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바늘꽂이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요사이 욕망으로 뒤덮여진 대도시들을 보면 바로 이 '바늘꽂이'가 생각난다. 인간의 모든 욕심들이 사상, 경제, 정치 분야의 바늘같이 압축되어서, 살벌하게 꼬챙이가 되어있는 모습이 현대도시의 속성이 아닌가하고 생각되기도 한다.
중세시대에는 '도시의 공기는 인간을 자유롭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도시는 바늘 사이로 부는 돌풍 공기가 엉켜서 서로를 경계하고 허점을 노리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이런 바늘들이 위험스럽게 여기저기 꽂혀서 부딪히고 경쟁하면서도 이들을 안정시키는 것은 바로 부드러운 솜뭉치이고 이런 바늘과 솜뭉치가 한데 얽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우리 도시의 모습 같아 보인다.
실제로 어떤 때는 도시의 외형마저 바늘꽂이를 닮기도 한다. 마천루가 끝을 모르고 올라가고 있는 홍콩, 상하이, 그리고 우리의 미래 도시들은 겉으로 보면 영락없는 바늘꽂이 같다. 특히 두바이는 가장 날카로운 바늘로 꽉 차고 있는 대표적인 도시 아닐까?
이렇든 가장 앞서나가고, 가장 복잡하고, 가장 치열한 경쟁의 와중 속에도 도시를 고정시키는 솜 같은 기능이 바로 도시의 환경, 복지, 문화 그리고 '인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도시가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해서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바늘기둥들을 다잡아주고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들이 바로 이러한 복지와 문화의 기능이라고 확신한다. 하기야 요새는 문화마저 기를 쓰는 바늘이 되어서 창의도시, 문화산업 하면서 새로운 욕망과 경쟁의 산물이 되고 있다.
날카로운 침들이 부딪히지 않는 '솜'이 필요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경쟁과 힘의 논리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이들을 안정시키는 인간성을 위한 인프라가 무너지면서 생기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런 문제를 정책적으로 대응하며 도시를 그래도 살 만하게 만드는 것, 즉 바늘꽂이의 솜뭉치 같은 것이 환경정책, 도시오픈스페이스(open space, 열린 공간), 문화와 복지 기능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기능들이 바늘꽂이의 솜들과 같이 안에서는 서로 날카로운 침들이 서로 비비면서 꽂혀서 경쟁하더라고 안전하게 기능을 수행하고 사회의 붕괴를 막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중 도시 오픈스페이스란 개념을 생각하면, 가장 완벽한 오픈스페이스는 사용목적, 사용대상과 사용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즉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는 (Il est interdit d'interdir) 공간으로 볼 수 있다. 즉 무위의 공간으로 다른 사회문제에 대응하는 사회, 환경, 문화를 통한 버퍼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의 기능이 있다고 본다.
세계 도심의 큰 공원들이 19세기 산업혁명으로 인한 도시환경 악화를 완화하고 대응하는 기능으로 생겨났듯이 그리고 급심한 도시화에 피폐된 정서를 되살리기 위해서 만들어졌듯이 오픈스페이스들은 시작부터 도시의 새로운 발전과 진보에 소외된, 그리고 망가진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해서 존재 가치가 있었다.
오픈스페이스가 환경과 정서에서의 버퍼(동작 속도가 다른 두 장치 사이에서 속도 차를 조정하기 위하여 쓰이는 일시적인 저장 장치. 원래 컴퓨터 용어이지만, 이 글에서는 성격이 다른 둘 사이의 완충장치를 가리키는 비유로 쓰였다.)라면 문화정책과 문화의 기능들은 경쟁의 사회에서 소외된 정신과 삶을 회복하기위한 버퍼의 역할로서 가치가 있다.
또 다른 '바늘' 역할 했던 세종로
도시가 바늘과 솜의 아슬아슬한 조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우리의 광화문은 대한민국 하고도, 서울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거대한 바늘들이 비집고 경쟁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가장 강력한 힘들이 모인 세종로는 당시에도 백성들의 민의를 수렴할 수 있는 광장이었다고 한다. 왕조의 우뚝 선 권력과 조선 왕조 육조의 사이에서도 민심과 함께한 장소가 되었다는 것이 아닐까?
현재 세종로는 청와대, 종합청사, 문화관광부, 정부통신부, 국세청 등의 관(官)의 가장 거대한 힘들이 버티고 있고 서울 파이낸스센터 등 금융과 기업의 힘이 아래에서 솟아있으며 또 인근에는 한국언론재단과 주위에 서있는 언론의 힘이 우뚝서있는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이 넘쳐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대사관, 영국대사관, 외교통상부 등 국제적인 힘이 이곳에 집중되 있기도 하면서 좀 멀리는 가장 강력한 지방자치단체인 서울시청과 사법기관의 최고봉인 헌법재판소까지 자리 잡고 있다.
세종로는 이렇듯 권력의 강력한 힘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태풍 사이의 '조용한' 눈이라고 할 수 있다 .
권력이 만들어낸 사이의 무풍지대이지만, 힘의 균형이 무너지던가 아니면 새로운 불씨가 생겨나면 가장 강력한 포스를 보이는 곳이 세종로이기도 하다. 가깝게는 월드컵 붉은 악마의 열기와 촛불시위에서 우리 역사의 가장 중요한 고비와 변화가 모두 세종로에서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은 권력의 중심지이면서 이들을 싸안고 버틸 수 있었던 솜뭉치같이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힘과 침범되지 않은 무위의 공간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세종로 '광로'(광장이 아니라)의 조성 방식은 현대사에서 이렇게 어루만지거나, 아니면 조화를 위한 솜뭉치 같은 방식이 아니라 또다른 새로운 힘을 보여주는 또 다른 바늘을 계속 요구해왔다.
위압적인 화강석 건물들과 관공서들 사이에 더욱 위압적인 넓은 광로의 직선적 구획된 모습과 포커스로 집중되는 시각 처리등으로 계획된 현재의 세종로는 지금까지 권력이나 힘을 중화하는 무위의 공간이라기보다 오히려 주위의 힘을 상징하고 더욱 돋보이게 하는 바로크식 계획의 아류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시민들을 이러한 권위적 계획을 넘어선 새로운 가치와 변화를 세종로 광로에서 만들 수 있었다. 이것은 물리적 형태를 넘어선 시민들의 인식과 가치의 차원에서 가능했었다고 보여진다.
경쟁, 상업, 그리고 땅값 상승에만 '매력적'인 공간이 될 것인가
현재 새롭게 계획되는 광화문 '광장'도 과거의 방식과 같이 새로운 바늘축만을 요구하는 듯하다.
세종로에 들어서는 길이 500m, 폭 27m의 광화문광장은 환경, 보행자축, 디자인을 고려하고 또한 육조거리복원이라는 역사적 가치의 확인 같은 가치들을 이야기한다.
과거와 같이 위압적 거리와 차량통행을 위한 거리, 그리고 항상 전경들에 의해 빨리 지나가고 싶은 거리에서 변한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으로 들 수 있다.
그러나 현재 계획의 개념들을 보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다.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조성된 오픈스페이스에서 했던 이야기 아닌가? 주체가 누가 되든 항상 '세련되면서 환경친화적인 게다가 보행자위주의 공간'이란 얘기는 변함이 없다. 청계천에서 시작되었고 그리고 시청 앞 광장에서도 이야기 되었었다.
게다가 관광의 관점에서 깔끔하고 세련된 거리의 조성이란 점도 빠지지 않고 있다.
겉모양만으로 모두가 반기고 좋아하고 관광하고 싶은 거리, 게다가 상가의 도입으로 과거보다 훨씬 걷고 싶은 거리로서 유혹하는 오픈스페이스를 모두가 지향하는 듯한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의 중심에서, 가장 센 힘들을 상쇄하고 지탱하고 새로이 뒤집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가진 강력한 태풍의 눈과 같은 가능성으로서 중심 오픈스페이스의 기능은 어디서도 기대할 수 없다.
또한 서울시에서 경쟁과 힘의 중간에서 시민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솜뭉치와 같은 부드러운 무위의 공간이라는 개념도 찾아보기 힘들다. 단지 새로운 경쟁력의 공간, 관광과 상업의 공간, 그리고 관공서가 사라진 후 토지가격 상승을 위한 '매력적인' 공간 만 남지 않을까?
공권력이 이전한 후 (물론 몇 개는 남겠지만) 금융, 언론, 외교 등의 강력한 힘들이 내려다보는 공간에서 쇼핑하고, 멋내고 뽐내면서, 매연 사이에서 환경을 찾는 것이 아닌 조촐한 시민공간을 대한민국 중심 광장에서 기대하기는 진정 조선시대보다 어려운 것인가?
우리의 인간성 찾는 막사발 같은 공간이 되기를
광화문광장이 현대사회의 아픔과 소외를 극복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위한 태풍의 눈이며 무위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오히려 환경, 디자인, 명품상가 (충분히 예상된다. 땅값만 생각해도)이 아닌 사람이 생각을 하게 만들고 일상에서 모자라는 것을 채워줄 수 있는 노력을 하게 만드는 텅 빈 공간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그리고 텅 비었기 때문에 막사발처럼 많은 것을 충실히 담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것이 아닌지.
환경을 생각한다면, 농약, 비료와 전정으로 가꾸어진 조경이 아니라, 이 척박한 도심에서 아무 생각 없이 자라날 수 있는 모든 아름다운 야생의 것에 열어놓아서 생명과 변화를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그리고 육조를 복원하여 과거의 권위를 다시 보여주는 것보다는, 광화문 앞에 모여들어 외치던 선조들의 모습을 민주주의 국가의 가장 중요한 빈 터에 가꾸는 것이 어울리지 않을지.
결론적으로 아무것도 안하자는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우리사회에 바늘만이 무성하고 바늘꽂이의 존재와 가치를 점차 망각하고 있는 풍조 즉, 경쟁, 힘, 효율성의 가치사이에 붕괴될 시민의 가치와 인간성의 황폐화를 생각하면서 이들을 받쳐줄 든든한 솜뭉치로서 광화문광장을 그려보게 되었다.
그리고 창조성, 디자인, 환경이 새로운 경쟁력으로만(물론 가치있다) 인식되고 인간성을 위한 느린 삶, 생각하는 삶의 가치에 대한 중요성을 어디서도 이야기하지 않을 때, 우리의 중심광장에서는 이러한 이야기를 만담같이 찾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다시한번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막사발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되었든, 또 다른 아류로서 베껴진 세련됨이 아닌, 참된 빈 공간으로서 광화문광장이 새로이 탄생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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