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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컴퓨터를 끄십시오"

[제안] '88만원 세대'에 문을 여는 추석이 되길….

추석입니다. 아침에 차례는 잘 지내셨는지요.

농사의 결실 즐기는 대신, 성적과 수입을 비교하는 추석

추석은 우리가 농경 문화권에 속해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흔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국인이 농사와는 한참 동떨어진 일로 생계를 꾸리는 지금도 추석은 의미가 있습니다. 도시로 뿔뿔이 흩어졌던 친척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도시인들의 세상에 남겨진 농경 문화의 유산인 추석은 본래의 뜻과 달리 그저 푸근하기만 한 날만은 아닙니다. 흩어져 있던 피붙이들이 모이면, 종종 부모의 월수입과 자식의 입시 성적을 비교하는 자리가 되곤 하는 까닭입니다. 한해 농사의 결실을 즐기는 날을 도시인들은 이런 식으로 이어받았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추석을 맞아 고향으로 향하는 도시인들의 '로망'은 주로 금의환향입니다. '도시로 떠났던 어느 집 자식이 크게 성공해서 좋은 차 타고 내려 왔다더라'하는 수군거림을 기대하는 것이지요. 물론 이런 로망을 실현하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그리고 높은 직위와 큰 승용차가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도시에서의 삶이 초라해도 고향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대개 가볍습니다.

'금의환향', 고도 성장기의 남성적 인정 욕망

하지만 아직도 도시, 특히 서울에서 통속적인 성공을 거둔 뒤, 금의환향하는 꿈을 꾸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지난해 11월 종방한 SBS 드라마 '사랑과 야망'은 이런 로망을 전형적이고, 적나라하게 묘사했습니다.

잘 알려져 있듯, 가난한 시골 수재와 그의 동생의 성공기를 다룬 이 드라마는 20년 전에 MBC가 이미 방영했던 것입니다. 드라마 속 태준, 태수 형제는 한국에서 기업인으로 성공한 인물의 두 유형을 전형적으로 보여줍니다.
▲ 20년만에 리메이크된 드라마 '사랑과 야망'의 주인공 형제. 과거 남성훈이 맡았던 형 박태준 역을 조민기가 맡았다. 이덕화가 연기했던 동생 박태수 역은 이훈이 맡았다. ⓒSBS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냉철한 자기 절제력을 가진 수재형 엘리트, 의리와 배포라는 남성적 매력이 넘쳐흐르는 마초. 이들 형제가 각각 속한 유형입니다. '사랑과 야망'에 삶을 온전히 내던졌던 형제가 야망을 실현한 공간이 국회나 행정부가 아닌 기업이었다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심지어 형 태준은 고시에 합격하여, 공직으로 진출할 수 있었음에도 대기업 평사원을 택합니다.

1986~87년 당시 이 드라마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드라마 방영 시간에는 가정의 물 사용량이 줄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주부들이 일손을 놓고 텔레비전 앞에 앉았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강렬한 기억에 힘입어 20년 만에 '리메이크'했지만, 아무래도 시청자들의 반응은 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이 드라마는 한국 경제의 '좋았던 시절'을 다루고 있습니다. 경제는 당연히 계속 성장하기만 하는 것으로 알던 시절이었습니다. 오늘의 중소기업은 내일의 대기업이고, 오늘의 대기업은 내일의 글로벌 기업이라는 믿음이 공고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드라마 속의 시대만 그랬던 게 아닙니다. 20년 전 이 드라마에 '국민 드라마'라는 칭호가 따라붙던 시기도 그랬습니다. 이런 점에서 당시 시청자들과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같은 시대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태준, 태수 형제의 성공기를 자신의 미래로, 혹은 형이나 삼촌의 미래로 가슴에 심으며 야망을 다지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야망의 세월'은 지나갔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1997년 IMF 구제 금융 사태를 겪으며, 질적으로 변했습니다. 이제는 맨주먹으로 상경한 가난한 시골 청년의 성공 이야기 자체가 무척 낯설어졌습니다.

그래서일까요. 22일자 <중앙일보>에 따르면 요즘 청소년들은 장래희망으로 가장 많이 꼽는 것은 공무원, 공기업 직원입니다. 극심한 고용 불안으로 직업의 안정성을 중시하는 세태가 청소년에게까지 이어진 셈입니다.

청소년의 장래희망은 으레 과학자, 대통령이었던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게는 낯선 장면입니다. 명절날, 어른들은 청소년들에게 흔히 "커서 뭐가 될래"라고 묻습니다. 대답을 들으며, 어떤 이들은 "겨우 공무원"하며 조금 실망할지 모르겠습니다. 20년 전, 드라마 '사랑과 야망'을 보며 가난한 시골 청년들의 치열한 '사랑과 야망'을 가슴에 깊이 담았던 이들이라면 더욱 그럴 것 같습니다.

하지만 20년 전과 지금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골이 패어 있습니다. 탤런트 차화연이 맡았던 여 주인공 미자 역을 한고은이 맡게 된 것 만큼이나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적어도 요즘 10대, 20대 가운데는 드라마 속 태준, 태수 형제의 성공기를 자신의 미래로 여기는 경우가 드뭅니다. 가난한 집 자제가 드라마에서처럼 재벌 총수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요.

재벌은 '신분', 가난한 시골 청년은 접근 금지

22일자 <조선일보>에 독특한 칼럼이 실렸습니다. 송희영 <조선일보> 논설실장이 쓴 "재벌 총수가 청와대 의전용 마스코트인가"라는 칼럼입니다. 기업 활동으로 분주한 재벌 총수들을 대통령이 한자리에 불러 모으는 일을 나무라는 내용의 이 칼럼은 "엊그제 청와대에서 열린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성과보고회 풍경은 더 이상 보지 않았으면 하는 혐오 동영상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눈에 띄는 구절이 많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총수와 기업인을 청와대 의전용 마스코트로 동원할 것인가. 우리는 삼성, 현대자동차, 포스코, LG그룹의 총수나 전문 경영인들의 신분이 2000년대 들어 국제적으로 몇 단계 상승해버렸다는 현실을 모르고 있다"는 대목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건희 회장은 세계 반도체 왕국에서 손꼽히는 제왕 중 한 명이고, 포스코 이구택 회장은 글로벌 철강제국에서 꽤 높은 윗자리를 차지하는 왕이다. 이날 청와대는 겁 없이 휴대폰 왕, 조선 왕, 에어컨 왕, 디지털 TV왕, 자동차 왕을 한 줄에 세운 셈이다"라는 구절도 있습니다.
▲ ⓒ<조선일보>

이 구절이 눈에 확 들어온 이유는 '왕'이라는 표현 때문입니다. 대통령은 직위에 불과할 뿐, 신분이 아닙니다. 하지만 왕은 신분입니다. 원칙적으로 누구나 대통령이 될 수 있지만, 왕은 핏줄을 타고 나야 합니다. 대통령은 임기가 제한돼 있고, 민주적 절차에 따른 탄핵도 가능합니다. 또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에 있어서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왕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민이 선출했으며,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시민의 통제가 가능한 권력보다 그렇지 않은 권력을 위에 두는 이 칼럼의 내용은 사실 불편했습니다. 민주주의 원칙에 비춰 볼 때, 바람직하지 않은 내용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재벌 총수가 왕이나 다름없다는 표현은 사실에 부합합니다.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듯, 재벌도 경영권을 세습합니다. 왕조 시대에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과 암투가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재벌가의 관심사 역시 경영권의 무사 승계입니다.

입법부와 행정부에 대해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는 사법부가 최근 재벌 총수에 대해서는 유독 관대한 태도를 취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는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들은 시민과 다른, '왕'이라는 특수 신분이니까요.

<조선일보>가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재벌 총수가 특수한 핏줄을 이어받은 '신분'이라는 점은 이제 다들 잘 알고 있습니다. 노력과 재능으로 직위는 얻을 수 있지만, 신분을 얻을 수는 없지요. 가난한 시골 청년이 남들보다 조금 똑똑하고, 부지런하다는 이유로 재벌 총수의 자리를 물려받는 드라마 '사랑과 야망'이 21세기의 현실에서는 판타지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능력이 아닌 자본이 소득을 결정한다"는 깨달음이 낳을 절망

'야망의 세월'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이와 쌍을 이루던 '금의환향'의 포부도 함께 지나갔습니다. 가난한 시골 청년이 성장할 수 있는 한계는 과거보다 훨씬 뚜렷해졌습니다.

드라마 속 태준과 같은 '가난한 시골 수재'라는 인물 유형 자체가 이미 어색한 캐릭터가 됐습니다. 학업성적과 집안의 경제력이 비례하는 경우가 늘어서입니다. 소위 명문대라 불리는 학교 신입생들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스스로의 집안 배경이 '상류층'이라고 대답한 비율은 해마다 높아지고 있습니다. 설령 진짜 '상류층'이어도 어지간하면 자기 입으로는 '우리 집은 중산층, 서민'이라고 대답하는 게 보통이었던 과거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면서, '금의환향'의 꿈에 자신을 옭아매는 일은 부질없어 보입니다. 다른 피붙이에게 같은 기대를 거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서로 다른 '신분'을 인정하고, 그러려니 하며 살아가면 되는 걸까요.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작고한 경제학자 정운영 선생이 생전에 중국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중국 쓰촨성 청두에서 광안까지 가는 길에서 그는 택시를 탔습니다. 그런데 온통 차와 가축과 사람이 뒤엉켜 혼잡한 도로에서 택시 기사는 연신 가속기를 밟아댔습니다. 고(故) 정운영은 "돈은 그렇게 사람을 변화시켰고, 중국 경제는 그렇게 과속으로 달리고 있었다"라고 적었습니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과속으로 질주하는 기사의 모습에서 사장이 돼 부를 일군 뒤, 명절에 좋은 차를 타고 고향을 찾는 게 출세의 상징으로 통했던 시대, 그리고 이런 야망을 위해 삶을 불살랐던 태준, 태수 형제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정운영의 글에서 정작 중요한 대목은 다음입니다.

"무엇이 운전 기사를 그처럼 미친듯이 달리게 했을까? 그 동력은 어디서 나왔을까? 아마도 그 답은 노력에 따른 보상이었으리라. 그러나 미구에 그는 소득이 노력에 비례하지 않고, 자본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죽을 둥 살 둥 달려봐야 더는 소용이 없다고 느낄 때, 그의 좌절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정운영의 중국경제산책>, p13)

"'스펙'이 딸리는데, 어쩌라고요"

드라마 '사랑과 야망'의 배경은 미친듯이 달려가는 운전 기사의 시대입니다. 이 드라마에 시청자들이 열광했던 1986, 87년 역시 같은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야망'의 설정이 어색해진 지금은 "미구에 그는 소득이 노력에 비례하지 않고, 자본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라는 문장에 담긴 시대입니다.

재벌 총수를 혈통에 따른 특수 신분으로 여긴다는 점, 가난한 시골 수재의 성공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는 점이 이런 시대의 징표입니다.

그리고 정운영 선생의 글에서 이어진 단어는 '좌절'입니다. '사랑과 야망'의 시대가 지나간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 역시 '좌절, 절망'입니다.

그리고 이런 절망에 우선 노출된 집단은 20대 젊은이들입니다. 명절에 친척들과 만난 자리에서 풀기 없는 대화만 나누다 방에 들어가 컴퓨터를 켜는 그들입니다.

"만나 보니까, 활기차고 좋던데…. 뭘"하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 청소년들이 장래희망으로 가장 많이 꼽은 게 공무원이라는 <중앙일보> 기사를 소개했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는 청소년만의 현상이 아닙니다. 20대 청년 구직자의 절반 이상이 각종 고시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공시족'입니다.

구조조정이 일상화되면서 드라마 속 태준과 같은 '회사인간'의 미래가 불투명해진 것도 한 원인입니다. 적어도 공무원은 정년이 보장되니까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괜찮은 일자리'의 수가 확 줄어든 게 더 큰 원인입니다. 전체 노동자의 절반 가까이가 비정규직입니다. 특히 20대 젊은이들의 경우에는 그 비율이 더 높습니다. 또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임금 및 고용조건 격차는 해마다 벌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중소기업에서 경력을 쌓은 사람이 대기업이나 공기업으로 옮겨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이직을 원하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대기업이 요구하는 여러 조건을 갖추지 못 한 경우, 인문학처럼 기업의 수요가 많지 않은 학문을 전공한 경우 등은 대개 공무원 시험으로 쏠립니다. 특별한 자격 요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노력에 비례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이 흔히 쓰는 용어를 빌자면, '스펙'(조건)이 딸리는 이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386세대와 88만원 세대의 경쟁
▲ 우석훈, 박권일 공저 <88만원 세대> 표지. ⓒ프레시안

하지만 공무원, 대기업과 공기업의 정규직 등 괜찮은 일자리의 수는 아주 적습니다. 그리고 대체로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88만 원 세대>의 저자들은 현재의 20대 가운데 이런 괜찮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비율은 약 5% 정도에 그칠 것이라고 추산합니다. 나머지는 '88만 원 세대'로 살아야 합니다.

'88만 원'은 비정규직 평균 임금 119만 원에 전체 임금에 대한 20대 임금 비율 74%를 곱해서 얻은 값입니다. 물론 괜찮은 일자리를 얻는 데 성공한 5%가 '88만 원 세대'의 또래 집단으로 미끌어질 가능성도 항상 열려 있습니다.

'괜찮은 일자리가 줄면서 생기는 피해를 꼭 20대만 겪는 것이냐'고 되물으실지 모르겠습니다. <88만 원 세대>의 저자들이 마련한 답변은 '세대 간 경쟁'입니다.

드라마 '사랑과 야망'을 보며 금의환향의 꿈을 품었던 세대, 한국 경제의 '좋았던 시절'에 안정된 일자리로 진출하여 경력을 닦은 세대와 그 다음 세대 사이의 경쟁입니다.

또 대학 시절을 여유롭게 보내며, 상대적으로 폭넓은 독서를 할 수 있었던 세대와 사회에 나오면 별 쓸모도 없는 토익 점수 올리기에 목을 맨 세대 사이의 경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20대 청년기에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주요 세력으로 대접받았던 386세대와 '부모 등골 빼먹는 철부지'라는 비아냥을 받고 있는 20대 사이의 경쟁입니다.

"20대에 천하를 품었던" 386이 어린애 취급받는 20대를 착취한다?

한 시사잡지는 전대협 세대를 가리켜 "20대에 천하를 품었다"라고 묘사했습니다. 실제로 전대협은 언론이 선정한 한국 사회 영향력 집단 10위 안에 들곤 했습니다. 갓 서른을 넘긴 나이에, 총학생회장 경력 외에는 딱히 내세울만한 사회적 경험이 없는 이들이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들에게는 강력한 세대적 공감대가 있습니다. 인구 분포상으로도 다른 세대보다 많습니다. 그래서 이들 세대의 지지를 얻지 않고서는 어떤 정치세력도 집권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반면 취업난에 허덕이는 현재의 20대는 늘 어린애 취급만 당합니다. 입시 경쟁에 시달리느라 다른 곳에 눈 돌릴 겨를이 없는 10대 청소년이 무조건 어린애 취급당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세대적 공감대도 희박합니다. 또 자신들의 주장을 조직적으로 담아내는 훈련도 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경쟁은 당연히 전자의 세대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합니다. 그래서 <88만 원 세대>의 저자들은 '착취'라는 단어를 꺼냅니다. 기득권을 확보한 세대가 다음 세대를 희생한 대가로 안정성을 보장받는다는 뜻입니다.

"문을 닫는다"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젊은 시절을 이념적 방황과 저항으로 보낸 세대가 손쉽게 '괜찮은 일자리'로 진출한 뒤, 다음 세대에 대해서는 높은 문턱을 설치했다는 뜻입니다.

수업을 빠지고, 집회 현장으로 달려가거나 당구장으로 향하는 것을 당연시했던 이들이, 영어 회화 테이프를 끼고 다니는 동료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들을 좀 시시하게 여기던 이들이 막상 20대 신입사원을 뽑는 위치가 돼서는 토익 점수와 학점이라는 기준을 절대시 합니다. 요즘 20대 젊은이들에게 토익 시험보다 진지한 고민거리가 무엇이 있겠느냐는 비아냥이 깔린 판단일지도 모릅니다.

'자식 위해 희생하는 부모, 젊은이 착취하는 기성세대'라는 역설

"아니 '착취'라니. 부모들이 20대 젊은이들을 위해 얼마나 희생하는데…. 그들에게 등골 빼먹히느라 노후 준비도 못 한다니까"라는 반박이 돌아올 법 합니다. 여기에 대해 <88만 원 세대>의 저자들이 준비한 답변은 "한 가정 단위에서는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구조, 사회 전체에서는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의 희망을 뺏는 구조라는 역설"입니다.

또 "기업 환경의 변화에 따라 신규 채용이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 사람을 적게 뽑다 보니, 경쟁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고 당연히 채용 기준도 까다로와지는 것이고…."라는 볼멘 소리에 대해서는 '386세대의 책임'이라는 답변이 돌아옵니다.

저자들은 현재 20대가 처한 문제의 상당 부분이 "386세대가 부모가 되면서 생겨난 일"이라고 지적합니다. 프랑스의 68세대와 달리 386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바꾸는 데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386세대가 아이를 낳게 되었을 때 한국에서는 원정 출산이 나타났고, 그 아이가 자랐을 때 조기 교육 붐이 일어났다. 영어 발음을 좋게 한다며 아이의 혀를 수술함으로써 미국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던 엽기 사건도 이른바 386세대가 부모가 됐을 때 발생한 것이다."라는 설명이 뒤따릅니다.

또래 집단에서는 강력한 공동체 문화를 이뤄냈던 386세대가 자식 세대에 대해서는 이와 상반되는 가치관을 가르친 셈입니다. 다음 세대에 연대와 협력의 가치를 심으려 했던 프랑스 68세대와 달리, 경쟁의식을 부추겼다는 평가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연공서열 문화의 마지막 수혜자입니다. 이런 혜택에 따른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는 게 저자들의 판단입니다.

'희망 고문'은 이제 그만

"그래. 기득권을 누린 세대가 있고, 그렇지 않은 세대가 있다고 치자. 그리고 이들 사이에 심한 불균형이 있다고 치자. 그런데 그게 누가 의도해서 생긴 구조는 아니지 않느냐"라는 지적이 가능합니다. 이 책의 저자들 역시 특정 세대 혹은 개인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시스템의 문제를 이야기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보다 젊은이들이 다양하고 안정적인 기회를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가 머리를 맞대야 합니다.

물론 당사자인 20대 젊은이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5%에서 4%, 3%로 좁아질 게 뻔한 기회의 문만 바라보며, '희망 고문'으로 스스로를 괴롭혀서는 절대 해법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 책의 저자 중 한 명인 박권일 씨는 개미지옥과 같은 승자독식 게임에 빠져 있는 20대 젊은이들이 서로 협력해 이런 구조를 타파하지 않는 이유를 "나는 승리한 소수에 속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런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일은 스스로와 다른 또래에 대한 '고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희망 고문'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젊은이들이 공무원 시험과 토익 점수에 목을 매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방법은 찾아보면 많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대학을 다니지 않아도, 토익 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일자리의 유형을 다양하게 소개합니다. 하지만 이런 대안을 찾는 것과 그것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세대간 대화'를 위한 드문 기회

대안의 현실화를 위한 방법? 이 책의 저자들은 짱돌과 바리케이트를 이야기합니다. 과연 지금 이 순간, 취직을 못 해서 친척들 만나기 민망하다는 이유로 방에 틀어박혀 있는 그 젊은이가 짱돌과 바리케이트를 찾아 나설지, 아니면 계속 좁아져가는 기회의 문만 쳐다보며 스스로에게 '희망 고문'을 가할지는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어느 쪽을 선택하건, 기성세대와 편안한 대화를 나누기는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올해 추석이 20대 젊은이와 기성세대가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몇 안 남은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지금 컴퓨터를 끄고, 잠시 스스로의 20대 시절을 돌아보십시오. 혹시 스스로의 20대 시절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지금의 20대를 무조건 어린애 취급하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술잔을 꺼내 들고, 방문을 여십시오. 기회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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