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는 민주화됐다고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지만 정작 집회를 진압하는 경찰의 폭력은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이 여전하다. 대학생 이한열 씨의 죽음이 6월 항쟁을 불러왔는데, 전용철, 홍덕표, 하중근 등 아직도 집회와 시위 도중 목숨을 잃는 사람이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시위는 매번 '불법'으로 열리고 있다. 정부가 집회 개최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87년 20주년, 한국사회에서 집회와 시위는 무슨 문제가 있는가? 집회와 시위를 둘러싼 논란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프레시안>은 총 5회에 걸쳐 <87년 20년, 집회와 시위>를 통해 그 물음에 답하고자 한다. 그 첫번째 글은 인권단체연석회의 경찰폭력대응팀에서 보내 왔다. <편집자>
지난 6월 26일 현대차 울산공장 정문 입구에서는 4000여 명이 '정치파업 철회'를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행복도시울산만들기범시민협의회(행울협)'라는 단체에서 주최한 이 집회는 금속노조의 지침에 따른 현대자동차노동조합의 파업을 철회하라는 주장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행울협은 금속노조 지침에 따른 현대차 지부의 파업이 근본적 해결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특히 이들은 이번 현대차노조의 파업이 '미국이 요구하는 자동차 재협상의 실마리를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이 집회를 예상대로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 등 소위 3대 언론은 대서특필했다.
사실 이런 현상은 정치파업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현대차노조의 파업은 언제나 사회 전체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돼 왔다. 현대차노조가 파업을 하면 언제나 공장이 정상운영됐을 때의 자동차 생산량을 비롯해 파업으로 인한 손실액이 언론 지상에 거론되곤 한다. 그를 통해 국민들은 한 번의 파업이 얼마나 국가경제에 손실을 가져오는지에 대해 수도 없이 들어왔던 터이다.
게다가 이런 악선전(!)을 끊임없이 해왔던 3개 언론사들의 그간의 보도행태를 되짚어보면, 그 언론들이 이번 행울협의 집회가 얼마나 '바람직한' 시민들의 목소리인지를 얼마나 알려내고 싶었을지 능히 짐작이 된다.
"집회·시위 근절하자"면서 집회하는 사람들
지난해 11월, 성균관대학교 신문에는 재미있는 기사가 실렸다. 대학로 문화발전위원회가 주최한 '대학로 문화지구 집회·시위 근절을 위한 범국민 캠페인'을 취재하면서 집회·시위의 자유를 돌아보는 기사였다.
가장 재미있던 점은 집회와 시위를 근절하자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 이들이 2시간에 걸쳐 '집회'를 진행했다는 것과 '집회추방, 시위근절'이라는 구호를 연신 외쳐댄 것, "시위하는 사람들을 죽창으로 찔러버려야 합니다!"라는 발언 내용이었다.
집회로 인한 소음과 쓰레기, 교통체증 때문에 재산권과 행복추구권이 침해된다며 모인 이들이 집회를 반대하기 위해 집회를 열었다는 사실은 실제로 이들이 '집회'라는 형식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정치집회'를 반대하고 싶었던 것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물론 '정치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강남에서도, 영월에서도…일상에서 쉽게 마주치는 집회
사실 집회라는 형태는 누구나 쉽게 만날 수 있다. 최근에 자주 만났던 기사 중 하나는 강남구 자원회수시설(쓰레기소각장) 광역화에 반대하는 집회에 대한 기사였다. 강남구 주민들이 타구의 쓰레기를 강남구 자원회수시설에서 처리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쓰레기 처리과정에서 나오는 다이옥신등의 유해물질에 대한 대책 없이 자원회수시설을 광역화 하는 것에 반대한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2004년에는 한국음식업중앙회 회원들이 일명 '솥뚜껑 시위'인 '생존권 사수를 위한 전국 음식업주 궐기대회'를 벌였다. 지속되는 경기침체 탓에 음식업들이 망해가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며 음식업주들이 한꺼번에 솥단지를 내던지는 퍼포먼스를 벌였던 집회였다.
지난해 12월 영월에서는 폐광 지역을 살리기 위해 강원지역의 4개 시·군이 힘써 얻은 강원랜드가 영월군민을 소외시킨다며 "강원랜드는 영월군을 우습게 보지마라. 사슴뿔로 받아버린다"라는 문구의 현수막을 동원해 영월군민 700여 명이 집회를 열기도 했다.
"배려가 있는 주장이 아름답다고요?"
최근 공중파를 통해 연일 방송되는 "배려가 있는 주장은 아름답습니다"라는 내용의 공익광고를 보면 정말 그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촛불 집회를 통해 '질서가 있는 주장'을 말하고, 삼보일배를 보여주며 '절제가 있는 주장'이라고 얘기하며, 전경에게 물을 건네며 '배려가 있는 주장'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이 광고는 정말 평화로운 집회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정치집회'를 반대하고 '배려가 있는 주장'을 말하는 논리 가운데 정작 빠져있는 것은 과연 그 주장이 무엇을 담고 있느냐의 문제다.
2005년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삼보일배를 진행하던 울산건설플랜트노조 조합원 700여 명을 전원 연행하고 주최 측에 소환장을 발부한 경찰은 '절제가 있는 주장'을 받아들일 생각이 정말 있는 것일까? '질서가 있는 주장'을 위해 지난해 서울에서 진행됐던 평택미군기지 확장이전 반대 촛불문화제에 참가했던 사람들에게 수백만 원의 벌금형이 내려진 것은 또 어떤가.
집회와 시위 도중 자주 마주하게 되는 전경과의 대치상황에서 시위대가 '왜 우리가 지금 이 장소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 바로 앞의 전경에게 말이라도 걸라치면 바로 뒤쪽에서 떨어지는 지휘관의 날카로운 명령은 "아는 척 하지 마! 듣지도 마!"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물을 건네줄 생각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임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무엇이 정치집회이고 무엇이 비(非)정치집회인가?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사회 교과서에서 '정치'란 "모든 사람이 인간답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서로 간의 갈등을 해결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여러 가지 일을 말한다"고 정의돼 있다. 이 정의를 토대로 생각해보면 대학로 문화발전위원회의 집회 역시 결국은 사실상의 '정치집회'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학로 문화지구에서 진행되는 집회·시위 주최자들과의 갈등을 해결하고 질서를 유지하고 싶은 바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외의 사례들 역시 모두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 따르면 모두 정치의 범주에 들어가는 내용을 담고 있는 집회임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과연 사람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정치집회', '정치파업'은 과연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가?
앞에서 예로 들었던 모든 집회들이 사실상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설명하고 있는 상황에서, 특정 단체의 집회를 '불법집회'로 규정하는 정부와 경찰의 모습은 참으로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나아가 분노를 억누를 수 없게 만든다.
대학로 문화발전위원회가 주최한 집회의 사례는, 우리가 효과적으로 입장을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 '집회'밖에 없음에 대한 반증이다. 특히 소위 '정치집회'가 과격하기 때문에 시민의 안전을 해칠 우려가 있다고는 하나 "시위대를 죽창으로 찔러버려야 한다"거나 "사슴뿔로 받아버린다"는 구호도 과격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집회'와 '그렇지 않는 집회'를 구분하는 것은 그 기준도 모호하다. 그뿐 아니라 이는 사실상 정부정책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것을 억압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불법집회'라는 딱지를 붙여 집회·시위의 자유를 억누르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당장 우리 집 앞에 쓰레기 소각장이 들어선다면, 화장터가 들어선다면 여러 이유로 반대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님비(NIMBY) 현상을 들먹거리며 욕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나와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한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의 권리를 얘기할 수 있을까?
집회와 시위라는 방법 이외에 우리는 어떤 방법도 쉽게 택할 수 없다. 그러나 집회를 하는 이유에 대해 해명할 기회도 없이 시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억압당한다면 민주주의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반문해볼 필요가 있다. 정치집회냐 아니냐를 가르는 것은 의미가 없다. 진짜 의미 있는 것은 왜 그런 집회를 열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듣는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