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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폭력시위? 한국만 아니라 독일도 문제지만…

[87년 20년, 집회와 시위②]외국인의 눈으로 본 한국의 시위

어떤 경우이든 폭력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시위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한국에서 폭력시위는 다시 일어나고 있다. 독재시대가 지났는데도 폭력시위가 부활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아주 당연한 현상이다. 그리고 이 현상은 한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추세라고 할 수 있다.

재미있게도 요즘 한국에서 논쟁되고 있는 폭력시위와 그에 대한 활동가들의 자제촉구 등의 문제제기는 독일에서도 마찬가지다. 다소의 차이는 있겠지만, 폭력시위는 세계적인 현상이며 구조적 폭력에 대한 대응의 결과이고,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의 대책이 될 수는 없지만, 정당성은 있다.

우리가 문제로 삼아야 할 것은 시위방식보다도 폭력의 이유와 원인, 그리고 그것의 해소에 대한 고찰이 아닐까?

세계적 추세가 된 '폭력시위'…독일과 한국의 공통점
▲ 요즘 들어 한국에서 폭력시위는 다시 일어나고 있다. 독재시대가 지났는데도 폭력시위가 부활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아주 당연하고도 세계적인 현상이다. 사진은 지난해 가을 평택에서 열린 집회의 모습. ⓒ프레시안

김영삼 정부에 이어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시위현장에서의 폭력행위가 줄어드는 경향이 발견됐다. 하지만 이른바 '참여정부'에서는 초기를 제외하고는 오히려 강력시위가 다시 두드러지고 있는 추세다.

지난 2005년 여의도에서 열린 농민집회와 2006년 포항에서의 건설노조 집회에서 사람이 죽는 일이 발생했다. 2007년에도 FTA에 반대하는 시위 과정에서 한 사람이 목숨을 끊었다. 집회를 주최하거나 참가하는 활동가들조차 '집회가 너무 과격하다'거나 '시위가 너무 많다'는 얘기를 하고 일각에서는 시위로 인해서 교통체증이 생기니 '자제하자'는 발언까지 나오고 있다.

독일에서는 벤노 오네소르그 학생이 경찰에 의한 사살당한 사건 이후에 시위하다 사망하는 사례는 없다. 이 사건은 68운동에 불을 지핀 사건으로 꼽힌다. 하지만 올해 6월 초에 독일에서 개최된 G-8정상회담을 앞두고 로스톡 시에서는 폭력시위가 발생했다. 이후 시위 개최 측인 아탁(attac) 등에서는 강한 자기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그날 로스톡에서 수만 명의 시위대 중에 1500~2000명 정도에 달하는 이른바 '검은 블록', 즉 자칭 자율파(Autonome, 극좌파)들은 경찰들과 과격한 싸움을 벌였다.

경찰 측과 시위대 측 모두에게 수백 명의 부상자 생겼고 로스톡 시민들은 도시 이미지의 하락과 시위로 인한 구체적인 피해를 호소했다. 그리고 시위주최측은 앞으로 폭력적인 시위참가자의 배제와 자발적인 경비원을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한국에서 진행중인 폭력시위에 대한 논쟁과 매우 비슷한 대목들이다.

공권력과 시위대의 충돌…자극하는 한국과 피하려는 독일

물론 겉으로 봤을 때 한국과 독일의 시위문화는 매우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필자가 직·간접적으로 목격한 한국의 시위는 늘 좀 낯선 부분이 있다. 시위대가 마치 사회주의 행진을 하는 것처럼 한 줄로 정렬해 이른바 '주먹질'하는 것을 비롯해서 진행무대에서 선동무용을 하는 희한한 '공연', 평양의 카드섹션을 떠올리게 하는 일사불란하고 획일적인 '카드 문구올리기', 집회장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음주집회, 지나친 이데올로기화, 동원 참가 등은 자발적인 것보다 동원되고 기능적인 인상을 받아서 좀 어색하고 반감을 일으키곤 한다.
▲한국에서 경찰과 전의경들은 언제나 시위대 인원수보다 약 2배 더 많고, 일부러 잘 보이게 배치되어 있어 정신적 압박감을 가하는 것도 독일 경찰들이 최대한 시위대와 충돌하지 않도록 취하는 전략과 비교된다. 사진은 지난해 8월 15일 열린 '2006 자주평화 대행진'에서 시위대를 향해 방패로 위협하고 있는 경찰의 모습. ⓒ프레시안

참가자들은 집회에 너무 능숙하고 전문적이라서 마치 '시위파견부대'와 같은 인상을 받을 때도 있다. 전문성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만의 리그'가 된다면 나머지 사회와의 교류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시위의 내용이나 의미도 별 다른 중요성과 실천가능성을 갖지 못하고 말 것이다.

계획한 폭력은 말할 것도 없다. 한국에서 경찰과 전의경들은 언제나 시위대 인원수보다 약 2배 더 많고, 일부러 잘 보이게 배치돼 있어 시위대에게 정신적 압박감을 가하는 것도 독일경찰들이 최대한 시위대와 충돌하지 않도록 취하는 전략과 비교된다. 즉, 시위대와 국가권력의 충돌을 오히려 자극하는 한국과 될 수 있는 대로 피하려는 독일은 매우 대조적이다.

신자유주의라는 구조적 폭력

이런 차이의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두 나라들의 근본적인 차이 때문일 것이다.

문화, 역사, 사회 등의 상이한 발전에 따라 한국의 정치참여의 제도화 수준은 비교적 낮다고 할 수 있다. 즉, 선거, 정당, 국회 등 이른바 정상적인 정치참여를 통해서 의사가 제대로 대의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법시위'와 같은 소위 비정상적인 행위라는 대안적 통로를 통해서 목소리를 전달하려고 하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자유의 기능과 중요성을 부여하지만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평화적 시위'로 제한함에 따라 폭력시위의 합법성을 부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법적인 정당성과 상관없이 폭력시위는 (구조적) 폭력의 인과관계에서 일종의 '정당성'도 가지면서 존재한다.

그 이유를 찾아보면 간단하게 프로이드가 말한 '문명속의 불안'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조금 더 구체화시킨다면 신자유주의 지구화에 따라 비슷한 영향을 미치는 구조적 폭력 때문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전 세계적으로 사회문제들이 비슷해짐에 따라 세계인들이 직면하는 어려움들은 수렴화한다. 따라서 이에 대한 반응과 항의도 역시 비슷해질 수 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시위도 세계적인 추세 속에서 발생하는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1999년 미국에서 개최된 세계무역기구(WTO) 정상회담에 맞춰 열린 세계화반대 시위, 2001년 이탈리아에서, 2007년 독일에서 열린 G-8회담에 반대하는 시위, 요즘 한국에서의 (미)군기지 및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에 반대하는 시위 등이 그 사례들이다.

이런 폭력적인 시위는 구조적 폭력에 대한 반응이다. 즉 구조적 폭력의 존재와 그것의 과격함을 폭로하기 위한 것이다. 이 맥락에서 폭력시위는 그 법적·도덕적 정당성 여부보다 원인이 더 중요하다고 하겠다.

"널 파괴하는 것을 파괴하라"
▲ 한국에서도 분명히 일어나고 있는 폭력시위는 민주화의 불충분한 수준, 낮은 제도화와 이에 동반되는 국민들의 낮은 신뢰와 일상생활에서의 불안감에 따른 불만과 두려움의 결과다. 사진은 지난해 여름 파업을 벌인 포항건설노조의 집회 모습.ⓒ프레시안

구조적 폭력은 구체적인 행위자에 의한 폭력이 아니라 가치관, 사회규범, '국가기계', 담론 등과 같은 구조에 의한 폭력을 말한다. 즉, 각종 인종·성 등에 따른 차별뿐만 아니라 소득수준, 교육기회 등 불평등한 분배가 구조적 폭력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렇게 봤을 때 구조적 폭력은 보이지 않는 보편적인 한 사회의 전통에 바탕함으로써 포착하기가 참 어렵다.

한국의 경우 국회(의원), 정당에 대한 신뢰도가 가장 낮다는 연구결과는 낮은 제도화와 불충분한 민주화를 의미하고 있다. 이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사회적 자본'이 축적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결과 시민들이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불만과 불안감, 두려움은 제도적인 통로(선거, 정당, 민원 등)를 통한 자기 의사 표현이 아닌 비정상적인 길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폭력적 저항이 구조적 폭력의 영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회적 불평등이 해결되기는커녕 점점 심해지는 것도 사람들의 좌절감을 더 심화시키는 원인이다. 한국의 경제('경제적 자본')는 세계에서 10위, 재벌들도 10위권 내외에 속하지만 노동자의 단결권 보장 수준은 세계 최하위권이다. 한국은 캄보디아, 필리핀 등 세계적으로 결사의 자유가 존중되지 않고 있는 가장 심각한 5개국 중 하나다. 또 경제협력기구 20개 회원국 가운데 소득격차가 세 번째로 큰 나라이며 일반세의 사회보장부문 사용비율은 3%로 OECD 평균인 43%에 비춰 봤을 때 최저 수준이다.

사람들은 소득, 복지, 삶의 질 등 다양한 분야에서 불안감을 갖는다. 하지만 기존 세계화의 무한경쟁과 시장논리로 인해서 도와주는 사람은커녕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제도조차 없거나 제도가 있더라도 매우 약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무력감을 느끼고 그것이 분노에 이어 폭력으로까지 귀결된다.

'널 파괴하는 것을 파괴하라'는 독일 '자율파'들의 모토는 그것을 잘 압축해서 말해준다. 반대편은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유발하기 때문에 안 된다'고 주장해 폭력시위를 부정한다. 그러나 이런 입장도 역시 (구조적) 폭력을 충분히 문제화할 수 없다는 점에서 기존상황에 별 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20년 후에도 여전한 폭력시위, 무엇을 의미하나

87년 여름, 독재국가라는 분명하고 구체적인 폭력에 대중이 그만큼 구체적으로 저항함으로써 결국 한국은 민주화를 얻어낼 수 있었다. 당시의 폭력시위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20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국가)폭력은 잘 보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에 반해 여전한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은 6월 항쟁만큼 어떤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필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폭력에 그만큼 똑똑하게 대응하는 저항방식이다. 폭력시위는 구조적 폭력을 폭로한다고 하더라도 폭로에만 그치면 별 다른 효과가 없다. 오히려 더 강력한 통제를 정당화하는 악순환을 낳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폭력시위를 부정하고 소위 평화시위를 강요하는 것도 이분법적인 논리에 빠지는 것이다. 즉, 보이지 않는 구조적 폭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근본적인 문제(구조적 폭력 자체)를 해결하지 못하는 차원에 머무를 뿐이다.

한국이 어느 정도 민주화되었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폭력시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 사회에 그만큼 근본적인 문제가 존재하는 것을 가리키는 신호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구조적 폭력의 논리를 이미 내재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즉 언제나 이른바 '먹고 사는 문제'를 앞세워 국익과 경제만 강조하면서 정말로 '살고 먹는 문제'는 뒷전으로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제도에 포섭된 것에 저항하고 우리가 '역사를 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한다. 예컨대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국가, 재벌, 시장이나 폭력시위를 하는 개인 행위자보다도 폭력시위를 정당화할 수도 있는 원인이 존재하고 있음에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정한다면 폭력시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평화시위 아니면 방관이라는 이분법적 접근으로 통해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따라서 '나로부터 시작하는 (일상)혁명', '살아 있는 연대' 등 개인적인 그리고 집단적인, 국제적인 그리고 국내적인, 세계적인 그리고 지방·지역적인 차원에서의 창의적인 노력들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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