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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집회가 짜증난다고요?"

[기고]무엇이 진정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가

최근 안진걸 성공회대 'NGO와 사회운동' 강사(희망제작소 사회창안팀장)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가 펴내는 잡지인 <시민과세계>에 집회와 시위문화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써 논란이 일고 있다. 이 논란은 각 언론사들이 "시민사회단체의 활동가도 현재의 집회와 시위 풍토를 비판했다"며 안 강사의 글이나 인터뷰를 보도해 더욱 확산됐다.

안 강사는 이 글에서 "시민단체들의 집회·시위가 국민들에게 감동이 아니라 짜증을 주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집회현장에서 나타나는 교통체증과 행사장을 뒤덮은 깃발, 경찰과의 충돌, 소음, 화형식, 음주 등이 시민에게 거리감을 느끼게 해 참여는 물론이고 반감마저 갖게 만든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안 강사의 이같은 주장과 관련해 다산인권센터의 박진 상임활동가가 반론을 <프레시안>에 보내와 전문을 전재한다. 박진 활동가는 이 글이 애초에 이같은 주장을 펼쳤던 안 강사가 밝힌 취지인 "반박과 비판 등의 토론을 거쳐 소통과 연대가 넘치는 집회·시위 문화를 만들어보자"는 말 그대로 "무엇이 진정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지 대화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편집자>


아직 석유문명의 혜택을 버리지 못한 저는 살고 있는 수원 인근의 소도시에서 가끔 운전을 합니다. 때로는 바쁘다는 핑계로 조금 더 빨리 가자는 이유로, 그 지독한 서울 길에 차를 몰고 들어서기도 합니다. 일상적으로 정체되어 있는 서울 길은 사람의 인내심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더군요. 참자, 참자 또 참자 해도 서부간선도로 어디쯤에서 한두 시간 서 있던 어느 날은 정말 폭발해 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 이후 아무리 빨리 가고 싶어도 서울행에 운전 하는 일을 접어둔 지 꽤 오래 되었습니다.

서울 시민들이 주말 도로의 집회 시위로 인한 교통정체를 참기 힘들어 한다는 소식은 여러 언론을 통해, 심지어는 경찰의 입을 빌어 자세히 들었습니다. 경찰은 지난 3월 형법 185조의 교통방해죄를 들어 집회·시위에 참여한 이들을 처벌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도로를 손괴하거나 차량을 도로에 방치하는 경우에나 적용되는' 교통방해죄를 적용하겠다는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경찰의 이런 주장이 서울시민들 또는 국민들에게 동의를 얻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서부간선도로 어디쯤에서 서 있던 한두 시간의 불편보다 더 불편한 것은 다른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정말 참기 힘든 불편은 한 달 세 빠지게 일하고 80만 원도 못 받는 가난한 삶들이 지천에 널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십 수 년을 묵묵히 일하다 하루아침에 계약해지 통보를 받고, 거리로 나 앉게 된 엄마와 아빠, 그리고 아이들의 참담한 오늘입니다. 손가락 잘리는 것 쯤 아무 것도 아닌 이주 노동자들의 하루입니다. 그보다 더한 불편은 광우병에 걸린 쇠고기가 밥상에 오르든 말든, 농민과 노동자가 거리의 어느 방패 아래에서 죽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는, 대한민국 보통시민들의 보편타당하다는 의식입니다. '한 해의 모든 집회 시위가 불법이었다면 이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12조'라고 발표하며 학자적 양심마저 돈에 팔아버린 지식인들의 기회주의적인 태도입니다.

돌림병 취급받는 거리의 민주주의,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의 싸늘한 시선이 저한테는 더 큰 불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어느 시민운동가가 시장통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는 집회에 대한 비난과 별반 다르지 않은 어조로 시민·사회운동의 집회·시위를 질타하는 글을 올렸더군요. 오늘 저는 그의 글을 빌어, 집회·시위에 대한 우리사회의 막혀있는 의사소통을 뚫어보고 싶습니다. 희망제작소의 안진걸 씨가 참여사회연구소가 발간하는 학술지 <시민과 세계> 11월호에 기고한 글 원문에 대한 제 반론글이 '반박과 비판 등의 토론을 거쳐 소통과 연대가 넘치는 집회·시위 문화를 만들어 보자는 취지'(한겨레 신문 5월 25일자 안진걸 씨 인터뷰)를 거쳐 '무엇이 진정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지' 대화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짜증주는 시위라고요?
▲ 지난해 12월 '한미 FTA 저지 국민 총궐기 대회' 당시 광화문 도로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이던 시위대의 모습.ⓒ프레시안

안진걸 씨 기고문이 게재되자 각 언론은 '짜증주는 시위, 참여보다 반감 초래'(<문화일보>), '현직 시민운동가 무분별한 집회·시위 이제 그만'(<세계일보>), '요즘 집회·시위 감동없고 짜증'(<한겨레>), '그들만의 무분별한 시위 감동은 없고 짜증만'(<서울신문>)이라는 타이틀로 기사를 실었습니다. 안진걸 씨 본인이 글 서두에 '집회·시위에 절대 자유를 허하라'고 전제했다는 것을 언급한 언론은 한겨레 말고는 물론 없었고 대부분은 시민운동가까지 나서서 집회·시위 짜증난다고 말하고 있음에 방점을 찍었습니다. 제 입맛에 맞는 것만을 취사선택하는 언론을 탓하는 것이 우선 순위겠지만, 어쨌든 이로 인해 힘들게 집회·시위를 진행하는 분(빈민해방철거민연합 논평)들이 분노를 표현하고 소위 원하던 논쟁의 거리가 생성되었으니 글을 쓴 안진걸 씨, 혹여라도 원래의 본뜻과 달리 소통되는 것이 있다면 맞대응을 하셔야겠습니다.

당신이 경험한 80년 5월 광주에서 시위 때문에 차가 막힌다고 시위대를 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 현재는 사회운동의 집회·시위가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짜증을 주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왜곡된 수구기득권 언론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시민사회운동의 집회·시위는 사람들을 만나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며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겐 가장 강력한 무기'인데 '보통의 시민들의 관점에서, 또는 객관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거리감과 불만을 느끼는 요인들'이 팽배해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출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꺼낸 것이 교통체증의 문제였습니다.

안진걸 씨가 지적한대로 운동사회 내부는 '관성화된 집회·시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자유와 권리를 확대하기 위한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인 집회가 참여자들을 객체화시키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감동과 정치적 목표를 얻기 위해 어떻게 국민 대중을 만날 것인가'를 논의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문제의식의 출발은 인도에 설 것인가, 차도에 설 것인가의 협소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할 것은 아니었습니다.

80년 광주에서와 마찬가지의 정치적 우월성과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운동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와 잃어버린 신념에 대한 문제의식, 상실한 정치적 힘에 대한 염려가 선행되었어야 합니다. 단순히 시위대가 인도 위에 올라선다고 운동의 지지도가 올라서고 시위가 인기를 얻는다면, 또는 우리가 지향하는 보편타당한 자유가 매도당하지 않는다면 인도에만 올라가겠습니까? 집회를 안 해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고, 오히려 광주 때는 없었던 절차적 민주주의가 생겼는지 생기지 않았는지 헷갈리지만, 신자유주의 세계질서 재편으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과 가난은 악랄하게 우리를 괴롭히고 있으니 집회의 수가 줄어들래야 줄어들 수 없음은 명확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점은 동의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런 마당에 도로 위에 군중이 떼로 몰리지 않는 한, 대다수의 언론은 한미FTA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는지조차 보도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회·시위는 다중의 위력을 통해 원하는 정치적 성과를 얻고자 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로서 주요도로 곳곳을 뛰어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진걸 씨는 어떤 보통시민이 자신의 귀중한 주말 시간을 반납하고 불법을 불사하고라도 도로를 뛰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았나 봅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어떤 보통 국민들의 짜증이 민주사회의 수인한도를 넘어서는 정도'라고 한 것을 보니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안진걸 씨가 서 있는 위치가 어디인지를 가늠하게 됩니다.

'애초에 집회 신고를 할 때부터 가급적이면 도로 위를 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 보자'니요. 왜 집회·시위를 하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검열을 강요하십니까. '이것이 안착되기 위해서는 경찰 당국도 광장, 공원에서의 집회 신고를 절대적으로 신고 수리해야 한다'라고요? 경찰에게 집회·시위와 관련한 모든 권한을 위임하기라도 할 작정입니까? 표현하신 대로 '집회·시위에서 벌어지는 상당수 문제는 경찰 당국의 무리한 대응이 초래한 경우가 많'은데 집회하는 사람들이 교통방해를 하지 않겠다는 선량한 의지를 보이면 경찰당국이 그것만은 용서하고 허용하고 그래서 집회·시위는 다시 예전과 같은 인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하긴 그렇게 되면 원하시던 대로 길은 안 막힐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대안이 20여 년간 집회를 기획하고 참여했다는 분이 내 놓을 대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앞선 문제의식의 협소함과 성급한 대안으로 인해, 뒤에 제시한 감동을 주는 집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묻혀 버렸습니다.
▲ '애초에 집회 신고를 할 때부터 가급적이면 도로 위를 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 보자'는 안진걸 씨의 주장에 대해 박진 씨는 "문제의식의 협소함과 성급한 대안으로 인해, 뒤에 제시한 감동을 주는 집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묻혀 버렸다"고 지적했다. 사진은 지난해 한미 FTA 저지 범국민 총궐기대회 당시의 모습. ⓒ프레시안

거칠다고 문제 삼지 맙시다

저 역시 안진걸 씨처럼 '○○○ 의장님, ○○○ 대표님'들이 비슷비슷한 어조로 되풀이하는 단상의 연설에 질겁한 사람입니다. 더 이상 감동이 없고 지루하고 거칠고 반복적인 구호에 식상할 대로 식상했습니다. 그래서 집회 시간을 가능한 만큼 줄이자는 제안도 좋고, 발언 연사도 줄이고 평범한 시민들의 목소리를 많이 포함시키자는 것에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분노를 거친 언어로 표현한다고 분노가 제대로 전달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거친 언어로 토하고 있는 어느 누군가의 분노에 대해서는 무조건 탓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발언의 톤조차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며 마이크를 잡은 해고된 아저씨, 아주머니의 연설에 깊은 감동을 받고는 합니다. 애국하는 심정으로 평택 미군기지 싸움하는 것이라고 절규하던 대추리 아줌마들의 악에 받친 분노보다 좋은 연설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집회가 거칠고 폭력적이라고 하는데,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군요. <친절한 금자 씨>의 박찬욱 감독이 '이젠 부자가 착하기까지 하다'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이제는 교양조차도 대를 이어 세습되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사회에 기부할 능력이나 선량함을 발휘할 여유조차 없는 이들이 쌓을 교양은 없다는 말인데요, 이런 이들이 모여서 하는 집회가 거칠거나 투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빼앗긴 자들은 거칠어지고, 빼앗는 자들은 교양을 쌓습니다. 이들은 법전을 들고, 학문으로 논리를 구축하고, 세련된 펜을 잡고 좀처럼 거칠어지지 않는 여유를 부리며, 분노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습니다. 그들은 결의를 드높이는 이들의 척박한 교양과 거친 어투를 문제 삼습니다. 방패에 찍혀 죽은 제 동료의 죽음으로 인해 절망이 깊어진 이들을 향해, '여러분들은 지금 불법집회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경고방송을 3번 합니다.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거나 때로는 고지하지 않고, 막강한 물리력을 앞세워 사람들을 체포합니다.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카메라들을 곳곳에 둘러놓고 채증을 합니다. 당장 때려잡지 않더라도 추후 경찰과 검찰에 소환하며 벌금 수백만 원씩을 부과하는 권력은 이제 점점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 세련됨으로 분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폭력적이라고요?

전경과의 충돌, 최대한 피하고 싶습니다
안진걸 희망제작소 사회창안팀장은 "집회현장에서 나타나는 교통체증과 행사장을 뒤덮은 깃발 등이 시민에게 거리감을 느끼게 해 참여는 물론이고 반감마저 갖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는 "동일한 조끼를 입고 깃발을 들고 집회에 참여하면서 처음으로 '연대'라는 단어를 배우는 이들의 심정도 이해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프레시안

깃발에 대한 문제제기 역시 좋습니다. 깃발 위주의 집회는 일반 시민들의 설 자리를 잃게 하는 것 맞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깃발을 내리고, 집회 내의 모든 권위주의조차 내리면 좋겠습니다. '노동형제'를 외치며 여성참가자들을 배제시키는 남성적 위계질서도 해체되면 좋겠습니다. 횡과 열을 맞추며 군대식으로 사열하는 방식의 집회도 없으면 합니다. 하지만 동일한 조끼를 입고 깃발을 들고 집회에 참여하면서 처음으로 '연대'라는 단어를 배우는 이들의 심정도 이해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편이 많아야 싸워서 이기지"라고 생각하는 늙은 노동자의 집회론도 저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문제의식은 보다 많은 품을 들여서, 그 현장에 들어가서 끊임없이 서로를 내놓고 소통하면서 변화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바깥에서 평론한다고 변화할 문제는 결코 아닙니다.

(<조선일보> 식으로) 시위대가 일부러 경찰과의 충돌을 일삼는다고 말한 것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항적 폭력이 아니라면 폭력을 철저히 방지하기 위해 집회 주최 측과 경찰 간에 이른바 '핫라인'을 통해 조정(통제)하자'는 발상은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안진걸 씨는 지금, 최근 집회마다 경찰이 평화집회 MOU를 체결하자고 요구한 것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집회주최측이 MOU 체결요구는 집회자유에 대한 반헌법적 발상이라고 비판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인간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에 해당하는 집회는 사실 신고할 의무조차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법률에 의해 수없이 제한당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MOU라니요, 저는 경찰 폭력에 의해 살해된 전용철, 홍덕표, 하중근 열사를 생각하면 경찰의 적반하장에 치가 떨릴 뿐입니다.

하지만 전경과의 충돌을 최대한 피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위대의 자세는 경찰측의 자료에 의해서 검증되기도 했습니다. 7000여 건의 집회 중 경찰측에 의해 폭력시위로 규정된 시위는 38회에 불과하다는 보도를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언론에 의해 끊임없이 리와인드되던 폭력집회조차 이제는 교통 불편에 자리를 내 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대안을 더 내 놓으셨습니다. 저 역시 월간 <사람>에 '민주주의만 빼고 다 바꾸자'라는 내용으로 대안적 집회·시위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생각이 다르지 않은 점들이 있으니 언젠가 시간이 되면 더 깊이 논의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정리하자면, 저는 지금의 집회·시위를 좀 더 진정성 있게 민주적으로 재편하길 원합니다. 앞의 글을 빌자면 '이제라도 예전에도 데모를 싫어했고 앞으로도 싫어할 이들이 말하는 성숙한 시위문화와는 무관하게 데모를 재구성해야 한다. 데모가 데모답지 못한 까닭은 폭력과 불법 때문이 아니라 무기력과 관행 때문이고 타협이 아닌 창조성, 절실함과 진정성, 그리고 민주주의가 결여되어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안진걸 씨가 깊은 차원에서 운동사회의 논쟁을 촉발해 주길 바랍니다.

누구의 시선인가요?
▲ 박진 씨는 안진걸 팀장에 대해 "서 있는 위치와 입장"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사진은 지난해 9월 '평택미군기지 확정이전 저지 범국민대책위'가 주최한 서울 시청 앞 집회의 모습. ⓒ프레시안

마지막으로 서 있는 위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입장입니다. 많은 것은 입장에 의해서 결정되고, 자신이 있는 위치에 의해서 판별됩니다. 어떤 카메라가 시위대쪽에서 사진을 찍는다면, 경찰은 폭력적이게 보일 것이며 반대쪽이라면 시위대가 위협적이게 보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진걸 씨는 지금 누구 쪽에 서 계신 것입니까. 이럴 때 과거의 기억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과거를 들먹일 경우 많은 사람들은 현실의 비평자가 되어, 이방인의 입장으로 이야기하게 됩니다. 특히 민주주의를 과거로 추억하는 이들은 6월 항쟁의 축포를 터트리며 현실의 절망과 단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의 시선으로 집회·시위의 재구성을 제안하는가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80년 5월 광주시민 학살자인 노태우 정권의 주구 파쇼 경찰들을 향해 돌을 던지기도 한 당신, 광주 전남에선 당시에 시위 때문에 차가 막힌다고 시위대를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말했지만, 정말 그랬겠습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비평자들은 있었고, 반대자들은 있었습니다. 반대자들이 많은 것은 돌을 던지는 당신에게 힘이 없기 때문이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조금 다른 옷을 입은 주구 파쇼 경찰들은 여전히 거리에서 사람들을 살해하거나 핍박하고 있습니다.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리지도 못하고 해고되는 무수한 비정규직, 수 년을 싸워오고 있지만 관심조차 없는 장기투쟁사업장의 노동자들, 빛도 들지 않는 7평 쪽방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한 부모 엄마의 아이가 있습니다. 이들이 분노의 걸음을 떼고 거리에 나설 때, 경찰은 80년대보다 좋아진 진압장비를 들고 돌을 던지는 당신의 폭력에 대응할 것입니다.

저는 빈민해방철거민연합의 논평대로 '지하철 손잡이를 승객 키 높이에 맞춰 다양하게 만들자는 제안. 이런 정도로 사회구조적 모순과 거리가 있는 표피적인 현상에 희망제작소가 매몰된다면…. '그런 희망이라면 조용히 그런 방식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권하고 싶다'는 조언을 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마다 처한 처지가 다르니, 시민운동의 방식으로, 작은 성과들을 쌓는 길을 선택한 이들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안진걸 씨의 문제제기가 전적으로 틀렸다'고 생각하거나 '당신은 문제제기를 하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운동가라는 이름을 단 사람들은 적어도 교통 불편보다 훨씬 불편한 것에 대해, 눈물과 통한의 세월을 살고 있는 사람들과 공명하기 위해 사회적 도구에 심사숙고한 노출을 했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지금까지 제 반박이 어눌하고 거칠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집회시위 자유 보장을 위한 인권활동을 했으면서도 여전히 교통불편을 이유로 삼는, 경제적 손실을 까닭으로 삼는 이들의 논리를 넘어서지 못하는 한계 때문입니다. 그저 여전히 더 불편하고 더 폭력적인 사회에 이유를 묻자고 말할 수밖에 없는, 절박함만 남은 미천한 논리로 인권운동을 하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민중항쟁의 계절이 돌아오는 6월에는 거리 곳곳에서 저항하는 이들의 분노든, 눈물이든 그 모든 것들이 싸늘하게 박대 받지 않기를 바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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