하다. "인간이 정의하면 신은 웃는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가 사용하는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일단 한정짓고 출발하지 않는다면 어떤 얘기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문화에 관한 이런저런 정의들이 튀어나온다. 인류학은 '인간의 삶의 방식' 전체를 문화라고 말한다. 문화에 관한 가장 폭넓은 규정이다. '이 세상에서 생각되어지고 알려진 것들 중에 최선의 것'이 문화라는 관점도 있다. 최선의 지식, 최선의 예술, 최선의 교양이 문화라는 소리다. '인간이 자연에 노동을 가함으로써 얻는 모든 것'을 문화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인간이 자기 삶의 목적을 위해 자연을 조직하고 동화하는 행위 일체'를 문화 또는 문화적 실천이라 말하면 문화는 '제2의 자연'으로 정의된다.

인간은 그러나 자연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화는 인간이 자연을 길들이는 방식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인간을 길들이는 방식, 인간이 죽음을 길들이는 방식의 총체'라는 정의도 가능하다. 교육을 포함한 모든 훈육, 감시, 상벌의 장치들이 인간에 의한 인간 길들이기의 방식이다. 종교와 예술은 인간이 그 자신의 유한성과 대결하는 방식을 대표한다. 특정의 사회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 일정한 가치관, 행동방식, 신념을 가진 사회적 주체들을 재생산하는 특정의 이데올로기도 문화라고 말할 수 있다. 이밖에도 문화를 정의하는 방식은 수없이 많다. 정의의 방식이 많다는 것은 문화가 그만큼 많은 얼굴을 갖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의 목적에 비추어 가장 유용할 듯한 문화 정의는 '특정 시기에 한 사회 안에서 우세하게 발현하는 가치, 태도, 신념, 지향점, 정신상태, 전제조건'으로서의 문화다. 여기서 문화는 우리가 사회적 삶의 영역들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네 분야로 나눌 때 그 네 분야의 '하나'로서의 문화가 아니라 다른 모든 영역들(정치, 경제, 사회)에서 사람들의 태도와 행동을 근본적으로 안내하고 지배하는 가치 및 신념의 체계다. 이 의미의 문화는 학문, 예술, 여가활동 같은 것과는 선명하게 구별되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랄 때의 그 금강산 구경, 곧 '빵 다음에 문화'라는 식으로 흔히 불요불급의 장식적 활동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는 문화 개념과도 구별된다.

문화는 정치, 경제, 사회와 떨어져 존재하는 별개의 독립영역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사회적 삶을 특정의 방향으로 조직하게 하고 거기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게 하며 사람들의 태도와 행동의 변화 여부에 결정적 영향을 주어 '사회발전을 촉진하기도 하고 저해하기도 하는 근본적 요인'이다. 이를테면 정치의 경우, 정치민주주의를 지향하고 민주주의 원칙과 가치를 존중하며 그 체제를 실현시키려는 지향의지가 없거나 미약한 곳에서는 정치민주주의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경제의 경우, 경제발전이나 번영에 의미를 부여하고 경제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태도, 가치관, 지향성이 없는 곳에서라면 경제활동을 통한 번영의 추구나 실현은 가능하지 않다.

정치발전과 경제발전은 문화와 별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치-경제발전을 포함해서 사회발전은 문화를 토대로, 문화라는 요인에 의해, 그 발전 여부에 결정적 영향을 받는다. 문화에 대한 이런 관점이 '성찰과 전망'을 말하기 위한 이 자리에서의 나의 기본 입장이다.

'민주주의를 향한 욕구와 열망의 좌절'이 저항의 도화선 당겼다

문화의 '결정적 영향력'이라는 표현은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논란을 부를 소지가 있다. 정치발전이 문화를 바꾸는가 아니면 문화가 정치발전을 유도하는가라는 논란, 경제발전이 문화를 변화시키는가 아니면 문화가 경제발전을 이끄는가라는 논란 등이 그것이다. 학문세계에서는 이 문제를 놓고 긴 논쟁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정치학은 정치발전이 문화를 바꾼다는 주장을 대체로 선호하고 경제학에서는 경제발전이 문화발전과 문화의 변화를 끌어온다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물론 치열한 반론들도 제기된다. 이런 논쟁은 인간세계가 끝나는 날까지 계속될지 모른다. 오늘은 학문을 말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시시콜콜 논점을 짚어갈 필요는 없지만, "문화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연결 지으면 이 문제는 오늘 우리 토론에서도 핵심적으로 중요한 사안이다. 내가 끌고 들어오고 싶은 것은 어떤 학문적 입장이 아니라 '경험'이다. 역사상 인간의 경험, 특히 광복 이후 정치적으로 독재와 권위주의를 거치고 경제적으로 빈곤과 궁핍의 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른 최근세 한국인의 경험은 그 문제에 아주 유익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한국에 제도로서의 정치민주주의가 도입된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문화적 열망이나 지향성이 선행요건 혹은 전제조건으로 미리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문화가 정치발전을 가져온다는 주장에 유보를 달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정치가 정치발전을 가져온 것도 아니고 정치발전이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문화적 변화를 유도한 것도 아니다. 4.19 학생봉기에서 6.10 항쟁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를 향한 근 30년의 사회적 투쟁이 발생한 것은 정치발전 아닌 '정치의 실패' 때문이며 그 실패에 대한 국민적 불만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불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어떤 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와 열망의 좌절'에서 발생하는 것이 불만이다. 바꿔 말하면 '민주주의를 향한 욕구와 열망의 좌절'이 독재와 권위주의를 척결하려는 저항의 도화선에 불을 당긴 것이다. 이 욕구와 열망은 앞서 우리가 채택한 문화의 정의 가운데 언급된 '가치, 태도, 신념, 지향성'에 해당하며, 그 점에서 그것들은 '문화적 요인'이라 할 수 있다.

경제발전 역시 우세한 열망이 작동했다
▲ ⓒ프레시안

1948년 소위 '민주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당시의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는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할 문화적 전제조건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독재와 권위주의를 거치는 동안 정치의 실패 앞에서 한국인이 경험해야 했던 불만과 좌절감이 민주주의에 대한 집단적 지향의 열망을 촉발하고 이 열망이 정치변화를 유도해내게 된다. 6.10 항쟁에 이르기까지의 민주화 투쟁기는 정치실패에 대한 국민적 불만이 절정에 달하면서 민주주의를 실현해보자는 열망이 다른 욕구들을 압도하는 '우세한 열망'이 되고 "독재나 권위주의보다는 민주주의가 낫다"는 생각이 '우세한 가치관'으로 발현했던 시기이다.

군사정권시기 이후의 경제발전에 대해서도 우리는 유사한 관찰을 내놓을 수 있다. 군사정권기의 경제성장 드라이브가 정치적으로 확보되지 못한 집권 정당성의 문제를 경제성장의 방법으로 해결하고 정치로는 줄 수 없었던 민주적 자유와 평등을 번영과 부의 약속으로 대체하려 한 동기에 지배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새삼 지적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적 발전이 군사정권의 강력한 드라이브와 성장정책의 산물이라고만 말하는 것은 빈곤 탈출을 위해 헌신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을 무시하고 폄하하는 일이다.

굶주림, 빈곤, 궁핍은 왕조시대의 근세 조선인은 물론 식민통치기를 거쳐 6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삶을 숙명처럼 옥죈 거대한 박탈의 조건이었고, 한국인이면 누구나 벗어던지고 싶어 한 부정적 유산이었다. 절대빈곤을 벗어나 삶의 물질적 토대를 개선하려는 사람들의 욕구와 열망은 군사정권에 의한 성장 드라이브와는 별개 차원에서, 성장정책의 개시 이전부터, 강하게 분출되고 있었다고 말해야 한다. 한국의 지속적 경제발전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런 욕구와 열망이다.

문화의 관점에서 말하면 그 열망도 "번영이 빈곤보다는 낫다"라는 가치관의 '우세한 발현' 형태이다. 이런 가치관은, 그것 자체에 대한 평가의 문제를 떠나 근면, 교육, 기강, 성취 등을 높게 평가하는 태도와 지향성을 넓게 대중화해서 경제발전을 견인하는 강력한 문화적 요인이 되게 된다. 우리는 이 부분의 중요성을 망각할 수 없다. 그 열망의 차원, 문화적 가치의 차원을 무시하면 우리는 경제발전의 공로 전체를 군사정권의 것으로 돌리는 오류를 범하게 될 뿐 아니라 경제발전의 요인들을 잘못 분석하고 경제발전을 석연찮게 평가하는 '설명의 빈곤'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기본조건인 '민주주의 문화'는 어디쯤 와 있나

87년 6.10 민주화 대항쟁 이후 20년 우리 사회에 발생한 주요 변화들을 문화의 관점에서 돌아볼 때 그 성찰의 기준, 그것의 준거점이 되는 것은 '민주주의'다. 6.10 항쟁이 사회민주화를 향한 열망의 폭발이었다면 우리의 당연한 관심은 그 시점 이후 20년 동안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되었는가, 사회변화의 큰 덩치들은 그 민주화의 열망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민주화와 관련해서 무엇을 이루었고 무엇을 미완의 과제로 남기고 있는가, 이런 문제들에 대한 문화적 반성일 것이다.

민주주의의 성장과 연결지어 말하면, 이 시기 가장 괄목할만한 (물론 아직도 많이 미진하지만) 문화적 발전은 냉전문화의 이완, 검열제도의 점진적 폐지, 인권(특히 여성인권)의 상대적 신장, 문화적 표현과 향수수단 의 확대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냉전구조는 정치적 군사적 대결체제일 뿐 아니라 정신상태이고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그것의 느린, 그러나 의미 있는 '이완의 시작'은 중요한 사회문화적 성취다. 검열제도는 독재와 권위주의 체제에서 예술, 언론, 출판, 교육, 사상, 표현을 전방위적으로 옥죄고 재갈 물렸던 거대한 가위손이고 망치이며 몽둥이다. 물론 그 가위, 망치, 몽둥이가 지금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민정부 3대 15년은 검열폐지를 향한 노력이 지속적으로 진행된 시기이며, 이런 노력이 국민의 문화적 활동에 상당한 활기를 불어넣게 되었다는 사실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

인권은 흔히 정치적 개념으로 이해되지만 사람의 기본 권리와 품위에 관련된 중요한 문화적 가치이고 원칙이기도 하다. '문화적 권리'(cultural rights) 개념의 핵심은 기본인권이다. 한국은 인권국가의 반열에 들기에는 이제 겨우 100리 길의 30리 쯤에 와 있다. 그러나 20년 전까지의 상황에 비하면 그 30리 진행도 상당한 성취다. 표현과 향수 수단의 확대에서 주목할 것은 시민들의 자기표현 방식과 수단, 문화적 향수기회 등의 확대가 문화민주화의 길 한 쪽을 열어놓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모든 평가들은 20년 전까지의 상황에 견준 상대적 평가다.

그런데 오늘 내가 강조하고 싶은 성찰의 요목은 좀 다른 부분에 있다. 6.10 항쟁 20주년에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우리 사회가 지난 20년간 민주주의의 지탱과 발전, 그것의 안착과 착근을 위한 기본조건들을 얼마나 성숙시켜 왔는가라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유지할 기본조건들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은 '민주주의 문화'이다. 민주주는 민주주의 문화의 성숙 없이는 언제든지 퇴행과 반전, 타락과 도괴의 위험 속으로 내몰린다.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 능력, 우리에게 있는가?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가 충분히 발전해서 더 이상 퇴행이나 반전의 위험이 없는 '안전지대'에 들어와 있나? 천만의 말씀이다. "이제 민주주의는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선거도 치르고 정권교체도 일어나고 국회도 돌아가니까 이제 한국 민주주의는 안전궤도에 들어섰다고 그들은 생각하는 것 같다.

20년만에 민주주의를 일구어낸 나라는 역사상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단기간에 성숙하는 것이 아니다. 제도와 법률만으로 민주주의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민주헌법이 없어서 우리가 반세기동안 민주주의를 못했던 것이 아니다. 제도라는 하드웨어는 민주주의의 외피를 걸치고 있으면서 실질 내용은 전혀 민주주의가 아니었던 것이 건국 이후 근 50년간의 '한국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정치제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문화'이다.

문화로서의 민주주의는 정치민주주의를 밑바닥에서 떠받치고 민주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일련의 가치, 태도, 행동방식, 신념, 정신상태의 총합이다. 이 총합은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시민의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에 '시민적 역량' 혹은 '시민적 덕목'(civic virtues)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자율성, 자발성, 합리성이라는 민주사회의 3대 원칙을 내면화하고 실행할 능력, 이성적 사고와 판단과 비판의 능력, 개인 이익과 공익을 조화시키고 개인적 자유와 집단의 요구를 중재할 연동적 가치를 가동하는 능력, 공동체적 선린의 정신, 이해와 신뢰의 능력, 사회정의에 대한 감각…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 민주사회를 지탱하는 시민적 역량이고 덕목이다.

역량은 열망과는 다르다. 열망이 불꽃이라면 역량은 그 불을 계속 지피고 이어나갈 수 있게 하는 기름과도 같다. 열망의 폭발이 일시적 사건이라면 역량은 지속의 힘이다. 열망이 아무리 강해도 그것을 지킬 뒷심이 없다면 열망은 한 때의 불꽃놀이로 끝나고 만다. 민주주의는 그것을 하겠다는 열망과 그것을 지킬 수 있는 능력, 그 두 가지를 모두 필요로 한다. 6.10 항쟁은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폭발했던 사건이다. 그러나 그 폭발 다음은 어찌 됐나? 그 폭발은 한 차례의 불꽃놀이로 끝난 것은 아닌가?

역사의 생략은 공짜가 아니다
▲ ⓒ프레시안

이것이 6.10 항쟁 20주년에 우리가 던져보아야 할 가장 중요한 성찰적 질문이다. 지난 20년간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속시킬 시민적 역량과 민주사회를 지탱할 시민적 덕목을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키워왔는가? 정부는 정부대로, 민간영역은 민간영역대로, 그 역량의 강화를 위해 필요한 노력을 경주해 온 것인가? 90년대 이후 3대에 걸친 이른바 문민정부를 실현하지 않았는가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내가 보기엔, 그 문민정부의 어느 정권도 민주주의 '문화의 성숙'이야말로 문민정권의 지속적인 기본 과제라는 인식을 가지고 거기 필요한 정책을 개발 시행한 적이 없다. 왕조시대에서 식민시대를 거치고 광복과 함께 나라를 세우게 된 순간까지,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시민적 사회적 준비도 훈련도 없이 덜컥 민주주의를 도입해야 했던 것이 우리의 최근세 역사이다. 전통사회에서 근대적 민주사회로 이행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이행은 거대한 사회변화이며, 역사상 세계 어디에서도 쉽게, 무탈하게, 큰 비용 들이지 않고 그 이행을 성취한 나라는 없다.

현대 한국은 그 이행기를 거치지 않은 '생략된 역사'의 나라다. 그러나 이 생략은 '공짜'가 아니다. 4.19 학생봉기에서부터 6.10 항쟁에 이르는 긴 기간의 희생과 고통을 우리는 그 생략된 역사에 대한 댓가로 지불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그 '이행기'에 있다는 역사적 인식이 필요하다. 지난 20년, 더 정확히는 15년 동안, 문민정권들은 무엇보다도 민주사회의 기본 토양이 되는 민주주의 문화를 성숙시키기 위한 정책적 투자를 아끼지 말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생략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 없었고, 그 생략을 메워 민주주의의 토양을 단단히 다지는 일이 현대 문민정권의 역사적 과제라는 인식을 투철한 수준에서 확보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의 과제인 '시민적 역량과 덕목의 성숙', 그러나…

시민적 역량과 덕목을 성숙시키는 문화적 과제는 정부라는 대표적 공영역만의 과제가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그것은 민간영역 곧 사회 전체의 과제다. 신문, 방송, 잡지, 인터넷을 포함한 매체영역과 중등 및 고등교육의 영역, 가족을 비롯한 친밀집단과 기업조직 등의 사영역, 수평적 연결망으로서의 시민사회 영역-민주주의의 문화를 성숙시키는 일은 이 모든 영역들에 지워진 사회적 과제다.

검열폐지와 표현의 자유 신장은 지난 15년의 중요한 성취라고 앞에서 말했지만, 우리 사회의 지배적 언론조직들이 그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보라. 문자 그대로의 '자유의 타락'을 우리는 보고 있다. 언론매체는 교육과 함께 민간영역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공영역에 들어간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지배적 언론조직들은 객관성과 공정성의 준수 같은 공영역적 책임을 방기하고 몰수하는 것을 언론의 자유라고 생각하는 극단적 이익집단으로 타락해가고 있다.

그런 신문들에 대한 혐오와 불신이 젊은 세대를 인터넷으로 몰리게 하는 이유의 하나다. 그러나 인터넷 사이트, 포탈, 네티즌, 댓글, 유씨씨(UCC) 등으로 요약되는 한국의 인터넷 문화가 민주주의 문화의 성숙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우리는 인터넷의 강점에 대한 예찬보다는 그것의 약점과 기본적 한계를 깊이 사고해보아야 하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 상업주의에 빠진 포탈들은 그 영향력의 대단한 증대에 비해 공영역적 책임과 기능을 수행할 의지가 없어 보이고 방법도 빈곤하다.

댓글은 합리적, 비판적, 이성적 담론과는 먼 거리에 있고 대화와 토론의 장도 아니다. 사용자 생산 콘텐츠는 개인들의 취미생활이나 여가활동을 다양화하는 데는 기여하지만 아마추어리즘을 넘어 독창성과 신뢰성을 가진 유용한 지식/정보를 생산하는 데는 역부족이다. '네티즌 민주주의'가 민주주의가 되자면 그 네티즌은 자유와 책임을 균형 잡는 시민적 역량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인터넷이라는 유용한 매체의 한국적 사용 수준은 아직은 오락, 소비, 잡담, 쓰레기 퍼뜨리기, '공짜추구' 위주의 원시 단계에 머물러 있다.

교육 영역, 진보진영 모두 '시민교육'을 위한 노력이 부족하다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의 영역에서, 나는 지금껏 시민적 덕목을 체득하게 하는 교육과목이나 과정의 유효한 실행을 본 일이 없다. 민주사회에서는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은 교육의 중대한 과제이고 사회적 책임이다. 어떤 조사를 보면 지금의 20대들 가운데 6.10 항쟁을 안다는 사람은 응답자의 40%가 채 안 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이는 우리의 중요한 사회적 기억들이 교육을 통해 전달되고 있지 않다는 얘기다.

중등 교육현장의 비민주성은 말할 것도 없고 교육방식 자체가 자율성과 자발성을 길러주고 합리적 사고력과 비판력과 상상력을 키우는 방식이 아니다. 이런 능력들은 개인이 어떤 직종에 진출하느냐에 관계 없이 그의 사회적 경제적 활동을 평생에 걸쳐 지원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능력이고, 그가 책임 있는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사는 데도 필수적 능력들이다. 한국 교육은 개인도 잘 키우지 못하고 시민도 키우지 못하는 교육이다.

나는 민주주의의 원칙과 가치와 역사를 가르치고 시민적 덕목을 체득하게 하는 '시민교육'을 필수교양이나 일반교육 과목으로 설정하고 있는 대학을 알지 못한다. 대학은 기능인만을 기르는 곳이 아니다. 사회 전 영역에서 장차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될 사람들을 기르는 곳이 대학이다. 지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시민적 역량을 키워주는 일이 참으로 필요하다. 대학들은 대학의 사회적 존재이유를 좀체 사고하지 않는 정신적 나태에 깊이 침몰해 있다.
▲ ⓒ프레시안

정치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좋은 사회'(good society)를 만들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다. 좋은 사회는, 간략하게 말하면, '사람이 사람으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다. 민주주의의 문화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정치민주주의의 기본 토양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그것이 함양하고자 하는 '문화적 가치'들이 좋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본질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 없이는 '좋은 삶'을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동시에, 예를 들어, 내가 밤중에 공원에 나가도 칼에 찔리고 지갑을 강탈당할 염려가 없는 신뢰의 공간 없이는 개인의 웰빙도, 행복도, 좋은 삶도 가능하지 않다. 그 신뢰, 돌봄, 상부상조의 공간이 '공동체'다. 근년 들어 한국인의 상당수를 휘어잡고 있는 '웰빙'은 개인의 건강이나 돈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공동체의 건강을 필요로 한다. 개인의 이익과 공익을 조화시키고 개인의 자유와 집단의 요구(책임, 의무 등)를 화해시킬 가치들은 그런 이유에서도 중요하다. 선의, 돌봄, 신뢰 같은 것은 그런 공생과 공존의 가치다. 비판적 사고능력은 민주사회에서 매우 소중하지만 공동체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적 가치들을 지키고 옹호할 줄 아는 능력도 대단히 소중하다. 어떤 가치의 옹호 없이 좋은 사회는 가능하지 않다.

지난 20년 이른바 진보진영이나 시민단체들이 소홀히 했던 것 중의 하나는 이런 '긍정적 가치의 제시와 옹호'라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중앙정부, 자치단체, 정부기관들의 현시주의 행정과 예산낭비, 허영과 비효율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일은 여전히 필요하다. 그러나 망가진 공동체를 일구고 지역사회 사람들을 활기차게 하는 일, 공동체 프로젝트에 대한 주민의 자발적 참여를 자극하고 아이 키우기에서부터 평생 교육에 이르기까지 풀뿌리 민생을 돕는 일도 필요하다. 이런 일들은 적극적 가치의 제시와 옹호를 요구한다.

가치의 옹호는 정부 정책과 사업에 대한 감시-비판이라는, 지금까지 시민단체와 매체들이 열심히 해온 일과는 전혀 별개 차원의 접근법을 요청한다. 이른바 진보진영이나 비판세력은 좋은 사회의 비전을 내고 그런 사회를 만드는 데 필요한 긍정적 가치들을 사회에 제시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상당수 국민이 시민단체들에 대해 "비판만 하고 대안은 내지 않는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시민단체들은 유념해야 한다. 시민단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사회의 성숙을 위해서 그렇다.

공동성을 확인하게 하는 본질적 가치 내팽개치는 현대인

세계적으로나 국지적으로, 현대 사회의 '문화'는 더 이상 사람들을 결속시키고 묶어주는 구심적 원리가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흩어지고 반목하게 하는 원심성의 원리가 되어가고 있다. 문화 때문에 개인과 개인이, 집단과 집단이, 문명과 문명이 대결한다. 문화적 차이, 특히 종교라는 이름의 믿음의 차이 때문에 살육과 전쟁도 발생한다.

한국 사회 안에서도 신념과 가치, 목표와 이데올로기 등 문화차이로 인한 갈등, 반목, 쟁투는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다. 그러나 한 사회, 한 공동체가 유지되자면 구성원들이 공유할 수 있는 가치들을 제시해주는 문화가 필요하다.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일이 중요하다면 동시에 문화적 공동성(commonality)을 찾고 확인하는 일도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그 공통의 가치, 공동성의 확인을 가능하게 하는 가치들은 무엇일까? 나는 지식인들이 흔히 고리타분하다고 제쳐버리는 상식적 가치들 속에 공동성의 확인을 가능하게 하는 가치항목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 존재의 비수단적 존엄성과 품위라는 가치, 생명존중과 평화애호라는 가치, 자연과 인간의 공생, 선의와 동정과 관용, 공유의 기억과 정의라는 가치들이 그것이다. 이 중에 어떤 것은 윤리적 가치로, 어떤 것은 심미적 가치로 여겨지지만 그러나 내 생각에 그것들은 근본적으로 좋은 사회에 필요한 기본적인 '문화적 가치들'이다.

나는 이런 문화적 가치들이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영역에 살아 있어야 하고 옹호되어야 하는 '본질적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어떤 것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적 가치가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라는 점에서 본질적 가치다. 문화도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문화적 가치에는 수단적 가치와 본질적 가치가 있다. 문화차이와 이해관계의 충돌 때문에 사회가 쪼개지고 풍비박산이 나는 시대일수록 사회는 구성원들을 묶어줄 공통의 문화적 가치들을 찾아야 한다. 그 공통의 가치는 누구도 거부하거나 부정하기 어려운 본질적 가치들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본질적인 것일수록 잊어버리고 내팽개친다. 그래서 본질적 가치의 환기와 확인이 더욱 필요하다.

지난 20년은 우리 사회가 시장 세계화, 시장근본주의, 소비와 오락문화, 기업문화(corporate culture), 광고, 디지털 신매체 등에 의해 상당한 사회경제적 문화적 변화와 변동을 경험한 시대이기도 하다. '한류'를 비롯한 영상문화와 대중문화의 급격한 성장, "문화를 팔자"라는 문화산업의 발전도 주요 변동에 속한다. 다민족사회의 도래도 주요 현상이다. 그러나 한정된 시간에 이 모든 사항들을 다 언급할 수는 없다. 다만, 현대 한국인을 나포하고 있는 몇몇 정신상태(mentality)와 가치의 전도현상에 대한 얘기는 빼놓을 수 없다.

본질적 가치 대신 공포와 선망이 자리잡은 '가치전도 사회'
▲ ⓒ프레시안

'정신상태'는 우리가 내린 문화의 정의 가운데 일부다. 여기서 짚고 싶은 것은 지난 약 10년 사이에 우리 사회에 퍼지고 있는 공포의 문화와 선망의 문화다. 이들 두 가지 문화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공포의 정신상태가 결정적으로 대두한 것은 97년 금융위기 때의 '노숙자' 현상에서부터지만, 고용 불안과 비정규직의 일반화, 항시적인 실직의 위험, 사회적 열패자로 전락할 가능성의 상존…이런 불안과 두려움은 지금도 상당수 한국인들을 공포의 문화 속으로 밀어넣고 있다.

한 예로, 대학 졸업자들이 안정적 직장을 얻어 정착하기까지에는 7~8년, 길게는 10년이 걸리는 수가 있다. 그들도 일종의 노숙자다. 고급 인력들의 인생에는 집 없음, 배우자 없음, 직업 없음의 '3무'를 특징으로 하는 유랑과 방황의 백수시대, 혹은 '도시유목민'의 한 시절이 인생의 불가피한 한 단계처럼 도입되고 있다. 어떤 이는 이 기간을 두고 '오딧세우스 시기'라고 명명한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10년을 방황해야 했던 오딧세우스 이야기에 빗댄 것이다.

'선망의 문화'도 있다. 지금 우리 사회의 한 쪽에는 높은 연봉과 물질적 성공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그 반대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있다. 매체들은 눈만 뜨면 '억대 연봉'의 사람들을 만인의 '모델'로 추어올리면서 그들처럼 되지 않으면 바보, 무능력자, 열패자라는 듯이 일방적인 '성공의 서사'를 퍼뜨린다. 소비의 신화는 이제 한국이 풍요사회다, 풍요사회에서는 누구나 맘껏 소비할 수 있고 그래야 인간 품위가 올라간다는 식의 신화를 확산시킨다.

한 쪽에는 불안과 공포와 방황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성공, 소비, 풍요의 신화가 있다. 문제는 이런 양극사회에서 사람들이 "나도 뒤쳐질 수 없다"는 강박에 짓눌리고 성공서사의 '모델'을 따라가려는 '선망의 문화'에 사로잡힌다. 젊은 여성들 사이의 '성형중독' 현상도 신데렐라라는 이름의 성공서사가 퍼뜨리는 선망의 문화에 속한다. 나는 지난 20년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키려는 시민문화를 잘 기르지 못한 요인의 하나가 이런 선망과 공포의 문화에 의한 사회의식의 마비에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 좋아하네, 잘 살고 봐야지"라는 것이 지금 대다수 한국인을 지배하는 생각이고 정신상태다. 현대 한국인들 가운데 '개발주의자' 아닌 사람은 소수의 소수에 불과할 듯 싶다.

잘 살아보자는 열망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병들고 굶주리고 아픈 사람에게는 '정치적 자유'란 것이 사실상 무의미하다. 경제발전은 사회발전을 이끄는 중요한 견인차의 하나다. 소위 진보진영과 민주화 세력은 경제발전이나 번영을 평가절하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는 두 갈래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경제발전은 정치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좋은 삶을 향한 길의 하나이고 수단이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경제발전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경제적 가치를 유일한 가치로 올려세우는 사회는 수단과 목적의 자리를 뒤바꾸는 가치전도 사회가 된다. 둘째,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은 적어도 이제 우리에게는 어느 것이 먼저다 아니다의 선후 문제가 아니라 함께, 동시에, 추진해가야 하는 과제다. 정치발전과 경제발전은 사회발전을 이끄는 두 개의 수레바퀴다. 두 바퀴의 어느 하나라도 망가지면 수레자체가 엎어진다. 사회발전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발전'이다. 경제적 가치는 이 인간발전을 위한 수단적 가치다.

우리는 앞에서 수단으로서가 아닌 목적으로서의 '본질적 가치'를 말했는데, 그 본질적 가치들은 '팔아먹을 수 없는 가치'라는 점에서 경제적 가치가 아니고 시장가치도 아니다. 물론 팔아먹을 수 있는 문화도 있다. 문화산업은 문화를 파는 산업이다. 그러나 팔아먹을 수 없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사회는 경제발전도, 문화산업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본질적 가치는 경제발전에 목표와 방향을 주고 번영사회를 안내하는 화살표와도 같다. 그 화살표에는 "무엇을 위한 경제발전이고 번영인가"라는 질문이 새겨져 있다.

문화가 전문적 활동이 아니라면 결국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

문화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것은 오늘 우리의 궁극적 질문이다. 지금까지 그 질문을 염두에 두고 이런저런 얘기들을 한 것 같은데, 요약을 위한 요약을 제시하자면 이렇다.

△ 민주사회를 발전시키자면 민주주의의 문화를 성숙시켜야 한다. 시민문화의 토양 없이는 민주사회가 가능하지 않다.

△ 사회가 풍비박산을 면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공유할 공통의 문화적 가치들을 부단히 찾고 확인해야 한다.

△ 경제발전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좋은 삶을 위한 수단의 하나이다. 경제적 가치도 수단적 가치이다. 사회발전의 궁극 목표는 인간발전이며, 이 목표를 안내하는 것이 본질적인 문화적 가치이다.

이 요약은 지난 20년에 대한 문화적 성찰의 주요 내용이지만, 내 생각에는, 문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견 제시이자 시사이기도 하다. 문화는 사회의 어느 한 영역이 전담하는 것이 아니고 지식인, 문화인, 교육자들만의 전문적 활동도 아니다. 일어난 일들을 성찰하고 사회발전의 방향을 안내할 가치들을 확인하며 태도변화를 유도하고 삶의 목표와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문화의 할 일이라고 한다면, 그 일은 결국 사회 모든 분야에서 모든 사람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미완성, 문화적 민주화가 동반되지 않았기 때문

▲ ⓒ프레시안

여건종:
도정일 선생님은 제가 문화에 대해 가지는 생각과 판단에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오늘 발표한 내용을 포함해서 대체로 도 선생님의 말씀에 동의하고 공감을 가지는 입장이다. 그래서 오늘 제 토론이 논쟁이나 반론의 성격을 갖기는 어려울 것 같다. 선생님이 거론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제 의견을 얘기하고 반론의 성격을 가지는 몇가지 질문을 제기하겠다.

오늘 강연 제목은 '문화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이다. 문화는 일상 생활에서 다양하게 정의되고 쓰인다. 문화연구를 전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정의가 다르다. 그런데 특히 문화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부분에서는 더욱 정의내리기 어렵다. 가령 정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경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상대적으로 대답하기 쉽다. 또 문화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도 일반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얘기하기가 어렵다. 문화라는 개념 자체가 굉장히 여러 가지 이론적 배경을 가지고 등장하기 때문이다.

'문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불편한 질문이다. 문화라는 행위 영역이 일반적으로 잉여적, 부차적, 때로는 장식적인 의미로 많이 쓰인다. '좋긴 좋은데 없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많다. 대체로 선생님이 한 얘기, 특히 우리 사회가 지난 20년을 거치며 경험한 것과 관련한 말씀은 문화에 대한 이런 일반적인 생각에 대한 반론의 성격을 가지고 시작한 것 같다.

즉 문화적 민주화가 경제, 정치적 민주화의 전제조건, 혹은 실천조건이 될 뿐만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민주화가 하나의 수단으로서 궁극적으로 가야 될 지향점으로서의 문화를 말한 것 같다. 그것을 한마디로 얘기한다면 일반 사람들이 보다 주체적이고 자유롭고 성숙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문화적 민주화가 동반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가 아직도 미완성 상태에 있다는 선생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특히 교육, 매체의 영역에서 교육에서는 민주적 시민을 양성할 수 있는 기능을 완전히 포기한 상태고, 미디어는 공공영역으로서의 역할을 방기하고 사적 이해관계를 실현하는 이익집단, 권력집단으로 전락했고,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는 합리적, 비판적 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 기능을 상실하고 독창성이나 신뢰성을 갖추지 못한 오락과 소비의 기제로 전락했다고 평가했다.

대중을 통하지 않고선 민주적 개혁도, 공동체적 삶의 혁신도 불가능

서구에서 근대화와 민주주의가 함께 등장했을 때 새로운 근대 제도들, 의회, 투표권, 시장 등의 제도적 조건만 가지고 근대 민주주의가 등장했던 건 아니었다. 굉장히 점진적이었지만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시민 주체, 즉 새로운 인간을 만드는 과정이 시민사회의 밑바닥에서부터 서서히 형성됐다. 길게 보면 300~500년간의 과정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처럼 근대를 식민지 경험을 통해 위로부터 이식받고, 해방 이후 압축 성장을 통해 근대를 성취한 나라에서는 밑으로부터 시민 주체를 형성할 수 있는 역사적 조건과 과정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문화적 민주화는 무엇보다도 밑으로부터의 시민 주체를 형성해나가는 과정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오늘 상황과 관련해 말하면 대중을 계몽된 대중, 주체적 대중, 성숙한 대중으로 만드는 것이 민주화 20년 이후 앞으로의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된다고 본다. 그래서 오늘의 주제인 '문화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하면 "새로운 대중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라는 문제로 환원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대중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민주적 개혁, 공동체적 삶의 혁신도 가능하지 않다. 이 점에서는 도 선생님과 제가 조금 의견을 달리 한다. 도 선생님은 대중에 대해 주로 부정적인 평가가 많은 것 같다. 좌파 엘리트주의적 태도와 매우 가깝지 않은가 생각한다. 오늘 말씀하신 것 중에는 인터넷에 대한 비판적 태도, 대중영역애서 생산되는 문화 생산물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 같다. 대중 속에 들어가기보다는 대중을 대상화시키고 꾸짖고 질책하는, 대중과의 거리두기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즉 대중이 실제로 무엇을 생각하고, 즐기고 사는지, 대중의 삶을 지탱하고 견인하는 상징적 자원은 무엇인지에 대한 공감적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이런 관점에서 선생님이 특히 앞으로의 민주화를 위해서 시민적 역량과 덕목이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현재 우리사회의 대중 문제와는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 듣고 싶다. 대중을 주체적 시민, 자율적 인민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대중이 되어 대중 안으로 들어가, 같이 문화적 매체와 제도적 조건들을 만들려는 노력을 해야 된다는 생각이다.

공포의 문화 속에 경쟁 담론이 존재한다
▲ ⓒ프레시안

두 번째는 시장에 관한 것이다. 시장사회, 혹은 선생님이 쓰신 용어로 시장전체주의에 관한 것이다. 이것을 특히 최근 5~6년간 도 선생님께서 가장 많이 강조하는 부분이다. 만약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민주화되는데, 특히 문화적인 관점에서 가장 위협적인 요소를 하나 든다면 시장의 문제, 시장의 지배라고 본다. 발전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모습을 바꿔가는 근본적인 세력으로서의 시장 논리의 지배를 말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된 민주주의의 문제는 발전된 자본주의 문제와 매우 깊이 연관돼 있다. 선생님이 오늘 발표에서는 시장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많이 거론하지 않았지만 우리 사회의 부정적 징후로 포착했던 '공포의 문화'와 '선망의 문화'가 나는 정확하게 자본주의의 문제라고 본다.

즉 시장 사회에서 지배적 헤게모니가 어떻게 작동하고, 그것을 통해 대중을 지배적 헤게모니 속으로 어떻게 동원시키느냐는 문제에서 공포와 선망의 문화가 잘 작동한다. '공포의 문화'는 시장이 대중을 시장 메커니즘에 동원하는 적극적인 장치다. 선생님은 그것을 고용불안, 실직의 위험, 비정규직의 일반화와 같은 예를 들었다.

나는 보다 더 큰 의미에서 공포의 문화의 핵심에, 후기 자본주의 핵심적 담론으로서 경쟁 담론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경쟁이 절대적 가치가 되면 왜 경쟁을 하는가라는 질문이 배제되고, 그 자리에 어떻게 하면 경쟁에서 이길 것인가가 절대적인 명령이 된다. 특히 서구 사회보다 후기 자본주의 문제를 더욱 심각하고 파괴적으로 경함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이 명령은 더욱 잘 작동한다. 절대적인 명령 속에서 대중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시장 사회 속으로 동원되고 이 명령에 '네'라고 대답하면서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이성의 마비, 시장 전체주의가 노리는 결과

선망의 문화도 마찬가지다. 이것 역시 대중의 욕망을 자극하면서 시장 가치를 내화시키고 비판적 관점을 무력화시키고 이를 통해 시장자본주의가 스스로를 강화시키고 재생산해나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공포의 문화와 선망의 문화는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선생님은 이런 상황을 오래전에 '시장 전체주의'라고 표현했다. 시장 전체주의는 정치적 전체주의와 마찬가지로 대중을 훈육하고 동원하는 체제다. 정치적 전체주의와 다른 점은 우리에게 자발적인 형태로, 내화된 욕망의 형태로 찾아온다는 것이다.

이것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사회적 이성의 마비다. 대중의 문제를 얘기하고, 민주적 문화의 가능성을 얘기할 때 현재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사회적 이성의 마비다. 결국 대중이 스스로의 삶을 주체적, 자율적이고 성숙하게 영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한다. 곧 대중이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능력, 현실에 참여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현 단계 한국 사회의 민주화 과정에서 문화적 민주화를 강조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질문을 정리하면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대중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이다. 또 한 가지는 오늘 선생님의 발표가 대체로 문화적 가치라는 용어하에 상당히 포괄적인 인간적 가치들을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구체적인 질문에서 실제로 실천할만한 구체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관점에서 좀 더 몇 가지 예를 들어서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얘기해줬으면 한다.

'문화운동' 보다는 '문화로 하는 운동'을 했던 시대

▲ ⓒ프레시안

정희섭:
도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올해 있었던 일들을 생각했다. 문화를 전문적으로 공부했다기보다는 문화운동이라는 영역에서 일했던 사람으로서 올해가 20주년이다 보니 문화운동을 했던 여러 진영에서 과거를 돌아보고 앞일을 전망하는 토론을 많이 가졌다.

토론회에 나가서 내가 주로 이야기한 것은 지난 20년을 되돌아봤을 때 여성, 환경운동의 성장과 발전에 비해서 문화운동은 별로 나아진 게 없는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여성이나 환경운동 쪽에서는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20년 전과 비교해 볼 때, 환경의 중요성이나 양성평등 의식 등에 대해서 활동가 뿐 아니라 시민사회 내, 심지어 기업 내부, 국민들도 일상생활에서 중요하게들 생각하고 제도화도 많이 돼 있다. 그런데 과연 문화운동은 문화가 참 중요하고 정치, 사회, 경제 등 네 분야 중 한 분야가 아니라 네 분야를 끌고 가는 기본적인 지향이자 가치여야 된다는 인식을 얼마나 확산시켰는가라는 점에서 반성을 많이 했다.

그 이유를 생각해봤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긴 했지만 문화운동이 출발할 때 시대적 한계가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80년대 초중반에 문화운동에 대한 글을 쓰면서 '문화운동'이라고 할 때 '문화'보다 '운동'에 방점을 찍어야 된다고 주장한 적 있었다. 실제로 그 사이에 문화운동은 문화보다는 운동에 방점을 찍었다. 냉정하게 뒤돌아 볼 때 문화운동을 했다기보다는 '문화로 하는 운동'을 하지 않았나 반성한다.

도 선생님 표현대로 한다면 80년대까지는 우리 사회의 우세한 열망이 '정치적 민주화'였기 때문에 그 우세한 열망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된다고 하는 쪽으로 문화를 지나치게 제한하지 않았나 반성을 하게 된다. 그 노선이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까지 우리 사회는 정치적 민주화가 해결되지 않으면 문화가 문화로서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지하나 김민기의 예를 들 것도 없다. 피카소라는 이름의 크레파스가 있었다. 화가 피카소가 6.25때 학살을 다룬 그림을 그린 혐의가 있었기 때문인지 피카소라는 상표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회사 사장이 기소된 적이 있었다. 유명한 코미디언이었던 곽규석 씨가 진행 도중 '그림 참 피카소처럼 좋네요'라고 했다가 조사받은 적도 있고. 드라마 배역 중 한명의 별명이 피카소였다는 이유로 해당 PD와 작가가 조사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가하면 이만희 영화감독은 <7인의 여포로>라는 영화에서 등장하는 북한군을 너무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었고, 이희재라는 만화가는 6.25를 다룬 만화에서 북한군을 미남으로 그렸다고 탄압받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시절에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문화를 이야기하면서 정치적 민주화를 달성하지 않고선 문화가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새로운 문화운동은 어떤 길로 가야 할 것인가?

그래서 요즘 흔히 쓰이는 표현을 빌면, 문화의 공공성을 실현하기 위해 당시의 최고 열망인 민주화의 실현을 위해 문화가 운동에 복무하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반성하는 뜻에서 말한다면, 요즘 얘기하는 문화권 보다는 정치적 자유, 노동기본권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문화의 창의성 보다는 실용성, 심하게 비판하면 운동 실천, 즉 선전선동이나 조직 작업에 활용하는 문제를 더 생각한 게 사실이다. 또 문화의 다양성보다는 이념성에 기반을 둔 문화를 강조했고, 개방성 보다는 민중적 입장, 실천적 입장을 강조했다. 세계적 보편성보다는 민족 전통성에 기울었다.

이렇게 지난 시절의 문화운동에 대한 반성 위에서 요즘 고민하고 있는 대목은 이런 것들이다. 도 선생님의 주장에 찬성하다. 그리고 올해 여러 토론 자리에서, 이제 정말 새로운 문화운동이 필요하다. 그것은 문화가 사회발전의 목표이자 원리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좀 더 소박하게 얘기하자면 문화의 중요성과 가치를 확산시키는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도 선생님이 내리신 문화의 정의, 지향점과 맞다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들이 아직은 하나의 당위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도 선생님 말씀대로 문화가 네 분야 중 하나가 아니라 네 분야의 기본적인 토대고 가치 지향성이 돼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맞는 말이지만, 그렇게 가도록 해야 하는 것이지, 문화의 정의가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새로운 동력은 어디에서 나올 수 있을까
▲ ⓒ프레시안

그러면 어떻게 그 길로 갈 수 있겠는가? 제 식으로 표현하면 새로운 문화운동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사실 문화가 중요하다는 말은 요즘에 처음 나온 게 아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넘어가면서 많은 이들이 '문화의 세기가 오고 있다'든지, '삶의 질'이 중요하다는 얘기도 많이 했다. 삶의 질을 얘기했던 배경에는, 삶의 질을 높이려면 문화적인 요소가 많아져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IMF를 거치면서 그 '삶의 질'에 오히려 문화가 배제됐다. 일자리, 학력, 학벌이 더 강조되고 명품, 비싼 공연처럼 문화적 양극화, 품위와 장식으로서의 문화, 또는 엔터테인먼트서의 문화만 너무 얘기되지 않았나. 국가 정책의 측면에서는 문화산업만 중시했다.

그래서 문화가 제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화운동이 필요한데, 그 동력은 어디서 나올 것인가가 내가 고민하는 부분이다.

도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운동의 동력은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와 열망이 좌절돼서 나온다는 게 아닌가. 경제발전, 정치발전의 동력이 있어서 결국 산업화와 민주화를 가능하게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민하는 문화발전을 위한 동력은 어디서 나올 것인가. 문화에 대한 욕구와 열망은 어느 정도인가가 고민이 된다.

그래서 문화에 대해서 얘기하다가도 어디서 무엇부터 해야 할 것인가라는 고민이 든다. 1980년대 까지는 문화에 대한 욕망과 좌절이 있었다. 황당무계한 현실 속에서 네 분야 중 하나 정도가 아니라 거기에 끼지도 못하게 완전히 배제됐었다. 이른바 순수를 표방하는 어용적인 주류문화를 제외하고는 문화로서조차도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 그 당시 문화의 현실이었다.

그래서 문화운동쪽에서는 한편으로는 '문화주의', '문화도구주의'를 경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예 문화가 투쟁의 무기라고 선언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당시가 문화가 존재할 수 없었던 사회적 토양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검열이 완화된 것이 문화운동의 아주 중요한 성과라고 하지만 검열이 제도적으로 없어진 것은 1999년이다, 10년 밖에 안 됐다. 음반에 대한 사전 심의가 없어지면서 실질적인 검열이 사라졌다. 그 과정에서 온몸으로 노력했던 박인배나 정태춘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문화운동의 경험은 억압에 대한 저항이 주된 것이었다. 도 선생님 말씀처럼 긍정적 가치를 확산시키고 제안할 수 있는 문화운동의 역량은 부족하다. 문화가 어떻게 자신의 가치와 중요성을 입증 받을 수 있을지 고민되는 부분이다.

일상 속에서 문화운동의 동력을 찾을 수 있을까?

한편 문화의 중요성을 문화운동 하는 사람들, 시민운동 하는 사람만 얘기하나? 그렇지 않다. 사실 정치, 경제하는 사람들도 문화 아주 많이 얘기한다. 예를 들어 코미디 같은 얘기이긴 하지만, 요즘 언론을 타고 있는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 문화에 투자를 정말 많이 한 것이다. 비록 그는 특정한 여인이 매개가 되기는 했지만, 문화의 중요성을 안 것이다.

어제 경주에서 열린 모 행사에 가서 강의를 했다. 행사가 열린 곳은 모 호텔이었는데 거기서 우연히 시를 전공하는 국문학자를 만났다. 어떻게 오셨냐고 물으니 울산 포항 등지의 대기업 임원들의 연수에서 시에 대해 강의해달라고 해서 왔다는 거다. 그런데 단순히 시에 대해 이야기 듣고 좋은 시 감상하는 수준의 강의가 아니라 임원들이 강의를 듣고 자작시 한편씩 제출하지 않으면 못 나간다고 했다더라.

이렇게 대재벌의 소유자나 CEO 등 기업 경영하는 이들도 문화를 알아야겠다고 나서고 있다. 다시 말해 자본도 자기 나름의 입장에서 문화의 중요성을 많이 얘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국가 또한 비록 문화산업에 치우쳐 있지만 문화의 중요성을 많이 얘기한다. 이제 문화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문화가 중요한가를 놓고 권력, 자본, 시민사회가 경쟁하는 단계가 아닌가.

그런데 중요한 건 국민들이 일상에서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체득하고 실천하느냐다. 아무리 빵만 가지고 살 수 없다고 얘기하지만 IMF 등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가 닥치면 먼저 줄이는 게 문화 부분의 지출 아닌가. 이렇게 문화가 일상생활 속에서는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 오늘 같은 자리에서 문화의 중요성, 새로운 문화운동을 얘기했는데, 어떤 동력을 가지고 시작해야 되는지 고민된다.

도 선생님이 문화 전쟁이란 말을 쓰셨는데, 그 맥락과는 좀 다르게, 자본이나 정치가 얘기하는 문화가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문화는 어떻게 전쟁을 해야 되겠는지에 대해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

'선택하세요'…부드럽게 침투하는 시장 전체주의

도정일: 시장의 가치, 시장의 원리가 한국 사회 거의 모든 영역을 침투하는 것이 10년 동안의 변화였다고 본다. 시장은 매우 중요하다. 시장이라고 하는 현상은 인간 사회 초기부터 있어왔던 빼먹을 수 없는 활동이다. 문제는 현대 사회의 시장은 일상적으로 물건을 살 때의 시장이 아니다. 비인간화, 엄청난 경쟁, 비인간적인 목표의 추구를 전제해야만 가능하다.

몇 년 전 다보스 경제회의가 열렸을 때 소니(SONY)라는 굴지의 기업 회장이 후기 자본주의의 경쟁 체제에 대해 긍정적인 발언을 해야 하는데 그 반대이더라. 자기는 경쟁에 시달려서 아내와 밥 먹거나 음악을 들을 시간도 없다. 계속 생각하고 있는 것이 '달리지 않으면 넘어지는 경쟁 기차에서 뛰어내리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고도의 경쟁도 문제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심각한 것인 시장 원리로 인한 공영역의 잠식과 장악이다.

한국 사회는 뭐가 '떴다'고 하면 정신없이 달려가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뭐든 시장 원리에 의해 경영해야 된다는 사회 인식이 퍼졌다. 대학도 지금 경영한다고 한다. 학교가 시장인가, 기업인가? 기업이면 반드시 이윤을 내야한다. 그런데 교육이나 연구가 이윤을 내기 위한 영역인가? 아니다. 그런데 이윤 동기를 학교 영역까지 끌어 들여온다. 교육만 그런 게 아니다. 공영역이 망가지면 국민 생활이 굉장히 나빠지고 막대한 희생이 발생한다. 돈 아니면 아무것도 안 하기 때문이다.

둘째, 오늘날 시장영역은 경제활동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시민적 자유를 심대하게 침탈, 저해, 위협하고 있다. 내가 시장 전체주의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옛날 정치 전체주의 못지않게 자발성의 외피를 걸친 시장 원리주의가 사상, 표현의 자유를 엄청나게 옭아매기 때문이다. 시청률 경쟁을 왜 하는가? 그래야 하기 때문에, 하지 않으면 광고가 붙지 않으니까 그렇다.

신문, TV 모두 마찬가지다.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 때 매체 조직들은 광고주의 눈치를 살핀다. 마치 옛날에 매체가 권력자의 눈치를 본것 이상으로 이제 돈줄에 눈을 돌리고 있다. 모든 형태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제한이다.

옛날 전체주의처럼 강제하는 형태의 자유의 제한이 아니라 '당신들이 선택하세요'라고 한 뒤 펴는 전체주의다. 다른 말로 '공포의 문화'다. 시장이 시키는 대로 안하면 다 죽는 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라가지 않으면 전부 열패자가 된다며 국민들을 겁박한다. 누가 그러는가? 시장성이다.

당장 교정할 방법, 현재로선 보이지 않는다
▲ ⓒ프레시안

나는 기업인을 존경하고 기업의 선순환적 기능이 충분히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우리가 봐야 할 것은 현대 자본주의와 시장이 이런 선순환적인 자본주의인가 하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 이론의 원조였던 200년 전 아담스미스가 걱정했던 그 모양- 악랄하고 비인간적인 자본주의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이미 국민 상당수가 어쩔 수 없이, 또는 피부로 느끼지 못하니까 시장 원리주의의 침투와 장악에 끌려들어가 있다. 이것이 선망의 문화를 부채질 한다.

사회 진출에서 성공하고 인정 받는 게 나쁜 건 아니다. 열망이 없다면 빈곤에서 탈출조차 못했을 거다. 그러나 문제는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너는 죽는다는 명령이 너무 무의식을 강하게 침투하고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서사, 이야기가 됐다. 시장이라는 힘이 참 강대해서 환상을 준다. 또 번영과 보호의 환상을 준다. 그러나 실제로 거기에는 정치 전체주의 못지않은 감시와 통제의 메커니즘이 있다. 전체주의적 시장 세력의 무분별한 확대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모른다. 우리가 함께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한 시대가 미쳐서 돌아갈 때는 그 상태가 극에 달할 때까지 더 부추겨야 할지도 모른다고 본다. 역사가 그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희생되는 비용의 총량을 비로소 사람들이 느낄 때에만 조금씩 바뀐다. 유럽은 오늘날 같은 세속적 민주주의가 확립돼 더 이상 기독교 교파간 전쟁이 안 일어난다. 과거에는 종교 전쟁이 엄청났다. 몇 십 년씩 계속되지 않았나. 그 경험이 결국 사람들에게 종교를 내버려두면 된다는 것을 알게 했다. 특히 지배적인 종교체계가 있을 땐 그렇지 않은 종파에 대해 끊임없이 탄압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깨달은 뒤 세속주의적 민주주의라는 정치장치 통해 교회를 견제할 수 있었다. 시장 전체주의도 그럴 거라 생각한다. 당장 교정할 방법? 현재로선 보이지 않는다.

원시적인 한국의 인터넷 문화와 '성찰'의 부재

여 교수가 대중 문제를 지적했다. 그런 부분이 있고 아닌 부분도 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대중의 우중주의나 무의식이 아니라 대중을 우중화하는 시장세력과 정치세력이다. 우리도 대중인데, 대중에게 우리가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대중 우중화 세력에 맞서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큰 과제다.

지금 인터넷, 유용하고 필요한 매체다. 그렇다고 내가 누리꾼을 무시하는가? 아니다. 존경한다. 다만 누리꾼은 동시에 시티즌(citizen), 즉 시민이어야 한다. 지금 댓글 수준 가지고는 민주주의가 되지 않는다. 댓글 중에 욕설, 비방, 모함 외에 몇 개나 이성적, 합리적인 대화와 토론이 있나? 인터넷 문화와 매체는 시민적 역량을 기른다는 작업을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

포털 사이트를 봐라. 인터넷 매체, 상업적 포털 사이트를 보라. 그들의 대중적 역량은 엄청나다. 지배적 매체들이 죽어야 될지 모른다. 그런데 포털이 영향력 증대에도 불구하고 공영역적 영역, 공적 이성에 대해 비판을 해도 책임있고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 기르게 하고, 사회에 보급돼야 할 가치가 있는 정보도 내놓으라는 거다. 오락이나 스포츠만 기사로 할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한다.

지금 포털에 들어가 보라. 어떤 여배우 이야기가 나오면 동시에 수십, 수백 개의 기사가 뜬다. 이것을 포털이 수행해야 할 사회적 역할을 완전히 방기하고 있다. 포털은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시장 사회의 섭리라고 한다.

오늘날 한국은 인터넷의 기술적 수준에 비해 사용하는 수준은 원시적이다. 이걸 모른 척 할 수 없다. 진중권이 '애국질 하는 집단'이라고 말한 누리꾼 집단을 상대로 진중권이 외롭게 투쟁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정치, 교육 등 모든 영역에서 대책이 나와야 한다. 민주화 항쟁 20년의 시점에 보면 지금 이 시대, 특히 대학생들이나 젊은이들이 공포의 문화에 시달린다. 대학 졸업하면 어느 직장에 들어갈까 외에는 달리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민주화? 아득한 영역이다. 민주화를 지키기 위한 시민영역? 먼 얘기다. 대학에서 이런 걸 교양과목으로 가르치는가? 그렇지 않다. 한국 사회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젊은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인 사색, 성찰, 비판, 판단의 능력을 길러주는 교육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저는 젊은이를 매도하는 게 아니라 젊은이를 망치는 교육을 비판하는 거다. 젊은이에게 '생각하라'고 하면 백리, 이백 리 밖으로 달아난다. '성찰? 그게 뭐지?'라고 한다.

생각하는 사회를 만들자, 자발성의 문화를 일으켜보자

민주주의 문화, 본질적 가치로서의 문화를 진작시키기 위한 노력을 해야 되는데 거기에 대한 답이 내겐 없다. 다만 이러저러하게 해야겠다며 몇 가지를 생각해보고 그런 일 중 하나를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책 읽는 사회 만들기' 운동을 몇 년째 하고 있다. 이 운동의 목표는 '책을 읽고 교양인이 되자'는게 아니다. 좋은 사회, 생각하는 사회를 만들자는 거다.

11월에 우리 단체에서 '사회적 독서'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려고 한다. 한국은 지금 생각하는 사회가 아니다. 지배 매체들을 보라. 그 매체들이 생각하는 매체인가? 한국은 합리적 담론, 이성적 판단만이 끌고 가는 사회가 아니다. 그러나 사회적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성적 사고력, 성찰력 등이다. 이런 것을 키우고 실천하는 언론이 아니다. 한국 사회를 불행하게 하는 세력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언론이다. 언론이 사조직 되고 이익집단이 됐다. 생각하는 시민, 비판하는 시민을 싫어한다. 대중을 비판하기 보다는 대중을 우중화하는, 바보로 만드는 세력에 대한 저항과 격파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많은 이들은 대학 교육을 받으면 웬만큼 안다고 생각하는지, 무슨 말만 하면 '지금이 계몽시대도 아닌데 이러냐'라고 반응한다. '왜 우리를 가르치려 드냐'고 말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오만한 사람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늘 가르침을 받고 깨치고 생각해야 하다. 상대가 누구이든지 가르침을 받고 배워야 한다.

그런데 지금 젊은이의 정신상태는 '네가 뭔데 날 가르치려 드냐'는 거다. 물론 반발할 수 있다. 기성세대, 지식인들 과거의 죄만 보면 그럴 수 있다. 책 많이 읽고 나쁜 짓 하는 사람 얼마나 많나? 한국 사회를 오도하는 이들 중에 책을 많이 읽은 사람들 참 많다. 책읽는 사회라는 운동을 하고 있지만 책 많이 읽고 세상 망치는 사람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생각하는 사회로의 진화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다. 책 읽는 사회는 '생각하는 사회를 만들자', '자발성의 문화를 일으켜보자'는 거다. '책 읽는 사회'가 돈이 있어서 도서관을 짓는 게 아니다. 그 지역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도서관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중심으로 지역 사회를 일구는 일을 하기 위해서다. 큰일은 아니지만 상당수 시민단체들이 그런 일을 하면서 밑으로부터의 문화적 능력을 키우려고 하고 있다. 이것이 어디로부터 동력을 얻을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 프로그램 중 하나로 말할 수 있겠다.

답답할 정도로 원론적이지만, 결론은 다시 문화다
▲ ⓒ프레시안

이 동력은 여러 군데에서 얻어야 한다.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것, 많은 이들이 동시에 달려들어 바꿀만한 그런 문화 프로그램은 쉽게 만들어 낼 수 없다. 작으면 작은 대로, 소규모성에 주목하길 바란다. 제가 발제에 실은 것처럼 시민단체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비판적 감시는 여전히 중요하다. 중앙정부든 지역정부든 한국의 관료는 현실주의 허례에 완전히 물들었다. 요즘 지역축제들을 보면 자생적인 것도 아니고 그 지역 주민들의 삶이나 문화전통과 별로 관계가 없이 한마디로 허례잔치다. 이런 게 낭비다. 끊임없이 시민단체들이 비판하고, 국민세금의 비효율적 사용에 대한 비판을 게을리 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공동체, 좋은 사회를 만드는데 필요한 긍정적인 가치를 우리 사회에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 20년동안 별로 하지 못했다. 긍정적인, 적극적인 가치의 제시와 옹호가 필요하다. 앞으로 시민단체들이 그런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고 본다. 할 일 참 많다. 시민단체라고 하면 국민들은 '매일 비판하는 싸움단체 아냐?'라고 본다. 싸움꾼들의 집단체로 본다. 대안제시를 하지 않는 게 아닌데, 비판만 한다는 이미지가 형성돼 버렸다.

대안적 사회, 이렇게 만들자고 끊임없이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망한다. 시장세력 등 강대한 지배세력에 맞서서 대안적 가치를 개발하는 것이 시민사회의 영역이다. 맞설 땐 맞서고 어떨 때는 자원도 활용해야 한다. 다만 그 목표와 방향이 올발라야 한다.

문화를 통해 실천 프로그램을 만든다. 아주 근원적인 문제제기, 이것은 답답할 정도로 원론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기술 굉장히 중요하지 않냐. 현재 경제발전이나 부를 창출하는 거대한 과학 영역으로서의 위상은 높다. 그 과학을 가능하게 한 것이 무엇인가? 그건 문화다. 예를 들어 중세 르네상스 때 서구에서는 과학혁명이 일어났다. 그 사람들이 혁명이라고 생각해서 했나? 뒤돌아보니 그런 거다. 그래서 과학혁명이라는 말을 후세에 붙였다.

그 성공의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는가? 거기에는 세속적 인문주의가 있었다. 첫째는 비판적 사고 능력이었다. 당시 세상을 지배하는 천동설이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다. '하늘이 도는 게 아니라 땅이 돈다'고 말하는 건 코페르니쿠스가 해야 했던 진리의 발견이었다. 그 발상은 기존 지배적인 관점이나 세계관에 대해서 비판적 관점을 들이대는 거다. 비판적 사고처럼 과학에 필요한 것이 없다.

긴 혁명을 바라보자

또 독립적 사고가 필요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진리 이외에는 어떤 원리도 인정할 수 없다는 정신이다. 과학이 도그마와 무엇이 다른가? 도그마는 끝까지 그것이 진리임을 주장한다. 과학의 진리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면 포기하는 것이다. '미안합니다. 제가 틀렸습니다'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 과학의 정신이고 학문이다. 그런데 아직 교회의 정치문화적 지배력이 막강했던 시절에 이런 주류에 저항하는 정신이 과학을 가능하게 했고 근대 예술을 가능하게 했다. 교회와 신성주의 영향력에 맞서서 진실을 말하려고 하는 인간의 정신적인 용기를 세속적 인문주의, 인문주의적 정신이라고 말한다.

현대 과학을 가능하게 하는 밑바닥에는 문화가 있다. 정신상태, 용기, 인문주의가 있다. 인문학이 오늘날 백수의 학문처럼 돼 있지만 그게 아니다. 그러나 인문주의적인 정신의 결과가 인류사의 발전을 가져온다. 그것을 단기적으로 재단해서 '갈릴레오! 그게 먹고 사는데 무슨 도움이 되냐'는 식으로 과학적 사고를 재단할 수 없다. 더구나 과학혁명을 가능하게 한 문화적 토양을 판단할 수 없다.

우리 좀 길게 보자. 문화 개혁, 문화를 쇄신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긴 혁명이다. 단기적인 일을 하되 동시에 길게 보자. 한국 사회처럼 호흡이 짧은 곳에서 그런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현대 자본주의를 가능하게 한 것이 뭔가. 부르쥬아, 산업혁명만이 아니다. 부르쥬아 문화, 자본주의 문화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 세속적 사고방식, 인문적 사고방식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독자적인 사업을 벌이려고 하는데 정치, 교회, 이데올로기가 막으면 어떻게 사업을 벌이겠나? 못한다. 민주주의의 문화 민주, 정치, 경제발전의 기본엔 문화적 정신을 깔고 있다. 비판, 사고의 능력을 요구한다.

그렇다고 오늘부터 '비판하자'고 해서 될 일인가? 다만 사회적으로 '생각하는 문화'를 만들어가자. 오락과 소비도 필요하다. 그러나 생각하는 것도 필요하다.

1980년대 젊은이들은 토론을 많이 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생각하지 않는 사회로 급변했다. 문화를 바꿔야 한다. 누가 그렇게 하나?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그 '누구'는 우리 전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문화의 성숙이라는 작업은 시민단체나 어느 정부기관이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모두의 것이다. 이말 역시 원론적인 것으로 들릴지 몰라도, 문화정책이라는 것은 내가 어떻게 문화적으로 사는가에 대한 것은 정부나 학회, 어떤 집단이 하는 것도 아니고 개인이 해야 한다. 개인의 문화정책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정부가 만들어서 배포하는가? 자기 자신이 만들어야 한다. 자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근본적인 질문과 일상적 실천의 교차

▲ ⓒ프레시안

심광현:
세 가지 질문에 대해 큰 틀에서 답변해주셨다. 다시 지금 말한 답변이 사실 원론적 입장에서 시야를 더 넓게 문화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정희섭 씨의 질문과 연결해보면 1980년대 문화운동에 대한 자기반성으로 토론이 이어졌다. 그 반성은 사실 1980년대 정치적 민주주의를 위해 문화를 하나의 수단, 방법으로 사용해 출발했던 문화운동도 문화를 넓고 길게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 거라면,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아주 넓고 긴 관점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될 거다.

윌리엄즈의 '긴 혁명(long revolution)'을 인용했는데 <문화와 사회>라는 책이 있다. 1750~1950년 동안 영국사회가 변했는데 영국 사회의 문화가 어떻게 변했고, 문화가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서술하고 있다. 오늘 도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도 그 책의 구조와 상당히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200년 동안 부자 계급, 지배 계급이 많은 문화적 성과를 만들고 경제도 발전시켰지만, 그런 관점에서 보면 노동계급과 민중이 이룬 성과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기가 보기에 노동계급이 만든 가장 훌륭한 성과는 민주주의였다고 얘기한다. 민주주의를 만든것은 귀족이나 부자가 아니라 오로지 순수하게 민중의 장고한 투쟁을 통해서 민주주의가 일상으로 파고들고 제도적으로 정착했고 문화적으로 새로운 신념과 가치를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공의 문화(common culture)'를 어떻게 다음 세대로 이어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60년대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영국도 민중이 주도하는 민주주의 문화가 발전하다가 60년대 후반부터 경제위기를 맞고 70년대가 되면 신자유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그런 질문이 나온 거다.

우리도 맥락은 다르지만 지난 20년간 군부독재로부터 민주주의를 구출해가는 양상을 보여줬는데 결국 20년을 결산하고 나서 보니 군부독재가 시장독재로 바뀌어져 있었다. 그리고 시장 독재는 훨씬 더 공포와 선망이라는 이중 메커니즘을 통해 대중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긴 관점에서 보면 문화혁명 또는 민주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바탕으로서 민중이 주인이 되기 위한 대중들의 신념, 가치, 희망, 열정이 준비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있을 수 없다는 너무나 동어반복적인 얘기이기도 하다. 지난 20년간 민중 스스로 노력을 하지 않았으니까 시장독재가 되지 않았나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무리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도 매일 여러가지 실천을 해나가야 하기 때문에 지난 20년을 평가할 때 장기적으로 어떻게 새로운 실천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모두 하고 있는 것 같다.

창조력을 소진하는 사회를 방치할 것인가?

청중 1: 코리아디지털콘텐츠연합에서 일하고 있다. 지난 민주화 20년은 한편으로 정보화 20년이라고 할 수 있다. 저희는 문화 콘텐츠, 정보화, 디지털문화를 많이 고민한다.

사실 정보화 20년은 IT에 기반을 둔 발전은 세계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앞으로 국가 발전이나 개인의 문화적 역량 성숙에도 기여할 것이다. 또 정치적 민주화, 경제발전에도 분명 기여했다. 그런 부분이 문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부분을 입증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보화 20년이라는 디지털 패러다임의 변화가 우리 사회의 전통적 가치의 급격한 붕괴를 통한 급격한 리스크의 증대에 주목하고 있다. 소위 '신경제'라는 경제 패러다임의 변화를 빠르게 추동하고 있으면서도 기존 경제 구조가 무너지면서, 그것을 통해 사회적 위기를 초래하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전국의 4000개가량의 음반 매장이 사라졌다. 온라인, 오프라인 상에서의 도박도 유행하고 있다. 그런 부분이 젊은이들의 창의성, 책 읽는 시간, 자기 자신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 계획을 세워서 노력하는 절대적인 시간과 배치되는 측면을 문화적 측면에서 많이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산업적인 측면에서, '바다이야기'가 대표적인 리스크인데, 그것은 결과적으로 자영업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정보화 20년이라는 정보화 정책, IT 기술 패러다임 이면에 어떤 헤게모니가 존재하는가, 사회의 전체적인 파워를 누가 끌고 가고 있는가에 대한 것. 게임도 좋지만 기타 장르가 균형발전 되고 동반성장하지 않으면 언제까지 '게임' 등 IT산업의 발전이 담보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도 함께 토론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도정일: 아주 중요한 문제다. 저도 다른 자리에서 한국 IT문화가 얼마나 큰 문제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 여러 차례 지적한 적이 있다.

우선 디지털산업에서 자영업으로서의 음반사업 붕괴를 얘기했다. 한마디로 '공짜주의'가 디지털 문화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젊은 세대가 '공짜로 퍼가기', 그렇지 않으면 바보짓 하는 걸로 아는 사고가 만연돼 있다. 이것은 일단 자영업의 위기를 초래한다. 그러나 동시에 작곡자, 가수도 엎어진다. 다른 말로 창조성이 고갈된다. 한 사회는 지속적 발전 염두에 뒀을 때 부단히 창조성이 살아있고, 창조력이 유지될 수 있도록 뒷받침돼야 한다. 지금 같은 디지털 상의 공짜문화는 창조능력 자체를 원천적으로 파괴하고 갉아먹고 소진한다.

그런 사회에서 어떻게 지속적인 예술적 창조를 기대할 수 있는가? 못한다. 시장 전체주의를 떠나 오늘날 대중사회, 네티즌이든 사용자이든 간에 IT와 디지털의 편의성을 누리고 있는 사용자사회가 창조성을 죽이는 세력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우리 사회가 이것을 방치할 것인가? 그럼 안 된다. 정책이 나와야 한다.

UCC가 창조적 결과물인가?
▲ ⓒ프레시안

저술도 마찬가지다. 몇몇 시민단체들은 저작권을 없애자고 한다. 그럴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책을 썼는데 10만 부, 20만 부 이상 팔았다면 그 저작권을 풀어서 공개 도메인에 올리고 사용하게 할 수 있을 거다. 그러나 겨우 몇 년에 걸쳐 책을 썼는데 누군가가 공짜로 퍼가고 지식생산자 자체는 남의 밥을 먹어야 한다. 그런 사회에서 어떻게 지식노동이 유지될 수 있나. 콘텐츠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나.

지금 UCC 등 사용자가 만드는 콘텐츠의 90%가 재활용(리사이클링)이다. '리메이킹'이 아니다. 창조적 자원에 창조적 노동을 가해서 무언가를 새로 만들어내는 창조행위로서 리메이킹이 아니고 그냥 재활용하는 것이다. 이런 형태의 UCC가 개인의 여가활동에 쓰임새도 있고 요긴할 수 있겠지만, 이런 콘텐츠를 창조적이라고 부를 수 없고 신뢰하거나 독창성 가진 생산이라 볼 수 없다.

게임의 경우를 보자. 게임 산업을 못하게 할 순 없지만 문제는 게임이 한창 자라나는 세대를 중독되게 해서 성장세대를 완전히 망가뜨리는 거다. 이것은 산업이 아닌 사회적 문제다.

젊은 세대 4명 중 2명은 게임중독자이고 1명은 유사 중독자다. 게임을 해보셔서 알겠지만 하다보면 사회적 접촉이 끊어지고 현실과의 교통이나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이 다 사라진다. 한 사회가 게임 중독 문화를 이렇게 퍼트리고 이에 대해 아무 대책도 안 세우는 것은 성장세대를 파괴하겠다는 가장 악랄한 의지의 발현이다. 이런 사회를 두고 볼 것인가? 그러면 안 된다.

정보화 20년이라고 하지만 한국은 지금도 지식생산의 관점에서 보면 세계에서 꼴찌다. 말로는 IT 강국이지만 거기에서 오가는 메시지나 콘텐츠 생산의 능력은 꼴찌다. 어떤 이가 소크라테스가 지금 세대에 산다면 인터넷을 쓸 것이라고 했다. 맞는 얘기다. 그러나 한 가지 놓친 게 있다. 지금 우리는 인터넷, PC 등 소통의 기술을 갖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 소크라테스와 같은 대화를 실어 나를 콘텐츠가 없다. 아이들 채팅에서 오가는 메시지를 보라. '밥 먹었니?', '어디 갔다 왔니' 등의 대화가 고작이다. 물론 이런 대화도 필요하다. 늘 지적 대화를 하면서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사회가 창조적인 생산력을 의지하자면 일상적인 부분에서도 지적 담론을 전개할 능력이 동시에 크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데도 잘 되가는 것처럼 여긴다. 이것이 IT 강국 한국의 모습이다. 아침에 눈 뜨고 나서 밤에 잘 때까지 몇 개의 광고메시지에 공격을 당하나? 제 경우 약 1000개의 광고메시지를 받더라. 초등학생들이 말초적 자극에 너무 많이 노출돼 있다. 집중력을 상실하고 있다. 생각할 능력이 없다. 이를 과자극 사회라고 부른다. 이런 사회의 특징은 무엇인가? 끊임없이 자극을 공급한다. 영화를 보면 폭력, 섹스, 판타지라는 삼총사의 총집합이다. 자극 없이는 영화가 되지 않는다. 지금처럼 자극만 가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진중하게 생각을 하거나 판단을 할 수 있겠는가.

요즘 초등학생들은 흥분 뿐 아니라 성공을 위해 끊임없이 경쟁해야 한다. 자극을 스스로 처리할 능력이 없으니까 육체가 반응한다. 애들이 눈을 감지 못한다. 말초신경 자극으로 넘쳐나는 사회다. 그래서 신에게 묻고 싶다.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그 답변을 기다릴 것인가? 신의 장기는 절대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거다.

신자유주의 폭격을 받는 시대…끊임없는 가치 회복 노력이 필요

청중 2: 종교수련과 IPTV 쪽에서 일하고 있다. 종교에서 말하는 열정, 자기 헌신성을 문화와 연관해 보면 그런 부분이 약한 것 같다. 또 문화 부문에는 당장의 실천적 접근이 약한 것 같다. 수련을 하면서 많이 접했던 자기의 세계를 성찰하는 문화도 약한 거 같다. IT의 장점인 신속성을 봐도 문화적인 권위 내지 웹 2.0 시대 참여, 개방, 공유가 약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종교, 정치, 전통 속에서 각자 나름대로 권위가 있고, 그것을 이제 최대한 활용해야 할 것 같다. 우리 시대에서는 종교와 같은 열정, 정치적 실천, IT와 같은 개방 등을 총체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과제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우선순위가 있다고 본다.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문화운동이 필요하다고 본다.

도정일: 원론을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지금 원론의 끊임없는 환기가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사회 내 여러 공동체가 있다. 공동체를 회복하는 일, 공동체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방향을 세워주는 것이 필요하다.

'책 읽는 사회'에서 11월부터 '사회적 독서'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할 만한 의제를 함께 토론하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첫 번째로 채택하려는 책이 '종교'에 관한 것이다. <만들어진 신>이란 책이다. 이 책은 지독하게 교회를 비판했다. 3대 유일신, 즉 기독교, 유태교, 이슬람교를 비판했다. 왜 생물학자가 강력하게 종교를 비판할까? 책의 첫머리에는 '야훼의 신은 인간이 만든 등장인물 중 가장 기분 나쁜 존재다'라고 시작한다. 인용된 글에서도 구약성서를 가리켜 '석기시대에 나온 가장 잔인한 문서'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3대 유일신 종교에 대한 과학의 반격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한 사회적 반향이 굉장히 잠잠하다. 이건 교회뿐 아니라 사회가 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사회적 독서를 하려고 하는데, 아직 그 모임에 20~30명 정도가 모인다. 그만큼 젊은 세대들의 마음의 여유는 없고 관심은 딴 곳에 가 있다. 가만히 있을 순 없다. 뭔가 회복하는 일을 해야 할 것 같다.

심광현: 공동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데 가장 기본적인 문화의 가치가 신뢰, 희망 등이라고 지적했다. 공동체를 만들 때 어떤 위계를 만드는 것보다 상호 호혜적인 공동체를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 이것이 신자유주의에 폭격 받고 있는 이 시대에 철저하게 노력을 기울일 사안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공포와 선망으로부터 해방되는 문화운동, 가능한 대안 아닐까

▲ ⓒ프레시안

여건종:
마지막으로 거론하고 싶은 얘기는 역시 다시 대중의 문제다. 대중을 민주적 주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대중과 소통하려는 노력이 좀 더 있어야 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다. 도정일 선생님이 강조하는 인문학적, 시민적, 민주적 가치 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중요하다.

그러나 실제 대중들이 문화적 생활을 하고 여러 가지 문화를 소비하고 삶을 유지하는 과정에서는 그런 가치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매우 의미 있는 상징 생산이 이뤄지고 있다. 우리가 정말 민주적 문화와 대중적 관계를 생각할 때는 조금 더 실제 현상에 들어가서 대중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통해 자신의 삶의 동력을 가져오는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것은 오늘 도 선생님의 발표에 거의 대부분을 동의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정희섭: 공포와 선망에 관한 얘기를 했다. 다시 문화운동을 얘기한다면 20년 전 운동에 방점을 찍었던 문화'운동'에서 이제 문화에 방점을 찍은 '문화'운동을 해야 할 것 같다. 여러 가지 실천이 필요하겠지만 대중의 일상에서는 공포와 선망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자신이 누리는 삶의 질이 지속가능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공포에서 일자리, 아이들 교육에 집착하는 문제가 나타난다.

또 양극화 속에서 자신이 속하지 않은 다른 일극을 좇아가는 것, 진정한 계급의식은 강남사람들이 갖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선망하는 역설에 놓여있다는 진단도 있다. 우선 공포와 선망으로부터 해방돼 자신의 생활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많은 즐거움을 누리게 하는 것이 문화운동이 당장 제시할 수 있는 긍정적인 가치나 대안이 될 수 있는 것 같다는 힌트를 받았다.

우리는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도정일: 50여 년 전 미국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인권선언을 하면서 '공포로부터의 자유'라는 얘기를 내놨다. 그때 획기적이었던 것이 빈곤이나 가난, 굶어죽을 수도 모른다는 공포로부터 해방돼야 한다는 개념이었다.

공포와 선망으로부터 해방이라는 이야기에서 정희섭 선생님이 실천적 프로그램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럴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천적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충분한 방점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공포와 선망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두 개의 큰 내러티브다. 누구든 그 일부가 되지 않으면 죽는 걸로 생각한다.

우리는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인간 개인의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들은 수없이 많을 거다. 그런데 공포와 선망의 문화에서는 그 많은 방법을 다 눈에 보이지 않게 하고 특정의 방법으로 몰고 가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지배서사로서의 공포와 선망의 문화다. 선망에는 반드시 질투와 경쟁이 따른다. 공포 또한 이겨내기 어렵다. 불안 그 자체 아닌가. 그래서 이렇게 조급하게 경쟁 체제에 치여 300km로 달리는 열차와 함께 달리는 문화가 아닌 문화를 시민 자신의 힘으로 만들 수 없을까? 만들 수 있을 거 같다. 상당수 시민단체들이 그런 얘기 하고 있지 않나?

심광현: 지난 20년간 한국 사회의 변화를 문화적 관점에서 살펴봤을 때 낙관적이지만은 않은 평가가 나온다. 오늘 마무리하는 말씀 가운데 공포와 선망으로부터 동시에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문화적 노력의 가능성 얘기가 나왔다. 문화가 가치를 창조한다는 측면이 있다고 봤을 때 여러가지 사회적 노력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공포와 선망의 문화로부터 벗어난 대안 사회를 창조하는 노력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 가능성을 보면서 대안적 내러티브를 창조하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하자는 말씀을 해주었다.

과거의 문화운동이 문화를 수단으로 해서 정치나 경제적 민주주의의 한 측면을 달성하는데 급급했다면, 민주주의의 가장 원류가 되는 문화의 저력의 긍정적인 힘인 창조력을 시민들 스스로 가질 수 있고 만들 수 있다는 확신 속에서 민주주의의 새로운 단계를 끌어내려는 창조적 노력이 필요한 단계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군부독재로부터 얻어냈던 민주주의를 시장이 알게 모르게 채어가 버린 오늘날의 상황, 1987년까지의 고통, 1997년 이후 시장 독재가 기승을 부리면서 맞게 된 두 가지 고통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 토론을 마친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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