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아직 따가운 9월 중순, 전북 부안군 곰소염전에서 만난 박정길(66) 씨는 '소금이 1년에 얼마나 나오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말이 안 된다는 듯 답했다. 대를 이어 30년 넘게 소금 농사를 짓고 있다는 그의 풍모는 사람의 욕심보다 자연에 순응하는, 영락없는 농부였다. 그는 "올해 비가 많이 와서 양이 적다"며 담담하게 덧붙였다.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가 부안 지역을 군항으로 사용하려고 제방을 축조하고 도로를 개설하면서 육지가 된 곰소. 곰소염전이 만들어진 것도 그때였다. 60년이 훨씬 넘은 셈이다.
사실 부안과 김제 지역에는 이 염전과 나이가 비슷한 건물들이 많다. 곡창지대인 이곳을 일제가 놓칠 리가 없었다. 쌀을 실어나르려고 만든 마을과 공장은 이 일대를 번화가로 만들었다. 그 쌀로 돈을 번 일본인들은 떠났고, 마을들은 다시 조용해져 갔다.
아직 이 지역 군데군데 제법 남아있는 당시 건물들의 모습은 박 씨와 닮았다. 툭 던진 한마디에서도 삶의 지혜가 느껴지는 원숙함. 그리고 가장 고된 일 중의 하나라는 염전 일을 하는 그의 구부정한 등에서 느껴지는 아픔.
지난 9월 중순, 문화연대 주최로 떠난 '다시 보는 근·현대 역사현장' 1차 답사의 발길이 닿은 곳도 바로 그런 데였다.
오래된 아픔을 만나는 답사길
채석강으로 잘 알려진 격포항을 지나 줄포로 가는 30번 국도는 창밖 풍경에서 눈을 떼기가 어렵다. 서해안과 맞닿은 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염전이 있는 곰소를 지나 줄포에 도착하게 된다.
마을은 한가했다. 낮고 또 낡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풍경은 적막함이라는 단어와 잘 어울렸다. 가끔 거리에서 마주친 이들은 여느 시골 마을과 다를 바 없이 손수레를 끌고 장을 보러 가는 등 굽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줄포는 일제 강점기 전북 지역에서 전주와 나주 못잖게 잘 나가는 중심가였다. 1870년대 만들어진 줄포항은 1920년대 일본인들이 매립지를 넓히면서 군산항에 버금가는 항구로 발전했다. 해방 전후까지 줄포는 호남평야에서 난 쌀을 정미하고 일본으로 유출하는 항구로서 전성기를 누렸다.
부안경찰서를 비롯해 각종 관청이 들어섰고 웬만한 규모의 도시에서나 찾아볼 수 있던 우체국과 극장도 여기에 지어졌다. 당대 재벌이자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김성수가 소년 시절을 보낸 저택을 비롯해 많은 일본인이 이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경찰서가 있는 줄포가 다른 도시에 비해 치안이 안전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후 줄포항은 토사가 쌓여 선박의 출입이 어려워지면서 항구의 기능을 잃게 된다. 결국 항구는 1960년대 폐항되고 대신 곰소항이 중심항구로 자리 잡았다. 더불어서 줄포 읍내도 서서히 쇠락했다.
그 수탈과 흥망의 역사를 간직한 채 그대로 드러내 주는 건물들이 읍내에 남아있다. 일제 강점기 우체국이었던 건물은 이제 호프집으로 쓰이고 있다. 줄포극장 역시 이제는 오락실로 쓰인다.
반면 김성수가 자랐던 집인 '김상만 가옥'은 잘 보존된 채 간간이 찾는 손님을 맞이한다. 1984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이곳은 1895년 고종 때 'ㅁ'자형으로 지어진 형태가 그대로 유지됐다. 그는 집 앞 소개 팻말에 적힌 것처럼 신문사를 창립한 언론인이기도 했지만 황국신민화 운동은 물론 학병제와 징병제를 찬양하던 친일 인물로도 역사에 남아있다.
금융조합, 정미소, 도정공장…흥망과 수탈의 흔적들
부안 읍내와 김제 시내에서도 일제 강점기 수탈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오래된 건물들을 만날 수 있다.
신청사 공사가 바로 옆에서 한창인 부안군청, 그 건너편에 자리잡은 해양수산과 건물이 그 중 한 곳이다. 일제 강점기 금융조합 건물로 지어졌던 이 건물은 근대 사무소건축 양식을 엿보게 한다.
목조 1층 건물로 지어진 사무공간 뒤쪽에는 아직도 육중한 문의 금고가 남아있다. 지난 2005년에는 등록 문화재로 지정됐다. 이곳에서 만난 군청 직원은 "신청사 공사가 완료되면 해양수산과도 이전할 것"이라며 앞으로 이 건물이 어떻게 쓰일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김제 시장은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건물을 많이 볼 수 있는 곳이다. 1층 또는 2층 높이의 건물들은 허름해 보이긴 해도 지어질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1934년 발간된 <김제발전사>에 따르면 김제시장은 일본인들이 이주하기 전에는 작은 시장에 불과했다. 그러나 호남선이 개통되고 일인들이 드나들면서 한번 장이 설 때마다 수천 명씩 모여들었고, 명절 때 모여드는 사람은 만 명이 넘을 정도로 전북에서 손꼽히는 큰 시장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중화요리 북경반점, 김제불교사, 중앙지업사, 린나이대리점, 교동정미소, 성산정미소 등은 지금도 김제시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당대 건축물들이다.
답사의 발길을 좀 더 옮겨보면 김제시 곳곳에 남아있는 당시의 유산을 만날 수 있다. 백일정미소, 능제 저수지, 월봉도정공장, 구 백구농협 등은 모두 일제 강점기 수탈의 역사가 남긴 유산이다.
아담한 근대 양옥집인 김제 농업기반공사 동진지부 죽산지소 사무실 역시 일제 강점기 대지주였던 하시모토의 농장사무실로 지어졌던 곳이다. 1911년 동진강 일대의 개간지를 불하받아 개간에 착수했던 그는 1931년 농장 소작인이 550명에 달할 정도로 전북 일대에서 유명한 대지주였다. 2003년에 등록 문화재로 지정됐다.
사라지기엔 아직 할 얘기가 너무 많은 유산
건물 하나, 장소 한곳이 한 편의 이야기처럼 당시의 역사를 말해주는 근대문화유산들. 그 현장이 말해주는 이야기에는 역사책에도 잘 나오지 않는 생생함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들을 보존하려는 노력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곰소염전은 몇 년 전 골프장에 자리를 내어줄 위기에 처했다가 살아남았다. 지금 남아있는 염전 넓이는 45정보(13만5000평) 정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100정보(30만 평)가 넘었지만 한때 염전이었던 저편에는 이제 빌라가 세워졌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월봉도정공장과 구 백구농협 역시 곧 철거될지도 모르는 위기에 놓여있다. 부안군청 해양수산과가 옮기고 나서 금융조합 건물의 운명도 불확실하기는 마찬가지다.
다른 지역들도 예외는 아니다. 경기도 시흥에 남아 있던 소금 창고 38채는 지난 8월 모두 헐렸고, 전북 정읍시 신태인읍에 있는, 일제 강점기 당시 국내 최초의 근대식 대규모 도정공장이었던 '서짓말 도정공장' 역시 지난 8월 새 건물을 지으려고 멸실신고를 마쳤다. 100년이 채 못된 근현대 건물들이 속속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헐리는 것이다.
반면 오히려 그와 같은 생생한 유산에 갈증을 느끼는 이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는 듯하다. 박정길 씨는 답사길에서 곰소염전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서울에서 대학생들이 우루루 몰려오기도 하고… 뭐 볼 게 있다고 자꾸들 찾아오데."
김제와 부안 일대의 일제 강점기 유산들 역시 '개발'이나 '부끄러운 역사'라는 핑계로 없어지기엔 아직 들려줄 이야기가 너무 많아 보인다.
문화연대는 지난 9월 8~9일 1차 답사를 시작으로 12월 9일까지 총 6차례에 걸쳐 '시민, 청소년과 함께하는 문화답사- 다시보는 근·현대 역사 현장'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일제 수탈의 현장 김제, 생태문화의 보고 부안', '근대 교육 도시 및 항쟁의 도시 광주', '근대 교통의 중심 대전과 고도 부여의 근대사' 등 답사지의 특색에 따라 각기 다른 주제로 진행되며 제주 4·3유적지, 노근리 쌍굴다리, 전남도청 등 상징적인 장소부터 시장, 저수지, 성당 등 책에서는 볼 수 없는 각 지역 내 역사 현장까지 답사 일정이 예정돼 있다. 문화연대는 "현재 근·현대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에 대한 인식 정도도 미약할 뿐만 아니라 개발이익과 상충되어 소유자의 재산권 침해도 문제가 되고 있다"며 "전문가의 강의와 시민참여적인 답사를 통해 인류문화에 대한 역사의식을 고취하고자 한다"며 이번 답사의 취지를 밝혔다. 참가비는 매회당 4만원(문화연대 회원 3만원)이며 제주 답사 항공료는 별도다. 더 자세한 내용에 관한 문의는 문화연대 홈페이지(www.cncr.or.kr)와 전화(02-773-7707)를 통해 가능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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