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록
지렁이가 밤새 말더듬이 한다. 해풍의 말을 버리고 옹알이부터 새롭게 배운다.
지렁이가 몇 날 몇 밤 노랠 웅얼댄다. 기미가요는 절대 안 되야, 다시금 자장가부터 배운다.
지렁이가 몇 달 몇 밤 땅바닥에 울음자락을 놓는다. 어깨울음까지 나갔던 허무의 등짝을 거두고, 돌아와 갓난애처럼 운다. 온몸으로 운다.
지렁이가 몇 해 몇 밤 욕지거릴 내뱉는다. 밟혀야만 겨우 꿈틀하던 지렁이들, 저를 향한 오줌발에 독을 쏘아 올린다.
지렁이가 생을 다해 사랑을 노래한다. 드디어 제 몸 끊어 혈족의 가계도를 엮는다.
비 그친 싱싱한 아침. 붉은 핏줄의 지렁이들, 어느 새벽으로 고행 길 떠나는가? 지렁이가 지나가는 길은 대지의 혈맥지도가 된다.
이정록(李楨錄) 시인은 196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며, 시집으로는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의자>등이 있으며, 동화 <귀신골 송사리>, <십 원짜리 똥탑>이 있다. '김수영 문학상', '김달진 문학상'을 수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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