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최인호 씨가 한 말이다. 백제와 가야, 고구려, 신라에서 이주한 도래인(渡來人)들의 흔적을 일본 곳곳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고대사(古代史)의 자취에서만 '일본 속 한국'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 오사카(大坂)시 이쿠노(生野)구. 대규모 코리아 타운이 있는 곳이다. 한국어 간판을,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사람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접한 한반도의 자취는 고대사의 영광과 사뭇 다르다.
'돼지를 기르는 들판'에서 살았던 재일 조선인들
고대의 도래인들은 철제 무기와 선진 문물을 갖고 일본에 건너갔다. 그리고 일본의 지배층으로 자리잡았다. 반면 오사카에 코리아 타운을 형성한 이들은 그저 맨몸뚱이 하나만으로 현해탄을 건넜다. 일제 강점기 강제 징용된 탄광 노동자들, 식민지 조선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 해 일본으로 떠밀려온 이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주로 오사카 동쪽 변두리에 몰려 살았다. 지금은 이쿠노(生野)구라 불리는 이곳의 당시 지명은 이카이노(猪飼野). '돼지를 기르는 들판'이라는 뜻이다. 아직도 이카이노라는 지명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조선인들이 대거 이주한 20세기 초중반, 이곳은 거대한 빈민가였다. 이곳 주민들은 대개 고물 수집 등 허드렛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이 지역에 흐르는 히라노 운하 주위에 일본인들이 경영하는 작은 공장들이 빼곡했다. 당시 조선인들은 이 공장에서 운하에 버리는 쓰레기를 뒤져 고철을 건져냈다. 진흙더미 속에서 건져낸 철사 한 조각을 놓고 욕설과 주먹질이 오갔다. 주먹이 센 사람이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었다. '돼지를 기르는 들판'에서 한국인들은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오물더미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을 자신과 마찬가지의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일본에 사는 조선인들은 일본 사회의 전통적인 최하층 신분인 부락민(部落民, 한국의 백정과 비슷한 계층)과 함께 양대 천인(賤人) 집단을 형성했다. 일본에는 최근까지도 입사 지원자가 부락민 출신인지 여부를 확인해주는 업체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상당수의 일본인들은 부락민과 어울리는 것을 꺼린다. 이런 부락민들과 재일 조선인들이 같은 처지였다. 그래서 조선인들이 아예 부락민 거주 지역 속에 들어가서 사는 경우도 많았다. 똑같이 차별받는 처지이므로 오히려 평등하게 어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이처럼 제 발로 부락민들 속으로 들어가는 조선인들을 종종 혐오스런 눈길로 지켜봤다.
재일 교포 사회에 들어선 휴전선
하지만 '돼지를 기르는 들판'에서 오물더미와 뒹굴어도 역시 그들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람이 사는 곳에는 정이 싹튼다. 한편에서는 주먹의 질서가 엄연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주먹이 센 사람조차 결국은 차별의 설움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서로 마찬가지인 이들끼리 나누는 문화가 피어났고, 이곳은 차별받는 이들의 작은 공동체가 됐다. 일본인들이 함부로 범접하지 못 한다는 뜻으로 '해방지구'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런데 '해방'이 이들의 '해방지구'에 균열을 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한반도는 독립했다. 그러나 곧 한반도는 둘로 갈라졌고, 이들의 해방지구 역시 쪼개졌다. 그리고 그저 진흙 속에서 건진 철사 조각을 놓고 다툴 뿐 차별받는 조선인이라는 점에서 다를 게 없었던 이들에게 '남(南)이냐 북(北)이냐'의 선택이 강요됐다. 복잡한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북을 택한 이들은 재일조선인총연합회(총련, 한국에서는 주로 조총련이라 불리지만 재일 교포 사이에서 통용되는 이름은 총련이다)으로 뭉쳤다. 남을 택한 이들은 역시 복잡한 과정을 거쳐 재일조선인거류민단(민단)으로 묶였다.
이어 한반도의 남과 북을 가르는 휴전선만큼이나 높은 담장이 재일 교포 사이에도 들어섰다. 민단과 총련은 서로 적이 됐고, 민단에 소속된 이가 함께 고철을 주우러 다니던 총련 소속의 친구를 만났다는 이유만으로도 한국 정부로부터 간첩 취급을 받아야 했다. 한국의 독재 정권은 북한의 위협을 빌미로 정치사상의 자유를 억눌렀다. 남과 북을 오가려면 철조망을 넘어야 하지만, 민단과 총련 사이를 가로지르는 벽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멀쩡한 사람을 간첩으로 조작해내는 것도 쉬웠다. 재일 교포들이 종종 희생자가 됐다. 억울한 희생자가 생길 때마다 교포 사이의 벽은 두터워졌다. 당연한 일이다. 총련 관계자와의 우연한 만남이 평생을 짓누르는 올가미가 될 수 있으니까.
민단과 총련 사이의 벽은 여전히 높았다…5·17 선언 폐기
그리고 다시 반세기가 지났다. 한국의 군사 정권은 무너졌고, 남북 정상이 만났다. 맹목적인 반공 정서도 많이 누그러졌다. 하지만 민단과 총련 사이의 벽은 여전하다.
그런데 지난해 5월 17일, 이런 벽을 허물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당시 민단 단장이던 하병옥 씨는 다른 민단 관계자들과 함께 이날 총련 본부를 방문했다. 그리고 서만술 총련 의장을 만나 부둥켜 안았다. 이날 양 측은 △6·15 민족통일대축전 일본지역위원회 공동 참가 △8·15 기념축제 공동개최 등의 내용이 담긴 공동성명에 서명했다.
두 대표가 서명하는 순간, 총련 본부는 눈물바다를 이뤘다. 이날 민단과 총련 간부들은 화합을 상징하는 뜻으로 '한반도기'와 '6·15 공동선언'이라고 새겨진 푸른 배지를 가슴에 달았다. 당시 하 전 단장의 나이는 70세, 서 의장의 나이는 78세였다. 이들 두 사람은 인생의 황혼에서야 서로에 대한 뿌리 깊은 반목과 불신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양 측의 화해 분위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약 한 달 뒤인 지난해 6월24일, 민단 임시 중앙위원회가 열렸다. 민단과 총련의 화해를 뜻하는 5·17 선언에 반대하는 세력은 이 자리에서 당시 민단 집행부를 맹렬히 성토했다. 욕설과 고함이 쏟아졌고, 하병옥 집행부는 이에 굴복했다. 북한 미사일 실험 직후인 지난해 7월 6일, 당시 민단 집행부는 5·17 선언의 공식 폐기를 선언했다. 이어 '개혁 민단'을 내걸고 당선된 하병옥 집행부가 물러나고, 반대 편인 정진 씨가 새로운 단장으로 선출됐다.
하병옥 전 단장은 오랫동안 민단 집행부로 활동해왔다. 민단이 한국 군사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시절부터다. 민단을 지배해 온 '반공', '반북'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런 하 전 단장이 총련과 화해를 시도한 것은 재일동포 사회를 가로지르고 있는 불신과 적대의 벽이 내부에서부터 허물어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런 시도가 좌절했다는 것은 이런 벽이 아직 견고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7년이 지나고, 남과 북을 잇는 경의선 철도가 개통됐지만 재일 교포 사회를 가로지르는 냉전의 벽은 여전한 셈이다. 이런 벽은 언제쯤 허물어질 수 있을까.
총련과 민단, 한통련이 함께하는 잔치 마당
그런데 작게나마 화해의 싹을 키워가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거대한 벽에 눌려 꼼지락거리는 이런 작은 싹이 결국 벽을 무너뜨리는 큰 나무로 자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념과 관계없이 재일 교포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잔치 마당을 매년 준비해 왔다. 지난 3일, 오사카시 이쿠노구 이마자토 공원에서 열린 '제14회 통일마당'이 이런 자리였다. 이카이노, '돼지를 기르는 들판'이라 불렸던 바로 그곳이다.
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과 재일한국청년동맹(한청) 등이 마련한 이날 행사는 냉면과 김치 등 소박한 한국 음식과 흥겨운 노래가 어우러진 따뜻한 잔치였다. 그리고 이날 행사장을 다녀간 5000여 명에게 민단과 총련의 구분은 큰 의미가 없었다. 김정의 총련 오사카 본부장 등 총련 관계자들도 대거 참석했다. 민단은 공식적으로 불참 입장을 취했지만, 민단 소속 교포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물론 민단과 총련,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교포들, 그리고 재일 교포가 겪는 차별에 대해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왔던 일본인들도 많았다.
이날 행사장에서 만난 김무석 씨. 올해 칠순을 맞은 그는 제주도 서귀포 출신이다. 하지만 그는 오랫동안 고향을 찾을 수 없었다. 총련 소속이었기 때문.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고향을 찾기 위해 민단에 가입했다. 오랫동안 속해 있던 조직을 바꾼다는 미안함은 의외로 적었다. 한국에서 민주화가 이뤄진 지금, 독재를 옹호했던 민단의 과거를 굳이 들출 필요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민단 민주화, 유신독재 반대를 주장하다 민단에서 제명된 이들이 결성한 한통련의 행사에 민단 단원인 그가 참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민족이 화해할 수만 있다면", 과거 쌓인 감정의 앙금을 털어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역사 바로 세우기'는 재일 교포 사회에서도…."
물론 이렇게 '화해'를 위해 모든 것을 덮어두자는 의견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도 있다. 재일교포 이윤철 씨가 이런 경우다. 그는 민단과 총련,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통련이 주도한 이날 행사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하지만 그는 20년 전, 고(故) 이한열 씨의 죽음을 듣고 일본 땅에서 종일 울었던 기억을 갖고 있다. 그리고 당시 민단이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 조치를 지지했던 것도,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비방했던 것도 기억한다. 이 씨는 "1970~80년대 세계를 감동시켰던 한국 민주화 운동의 성과가 국내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아직도 냉전의 그늘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재일 동포 사회에까지 이런 성과가 전달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한국에서 한동안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말이 유행했다. 그러나 진정한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위해서는 한국의 독재 정권과 결탁했던 민단의 과거를 반성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해외 교포 사회의 '역사 바로 세우기'를 이야기한 사람은 또 있다. 탤런트 권해효 씨다. 권 씨는 '우리겨레하나되기 운동본부'가 추진하는 '북녘 어린이 영양빵 공장 사업'을 홍보하기 위해 이날 행사에 참석했다. 권 씨는 일본에서 유명 인사다. 한류 열풍을 일으킨 드라마 '겨울연가'에서 권 씨가 '김 차장' 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이날 행사장에서도 권 씨가 지날 때마다 사인을 받으려는 팬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권 씨는 이날 만난 이들 가운데 가장 격정적으로 말을 쏟아낸 사람이기도 하다.
권 씨는 이날 "왜 가장 고생한 사람들이 외면당해야 하느냐"라며 말문을 열었다. 일본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고, 한반도의 통일을 염원했던 이들을 가리킨 말이다. 그는 "오사카 빈민촌에서 비참한 생활을 했던 교포들은 자신이 원해서 조국을 떠난 게 아니다. 그들은 강제로 쫒겨났다"면서 "낯선 땅에서 온갖 고생을 겪으며 조국의 통일과 민주화를 염원했던 이들이 한반도 통일 논의에서 외면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분단은 우리의 뜻이 아니었지만, 통일은 우리의 뜻대로 이뤄져야 한다"며 "(일제로부터의) 진정한 독립은 통일을 통해서만 이뤄진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그에게 국가보안법에 대해 물었다. 총련 관계자들이 참석한 이날 행사에서 발언을 한 행위가 국가보안법에 저촉될 가능성에 대해서다. 그리고 통일을 위한 남과 북, 해외 동포의 교류에 국가보안법이 장애물 역할을 하고 있지 않느냐는 질문도 곁들였다.
대답은 단호했다. "6월 3일, 도라산 역에 문익환 목사의 시비(詩碑)가 세워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행사가 취소됐다. 통일부의 승인을 받지 못 해서다. 그리고 이런 간단한 행사조차 제대로 열 수 없는 배경에는 국가보안법이 있다. 만약 내가 이런 자리에 와 있는 것도 어쩌면 국가보안법 상 문제가 될지 모르겠다. 국가보안법이라는 게 어차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적용되는 것 아닌가. 도대체 (경의선)열차만 오가면 뭐하나. 국가보안법부터 없애야 한다. 그런데 소위 민주화 세력이라는 이들이 정권을 잡고도 아직 없애지 못 했다. 요즘 범여권 통합 등을 놓고 말이 많다. 하지만 지난 4년 동안 국가보안법조차 없애지 못 한 이들이 모여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립학교법 문제처럼 '국가보안법 폐지'라는 과제 역시 정치적 흥정의 대상으로 전락하면서 흐지부지될까 두렵다."
"해외 동포 지원, 남과 북이 '바통 터치'해야"
열띤 어조로 대답을 쏟아낸 뒤, 한숨 돌리는 그에게 해외 교포 문제에 관심을 갖는 까닭을 물었다. "1990년대 초, 중앙 아시아의 까레이스키(고려인) 거주 지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받았던 충격은 컸다. 오랜 단절 속에서도 민족적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그들에게 놀랐고, 한국 정부의 무관심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리고 그들을 지원해 온 게 북한이라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어 그는 "과거에는 북한이 잘 살았고, 한국이 못 살았다. 그래서 한국 정부가 어려운 처지에 있는 해외 교포들에게 무관심한 게 정당화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한국이 잘 살고, 북한이 못 산다. 이제 강제로 고국을 떠나야 했던 해외 교포 문제에 대해 남과 북이 '바통 터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권 씨의 이런 지적은 재일 교포 문제에 대해서도 타당한 면이 있다. 해방 당시, 재일 조선인의 수는 230만 명 가량이었다. 이 가운데 약 60만 명이 일본에 잔류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97%가 38선 이남에 고향을 뒀다. 그런데 1950년대 총련에 적을 둔 교포의 비율이 70%에 달했다. 고향이 있는 한국과 대립하는 단체에 가입한 것이다. 또 한국이 고향이지만, 북한으로 귀국한 인원도 10만 명에 가까웠다. 이들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흔히 꼽히는 이유가 재일 교포에 대한 북한 정부의 과감한 지원이다. 총련이 결성된 1955년부터 1959년까지 북한이 장학금, 교육지원금 등의 명목으로 재일교포 사회에 지원한 금액이 약 7억 엔이다. 게다가 이 무렵은 북한이 한국전쟁의 후유증을 심하게 앓고 있던 시기였다.
반면 당시 이승만 정부는 재일교포 문제를 철저히 외면했다. 심지어 '반공, 반북'의 기치를 선명히 내건 민단에 대해서도 거의 지원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재일교포들이 한국에 대해 어떤 감정을 품었는지를 짐작하는 것을 어렵지 않다. 한국에 고향을 둔 많은 교포들이 민단 대신 총련을 택한 것은 결코 "빨갱이 물이 들어서"가 아니었다.
권 씨의 '바통 터치' 주장은 과거 교포들을 외면했던 한국 정부가 이제는 그들에게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 권 씨는 "한국 정부는 해외 교포에 대해 늘 이중적 태도를 취해 왔다. '강대국에 있는 교포냐, 약소국에 사는 교포냐'에 따라서, 그리고 '친정부 성향이냐, 반정부 성향이냐'에 따라서 전혀 상반된 태도를 취했다. 한국 정부의 이런 과거에 대해 교포들은 잘 알고 있다. 이제 한국 정부가 반성할 때다."라고 말했다. 우리 민족사의 일부인 해외 교포들의 역사에서도 '역사 바로 세우기'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우리 학교'의 위기, 북일수교로 풀자
그리고 그는 최근 한국에서 호평을 받은 다큐멘터리 '우리 학교'를 언급하며, 일본 사회에서 위기에 처한 '민족학교'에 대한 관심을 호소했다. '우리 학교'는 호카이도에 있는 총련계 민족학교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최근 일본에서도 상영됐다. 권 씨가 지적한 '민족학교'의 위기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빚어진 시설 낙후의 문제다. 다른 하나는 총련계 학생에 대한 일본 사회의 따돌림이다.
권 씨는 이런 문제가 결국 '북한과 일본의 수교'를 통해서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유는 이렇다. 우경화한 일본 정부의 북한 적대 정책과 이에 동조한 일본 언론의 보도는 총련계 학생에 대한 사회적 위협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포 사업가들에 대한 세무조사 압박으로 나타났다. 이는 총련과 민단 모두에게 심각한 경제적 위협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이런 위협은 민족학교의 재정적 부담으로 이어진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려면 재일 교포 사회의 속사정을 잠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재일 교포들은 심한 차별 탓에 일본 주류 사회에 편입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파칭코 사업이나 요식업 등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세무조사 및 공권력의 감시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지난해 5·17 선언이 무산된 것도 일본 정부의 세무조사 압박이 주요한 이유였다. 북한 적대 정책을 강화하고 있던 일본 정부는 민단과 총련의 화해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재일 교포 사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파칭코 사업, 요식업 등에 대한 세무조사를 강화했다. 그리고 그 효과는 금세 나타났다. 5·17 선언을 지지하던 교포 사업가들이 한순간에 등을 돌린 것이다. 결국 일본 정부의 북한 적대 정책이 바뀌지 않는 한, 재일 교포들의 어려운 처지는 개선되기 힘들다.
이날 행사장에서 '북일 수교'의 필요성을 이야기한 사람은 권 씨만이 아니었다. '북한의 미사일 위협'을 빌미로 우경화 행보를 거듭하는 일본 정부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이런 불안감을 호소하는 이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재일교포 장순부 씨는 "조카가 총련계 민족학교에 다닌다. 최근 일본 사회의 분위기 때문에 몹시 불안하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마침 총련계 민족학교 학생이 지나갔다. 히가시오사카 조선중급학교 3학년 박남이 양이다. 그에게 "실제로 어떤 위협을 느끼는지"에 대해 물었다. 박 양은 "유치원 시절에는 무서운 일을 가끔 겪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없다"라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이런 밝은 대답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켜본 교포들은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조선인도 '사람'이구나"라는 깨달음이 삶을 흔들다
그런데 이날 행사장에서 '우경화하는 일본', '북일수교의 필요성'을 지적한 이들이 빠뜨리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양심적 일본인의 존재'다. 일본 언론 및 정부가 우경화 행보를 거듭해도 이에 흔들리지 않는 양심적 일본인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들과 손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날 행사장에서 만난 이들 가운데 일본인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일본 언론 및 정부의 태도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칠순 노구를 이끌고 행사에 참석한 아리모토 마사아키 씨도 그 중 한 명이다. '일본과 조선의 국교 정상화를 촉구하는 시민연대'(일조시민연대)에서 활동하는 그는 오사카 재일 교포들의 오랜 벗이다. 물론 그 역시 어린 시절에는 여느 일본인과 다를 게 없었다. '돼지를 기르는 들판'에서 살면서, 몸에서 이상한 냄새를 풍기는 조선인들이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때리거나 돌을 던져도 그들은 그저 피하기만 했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심심해서 지나가는 조선인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랬더니 조선인의 눈빛이 확 변했다. 철없는 아이였던 아리모토 마사아키는 이날 조선인에게서 몇 대 얻어맞았다. 1945년 일본이 패한 뒤였다. 그때 깨달았다. '조선인도 사람이구나. 맞으면 아파하고, 놀리면 불쾌해하는구나' 너무 어렸던 탓이기도 했겠지만, 이전까지는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런 작은 깨달음을 그는 잊지 않았다. 자신과 똑같이 아픔을 느끼는 사람인 재일교포들과 친구가 됐다. 스무살 청년이 된 그는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사람이 사람을 때릴 권리가 없다는 어린 시절의 깨달음도 이런 선택에 한몫했다. 오사카 항구를 관리하는 공무원이었던 그는 공무원 노조의 주요 활동가가 됐다. 그리고 노동운동의 경험은 모든 억압받는 이들에 대한 공감대로 이어졌다. 그래서 오사카의 재일교포들과 더욱 친해졌다. 퇴직으로 노동운동을 그만둔 뒤, 그는 오사카 시에서 관리하는 평화회관 관장을 맡았다. 그곳에서 일본이 과거 저지를 잘못을 알리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물론 일본인들의 반발이 따랐지만, 그는 버텼다.
"항구에는 국경이 없다"…남과 북, 조선과 일본을 평등하게 오가는 꿈
그는 이날 "항구에는 국경이 없다"라고 말했다. 어느 나라 배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는 오사카 항에 만경봉호가 처음 들어오던 날, 술렁거리던 재일교포 사회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같은 날, 살벌한 위협을 거듭하던 일본 우익들의 모습도 기억한다.
그는 한국과 북한에 똑같이 8번씩 왕래했다. 재일 교포들의 친구였던 그는 한국과 북한을 굳이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처럼 북한과 일본도 수교해야 한다고 믿는다. 평화회관 관장을 그만둔 뒤, 일조시민연대 활동에 뛰어든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마지막 꿈은 평생의 친구였던 재일 교포들이 "부산에서 열차를 타고, 신의주까지 자유롭게 오가는 것"이다.
이날 행사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500여 명의 참가자가 강강수월래하듯 서로 손을 잡고 빙 둘러서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둥글게 손잡고 노래를 부르는 무리 속에 아리모토 씨도 있었다. 오사카의 저녁은 이렇게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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