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누가 후보가 될지 여전히 예측하기 어렵다. 한나라당은 한나라당대로 안개 속에 놓여 있고, 범여권은 여러 주자들이 일대 혼전 속에 있다. 민주노동당에서도 누가 최종 후보가 될지 장담하기 쉽지 않다. 경선 과정에서 치열한 검증이 이뤄지는 것은 나무랄 게 못된다. 하지만 혹시 이러다가 당 대 당 비교와 검증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12월 19일 기표소 앞에 서 있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다.
국가 비전과 정책 검증 이뤄져야
현재의 추이대로라면, 진도가 가장 늦은 범여권의 경우 10월이나 돼야 후보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그 이후 후보 단일화 과정이라도 있게 되면, 당 대 당 후보 비교와 검증 시간은 상당히 부족할 것이다. 선거 막판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네거티브 전략들까지 고려하면, 이번 대선은 제대로 된 검증을 생략한 채 치르는 선거가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뭔가 방향이 잘못돼 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검증에는 여러 차원이 있다. 개인의 자질, 도덕성에 대한 검증도 있고, 비전과 정책에 대한 검증도 존재한다. 당내 경선에는 아무래도 정치 노선이 유사하기 때문에 전자에 초점이 맞춰질 가능성이 높다. 반면 당 대 당 경쟁에서는 후자에 무게 중심이 놓일 수 있다. 전자의 검증도 의미 있지만,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한 상황을 고려하면 후자의 검증은 더없이 중요하다.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 내가 바라는 것은 국가 비전 및 정책에 대한 치열하고 생산적인 토론이다. 특히 이번 선거는 민주화 20년을 결산하는 선거라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선 자리'와 '갈 길'에 대한 일대 논쟁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총선이 '회고 투표' 성향이 두드러진다면 대선은 '전망 투표' 경향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는 민주화 20년을 맞아 회고와 전망 투표가 동시에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민주화세력의 평가
최근 나는 동료 교수와 함께 경제전문가 260명(기업인, 경제관련 교수, 경제부 기자, 애널리스트 등)을 대상으로 정치개혁이 경제성장과 사회발전에 미친 영향을 조사한 바 있다. 이 조사 말미에 이뤄진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경제인들의 평가는 그 결과가 자못 흥미로웠다.
민주화세력이 한국 현대사 및 사회발전에 대한 기여 정도에 대해 응답자들은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인식(55.0%)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그림 1 참조). 하지만, 민주화세력이 향후 사회발전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묻는 질문에는 부정적인 의견(35.8%), 보통(31.2%), 긍정적인 의견(32.3%)이 팽팽히 맞섰다(그림 2 참조).
흥미로운 사실은 세부항목 조사에서 세대별, 지역별, 국정운영 지지 여부별로 민주화세력의 향후 역할에 대한 기대의 차이가 매우 크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30대 이하와 50대 이상은 상대적으로 민주화세력의 향후 역할에 대한 기대가 높지 않았지만, 386세대는 민주화세력의 역할에 대해 여전히 높은 기대를 갖고 있었다. 더불어 노무현 정부 국정운영에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민주화세력의 미래 전망과 그 역할에 대해서도 큰 기대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조사결과는 일각에서 제시하는 '민주화세력 무능론'이나 민주화세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와 같은 일방적인 평가가 온당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물론 전문가들의 평가보다 일상생활에 밀착돼 있는 국민들의 생각은 다소 냉정하다. 최근 한겨레신문이 보도했듯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잃어버린 10년'에 대해 진보개혁 전문가들의 78%는 '그렇지 않다'고 답변한 반면, 국민들은 55%나 '그렇다'고 답변한 것은 그 단적인 사례다.
경제 성장, 양극화 해소, 평화 정착
여하튼 민주화세력에 대한 평가는 당 대 당 토론 과정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이룰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런 과거에 대한 평가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계속돼 온 경제.사회 패러다임을 어느 정도, 그리고 어떻게 바꿀 것인가의 미래 비전 및 정책과 직결돼 있다. 지난 10년간 집권해 온 중도 정부는 경제적 신자유주의와 사회적 복지국가 모델을 결합하려고 해 왔다. '제3의 길'의 한국적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이 모델은 외환위기를 벗어나게 하는 성과를 가져 왔다. 또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등을 포함한 일련의 정책은 복지국가의 기초를 세우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 모델이 지금 전환점에 도달해 있다는 점이다. 경제적 신자유주의와 사회적 복지국가 모델은 상호 시너지 효과를 창출한다기보다, 그 반대로 경제적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양극화를 강화해 오고, 복지정책은 그 동안 적잖은 노력이 경주돼 왔음에도 여전히 작지 않은 사각 지대를 갖고 있다. 바로 이것이 현재 우리 사회의 현주소이며, 이번 대선에서 국민들은 담론 및 정책 수준에서라도 이에 대한 속 시원한 대안을 듣고 싶어 한다.
6월 말 현재 제출된 주요 비전을 지켜보면,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747 구상'(7% 성장, 4만 달러 국민소득, 7대 경제강국)을, 박근혜 후보는 '줄푸세'(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풀고 법과 원칙을 세우자)로 7% 성장을 강조한다. 범여권의 경우, 정동영 후보는 평화가 돈이라는 '한반도 평화시장론'을, 손학규 후보는 '21세기 광개토전략'과 '4대 민생불안 해소책'을, 이해찬 후보는 '세계 일류국가'와 사회 양극화 해소를 주요 비전으로 내세운다. 한편 민주노동당의 경우 권영길 후보는 '진보적 경제성장론'을, 노회찬 후보는 평화와 일자리 창출을, 심상정 후보는 '세 박자 경제론'을 비전으로 제시한다.
이런 비전 제시에서 나타나는 주요 흐름은 세 가지다. 첫째, 보수, 중도, 진보를 아울러 경제성장이 강조된다. 최근 우리 경제성장률이 과연 낮은 것인지는 논란거리지만, 국민 다수가 더 많은 성장을 원하고 있음은 분명한 듯하다. 둘째, 일자리 창출과 양극화 해소 또한 주요 아젠다로 강조된다. 강화되고 있는 사회양극화를 해소할 대책은 현재 매우 시급하며, 일자리 창출 또한 새로운 복지 프로그램으로 부각된다. 여기에 더하여 세 번째로 한반도 평화정착이 중도와 진보세력의 경우 특히 강조되고 있다.
더 이상 시간 지체 말아야
물론 성장 동력 확충, 사회양극화 해소, 한반도 평화 정착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에서 보수, 중도, 진보의 방법 및 전략의 차이는 크다. 정부의 역할, 조세 정책, 교육 개혁, 노동시장 정책 등에서 경쟁력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적 접근과 공공성을 강조하는 사회민주주의적 접근, 그리고 이 둘을 절충하려는 중도주의적 접근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21세기 세계사회가 탈이념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이념적 차이는 정책에 크게 반영된다고 봐야 한다.
당 대 당 비전과 정책 검증이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아무리 그럴싸한 전략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실현가능한가, 지속가능한가, 어떤 사회적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에 대한 치밀하고 광범위한 토론이 요청된다. 둘째, 이런 토론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유권자들이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을 이룬다. 문제와 상황이 이러한데도 이번 대선에서 그 검증 시간이 자꾸 줄어드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대통령제의 특성은, 입법부와 행정부 사이의 견제와 균형이 강조된다 하더라도,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력이 주어진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그 권력의 크기에 비례하여 사전 논쟁과 검증이 치밀하게 이뤄져야 한다. 국민들이 우리 사회 미래 비전에 대한 일대 논쟁과 검증을 기다리고 있음을 정치권은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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