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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20년, '번지점프대'에 선 4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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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20년, '번지점프대'에 선 40대

[2007 대선이야기]'더 위대한 세대'의 정치사회학

20세기는 위대했다. 비록 두 번의 세계 대전을 포함한 끔찍한 전쟁이 멈추지 않았고, 홀로코스트와 같은 참혹한 제노사이드(대학살)가 곳곳에서 저질러졌고, 그래서 인간성에 대한 근원적 불신이 확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는 위대했다.

생산력과 민주주의는 20세기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역사는 전진했다. 20세기가 위대했다면 누가 그 역사를 만든 주역이었을까? 위대한 시대에 위대한 국가를 만든 위대한 세대(!)는 누구일까?

미국의 대표적 앵커이자 저널리스트인 탐 브로코는 '위대한 세대(The Greatest Generation)'라는 책에서 1910~1920년에 태어난 미국인들에게 '가장 위대한 세대'라고 경의를 표했다. 이 세대는 어린 시절 참혹한 대공황을 겪었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 수십 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2차 대전 이후에는 미국이 정치, 경제, 군사, 과학기술, 문화에서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주역이 되었다. 이들은 한국과 베트남에서도 기꺼이 싸웠으며 케네디의 죽음과 닉슨의 사임도 지켜보았다. 60~70년대 자녀들이 반전과 히피문화에 빠져드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으며, 90년대 초반까지 계속됐던 냉전도 묵묵히 참아냈다. 미국의 언론들은 이 세대가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아 마땅한 세대라고 칭송했다.

나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세대는 1920~1930년대 한국에서 태어난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식민지에 태어나 나라 잃은 서러움으로 어린 날을 보냈다. 해방되자 분단이 그들을 기다렸다. 끔찍한 좌우대립을 겪었다. 혼돈과 혼란, 공포와 불안 속에 그들의 청춘은 흘러가 버렸다. 죽는 날까지 영원히 씻기지 않을 영혼의 상처(6.25전쟁)도 경험했다. 이들은 10대에 철이 들 수밖에 없던 세대다.

민주주의를 갈망(4.19)했으나 몇 차례의 쿠데타 앞에 변변한 저항도 못해 본 무기력을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자신들은 많이 배우지 못했으나 먹지도 입지도 않으면서 자식들을 가르쳤다. 보릿고개를 견뎌내며 '우리도 한 번 잘살아보자'는 생각 하나로 입술을 깨물고 닥치는 대로 일했다. 독일로 갔고 중동으로도 갔다. 세계를 놀라게 한 '한강의 기적'은 그들이 이루어 낸 것이다. 70~80년대 민주화운동을 하는 자식들을 보며 하루도 맘 편히 자보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두려웠으나 마음속으로는 자식들이 자랑스러웠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이젠 힘도 없고 건강도 잃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들을 기억해 주지 않는다. 진정한 영웅들은 기록되지도 기억되지도 못했다.

'더 위대한' 세대

그러나 생각해 보라.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그 보잘 것 없던 나라를 이만큼 세운 이들이 누구였는가?

미국인들은 위대한 세대에 이어 또 하나의 세대에 주목했다. 미국인들은 2차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6~1965년에 태어난 이들을 베이비 붐 세대라고 불렀다. 한 때 '잃어버린 세대'라 불리기도 했던 이들이 새삼 평가 받게 된 것은 그 자신이 베이비부머인 아메리칸 대학의 레너드 스타인혼 교수가 2006년 펴낸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 명백히 '위대한 세대'를 의식한 것이 틀림없는 '더 위대한 세대(The Greater Generation)'라는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 7800만 명으로 추산되는 그들 세대를 위한 변명(?)을 담은 책이다.

실용적인 세대라 불렸으나 사실은 부모들로부터는 이기적 세대로 인식되어 온 그들에게 46년에 태어난, 말 그대로 베이비 붐 1세대인 빌 클린턴은 그 세대의 총아였다. 클린턴의 개인사가 그들 세대의 역사였다. 클린턴의 문화가 그들의 문화였고, 클린턴의 정치의식이 그들의 정치의식이었다. 그러므로 1992년 그들이 미국 유권자의 중심으로 떠올랐을 때, 클린턴이 대통령이 된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스타인혼 교수가 이 책을 쓴 것은 아마도 클린턴과 똑같이 46년생인 조시 W 부시가 2004년 재선에 성공함으로써 그들 세대의 가치가 훼손된 것처럼 인식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하지만 클린턴을 선택한 것도 그들이었고 부시를 선택한 것도 그들이었다(이들 세대의 극적인 변화가 2007년 한국 대선의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줄지 모른다). 이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것은 베트남전이었다(우리의 광주처럼). 반전과 히피로 상징되던 보헤미안(진보)적 기질이 왜 부르조아(보수)적 기질로 변질(?)되었는가? 혹은 보보스(BOBOS, 60년대 보헤미안의 가치와 80년대 부르주아 문화의 결합)의 출현이 상징하듯 다소 모순적인 두 기질이 어떻게 기묘하게 결합되었는가? 이 질문이 중요한 것은 2007년 우리게도 똑같이 던져졌기 때문이다.

피와 땀, 그리고 눈물

스타인혼의 세대 독법을 한국적으로 차용해보자. 20세기의 '위대한 세대'보다 '더 위대한 세대'가 있다면 한국에서 1953~1968에 태어난 세대가 아닐까 싶다(물론 군사정권이 끝나고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던 92년 대학에 입학했던 73년생까지 확장할 수도 있으나 역사적 의미를 엄격하게 적용한다는 의미에서 제외했다). 53년생은 전쟁이 끝나던 해에 태어났다. 대학에 입학하던 72년에는 유신이 선포됐다. 당시 그들 나이는 스무살이었다. 이른바 긴급조치 시대, 혹독한 겨울이 시작됐다. 길고도 추웠던 겨울은 87년 6월에 끝났다. 스무살이 된 68년생들이 대학에 입학하던 해였다.

이들은 보릿고개를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풍족과도 거리가 먼 세대였다. 국민교육헌장을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외워야 했으며, 여학생들도 군사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비록 모조품이긴 했지만 중고생들은 체력 테스트에서 수류탄을 던졌다. 북한보다는 북괴라는 단어에 더 익숙했다. 박정희 정권의 18년 장기집권이 끝나던 날, 기쁨보다는 두려움과 불안에 더 떨어야 했던 세대였다. 또 한 번의 쿠데타가 있었고 광주를 경험했다. 수배와 고문, 투옥이 이어졌다. 살아서 서른을 맞는다는 것이 '부끄러운' 시대였다. 이들은 20대에 철이 들 수밖에 없던 세대였다.

가수 이연실이 부른 '민들레'의 노래가사처럼 그 겨울, 길고도 추웠음에 봄이 온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살았지만 87년 6월 10일 오후 6시 정각, 전국에서 동시에 모든 차량이(트럭이든, 버스든, 택시든, 자가용이든 차종에 상관없이, 운전자의 학력에 상관없이, 운전자의 출신지에 상관없이) 울리던 경적을 신호로(마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듯이) 군사정권은 사실상 끝났다. 민들레가 피면 봄이 오는 것이다.

세상에서 이들보다 더 많은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린 세대는 없었다. 이들이 흘린 피는 고스란히 민주화의 거름이 되었다. 한때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느니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가 피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낫겠다는 조롱을 받았던 나라가 한 세대만에 밑으로부터의 민주혁명을 성공시킨 것이다.

이들은 피만 흘린 게 아니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슬로건 하나만 믿고 286 컴퓨터 들고 맨 땅에 헤딩하듯 무모하게 도전한 결과 세계에서 가장 앞선 IT 강국을 만들었다. 무모한 도전이 무한 도전으로 바뀌기까지 이들이 흘린 땀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민주화와 정보화의 신화를 만들면서 흘린 눈물이 영화, 드라마, 소설에 그대로 녹아 한류를 만들어 냈다. 한류의 맨 밑바닥에는 피와 땀과 눈물이 처절하게 뒤엉켜 있는 것이다.

'위대한 세대'가 '산업화'의 신화를 만들었다면 '더 위대한 세대'는 '민주화', '정보화', '한류'의 신화를 만들어 냈다.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소수자의 권익에 눈 뜨게 했다.

100가지 이슈에 반응하는 40대

그 세대의 막내인 68년생들이 2007년 40살이 됐다. 누구나 40살이 되면 생각이 많아지고 신중해지는 법이다. 맹목적이지 않게 되는 나이다. 여론조사를 하면 이들이 얼마나 합리적으로 답을 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지역적으로 수도권의 민심이 전국적인 표심을 반영하듯 세대로는 40대가 민심을 가장 정확히 반영한다. 이들의 선택이 금년 대선의 승패를 좌우한다고 보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금년 대선은 40대에서 이기는 후보나 정당이 집권하게 될 것이다.

지난 2004년 이후 목도하게 된 한나라당의 압도적 우위는 바로 40대의 강력한 지지 때문이다. 50대 이상에서의 전통적 강세에 덧붙여 40대에서도 지금까지의 우세가 유지 된다면 40~50대의 자녀들인 20대까지 견인될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승부는 뻔하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될 것인가? 50대 이상에서 한나라당의 우세는 충격적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 그다지 변화가 있을 것 같지 않다. 문제는 20~30대와 부모 세대인 60~70대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40대의 선택이다. 자, 이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누구나 나이 40이 되면 다소 보수화되는 경향이 있다. 20대는 주로 취업이나 결혼 등의 이슈 외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30대는 결혼 후 자녀의 양육 문제가 추가 된다. 그러나 40대가 되면 완전히 양상이 달라진다. 모든 이슈가 이들의 관심사다. 이들과 무관한 뉴스는 별로 없다.

부모님의 건강이 악화되고, 자신의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진다. 배우자 역시 몸이 예전 같지 않다. 사업이나 장사는 신통치 않고, 용케 견딘 직장에서도 이젠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다. 아이들의 성적은 올라가지 않는데 학원비는 만만치 않다. 때론 아이들이 두들겨 맞기도 하고 집을 나가기도 한다. 느닷없는 친구의 죽음에 충격을 받는다. 과거는 초라하고 현재는 불만인데 미래는 불안하다. 부동산, 세금, 연금, 교육, 복지 등 뭐하나 그들과 무관한 뉴스가 없다.

20대가 고작 7가지(상징적인 숫자다) 이슈에 반응하는 나이라면 30대는 30가지 이슈에 반응하는 나이다. 40대는 기하급수로 늘어 무려 100가지 이슈에 반응하는 나이다. 일상에서 이런 이슈들에 반응하다보면 자기도 모른 채 보수화 되는 경향이 있다.

더 위대한 세대의 정치적 선택

그렇다면 올해 대선에서 이들은 보수적 선택을 하게 될까? 그것은 아직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지난 세 번의 대선 출구조사 결과는 한국의 40대가 지속적으로 대선에서 개혁과 변화를 선택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왔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중성은 마치 번지점프대를 뛰어내린 상황에 비견할 수 있다. 번지점프를 하면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뛰었으니까 내려오는 것이 확실하고 한 번에 내려오지 않고 몇 번의 반동을 거쳐 내려오는 것이다. 내려온다는 것은 진보성을 상징하고 몇 번의 반동은 보수성을 상징한다.

이들 세대가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올 대선에서도 개혁적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이들의 전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날 입었던 정신적 내상이 치유되지 못하는 것은 시대상황 때문이 아니라 실존적 고통 때문이다.

영화 박하사탕은 이를 웅변한다. 학생운동을 하다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았던 한 학생은 훗날 시대가 바뀌어(민주화된 이후) 식당에서 우연히 자기를 고문한 형사를 만나게 된다. 시대상황은 분명히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사는 당당하고 학생은 주눅 들어 있다.

김근태가 이근안을 용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의 끔찍했던 두 사람의 기억은 현재의 위치와 전혀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내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사람들은 '타인의 삶'을 위해 사라져 주는 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다.

만약 한나라당이 이들 세대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현재와 미래에 처한 조건이 아니라 실존적으로 내면화한 과거의 기억 때문이라는 것을 간과한 탓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세력 역시 이들의 지지를 받는 것이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이들 세대의 다른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이 몇 마디 구호로 동원할 수 있는 군중이 아니다. 세상이 변했다. 이미 세상은 광장에서 권력자를 욕하면서도 겁을 먹지 않는 시대가 됐다. 그만하면 된 것이다. 또 하나는 자신들의 문제가 더 절박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들은 국민이나 시민의 '의무'보다는 소비자, 납세자의 '권리'를 찾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이 세대가 위대한 것은 이들이 자기들이 성취한 위대한 업적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여전히 '위대한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아직 끝내야 할 숙제가 있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한국 사회의 천박성과 폭력성을 제거하고 명실상부한 선진국을 만드는 것, 그리고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평화의 시대를 여는 것이다. 이들 세대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세대인 것은 짧은 시간에 그들이 이룬 업적 때문이 아니라 아직도 그들의 꿈이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가장 부끄러운 것이다. 보수든 진보든, 산업화 세력이든 민주화 세력이든, 선진화를 꿈꾸든 평화를 꿈꾸든 자기 자신의 내면적 성찰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전쟁이 '타인과의 전쟁'이었다면 이제부터의 전쟁은 '자기와의 전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수든 진보든 이들 세대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자기반성'이다. 과거는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보상의 시대는 끝났다. 대중은 미래를 살 뿐이다. 그러나 만일 과거를 산다면 그들의 찬란했던 성취가 아니라 부끄러운 고백을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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