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존경할만한' 정치인을 역사 속에서 찾은 이가 있다. <프레시안>과 전남 화순군 홈페이지를 통해 동시에 연재된 소설 <하늘의 도>의 소설가 정찬주 씨가 그렇다.
지난 8월 초 76회를 끝으로 연재를 마친 정찬주 씨는 "하늘의 도에 이르고자 했던 사람들의 일생을 보면서 '아름다운 선조들'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늘의 도>는 바른 정치를 이루고자 뜻을 펼치다 사약을 받고 절명한 조광조를 중심으로 사림들의 이야기를 풀어 낸 소설이다.
"오늘날 '강개'하는 정치인 본 적 있는가"
정찬주 씨는 "죽으면서도 '내 눈을 빼 두어라. 저 간신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죽어서도 지켜보겠다', 참수를 당해 죽는 순간에도 '내수염은 다치지 않게 하라'며 나장들을 호통 치는 선비의 모습에서 '아 이것이 유도(儒道)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산은 산>, <암자로 가는 길>과 같이 불교 관련 소설과 산문에 정통한 그는 "유교에 대해 종교라는 생각을 별로 해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정도전 등 죽음 앞에서도 자기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하늘의 도에 따라 살고자 했던 사림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 유교도 종교구나"라고 느꼈다고 한다.
정찬주 씨는 특히 "비분강개(悲憤慷慨: 의롭지 못한 일이나 잘못되어 가는 세태가 슬프고 분하여 마음이 북받침을 일컫는 말)할 때의 '강개'(慷慨)의 모습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강개'를 "오늘날 찾아볼 수 없는 과거 사림들의 모습"이라며 "한국인들이 잃어서는 안 될 가치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소설을 집필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그렇다면 정찬주 씨가 생각하는 정치인, 혹은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 무엇일까? 바로 하늘의 도를 실천하는 '군자'(君子)의 모습을 갖추는 것이다. 그리고 군자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수신제가(修身齊家)를 하는 것이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자신을 갈고 닦으며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것이다. 왕조시대에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는 왕의 몫이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듯하다. 단종 이후부터 중종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반정(反正)이 일어나며 권력쟁탈이 벌어졌다. 그만큼 조선시대 정치에서 왕족 외의 사대부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정찬주 씨는 "조광조는 왕도를 갖춘 군자의 정치로 개혁하려 했으나, 중종의 그릇이 이를 담기에는 버거웠다"고 말했다.
역사소설, 특히 정치를 다룬 소설을 읽을 때 현실정치와 대비되는 면을 찾아볼 수밖에 없다. 정찬주 씨에게 "조광조의 개혁은 실패한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이에 "개혁의 본질은 장렬하게 전사하는데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개혁은 세상과 절충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보수의 저항에 절충하고 마는 개혁은 실패라고 보는 것이다.
그는 "조광조 사후에 도학이 더 융성해지고, 서원문화가 꽃 피는 계기가 됐다"며 "조광조의 영향을 받은 호남 사림이 중앙 정계에 활발히 진출해 훈구파들을 견제하고 선비정신이 융성해지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조광조의 개혁은 조광조의 생전에는 실패했지만, 조광조가 간신 권력들과 타협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기에 개혁적 사림문화가 융성해질 수 있었다는 해석이다.
"장렬하게 전사하는 개혁이었더라면"
정찬주 씨는 노무현 정권에 대해서도 "개혁이 좌초된 것은 정권을 잡았을 때의 참 마음, 초심을 잃지 않고 밀고 나갔다면 국민 지지도가 형편없이 떨어지더라도 진정성의 가치만큼은 남지 않았었겠느냐"며 "훗날 평가를 받겠지만 이도저도 아닌 상태가 된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자연히 관심사는 앞으로 있을 대통령 선거로 넘어간다. 정찬주 씨는 지지 후보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늘의 도> 작가답게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 중심의 사회를 꿈꾸는 사람이 있더라"고 언급했다. "결국 하늘의 도라는 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라는 것이다. "대권을 거머쥐기 위해 '앞으로 이렇게 하겠다'는 희망사항을 얘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백성에게 예의를 다하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며 "아무 말 없이 그림자처럼 묵묵히 살아온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반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인데, 수신제가가 안 돼서 시끄러운 사람이 지도자가 됐을 때 과연 아랫물이 맑아질 수 있겠느냐"며 "수신과 제가가 되지 않고 치국과 평천하를 하겠다는 것은 언어도단이자, 그 피해는 백성들이 고스란히 받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정찬주 씨는 대학시절 인연을 맺었던 화순군 쌍봉사 근처에 집을 짓고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쌍봉사와의 인연으로 불교 작품 영역을 확장해 가던 정찬주 씨는 쌍봉사 근처 조광조의 임시 무덤을 통해 사림들을 접하게 됐다. 과거 능주라 불렸던 화순에는 조광조가 짧은 기간 유배당했던 곳이지만 많은 흔적들이 남아 있고, 그를 추종했던 다른 사림들의 흔적도 많이 남아 있다.
정찬주 씨는 "지방에 내려와 보니 아주 많은 얘기들이 보인다"며 "조광조도 화순에 여전히 살아 있는 인물이더라"고 말했다. 그는 <하늘의 도>를 다듬어 조만간 출판물로 펴낼 예정이며, 판소리에 관한 소설을 구상 중이라고 한다.
인터뷰는 정찬주 씨의 화순 자택에서 문학평론가인 이경철 랜덤하우스코리아 주간이 진행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이경철 : <하늘의 도>를 쓴 배경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달라.
정찬주 : 하늘의 도에 이르고자 했던 사람들의 일생을 보면서 '아름다운 선조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조광조의 삶도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아직 재조명 받지 못한 사림들의 모습이 너무 감동적이었다. 죽으면서도 "내 눈을 빼 두어라. 저 간신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죽어서도 지켜보겠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고 이게 바로 유도(儒道)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유교에 대해 종교적 의미로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는데, 참수 당해 죽는 순간에도 "수염은 다치지 않게 하라"는 모습을 보며 유교도 종교라는 것을 느끼게 됐다.
도대체 이런 정신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오늘날 찾아볼 수 없는 수많은 사림들의 모습을 보면서 한국인들이 잃어버려서는 안 될 가치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백 년 전의 역사 속 인물들을 되돌아보며 그런 훌륭한 면면들, 특히 '비분강개(悲憤慷慨)'라고 할 때의 '강개(慷慨)'한 모습이 아름다워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이경철 : 도회지 삶 다 접고 언제부터 이렇게 한적한 쌍봉사 옆에 자리 잡았는가. 쌍봉사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정찬주 : 7년이 됐다. 우연히 지나다 여기가 마음에 들어 거처를 정한 것은 아니다. 내가 나이는 71학번인데 진학이 늦어져 73학번으로 동국대에 들어갔다. 당시 수도경비사 군인들이 학교 안에 들어와 있던 시절이다. 데모가 아주 심했다. 강의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나는 시골에서 유학을 간 셈이었는데, 시골에 계신 부모님 생각에 앞장서서 데모를 할 용기가 없었고, 그렇다고 잔디밭에서 하숙집에서 싸준 도시락을 까먹으며 관심을 끊었던 것도 아니었다. 우리 세대 중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사람들이 많다.
그 때 소설 습작이나 해보자고 해서 모포 하나 들고 온 곳이 쌍봉사이다. 그 전에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쇠락한 절이어서 덮고 잘 모포와 비누 한 장, 칫솔 한 개 가져오라고 해서 이것들과 원고지를 들고 왔다. 식구라고는 주지 스님과 공양 보살 한 명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지 스님이 출타하셨을 때 마른 걸레로 불상의 먼지를 닦고 있는데 부처님이 부드럽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불교의 궁극의 목적이 있다면 저 미소에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 불교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 당시 스님과 '좋은 소설가가 돼서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이 절에 불사를 해 도량을 정비하는데 일조하겠다'고 약속하고 절을 떠났었다.
이경철 : 서울 문명과 현대 조직 사회에서의 삶과 이 곳 삶의 차이는 무엇인가?
정찬주 : 인도에 서너 번 다녀왔는데, 인도에 가서 부러웠던 것 중에 하나가 브라만 계급의 귀족들이 나이 50이 넘으면 사회적인 의무와 가정에 대한 봉사를 다한 뒤 숲 속으로 들어가 지내는 기간을 가진다는 것이었다. 임간기(林間期)라고 하는데, 자연을 스승으로 삼아 사는 기간이다. 나도 언젠가 때가 되면 종교라는 옷도 벗어버리고 서울에서 갖고 있던 하찮은 것이지만 기득권도 벗어던지고 자연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사실 서울 생활이라는 게 우리 의지대로 하는 게 없지 않나. 자의반 타의반 생활이다. 직장도 사주의 의지대로 움직여야 한다. 도회지 생활은 목적적이다. 목표를 설정해놓고 거기를 향해 가는 삶이다. 쉽게 얘기하면 '글을 쓰는 사람은 좋은 소설을 써야겠다. 장사하는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직장인은 승진을 해야겠다'와 같이 목적의 노예가 되는 삶이다.
광주호에 가보면 '식영정'(息影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그림자도 쉬어간다'는 뜻의 정자인데 '목적 지향적인 삶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게 삶을 놓아라'는 '식영'이라는 말이 주는 깨우침을 느꼈다. 그래서 서울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꾸준히 했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내려오게 됐다.
여기 와서 자연을 가까이 하며 살다보니 느끼는 점이 많다. '땅콩'이 왜 땅콩인지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손수 재배를 하다보니 '땅 속에서 자라는 콩'이더라. 자연에서 받는 느낌이 강렬하다. 나더러 '외롭지 않느냐'고들 묻는데, 여기서 살다보니 오히려 여기서 내 삶을 지탱해주는 게 외로움이더라. 외로우니까 자연과 더 가까워진다. '불편하지 않느냐'고도 묻는데, 내가 선택한 불편이기에 별로 불편하지 않다. 이 곳에서 내 인생사의 2기를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역사 속 인물 아직도 지역에는 살아 있다"
이경철 : 주로 불교와 차(茶)에 관련된 소설을 쓰다 왜 조광조라는 유교 개혁가를 다룬 역사소설을 연재하게 됐는가? 혹여 현실의 개혁정치를 염두에 둔 것 아닌가?
정찬주 : 불교 쪽으로 거의 30여 년 써왔고, 그 쪽으로는 흔히 하는 말로 '소기의 성과'랄까. 그런 것을 이뤘다. 내 나름의 독자들도 있고 스님들하고도 인연으로 교우도 깊고 그 교우 속에서 조촐한 행복을 느낄 정도다. 그런데 내 외연을 조금 넓힐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예전부터 판소리에 관심이 많았다. 서울에 있을 때 국악원 다니며 판소리 배웠던 적도 있다.
그런데 여기(화순)에 와서 보니 조광조가 400년 전 인물이 아니라, 지금 현재 주위에 있는 인물이더라. 여기서 20리를 나가면 능주에 조광조의 유배 처소가 있다. 조광조가 능주로 유배 왔을 때 죄인의 신분과는 달리 상당한 대접을 받았던 듯하다. 유배를 가면 처소에 가시울타리 쳐놓고 못 나가게 하기도 했는데, 조광조는 능성 정도는 돌아다녔다. 쌍봉사에도 조광조와 얽힌 구전이 내려오고 있다. 쌍봉사 주지가 당시에 불상을 팔았다는 누명으로 능성에 하옥을 당했는데, 조광조가 전라도 감사에게 편지를 써 주지를 변호해 풀려나게 한 적이 있다. 조광조는 쌍봉사 주지와도 연을 쌓고 있었던 것 같다.
쌍봉사 인근에는 조광조가 사약을 마시고 죽은 뒤 임시로 묻혀 있던 자리가 있다. 가끔 산책 때 가보고 그러는데 표지석이 있는데, 구한말 의병장 최익현이 나라가 어지러우니까 충신 유적지 돌아다닐 때 세운 표지석이다. 최익현은 조광조 유적지를 다녀갔다. 또 예전에는 마을 이름을 조대감골이라고 불렀다더라. 조광조가 먼 역사책 속의 인물이 아니라. 내 집 산중턱 옆에 있더라. 마침 우리는 요즘 개혁의 실패니, 성공이니 눈만 뜨면 듣고 있지 않은가. 조광조의 개혁의 실체는 무엇이었는가. 이런 게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더라. 의도적이라기보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됐다.
이경철 : 소설 속에는 조광조가 호남 도학의 뿌리라고 나오는데, 머문 것은 한 달 남짓에 불과하다. 그 짧은 기간에 어떻게 호남 도학의 뿌리가 될 수 있었겠나?
정찬주 :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살아서 머물렀던 기간은 20일이고, 묻혀 있던 기간은 3개월이다. 그런데 유교에서는 묻혀 있던 자리가 굉장한 의미를 갖더라. 묻힌 자리에 사당을 짓고. 위패를 모시며 불사와 영생이 이뤄진다. 그렇게 보면 결코 짧은 기간은 아니었다. 정말 호남의 도학의 뿌리인가를 살펴보면, 도학이라는 용어부터 얘기해야 한다. 성리학을 도학이라고 한다. 송나라 이전 때까지는 유교라고 했다. 교(敎는) '가르침'의 느낌이 강한 반면, 학(學)은 배움의 느낌이 강하다. 송나라 이전 시대를 관념 유학이라고 하고, 주자 이후에는 실천 유학이라고 한다. '실천한다', '무엇을 닦는다'는 것은 '도'(道)에 해당한다. 그래서 조광조 시절을 '유도'(儒道)라고 한다. 유도라는 것은 삶의 길이다. 유도는 실천을 강조했다. 유도, 도학에서는 유교 경전 중 소학(小學)을 중요시한다. 소학은 실천 학문이다. 수신제가라는 실천지침이자 도덕교과서가 소학이다. 이런 소학 중심의 학풍은 길재에서 김굉필까지 이어지고, 김굉필의 수제자가 조광조였다. 이 쪽 모두 경상도가 뿌리였는데, 김굉필이 순천에 유배 와서 제자들 기르고. 조광조가 화순 사림들을 만나면서 사림들한테 '아 나도 다르게 살아야겠다'는 대의명분을 보여주는 본보기가 됐다. 당시 실천적인 도학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조광조가 죽고 난 다음에 복권이 빨리 됐는데, 복권 되면서 조광조를 추종했던 호남 사림들이 중앙 정계에 활발히 진출하는 기회가 됐다. 조광조는 호남 도학 뿌리라기보다, 호남 도학을 발원, 격발 시켜준 인물이다.
"후보들의 삶의 궤적 돌아보라. 소인배인지 드러난다"
이경철 : 유교의 성리학 중에서 사실적 실천을 강조한 것을 도학이라고 한다면 천도(天道. 하늘의 길)는 무엇이며, 그것은 현실정치에 어떻게 드러나고 있나?
정찬주 : 도학 쪽 관점에서 '하늘의 도'는 인간의 '절대선'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말한다. 그리고 하늘의 도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이라 해서 인간의 마음에 내재돼 있는 것이다. 사람의 도를 인도(人道)라고 한다. 다르게 얘기하자면 천도와 인도는 같은 것이다. 천도는 본질적인 것이고, 인도는 실천적인 것이다. 하늘의 도라는 것은 사람이 걸어야 하는 길이라는 것을 얘기한다. '인'은 사랑, 너그러움, 인자함이고, '의'라는 것은 사람에 대한 의리, '예'라는 것은 예의, '지'라는 것은 사람의 지혜를 말한다. 이러한 것을 갖춘 사람을 '군자'(君子)라고 하는데, 이런 것을 갖추지 않은 사람을 '소인배'(小人輩)라고 한다. 군자가 수신제가(修身齊家)해서 정치를 하는 '군자정치'를 '지치'(至治) 즉, 지극한 정치가 이뤄진다고 하는데. 현실에서 소인배가 정치를 할 때 생기는 피해는 불 보듯 뻔 한 게 아닌가.
이경철 : 요즘 많이 얘기되는 '후보 검증'하는 것도 이 사람이 군자인가 소인배인가를 가려내기 위한 것이라고 봐도 되겠나?
정찬주 : 사람을 위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할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 아니면 사익을 추구하던 권신들처럼 권력을 탐하는 사람은 아닌가 등을 따져보자는 거로 이해한다. 중용(中庸)을 보면 '하늘의 도는 완벽한 것이고, 사람의 도는 완벽해지려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하늘의 도를 쫓아가는 게 사람이다. 이 말을 정치인들이 되새겨볼만하다. 지금 나와 있는 후보들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군자인지 소인배인지 드러나지 않겠는가.
이경철 : 시대배경이 성종으로부터 연산군을 거쳐 중종조까지의 반정, 즉 권력다툼을 주로 다루고 있다. 정치란 무엇이기에 이렇게 끊임없이 권력다툼이 벌어지는 것인가?
정찬주 : 조광조와 그의 동지들이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다. 정치가 바로서지 못하고 자꾸 권력을 탐하는, 소위 '훈구파'들에 의해서 왕권이 흔들리고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곤궁해지는데, 도대체 뭘 손을 대야지 정치가 바로 설 것인가. 이것이 조광조가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다. 그런데 분명히 왕도 정치가 구현됐던 시대가 있었다. 요순시대다. 그 때는 모두가 군자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왕들이 권력을 서로 물려주려고 했다. 조광조 등은 '아, 왕을 교육을 시켜서 왕도 정치를 구현한다면 조정에서는 저절로 소인배들이 발을 못 붙이고, 지치(至治)를 이룰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해답을 도학에서 찾은 것이다.
권력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권력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하다. 문제는 사람인데. 조광조는 소인배가 정치를 하느냐. 군자가 정치를 하느냐에 권력이 좋게 쓰이는지 나쁘게 쓰이는지가 걸려있다고 봤다. 권력을 빼앗기 위해 다툼이 끊이지 않는 세상이 아니라, 권력을 서로 양보하는 세상을 꿈꿨던 것이다.
이경철 : 사람의 도와 하늘의 도가 같은 것은 유교적 이상이지만,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현실이 이러하다면 권력다툼은 끊임없이 일어나지 않겠나?
정찬주 :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군자가 있으면 소인배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조광조가 군자정치라는 이상을 실현하려고 개혁을 할 때 기득권을 뺏기지 않으려는 세력들은 붕당을 만들어 개혁세력을 치고, 권력을 쟁취하려다보니 다툼이 지속되는 것이다.
이경철 : 역사소설은 현재의 삶과 사회를 비추는 거울인데도 이 소설에서는 애써 그걸 비껴가고 있는 듯하다. 하늘의 도만 말할 뿐, 그 구체적 실천의지와 형상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왜인가? 연재 시작에 밝힌 대로 독자의 몫으로 돌리기 위해서인가?
정찬주 : 역사소설은 인물이나 사건을 중심으로 펼쳐가는 것이다. 독자한테 맡긴다는 것은 작가가 역사소설로서 최선을 다한 다음에 할 수 있는 얘기다. 내 의도는 소설 속에 펼쳐진 현실공간은 중종시대였지만, 연산군의 극악무도한 시대라 할까. 유교적 가치가 뒤죽박죽이 돼버린 혼돈의 시대에 대해 의도적으로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얘기하며 그 시대 사림들의 고뇌 양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연산군 폭압의 시대를 회상적으로 배경으로 넣고 있는 의도는 어떤 면에서는 요즘의 시대와 대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요즘의 시대는 가치관이 전도되고 질서가 무너진 시대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시대를 두고 김굉필이나 김종직이나 조광조 같은 사림들은 그 시대를 어떻게 바라봤으며 어떻게 고뇌하며 살 것인가를 얘기하고 싶었다. 또 역시 연산군 시대를 살았지만 하늘의 도를 져버리고 권력을 탐했던 권신과 간신들이 그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느냐를 대비시키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오늘을 살고 있는 당신은 어떻게 살겠는가. 도학자들이 목숨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타협하고 야합해서 당대에 부귀영화를 누리며 호의호식하며 살 것인가. 사람다운 길이 무엇인가를 묻고 싶었던 것이다.
"조광조의 죽음이 도학을 꽃 피웠다"
이경철 : 조광조는 왜 개혁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가. 중종이라는 인간, 권력의 도와 조광조의 하늘의 도가 상충되기에 실패한 것으로 소설에서는 판단할 수 있다. 권력의 속성은 도대체 무엇이라 보는가. 그리고 정치와 권력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정찬주 : 조광조의 개혁이 실패하지 않았다고 본다. 현상적으로 좌절했던 것은 도학 정치를 할 만큼 인품이 되지 못한 중종의 작은 그릇과 조광조를 견제하려는 권신들이 중종을 이용해서 기묘사화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기묘사화 전까지는 조광조를 비롯한 젊은 사림들이 신물이 날 정도로 중종에게 도학 교육을 많이 시켰다. 중종도 성리학문이 깊어졌고. 제도적으로도 도교나 불교의 잔재를 없앴다. 그러다 기묘사화가 일어남으로써 좌절됐다.
나는 개혁의 본질은 장렬하게 실패, 전사하는데 있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개혁은 세상과 절충할 수밖에 없다. 조광조가 꼭 실패했다고 볼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 조광조 사후에 도학이 더 융성해지고 서원문화가 꽃피는 계기가 됐다. 호남 사림들도 중앙정계에 활발히 진출해 훈구파들을 견제하는 등 선비정신이 융성해지는 계기가 됐다. 당대에 좌절했다고 해서 실패했다고 단정 짓는 것은 무리다.
나는 노무현 정권의 개혁이 좌초된 것은 정권을 잡았을 때 참 마음, 초심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를 잃지 않고 밀고 나갔다면 국민 지지도가 형편없이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그것대로의 진정성의 가치는 남지 않았겠느냐고 훗날 평가 받지 않을까 한다. 지금 개혁은 죽도 밥도 안 돼 있고, 지지도는 떨어져 있다.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조광조는 그 점에서 훌륭하게 살다 간 개혁의 전범을 보여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경철 : 조광조가 혼자 도학을 수학하며 세상에 나오지 않다가, 세상에 나와서 개혁을 시도하다 실패한 셈인데, 조광조의 유학자로서의 개인적 운명은 무엇이고, 정치인으로서의 역사적 운명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나?
정찬주 : 조광조의 등장은 역사적 필연이라고 본다. 연산군 시대 등 도덕이 땅에 떨어진 시대에 정치를 정도로 돌려놓은 것이 반정이었다. 그러나 반정 공신들이 도덕적으로 흠이 많은 사람들이었다고 본다. 반정 공신들이 도학자였다면 중종시대 역사는 또 달라졌을 것이라고 본다. 인격적으로 흠이 많고 권력과 사익을 추구하던 사람들이 반정 공신이 되는 바람에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 했다. 도덕적으로 연산군 시대랑 똑같이 돼버렸다. 백성들 지지를 못 받으니 자연적으로 사림들의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고, 훈구파들이 조정에서 물러나야 법도가 바로 선다고 했기 때문에 조광조가 그 중심에 필연적으로 설 수밖에 없었다. 조광조의 등장은 역사적 필연이라고 본다. 조광조가 나가고 싶지 않아도 사림들이 조광조를 내세웠을 것이다. 그 당시 조광조는 최고의 도학자로 평가 받고 있었다. 조광조는 '나는 아직도 부족하다'고 하면서 과거 시험도 보지 않았으며 나서지도 않았다. 조광조가 문과에 급제한 나이가 서른네 살 때였다. 조광조가 서른여덟에 죽었으니 정치를 한 기간은 4년에 불과하다. 조광조는 수신제가를 더 해야 한다고 나서지 않았으나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의 권유에 의해 과거를 봤으니 역사적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조광조는 나름대로 왕도 정치를 실현해 보려 했으나 중종의 작은 그릇 때문에 실현하지 못 했고, 조광조의 깊은 도학을 버거워하던 중종의 심리를 눈치 챈 권신들이 중종을 이용해 기묘사화 일으킨 것이다. 조광조 죽음은 역사적 타살이다.
"'수신제가'없이 지도자 되면, 피해는 국민이 입는다"
이경철 : 지금 우리의 현실정치에서 조광조처럼 하늘의 도에 따라 사리사욕 없이 정치하는 사람을 보았는가. 현실정치에서 왜 도와 도덕이 필요한 것인가?
정찬주 :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않았지만 질문을 받고 둘러보니 비슷한 사람은 있더라. 사람 중심의 사회를 꿈꾸는 사람이다. 결국 하늘의 도라는 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이다. 수신(修身)과 제가(齊家)에 바탕해 진심의 정치, 지극(至極)한 정치를 펼치려는 사람이어야 한다. 대권을 거머쥐기 위해 갑자기 '앞으로 이렇게 살겠다'는 자신의 희망사항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백성에게 예의를 다하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이를 손에 쥐어줄 자가 필요하다.
이경철 : 정치판이 이전투구 양상으로 번지고 있고 서로서로 헐뜯고, 도덕이 없는 것 같은데, 왜 정치판에 도덕이 필요한가?
정찬주 : 우리가 흔히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아진다'는 얘기를 한다. 하늘의 도, 사람의 도를 가장 쉽게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수신제가가 안 돼서 시끄러운 사람이 지도자가 됐을 때 과연 아랫물이 맑아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에 이르는 수신과 제가는 100번을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대학(大學)에 나오는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라는 얘기의 전제도 수신제가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평안하게 하겠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 피해는 백성들에게 고스란히 돌아오게 된다. 윗물이 맑지 않으면 아랫물이 맑지 않은 것이다.
요즘 정치판에 나와서 대권을 꿈꾸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과연 자신은 수신제가가 돼 있는가를 돌아보면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 것 같다. 도라는 것은 수신이다. 몸을 닦는 것이다.
이경철 : 소설이 누가 주인공인줄 알 수 없게 인물과 사건에 집약되지 않고 작중에 드러나 듯 '바람이 불어가듯 허허실실 끌어가고 있다'. 왜 그런 구성을 택했는가?
정찬주 : 구성법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연산군 시대를 장황하게 등장시켰던 것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의 등장에 대한 필연성을 주기 위해서였다. 연산군의 패악(悖惡)과 황음(荒淫)의 이야기를 많이 서술했고, 연산군의 혹독한 시기를 거치면서 자기 목숨을 내놓으면서도 유도의 가치 지키고자 했던 많은 사림들을 소설 속에 등장 시켰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 조광조의 정신을 그들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했던 의도도 있다. 그들이 조광조의 '모자이크'라는 의도가 있었고, 또 하나는 정말 몇 백 년 전에 어떤 의미에서는 문명으로 따지자면 지금 시대와 비교할 수 없는 초라한 시대이지만, 이런 고도의 정신을 갖고 있었던 사림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사림들의 강개한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런 모습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가을에 자기가 죽을 줄 알면서 매화 꽃 핀 그늘에서 거문고를 켜는 선비들을 볼 때 이런 인물들이 있었구나. 교수형을 당해 목이 매달렸는데 동아줄이 썩어 끊어지니 오히려 나장을 호통치는 모습과 그러한 정신. 이게 정말로 오늘 우리가 살아가면서 잊어버려서는 안 될 소금과 빛 같은 정신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선비들의 강개한 모습에 상당히 감동을 받았고, 그런 강개한 모습이 소설을 써나가는 힘이기도 했다.
이경철 : 인물의 전형성이나 사건의 집약 등 소설적 장치는 잘 보이지 않는다. 특히 등장 인물들이 많은데.
정찬주 : 권신이나 간신들의 삶은 픽션을 가미해서 의도적으로 잔혹하게 처리한 측면도 있다. 권선징악이라는 가치가 조금 낡았다고 생각할지 모르는데, 인간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데 하나의 신호등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긴장된 현대 소설적 기법보다는 역사소설에서는 물 흐르듯 흐르는 옛날 이야기 방식이 독자들에게 더 효과적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현실 개혁 정치에 나선 조광조, 김굉필 뛰어넘은 학자"
이경철 : 끊임없이 하늘과 인간의 도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 도에 대한 유교는 물론 차와 더불어 불교적 입장도 기회 있을 때마다 밝히고 있다. 각 가르침이 전하는 도의 본질은 무엇이고 그것의 현실태는 무엇인가?
정찬주 : 수신이 몸을 닦는 도이고, 도(道)는 길이다. 즉 몸을 닦아서 지향하고자 하는 삶의 길이 도이다. 불교나 유교나 모두 도라고 볼 때, 유도의 궁극적 목적은 군자가 되는 것이고, 불교는 성불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다 일맥상통하는데, 다만 불교식으로 얘기하자면 하화중생(下化衆生). 즉 자기 자신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이웃을 위한, 백성을 위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도가 아닌가라고 생각해본다. 자기 자신에게만 머물러 버리면 진정한 도학자라고 볼 수 없지 않을까 한다. 조광조도 끝까지 세상에 나서지 않았으면 과연 진정한 도학자라 칭할 수 있었겠는가. 조광조는 그런 면에서 스승인 김굉필을 뛰어넘은 도학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경철 : 1년 반 동안 연재하며 독자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정찬주 : 화순군청 홈페이지에도 연재가 됐는데, 군청 직원들이 "출근해서 가장 먼저 보는 게 이 소설이었다"고 한다. 어떤 신문에는 '낙향한 작가가 그 지역 역사를 소재로 소설을 쓰는 것도 의미가 있고, 다른 작가들도 생각해볼 문제'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작가들이 각 지방으로 많이 내려가 있는데, 지방마다 독특한 역사와 문화가 있다. 지방으로 내려간 작가들이 지역 역사를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하면 또 다른 문학의 르네상스가 오지 않을까 생각한다는 내용이었다.
30년간 양평손을 연구해 온 동아일보 퇴직기자 한 분이 조광조 시신이 묻혀 있던 곳의 사당 초상화를 보러 오기도 했다.
소설이라는 것이 있을 법한 얘기를 쓰는 것인데, 순천에서 유배 생활을 한 김굉필의 사상을 공부하는 순천 지역 교사들의 모임이 있는데, 김굉필 편이 나가니까 교사 모임에서 찾아와서 강의를 부탁하기도 했다. 또 소설에 화순지역 풍광 묘사를 했더니 출향한 화순 사람들이 화순이 이렇게 아름다운지 몰랐다고 얘기하고, 마을 이름의 유래 같은 것들도 '예전에는 몰랐다'며 많은 관심을 기울여 주셨다.
"인터넷 연재, 원고 분량 자유로워 호흡 길게 갈 수 있었다"
이경철 : 신문, 잡지 등 인쇄매체 연재와 인터넷매체 연재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
정찬주 : 원고지 분량으로부터 자유스럽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신문에서는 한 단이면 원고지 25매 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얘기를 진행하다 끝을 내는 바람에 다음 회로 이상하게 넘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인터넷매체에서는 50매라는 충분한 분량이 주어지니까 강물이 흘러가듯이 호흡을 유장하게 끌고 갈 수 있다. 그래서 '허허실실' 구성이라고 말하는지 모르겠다.(웃음)
이경철 : 이 연재를 끝까지 관심을 갖고 보아준 애독자들에게 한 말씀 한다면?
정찬주 : 처음 쓴 역사소설이다 보니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게 되는 계기가 됐다. 역사라는 것이 발전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반복되는 것 같기도 하는 등 안타까운 측면이 있더라. 그래서 이 소설을 독자들이 보고 선비들이나 그들의 강개한 아름다운 모습. 자기 신념을 죽으면서까지 지켜내고자 했던 정신. 이런 것은 독자들이 현실을 살아가는데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또 허물이 반복되는 것 같은 이러한 모습들에서 반면교사 삼아 지혜를 얻었으면 좋을 것 같다. 분명한 것은 역사에 인과가 있다는 것이다. 조광조처럼 하늘의 도를 따르고자 했던 사람들의 삶은 반드시 후대 사람들로부터 훈장이랄까 그의 삶 자체가 더 추앙을 받지만, 권신들의 경우 당대에는 부귀영화를 누렸을지 몰라도 죽은 뒤에는 허망하게 사라지는 모습을 볼 때 역사에도 인과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유자광은 맹인이 됐다고 한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아 홧병에 눈이 멀었겠지만, 분명 역사에는 인과가 있는 것 같다. 그런 것들을 지혜 삼아서 역사를 받아들이고 소설을 읽었으면 한다. 지난 1년 반동안 많은 조언과 함께 이 작품을 읽어주신 독자들게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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