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째 끌어 온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 문제가 최종국면을 맞았다. 제주도정은 이 문제가 수년 동안 논란이 돼 온 만큼 이제 결정할 때가 됐다며 수용 가부를 5월에 결정짓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면에는 국방부와 해군의 압력이 결정적으로 한몫 하고 있다는 것이 정황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기지 후보지가 되고 있는 안덕면 화순리, 사계리 주민들과 남원읍 위미리 주민들이 결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주도지사는 이를 크게 고려치 않는 눈치다. 여기에 대다수의 제주도민들은 기지 건설의 실체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제공받지 못한 채 막연한 경제적 기대심리를 품는 것으로만 일관하고 있다.
제주도 내 30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제주도군사기지반대도민대책위와 해당 지역주민들은 이 문제를 평화적이고 합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기지 건설에 따른 찬반 당사자들이 모여 이 문제를 최대한 대화로 풀어보고자 '다자간 협의체'를 제안했고 도의 주관 하에 6차례 회의를 해 왔다. 그러나 제주도정은 이 협의체와 무관하게 별도의 '로드맵'을 만들어 왔고 최근 이를 발표하면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더구나 그 로드맵이란 것이 해군기지 건설과 관련해 관심도나 인지도에 상관없이 불특정 도민 1500명의 설문조사로 결정하겠다고 하는 것이어서, 찬반을 떠나 도민들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다.
게다가 생존이 걸린 해당 지역주민들의 의사는 한 치도 반영될 틈이 없으니 그 자체로 '절차적 폭력'이라 할 수 있다.
'평화의 섬'과 '군사요새'라는 갈림길에 처한 제주
제주도 군사기지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1937년 일제가 제주도 모슬포 일대에 중국 본토 공격을 위한 전진기지로 군비행장을 건설한 이래, 70년 이상 이어져 온 숙명과도 같은 사안이기 때문이다.
1948년에는 당시 이승만 정권이 아예 제주도를 미군의 영구기지로 제공하겠다고 했다가 제주도민뿐만 아니라, 전국민적인 분노를 산 적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에 제주도는 신병을 양성하는 군사훈련장으로 쓰였고, 1989년에도 공군기지를 추진하다 주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힌 바 있다.
이렇듯 지금 첨예한 논란에 처해 있는 제주도 해군기지의 문제는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온 군사기지 시도와 관련, 이를 어떻게 할 것이냐는 역사적 관점에서 다뤄져야 한다.
즉 지리적 위치상 '위험'과 '기회'의 요소가 동시에 상존하는 제주도가 마침내 군사기지의 위협을 청산하고 새로운 평화의 섬으로 거듭날 것이냐, 아니면 해군기지와 더불어 추진되는 공군기지 등 군사기지의 요새로 전락할 것인가는 제주 미래의 향방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제주도정은 이 문제가 마치 무슨 투자시설 유치 사안인 양 경제효과를 따지는 데만 골몰해 왔다. 국방부와 해군도 기지 건설이 제주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것처럼 홍보해 왔다.
중앙 정부는 2005년 1월 27일 공식적으로 제주를 '평화의 섬'으로 지정했지만, 그에 어울리지 않게 군사기지 건설을 추진하는 분열적 모습만 보여주며, 이에 대한 책임있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있다.
"평화는 평화에 의해서만 지켜진다"
지난 16일부터 제주시에는 매일 저녁 6시에 어김없이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 해군기지 철회와 평화의 염원을 모으기 위한 평화행동에 시민들이 나선 것이다.
백배(百拜) 실천으로 이뤄지는 이 행동에 시민사회단체 회원들, 지역주민은 물론 신부님, 목사님, 스님 등 종교계 인사들과 강요배 화백 등 문화예술인, 정치인, 아이들까지 함께 하고 있다.
기지 찬성론자들과 해군 측은 평화의 섬을 지키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이런 배타적 평화론은 평화의 논리가 아니라 폭력의 논리일 뿐이다.
우리를 지키기 위한 힘은 결국 다른 누군가에게는 상처와 아픔이 된다. 민주주의와 평화를 명분으로 한 힘의 논리가 어떤 상처와 갈등을 남기는가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사태로 이미 확인되고 있다.
거꾸로 세계 제일의 군사력을 보유한 미국이 뉴욕 심장부에 테러공격을 당하는 현실은, 오늘날의 안보가 결코 군사력으로 등치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해군은 제주기지 건설 이유를 궁극적으로 남방해상로 보호에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한반도 본토 방어를 목적으로 한 진해, 동해 등 국내 기지와 달리 제주에 추진 중인 기지는 잠재적으로 중국을 겨냥하고 있음을 스스로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국제적으로도 '군축'이 평화체제와 관련한 중요한 의제가 되는 지금, 유일하게 군비경쟁이 계속되는 동북아 지역에서 첨단무기체계를 동반한 대규모 전략기지의 건설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뻔하다.
이미 제주 해군기지 건설계획을 놓고 중국 관영 신화통신이 몇 차례의 '경계' 보도를 내는 것만 봐도 이는 주변국들을 자극하는 군사경쟁을 더욱 가속화시킬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이른바 '전략적 유연성'으로 불리는 미 군사전략과 어떤 식으로든 연동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외교안보전문가와 군사전문가들의 의견이고 보면, 제주는 대양해군 로드맵을 갖는 기지건설로 장래에 동북아의 갈등거점으로 전락할 공산이 매우 크다.
해군이 추진하는 해군력 증강의 배경에는 '각 병력의 균형 잡힌 프로그램 및 첨단기술 도입'과 더불어 '동맹 및 우방과의 효율적인 군사작전과 상호협력'이 주요하게 자리잡고 있다.(정옥임, 2004, 해군본부 해양력 심포지움) 이는 해군력 증강의 핵심적인 요소로 제기되는 제주 해군기지가 한미군사동맹체제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짐작케 한다.
우선, 현재 진해 기지에 이미 7000톤급 미국의 핵 추진 전략 잠수함 라졸라, 핵추진 구축함 쿠싱 등이 빈번히 기항하고 있음이 확인된 바 있고, 한미합동군사훈련인 독수리 훈련에는 핵항공모함인 칼빈슨호 등이 참가한 사례(이시우, 2004)가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일본을 거점으로 하는 미군에 있어서 제주는 훨씬 손쉬운 기항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현행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르면 미국은 언제든지 한국에 기지 제공을 요구할 수 있도록 돼 있어, 한미관계의 전례에 비추어 한국정부가 이를 거부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하면 제주 해군기지의 미군사전략 연동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제주가 정부에 의해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된 배경에는 '4.3 항쟁'이라는 역사적 비극에 대한 보상 차원이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한반도 평화정착과 동북아 평화체제에 기여하기 위한 '평화 지대'로서의 역할론이 주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이유가 더 크다.
즉, 제주는 군사적 방식이 아닌 평화적 방식으로 국제 사회에도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 문제는 동북아 평화공동체 구축과 관련해 반드시 막아내야 할 상징적인 화두임에 틀림없다.
이글은 인권운동사랑방이 발행하는 <인권오름> 최근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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