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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팔아넘기며 기뻐하는 바보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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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팔아넘기며 기뻐하는 바보를 아십니까"

[기고]'동대문운동장 일병'을 구하는 지혜

중학교 2학년 때였던가, 아버지와 함께 봉황대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을 보러 동대문운동장에 간적이 있다. 야구광이었던 아버지는 고향 연고팀인 천안 북일고를 열렬히 응원했는데, 마침 천안 북일고가 창단 3년 만에 전국최고의 대회인 봉황대기 결승전에 올라갔다.

당시 최고의 인기스포츠였던 고교야구대회의 열기가 열기였던 만큼 아침 일찍 동대문운동장에 찾아가 표를 구하고자 했지만, 이미 입장권은 매진되고 말았다. 아쉬움을 달래며 집으로 돌아와 TV 중계로 천안북일고의 전국대회 최초 우승을 아버지와 지켜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수많은 추억을 내장한 고향 또는 전쟁터

그 후로 나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고교야구를 보러 동대문운동장에 가곤했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후 동대문구장은 MBC 청룡의 홈구장으로 사용됐는데, 특히 개막전 이종도의 극적인 역전 만루홈런이 터진 동대문운동장에서의 추억은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나뿐 아니라 야구를 사랑하는 많은 팬들에게 동대문운동장은 한국야구의 성지이자 본향이다. 흥미진진했던 고교야구의 모든 추억들과 한국 프로야구 초창기의 진기명기가 고스란히 그라운드에 스며들었던 곳이 바로 동대문운동장이 아니던가.

어디 야구장뿐인가, 한국 근대 축구의 메카였던 동대문축구장도 수많은 추억을 내장한 곳이다. 한국의 월드컵 도전사, 아시아 축구 정복사에서 동대문축구장은 선수들에게나 축구팬들에게나 잊을 수없는 전쟁터였다. 차범근 수원삼성 감독이 1977년 박스컵 축구대회에서 후반 5분을 남기고 3골을 넣은 곳, 1972년 브라질 산토스의 위대한 영웅 펠레가 한국에서 처음 경기를 했던 곳이 바로 동대문운동장이다. 동대문운동장은 한국야구와 한국축구의 수많은 유산들이 깊게 각인된 근대 문화재로서 손색이 없다.

'메가 글로벌 도시'에 먹칠 하는 천덕꾸러기 취급받는 산증인
▲ 한국 근대스포츠의 산증인인 동대문운동장이 서울시의 도심 재창조 프로젝트 사업 때문에 철거당할 처지에 놓여있다. ⓒ뉴시스

그런데 한국 근대스포츠의 산증인인 동대문운동장이 서울시의 도심 재창조 프로젝트 사업 때문에 철거당할 처지에 놓여있다. 서울시는 아마도 이명박 전 시장 시절부터 세월의 떼가 묻어 칙칙하게 변해 버린 동대문운동장이 메가 글로벌 도시를 꿈꾸는 서울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천덕꾸러기로 생각하고 조기 철거를 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청계천을 도심 신개발 프로젝트로 전용한 경험이 있는 시울시의 입장에서는 동대문야구장과 축구장이 차지하고 있는 수만 평의 공간은 서울시 도심 신개발의 최적지이자 최대 규모였을 거다. 이 칙칙한 체육시설을 갈아 업고 여기에 '쌈박한' 디자인 패션 타운을 조성한다면 그 개발 차익은 수조원에 이를 것이고, 서울의 도심 북부의 개발 사업은 이로서 본격적인 탄력을 받게 될 것으로 구상했을 거다.

더럽고 칙칙해지면 그대로 철거해버리는, 혹은 개발이익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살아온 추억을 팔아버리는 우리의 건축과 공간의 역사는 비단 동대문운동장만의 문제는 아닐 거다. 아파트 재건축 붐이 그렇고 서울 뉴타운 바람이 그렇다.

동대문운동장의 철거계획이 동대문만의 문제가 아니라 서울 전체, 아니 남한 전체의 건축과 공간의 신개발주의 논리와 연결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흔히들 한국의 건축가들로부터 한국의 건축에는 한국적 역사의 주름이 없고, 독특한 자신들만의 철학이 없다는 말을 듣곤 했는데, 어찌 보면 오랜 것을 부수고 맥락 없이 새로 짓는 일에 익숙한 현실에서 건축과 공간의 철학 운운하는 것은 생각의 사치일지도 모르겠다.

팔리는 추억에 기뻐하고 재건축에 환영하는 개발지상주의

자기가 살아온 곳에 대한 애정과 배려보다는 편리하고 이익이 되는 상황을 선호하는 관습은 사실 누구를 탓할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내면화한 것일 수 있다. 서울시의 국적 없는 신개발주의 도심정책도 문제지만 사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개발정책에 무감각하거나 아니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환영하는 대중의 심리다. 건축가 정기용 선생의 말대로 자기가 30년 넘게 살아온 집이 재건축 때문에 헐릴 수밖에 없을 때, 슬퍼하기는커녕 보상금과 개발 이익을 챙기기 위해 환영 플래카드를 거는 현실은 우리 안의 개발지상주의의 심리를 반영한다.

2006년 독일월드컵 거리공연 차 뮌헨에 방문했을 때, 버스에서 가이드를 하던 한 한국 교포분이 뮌헨 개선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무역센터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분의 말에 의하면 뮌헨 개선문에서 멀리 보이는 50층 규모의 무역센터가 시민들의 동의 없이 지어졌는데, 나중에 시민들은 이 건물이 자신들의 조망권을 해쳤다며 시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고 한다.

역사의 주름과 흔적을 건축 안에 그대로 남겨둔 뮌헨시민들에게 50층의 초현대식 무역센터는 자신들이 지켜온 도시의 오랜 권위를 순식간에 무너뜨린 '에일리언'이었을 거다. 결국 뮌헨시장은 시민들에게 공식사과를 했고, 앞으로 현대식 건물을 지을 때 시민들의 조망권을 해치는 지에 대한 사전 조사와 건축에 대한 동의를 구하겠다고 발표했다.

사실 내가 보기에 개선문에서 보이는 무역센터는 강변북로 한남대교 북단에서 스타타워 빌딩을 보는 것만큼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자세히 보니 멀리 떨어진 무역센터는 정말 뮌헨시의 전체적인 도심 경관과 건축 생태계에 어울리지 못하는 흉물처럼 보였다.

고시엔 구장, 웸블리 구장, 펀웨이 파크가 주는 교훈
▲ 1924년 건립된 고시엔 구장은 최신식 시설이 겸비된 도쿄 돔구장보다도 일본인의 마음 속에 일본 야구를 대표하는 구장으로 각인됐다. ⓒDX Broadrec

1924년 건립된 일본의 고시엔 구장은 아직도 갑자원 고교야구가 열리는 유서 깊은 곳이다. 갑자년에 지어졌다고 해서 명명된 갑자원 고고야구 대회는 지금도 매년 100만 명의 야구팬들이 몰리고 있다. 갑자원 대회가 없을 때는 프로야구 한신 타이거스의 홈구장으로 이용되는 고시엔구장은 최신식 시설이 겸비된 도쿄 돔구장보다도 일본인의 마음 속에 일본 야구를 대표하는 구장으로 각인됐다.

우리도 동대문축구장과 야구장을 한국인이라면 마음속에 간직한 꿈의 구장으로 남겨둘 수는 없을까? 낡은 외관과 시설 때문에 도심의 시각성에 방해를 준다면 공간의 특성에 맞게 리모델링해서 자자손손 물려줄 수는 없을까?

영국 축구의 성지 웸블리 구장은 9년 동안의 리모델링을 통해 올 초에 FA컵 맨체스터유나이티드와 첼시와의 결승전을 멋지게 치렀다. 앞으로 웸블리 구장은 영국에서 벌어지는 국가대표 A매치 경기와 FA컵이 열릴 것이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구장 '펜웨이 파크'에 가면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역사의 깊이가 느껴지듯 동대문구장도 그러한 한국 스포츠의 숨결이 느껴질 수 있도록 그냥 보존하면 안 되는가? 이제 불과 50년도 채 안된 스포츠 역사의 본향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기에는 너무나 삭막해질 우리 삶의 기억이 두렵지 않은가?

개발보다는 역사를, 경제적 이익보다는 문화적 가치를 더 소중히 여기는 생각을 오세훈 시장이나 서울시민들이 제발 깊게 해주었으면 한다. 수천억을 들여 서울을 리모델링하여 세계적인 도시를 만드는 것보다 이런 근대 유산의 건축과 공간을 잘 보존하고 유지하는 것이 되레 서울시 본래의 계획에 더 가깝고 진실된다는 것을 알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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