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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왜 당당하게 '과로사' 말 못하나"

[일과 희망⑧]"산별교섭 앞둔 금융 노사, 당당하고 폭넓게!"

1980년대와 1990년대 일본에서는 사무직들의 과로사(過勞死)가 큰 사회적 문제가 됐다. 당시 서구 언론과 지식층에는 과로사의 일본말 인 '카로시(Karoshi)'가 그대로 발음돼 고유명사로 소개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얼마나 무식하게 일을 시키면 과로로 사무직 근로자들이 죽을 수 있겠느냐'면서 약간은 경멸과 연민이 쌓인 시선으로 일본의 '협력적 노사관계' 속에서 죽어나가는 사무직 근로자와 그런 문제를 다루지 못하는 일본 노사관계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었다.

2000년대 들어 일본의 과로사처럼 한국에서도 은행권을 중심으로 지난 몇 년간 사무직들의 과로사가 적지 않게 일어났다고 한다. 은행 간 과도한 실적경쟁과 긴장, 1998년 구조조정 이후 인력감축 이후 늘어난 과중한 업무 속에서 길어진 노동시간과 노동강도 등이 주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은행 영업시간 단축' 논란에 가려진 것은?
▲ 지난 몇 년간 은행권을 중심으로 사무직 노동자의 과로사가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하지만 이 죽음에 대해 모두가 침묵하고 있다. ⓒ연합뉴스

은행 등 금융권에서 일어난 과로사는 해당 기관에서 은폐된 채 처리되곤 했다. 지난 몇 년간 은행 등 금융권에서 몇 건의 과로사가 일어났는지 제대로 조사돼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문제제기도 되지 못했다. 과로사가 일어난 은행들은 사회적인 이미지가 나빠질까 쉬쉬하고 있다. 해당 은행 노조들도 자기 소속 은행측과 담합해 과로사가 일어난 자기 은행의 이름이 사회적으로 알려지는 것을 한사코 반대하고 있다.

각 은행에서 노사가 담합관계, 불건강한 노사관계에 있으면서 실리주의, 자기 기업 이기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개별 은행 노사의 자기 조직 이기주의 때문에 산별노조인 금융산업노조도 과로사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은행을 포함한 금융기관 사무직들의 과로사 문제는 금융산업노조의 단체교섭 의제로 정면으로 제기되지 못하고 엉뚱하게도(?) 2007년 은행의 영업시간 단축문제로 왜곡되어 제기됐다.

'영업시간' 아닌 '영업시간 후 근로시간' 단축을 말해야 한다

은행 영업시간 문제가 제기되자마자 금융산업노조는 각 언론으로부터 뭇매를 맞고는 '우리가 왜 영업시간 단축을 제기했는지 알아보지도 않고 뭇매를 가했다'며 억울해 하는 입장이다. 금융산업노조의 문제제기 배경은 이해가 가면서도 은행 이용자들의 입장을 중심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언론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금융산업노조가 교섭력 향상을 목적으로 전략적으로 은행 영업시간 단축문제를 제기했다는 일각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금융산업노조가 왜 당당하게 과로사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는지, 왜 '영업시간' 단축이 아니라 '영업시간 이후 연장근로나 야간근무' 단축으로 제기하지 않았는지, 왜 내부적으로 개별은행 노사의 담합과 자기 기업 이기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지 자문할 점이 많다. 그뿐만 아니라 은행의 실적주의, 은행노조의 실리주의가 조합원들로 하여금 임금인상, 실적에 따른 각종 수당인상 등에 집착하게 만들고, 나아가 은행의 근로시간, 특히 영업시간이 끝난 뒤 밤 늦게까지 일하는 장시간 노동의 관행, 노동생활의 질, 일과 가정의 양립(work-life balance)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 소홀하게 만들지 않았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각 은행들도 과로사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근본원인인 지나친 실적경쟁과 성과급제, 그에 따른 압력과 긴장, 인력감축에 따른 인력부족과 업무의 과중한 부담을 일상화된 장시간 노동시간으로 해결하는 기존의 관행을 조장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야 한다.

2007년 금융산업노조가 장시간 노동, 과로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체협약 의제로 제기한 은행 영업시간 단축은 영업시간 단축이 아니라 영업시간 이후 근로시간 단축으로 수정 제의해야 할 것이다. 최근 신한은행, 기업은행 등에서 노사가 근로시간 단축을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은 다행스럽지만, 영업시간 이후 근로시간 단축은 어느 하나의 은행만이 실행하기 어려운 과제다. 왜냐하면 어느 한 은행만 영업시간 이후 근로시간을 줄이는 경우 지금처럼 경쟁이 심한 상황에서 해당 은행만 손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행들이 함께 영업시간 이후 근무시간을 줄일 수 있도록 금융산업노조와 단체협약을 통해 합의하는 길이 바람직하다.

정규직의 실리주의와 실현하기 힘든 요구 사이의 해법도 고민하라
▲ 은행영업 시간 단축에 대한 논란의 핵심은 은행원들의 심각한 노동강도다. 그렇다면 오히려 영업시간 단축이 아니라 '영업 후 근로시간 단축'이 노조의 요구가 돼야 하지 않을까?ⓒ연합뉴스

은행의 영업시간(오후 4시30분까지)을 그대로 두고 영업시간이 끝난 뒤 근무시간을 단축하려면 기존 직원들이 보다 짧은 시간 내에 그동안 하던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추가로 인력이 투입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은행은 오후 4시30분 이후에 새롭게 필요한 인력을 기존 정규직과 같은 형태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비정규직 혹은 다른 형태의 고용을 고려할 것이다.

이것은 이제까지 은행들이 상시업무에 비정규직을 사용해 온 관행을 오는 7월 1일 비정규직법 시행을 계기로 어떻게 바꿀 것이냐는 것과 연계된다. 우리은행에서 시도되고 있는 '직군분리를 통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모델'이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주목하고 발전시켜야 할 것이라면, 금융산업노조가 2007년 임금교섭을 계기로 좀 더 적극적인 고민과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다수 은행노조들은 우리은행 모델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혹은 정규직의 임금동결 혹은 임금억제 혹은 장래 고용불안이라는 잠재적 피해 가능성을 경계하면서 정규직들의 임금인상에 집착하는 실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른 소수의 은행노조나 제2금융권 노조들은 다른 노동단체의 눈치를 보거나 혹은 비정규직의 기존 정규직으로의 전환이라는 실현하기 어려운 요구를 하고 있다.

은행과 금융산업노조는 이같은 정규직의 실리주의와 실현곤란한 높은 요구 사이에서 우리은행 모델이 안고 있는 한계와 문제점(차별가능성, 승진기회 차단, 비용부담)을 좀 더 현실적으로 고민하면서 해결방안을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협소한 실리적 의제 벗어나 새로운 접근 시도하자

은행과 금융산업노조는 은행의 외부환경 변화에 따라 새롭게 제기되는 이슈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 우선 단체교섭 의제에서 기존의 임금인상(2007년 9.3% 인상 요구), 추가적인 복지 등 협소한 실리적 의제를 벗어나야 한다. 일과 가정의 양립, 영업시간 이후 근무시간 단축, 과도한 실적경쟁의 제한, 스트레스 줄이기와 관리 등 노동생활과 삶의 질 개선, 고용안정과 임금피크제, 새로운 환경에서 제기되는 직업훈련과 교육을 위한 의제를 제기할 수 있다.

단체교섭의 의제는 아니지만, 은행과 금융산업노조가 함께 안고 있는 대 사회적 문제는 단순한 봉사활동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은행과 금융산업노조는 1998년 이후 지나치게 이익 중심의 경영을 해 오지 않았는지 그리고 그런 경영 속에 방치되어 온 공공성과 보편적 서비스를 개선할 방안은 없는지를 찾아봐야 한다. 영세기업과 가난한 사람들이 좀 더 은행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지 등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은행산업에서의 노사관계는 타협적인 수준을 넘어 심지어 담합적이라 할 정도였다. 이와 같은 은행산업의 협력적 노사관계를 바탕으로 새로운 교섭의제들이 논의된다면 타협적 방안이 도출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은행산업에서 산별교섭을 통해 새로운 이슈와 의제들에 대한 양해와 합의에 기초한 산별협약은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은행들이 개별 기업 노사 수준에서는 제공할 수 없는 공공재(근무시간 단축, 보편적 서비스 개선, 직업훈련과 교육 등)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은행산업에서 타협적인 산별교섭을 통해 새로운 의제에 대한 산별협약 혹은 대안을 마련함으로써 그동안 대립적인 관계를 계속해 온 금속산업이나 병원의 산업별 교섭에서 평소 이루어내기 어려웠던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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