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민주화운동을 하다 수감된 사람'을 꼽는 게 보통이다. 그가 쓴 편지를 외부에 전한 사람에게 주목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야기를 조금 보완해보자. 편지를 전한 사람이 민주인사들을 감시하는 교도관이었다. 조금 흥미가 생긴다. 하지만 역시 주인공은 아니다. 편지를 전한 사람은 그저 심부름꾼 역할을 했을 뿐이다.
이야기를 더 보태자. 교도관은 그 편지가 외부에 전달됐을 때, 미칠 영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역할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도 알았다. 그래서 목숨을 걸었다. 이쯤 되면 편지를 전한 교도관은 역사의 뒤안길에서 큰 역할을 한 숨은 주인공으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새로운 이야기가 더 있다. 그 교도관 자신이 이미 독재 정권에 항거하는 투사였다. 엄혹한 시절, 우연히 접한 책을 통해 사회 문제에 눈을 떴고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한 조직에 가담했다. 이렇게 되면 주연과 조연이 따로 없다. 모두 주인공이다.
이 이야기는 실제 역사다. 이야기 속의 '민주화 운동을 하다 수감된 사람'은 이부영 전 의원이다. 그리고 편지를 전한 교도관은 지난 2004년 서울구치소에서 퇴직한 한재동 씨다. 한 씨는 현재 과천경마공원에서 직원용 테니스장을 관리하는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기적처럼 전달된 편지가 6월 항쟁의 도화선 됐다
당시 상황을 조금 자세히 살펴보자.
"이부영이 들어간 영등포 교도소에는 지난 날 서울 구치소에서 정치범들을 돕던 교도관 한재동이 있었다. 이부영이 쓴 편지가 한재동을 거쳐 전병용에게, 그리고 최종 수신자인 나(김정남)에게 전달된 것이다. 전병용은 그 편지를 내게 전달하고 난 이틀 뒤엔가 검거되었다. 내가 그 편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김정남 전(前) 대통령 교육문화수석비서관의 <프레시안> 기고 '사제단, 국민의 의분에 불을 지르다' 중의 일부)
이 글에서 김 전 비서관은 "편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 술회했다. 도대체 어떤 편지이길래?
1986년 5·3 인천 사태의 배후 인물로 지목돼 영등포 교도소에서 수감 중이던 이부영 씨는 이 교도소의 한 간부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이 간부는 1987년 당시 박 씨 고문에 연루된 혐의로 같은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두 경찰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과거 친분이 있던 이부영 씨에게 전했다. 수감된 경찰관들이 "진범은 따로 있는데…"라며 억울해하더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이 간부는 이 이야기가 교도소 밖으로 새나가리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 했다.
김 전 비서관의 글에 나오는 '기적'은 여기서부터다. 이부영 씨는 그 간부가 지나가듯 한 말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평소 민주 인사들과 가까이 지내던 한재동 교도관에게 볼펜과 종이를 청했다. 한 교도관이 제공한 종이에 "박종철 사건의 진범은 따로 있다"는 내용이 적혔다. 그리고 한 교도관은 며칠 간격으로 이같은 편지를 서너 차례나 밖으로 전했다.
그리고 이 작은 '기적'들은 용기 있는 이들의 결단을 통해 1987년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같은 해 5월 18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광주민주항쟁 7주기 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소속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내용의 성명을 공표한 것. 이 성명은 국민의 억눌린 분노에 불을 붙였다. 이렇게 타오른 불길은 6·10 민주항쟁으로 이어졌고, 결국 전두환 정권의 항복을 끌어냈다.
이부영 씨의 편지를 밖으로 전한 한재동 씨. 그의 역할이 없었다면 '기적'도 없었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알려지기까지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게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성명이 발표된 지 20년이 되는 오는 18일, 사제단은 한 씨에게 감사패를 전달할 예정이다.
1987년 당시 이부영 씨는 편지를 부탁하며 한 씨에게 "죽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 씨는 "알았다"고 간단히 답했다. 한 씨는 자신의 품에 있는 편지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목숨을 걸었다.
"어차피 목숨을 걸었다"
"평범한 교도관이던 그는 왜?"라는 질문이 뒤따른다. 20여 년 뒤인 8일, 한 씨가 일하고 있는 과천경마공원 내 테니스장 관리실을 찾아갔다.
지난 2004년 말, 한 씨는 34년 간의 교도관 생활을 마쳤다. 그리고 이듬해 초 과천경마공원 일용직으로 취업했다. 각종 허드렛일을 하는 대가로 한 달에 130만~140만 원을 받는다.
〈프레시안〉 : 1987년 당시 이부영 씨의 편지를 밖으로 전했다. 혹시 뒤늦게 사실을 파악한 정부 당국으로부터 압력은 없었는지 궁금하다.
한재동 : 정부는 내가 편지를 밖으로 전했다는 사실을 끝내 몰랐다. 아마도 검찰 쪽에서 새나갔다고 여긴 것 같다. 그래서 2004년까지 무사히 교도관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
〈프레시안〉 : 1987년 1월, 이부영 씨의 편지를 외부로 전하던 당시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듣고 싶다.
한재동 : 박종철 사건의 책임을 떠안은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가 당시 영등포 구치소에 수감돼 있었다. 이들이 하필 영등포 구치소에 머물게 된 것이 행운이었다. 두 경찰관의 호소를 내가 이부영 씨에게 전했다는 보도도 있던데, 그건 사실과 다르다.
당시 영등포 교도소에서 일하던 간부 중에 민주 인사들과 친하게 지내던 분이 있다. 이 분이 조 경위와 강 경사 조사 과정에 입회했었다. 그래서 이 두 경찰관의 이야기를 들었고, 당직 근무하던 밤에 이부영 씨를 불러 이야기를 전했다. 물론 이 간부는 이야기가 밖으로 새나가리라는 생각을 전혀 못 했다. 기자 출신이어서인지 이부영 씨는 자신이 들은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금세 눈치 챘다.
그리고 다음날 이부영 씨가 나를 불렀다. 나 역시 이 씨와 가까운 사이였다. 이 씨가 종이와 볼펜을 달라고 했다. 종이가 없어서 교도소 근무일지를 한 장 구해줬다. 다른 직원들이 눈치채지 못 하도록 종이와 볼펜을 점퍼 소매 안에 넣어갔다. 이 씨는 내 손을 잡는 척하면서 소매 속에서 종이와 볼펜을 빼 갔다. 이 씨가 편지를 쓴 뒤, 다른 직원들이 지나지 않는 틈을 타 내게 전했다. 역시 점퍼 소매 안에 넣어서 밖으로 가져갔다.
이 씨는 "김정남 씨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김 씨와 연락하는 것은 어려웠다. 당시 '5·3 사태'로 수배 중이던 김 씨는 잠적 상태였다. 게다가 전화도 마음대로 쓸 수 없었다. 도청 위험 때문이었다. 그래서 김 씨와 가까운 사이였던 전병용 씨를 찾았다. 전 씨는 나와 함께 교도관 생활을 하다 1979년 교도소에서 쫒겨난 사람이다. 전 씨 역시 교도관 시절부터 민주화 인사들과 교분이 두터웠고, 해직 이후에는 재야단체 일에 관여해 왔다.
전 씨가 잠적한 김정남 씨에게 편지를 전했다. 이렇게 이부영→한재동→전병용→김정남으로 이어지는 편지 전달이 서너 차례 쯤 있었던 것 같다.
〈프레시안〉 : 이부영 씨의 편지가 낳을 파장을 예상했다면, 두려웠을 것 같다.
한재동 : 편지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항상 교도관 신분증을 갖고 다녔다. 불심검문에 대비해서다. 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어차피 목숨을 걸었다. 이 씨가 편지를 전할 때, "죽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는 그런 시대였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사람이 많았다. 나 같은 사람 하나 죽여 없애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나 역시 억울한 죽음을 밖으로 알려야 한다는 입장이었기에 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재미 있었다. 당시 집에 들어가니까 아내가 "얼굴에 화색이 돈다"고 하더라.
높은 자리를 꿈꾸던 삶, 한 권의 책이 흔들다
〈프레시안〉 : 목숨을 건 상황에서 두렵지 않았다는 게 놀랍다. 또 교도관이 민주 인사들과 가깝게 지냈다는 사실도 의외다.
한재동 : 민주 인사들과 참 친하게 지냈다. 그 시절 만났던 이들 가운데 나중에 유명해진 사람도 많았다. 이부영, 김종철, 성유보, 양성우…. 참 많았지. 김대중 전 대통령도 가깝게 지냈다. 좋은 분이었는데, 나를 기억할지는 모르겠다.
그들과 가깝게 지냈던 것은 내가 '반골'이라서다. 또 젊은 시절부터 유도, 검도 등의 운동을 꾸준히 해 온 까닭인지 원래 겁이 없는 편이기도 하다.
교도관 생활을 시작하던 첫 해, 그러니까 1971년 4월 수원교도소에서 근무하던 당시 보름 만에 잘렸다. 내가 순천고등학교를 나왔는데, 아마 나름대로 명문고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간부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를 하는 게 윗사람들 눈에 거슬렸고, 내가 반발하니까 바로 파면 통보가 날아왔다. '근무태만'이라는 명목이다. 소청을 냈는데, 그게 받아들여져서 복직했다.
3개월 뒤, 대전교도소로 옮겨 근무하게 됐다. 그런데 당시 대전에서 중요한 계기를 만났다. 당시 하숙방을 같이 쓰던 사람이 〈씨알의 소리〉를 읽는 것을 봤다. 나는 간부 시험 준비용 책이나 읽던 터였는데, 그 책을 보니까 확 빨려들었다. 그리고 정기구독을 신청했고, 그 책 광고에 나온 책까지 모조리 구해 읽었다. 지방에 살다 보니 가끔 정기구독자에게도 책이 배달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경우에는 서울에 올라가서 직접 책을 샀다.
그때 세상에 눈을 떴다. 박정희 정권의 실체를 알게 됐고,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됐다. 당연히 교도소에서 민주 인사들을 만나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 수감된 이들과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그때마다 즐거웠다.
〈프레시안〉 : 그래서 '민주교도관'이라는 별명을 얻었나보다. 그런데 당시처럼 엄혹한 시절에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을 품은 채, 교도관으로 지내려면 마음 고생이 컸을 것 같다.
한재동 : 별명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흔히 듣는다. 사실 교도관 시절 많이 듣던 말이다. 그때마다 나는 "절이 싫다고 중이 떠나면 절은 바뀌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절이 싫으면 절을 바꿔야하는 것 아닌가. 그냥 떠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봤다.
근무복 안 바꿔 입었다고 두들겨 맞던 시절, "구치소를 바꾸자"
〈프레시안〉 : 절(교도소)을 바꾸려는 노력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한재동 : 글쎄. 많이 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잘못된 것을 보고 가만 있지는 않았다.
1979년 3월 1일 일어난 일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공휴일은 무조건 교도소에 비상 걸리는 날이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비상이 걸린 날은 근무복을 국방색으로 바꿔 입고 와야 했다. 그런데 한 동료 직원이 안 바꿔 입고 왔다. 정문 앞에서 감독관에게 걸렸는데, 그 동료는 안에 들어가서 갈아입겠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감독관이 그 동료를 대걸레 봉으로 두들겨 팼다. 맞은 동료가 항의하니까 다른 간부가 군화발로 마구 걷어찼다. 결국 그 동료는 병원에 입원했다.
화가 났다. 그래서 동료 교도관들의 서명을 받아 진정서를 냈다. 당시 서울구치소 직원이 550명 조금 넘었는데, 순식간에 115명이 서명했다.
이런 진정서를 들고 구치소장을 만나려 했지만, 만나주지 않았다. 훗날 이부영 씨의 편지를 김정남 씨에게 전한 전병용 씨도 당시 나와 함께 들고 일어났던 교도관이다. 구치소장은 서명한 직원들 전부를 징계할 태세였다. 문제가 커졌고, 실랑이가 벌어졌다. 결국 때리고 맞은 사람 외에는 구치소 당국이 문제 삼지 않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사태는 일단 정리됐다고 여겼다. 그래서 당시 사태를 이전부터 추진해 오던 모임을 공론화하는 계기로 삼으려 마음 먹었다. 구치소 직원들의 근무 조건 개선을 위한 모임이었다. 구치소의 비리 구조가 열악한 근무 여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태가 끝난 게 아니었다. 같은 해 6월, 갑자기 전출 통보를 받았다. 살펴보니 나와 전병용 씨를 포함해 당시 사태를 주도했던 인물들이 모두 포함됐다. 더욱 수치스러웠던 것은 비리에 연루돼 지방으로 전출되는 이들과 한데 섞여 있었다는 점이다.
일단 전출지인 김천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얼마 뒤, 미처 받지 못한 월급을 받으러 서울로 올라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당시는 월급을 현금으로 줄 때였다. 3월에 벌어진 폭행 사건에 항의했던 이들이 다 모였다. 어차피 지방으로 전출된 상태였으니 구치소장이 조금은 미안해 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구치소장을 만나러 간 자리에서 "지방에서 조용히 있을 것이지…"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결국 흥분한 동료가 집기를 부수며 화를 냈다. 간부들이 달려오고 소동이 벌어졌다.
당시 현장에 있던 이들에 대해 검찰 조사가 시작됐고, 일부는 사표를 냈다. 나와 뜻을 같이 했던 전병용 씨도 이때 교도소를 떠났다. 나는 사표를 쓰지 않고 버텼다. 그래서 구치소 안의 독거방에 갇혔다.
하지만 검찰 조사 시작 단계에서 사표를 낸 전병용 씨 등은 끝내 복직하지 못 했다. 전 씨는 이때부터 토룡탕(지렁이탕) 집, 찻집 등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최근에는 간판업을 했다.
그런데 독거방에서 나온 뒤에는 나도 사표를 냈었다. 하지만 1981년 행정소송에서 승소해 복직할 수 있었다.
"박정희 무너뜨리자"며 가입한 남민전…김재규의 총성에 가로막힌 혁명
<프레시안> : 사표를 안 내고 버티다 갑자기 냈다니 의아하다.
한재동 : 그해 10월 터진 소위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 때문이다. 나는 당시 사표를 낸 상태였는데, 그것과 관계없이 일단 몸을 숨겨야 했다. 나도 남민전에 가담한 상태였으니까.
1970년대 내내 진보적 학술 서적을 읽으며 김재술 씨와 가깝게 지냈다. 김 씨는 당시 일월서각 영업부장을 맡고 있었다.
남민전이라고 하니 이름은 거창하지만, 가입 동기는 소박했다. 사실 남민전이라는 이름은 나중에 신문을 보고 알게 됐다. 평소 시국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눴던 김 씨가 어느 날 나를 찾아와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모임이 있다"고 말했다. "때가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다. 그래서 당연히 가입했다. 가입 직후, 혼자 머리를 깎았다. 결의를 다지기 위해서였다.
남민전 조직은 세 명이 한 단위가 되는 방식으로 짜여졌다. 내가 속한 단위의 중심인물이 김재술 씨였다. 나보다 앞서 사표를 냈던 전병용 씨는 남민전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김 씨와 가깝다는 이유로 숨어 지내야 했다. 전 씨와 내가 함께 도피생활을 했는데, 전 씨와 달리 나는 미혼이어서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전 씨는 아내와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다며 잠깐 집에 들어갔는데, 그때 경찰에 잡혔다. 하지만 나의 도피 생활은 길지 않았다. 박정희가 갑자기 죽었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 10·26 사태의 덕을 본 셈인데….
한재동 : 착잡했다. 1979년은 혁명 분위기가 고조된 시점이었다. 부마항쟁 당시, 시민들의 열기는 분명 그랬다. 그런데 대중의 힘이 아닌 김재규의 총에 의해 박정희가 죽었다. 그 바람에 타오르던 열기가 확 식어버렸다.
어떤 이들은 김재규 씨를 '의사'라고 부른다던데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혁명으로 가는 길을 그가 막아 버렸다.
양 김의 분열로 퇴색된 6월항쟁, "안타깝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당신이 전한 편지가 도화선이 된 6월항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한재동 : 뭐라고 길게 할 말은 없다. 더 밀어붙였어야 했는데, 시민들의 열기가 6·29선언으로 갑자기 수그러든 게 돌이켜 보면 참 안타깝다.
특히 안타까운 것은 당시 양 김 씨의 분열이다. 그들의 분열로 6월항쟁의 의미가 바랬다. 또 민주 세력의 집권이 늦춰졌다.
더 큰 문제는 단지 두 사람의 갈등이 아니라 민주화 세력 전체의 분열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당시 양 진영으로 갈라졌던 이들은 아직까지 서로 반목하며 지낸다. 이제라도 감정의 앙금을 풀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갈라진 민주화 세력의 화해. 그것이 김영삼,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의 마지막 과제가 아닐까 싶다. 일단 두 사람이 먼저 화해해야 한다.
<프레시안> : 당신이 목숨을 걸고 편지를 전한 지, 20년이 지났다. 그 사이 세 명의 대통령이 당시 민주화 세력에서 나왔다.
한재동 : 민주화 이후 집권한 세력이 잘못한 게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처럼 독재정권의 치부를 많이 접한 입장에서는 조금 다르게 받아들인다. 과거 독재정권은 잘못을 은폐했다. 반면 민주화 이후에는 그게 쉽지 않다. 그래서 잘못이 두드러져 보인다.
그런데 보수 언론은 이런 잘못을 이유로 민주화 세력 자체를 통째로 비난한다. 그건 잘못이다.
'6월항쟁의 도화선'의 눈에 비친 비정규직 문제
<프레시안> : 과거 독재정권에 맞섰던 이들이 원했던 것은 단지 절차적 민주화만은 아니었다. 외세의 부당한 간섭에 맞서는 자주적인 통일, 기득권과 자본에 맞서는 민중의 권리도 함께 요구했다. 그런데 이런 요구들은 여전히 수용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과거 남민전 활동을 했고, 1987년 6월항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입장에서 현 상황을 어떻게 보나.
한재동 : 안타깝다. 민주화는 됐지만, 가난한 사람이 계속 가난할 수밖에 없는 구조는 여전하다. 특히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해졌다. 당장 나부터가 비정규직이다. 물론 나는 공무원 연금을 받기 때문에 한 달에 130만~140만 원 정도 받고도 생활이 가능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공무원처럼 연금을 받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내가 공무원 출신이어서 더 민감하게 느끼는 것 같은데, 관공서에도 요즘은 비정규직이 많다. 관공서, 공기업부터 비정규직을 줄여야 한다. 그나마 기관과 직접 계약한 비정규직은 처지가 조금 낫다. 용역업체를 통해 취업한 경우는 정말 힘들다. 한 달에 100만 원도 못 받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사실 부자들은 정부가 도와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산다. 원래 능력이 있으니까 잘 사는 것 아니겠는가. 정부가 할 일은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들어선 정권이라면 비정규직처럼 어려운 사람들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할 텐데…. 마음이 아프다.
<프레시안> : 과거 민주화 운동을 했던 이들이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는 동안 고위 공직에 오른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들 중 상당수는 과거 운동을 함께 하던 소위 기층 민중과 달리 대학을 나오고 공부를 꽤 한 사람들이다. 과거 한 편에 서 있었지만, 지금은 처지가 다른 입장에서 보면 회한이 들 법도 하다.
한재동 : 글쎄.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 어려운 시절에 더 편한 길을 갈 수 있었지만, 힘든 길을 택했다. 그것만으로도 높이 평가한다. 또 당시 품었던 초심을 유지하는 분들도 많다고 본다.
단지 바라는 게 있다면 그와 같은 초심을 버리지 말아 달라는 것, 그리고 과거 쌓인 앙금을 털고 화해했으면 좋겠다는 것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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