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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남산 안기부를 '역사'로 보존하라”

인권·시민단체, 서울시의 유스호스텔건립계획 반대

서울시(시장 이명박)가 군사독재시절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공포정치의 본산이었던 ‘남산 안기부’ 옛터를 유스호스텔로 개조해 수익사업을 벌이려는 계획이 알려지자 인권·사회단체들이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인권·시민단체 대표들은 25일 오전 옛 남산 안기부 본관 주차장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서울시가 이 지역을 역사공원으로 지정해 보존해 줄 것을 요청했다.

<사진>

이들은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군사독재에 항거하여 민주주의를 쟁취한 역사를 지니고 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감시와 폭력, 고문을 당했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었으나 우리에게는 아직도 이 민주화운동을 기념할 만한 역사적인 공간을 갖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시민단체 대표들은 “1973년 최종길 교수가 이곳에서 사망했고, 1974년 인혁당 재건위와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이곳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지옥의 고문’을 당했고 1980년 계엄합수부에 의해 끌려왔던 민주인사들, 조작간첩 사건에 연루되었던 사람들, 1980년대와 90년대의 공안사건의 피해자들이 이곳에 끌려와 눈을 가리운 채 끌려와 음습한 습기로 가득한 지하실에서 물고문, 전기고문 등의 고문을 당했다”고 과거 남산에서 행해진 안기부의 인권유린 사례를 열거했다.

시민단체는 따라서 “그렇게도 모진 고문을 당하고도 끝내 민주항쟁을 성공시킨 역사와 결합된 소중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한 만큼 과거의 고통스러운 역사일수록 철저하게 기억해야 한다는 것은 어느 나라의 역사를 보나 진리”라고 강조했다.

대표들은 또 “외국의 예를 보아도 아유슈비츠 등 고통스러운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 현장을 보존하고 그곳을 역사 교육의 장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덧붙였다.

대표들은 “국정원이 세곡동으로 옮겨간 뒤 서울시가 이곳의 건물 27동 중 23동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다행히 본관 건물과 별관 건물은 남아 있으나, 예전 고문실로 사용되던 지하벙커는 소방방재시설이 들어서면서 그 흔적이 없어졌다”며, 본관 건물을 유스호스텔과 청소년정보문화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우고 8월말에 사업자 선정 공고를 낼 예정인 서울시 계획에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현재 남산 옛 안기부 터에는 전체 27개 건물 중 4개동만 남긴 채 해체되었으며, 고문실로 이용하던 지하 벙커는 현재 개조되어 소방방재센터로 이용되고 있으며 안기부를 상징하는 본관 건물과 취조실로 이용되던 별관 원형대로 건물이 남아 있는 상태다.

인권·시민단체들은 “남산 안기부 옛터를 민주화운동과 인권기념공원으로 보존하기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제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구성하고, 사회원로들의 시장 면담과 공청회 등을 통해 여론을 조성해 나갈 것”이라고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다음은 단체들이 밝힌 남산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의 주요사건(1973년~1980년은 중앙정보부 사건이며 1981년~1995년은 안기부 사건)

***중정-안기부 인권침해 사례**

1973.10.16. 최종길 사건
최종길씨는 유럽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과 관련하여 남산 중앙정보부 청사에 동생 최종선(당시 중앙정보부 요원)과 함께 임의출두 하여 조사 받던 중, 출두 3일만인 10월19일 중앙정보부 건물 앞에서 변사체로 발견됨.

1974.2.15. 울릉도 간첩단 사건
이 사건으로 구속된 이성희씨는 ‘전북대 교수로 일본에 유학하던 중 재일교포 이좌영에 포섭되어 북한에 다녀왔고, 귀국한 뒤에는 군 장성인 동생으로부터 미군철수문제 등에 대한 군사기밀을 탐지했다’는 혐의를 받음. 이씨는 고문과 체념에 의한 허위자백을 했다고 법정에서 진술

1974.1. 장준하, 백기완 구속 사건
1974년 1월8일 유신헌법반대운동을 처벌하기 위한 대통령긴급조치 1호가 선포된 후 첫 번째로 ‘개헌청원서명운동본부’ 관련하여 장준하, 백기완 구속.

1974. 긴급조치 1호 성직자 구속사건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이해학, 김진홍, 인명진 목사 등 6명 구속.
이어 김동완, 권호경 목사 등 구속.

1974.4. 민청학련 사건
중앙정보부는 긴급조치 제4호가 선포된 후 1,024명의 위반자를 조사, 180명 구속하면서 민청학련 사건을 발표. ‘1973년 12월부터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전국적 민중봉기를 획책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인민혁명당계 지하공산세력, 재일조총련계열, 불순학생운동으로 처벌받은 용공세력, 국내의 반정부인사 및 그리스도교인 중 일부 반정부세력과 결탁, 4월 3일을 기하여 정부를 전복하고 4단계혁명을 통하여 노동자와 농민에 의한 공산정권 수립을 기도하였다’는 혐의.

1974. 인혁당 재건사건
중앙정보부는 '도예종씨 등 23명이 인혁당
재건위를 결성, 북한의 지령을 받아 당시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해 정부를 전복하고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고 발표하고 1024명을 구속. 뚜렷한 증거도 제시되지 않은 채 75년 4월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8명은 20여시간 후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사형이 집행됐으며 나머지 15명도 무기징역에서 징역 15년까지 중형을 선고받음.

1974.5.30. 중앙일보 편집국장 등 구속 사건
‘중앙일보’ 편집국장 김인호, 정치부장 이영석 등 5명이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제37화 ‘진보당사건’과 관련하여 연행. 이 사건은 중앙일보사와 당국과의 타협을 통해 무마됨.

1975. 한승헌 변호사의 「어떤 조사」 사건
한승헌 변호사가 발간한 자신의 수상집 『위장시대의 증언』에 있는 ‘어떤 조사’라는 글에서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간첩단사건과 관련하여 사형수 김규남의 사형집행에 대해 언급하여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을 찬양․고무하였다”는 혐의로 구속.

1975.4.11.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던 김상근, 이해동, 문동환 목사 등, 12일에 풀려났다가 14일 다시 출두하여 “그동안의 활동이 반공법에 저촉되는지 여부에 대해 조사” 받음.

1975.11.22. 재일동포유학생 사건
중앙정보부는 “북의 지령에 따라 모국유학생을 가장하여 국내에 잠입, 암약해오던 백옥관 외 21명의 학원침투간첩단을 적발하여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했다”고 발표. 이 사건으로 서울대, 한신대, 부산대, 고려대, 카톨릭의대 등 전국의 여러 대학에 걸쳐 김오자, 김철현, 김종태, 최연숙, 김명수, 김원중, 허경명, 이원이, 장영식, 강종건, 김동휘 등 수많은 재일동포유학생들이 검거됨. 이 사건 관련자들 역시 심각한 고문과 조작에 시달렸음을 주장.

1976.3.16. 김명식 시인의 <10장의 역사연구> 사건
서강대생 김명식, 박정희정권의 죄악상을 낱낱히 고발하는 내용의 시 ‘10장의 역사연구’와 관련하여 구속.

1976. 3.1. 3.1민주구국선언 사건

1978.1.15. 조상록 사건
1973년 국회의원선거에 순천에서 출마한 경력이 있는 조상록씨, 일본명치대학 대학원에 유학을 하던 도중 잠시 귀국한 사이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간첩으로 발표됨. 그러나 조씨는 ‘일본에서 몇몇 아는 교포들과 만나서 서로 의견을 나누고 학비에 보태 쓰라고 하여 다소의 돈을 받았을 뿐’이라며 ‘주일대사관 주최 신년회 등에서 일본의 교과서 왜곡문제와 함께 일본군국주의에 대한 경계, 통일에 있어서의 외세배격 발언 등이 자신이 간첩으로 몰리게 된 이유’ 설명함.
17일동안 중앙정보부에 불법구금. 전기고문, 물고문, 집단 구타 등 참혹한 고문으로 고막이 찢어지고 이빨이 부러짐.

1979.4.16.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
중앙정보부는 ‘불법지하 용공써클을 구성, 크리스찬아카데미에 입교하는 농민, 근로자, 청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중간집단이론 강의를 통하여,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등 헌법질서를 부정하고 이를 변혁함으로써 사회주의의 실현을 획책했다는 혐의로 크리스찬 아카데미 간사 이우재, 한명숙, 황한식, 장상환, 신인령, 김세균 씨 등 6명과 한양대 정창렬 교수를 구속. 그러나 이 사건에도 가혹한 고문이 자행되었고 학문의 자유가 유린되었다는 항의와 비난이 계속됨.

1980.5.17.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1980.8.20 석달윤 사건
1980.8.21 - 10.6까지 약 47일간 불법구금.물고문, 통닭처럼 매달아 고문수사.

1981.3.7. 박동운 사건
1981.3.7 - 5.8까지 62일간 불법 구금 물고문, 성기고문 등을 당함. 증거가 없자 모든 증거를 ‘망치’로 때려 부셔서 버렸다고 조작, 망치가 유일한 증거물.

1981.4.경 손유형 사건
골프하러 한국에 오던 중 안기부에 연행된 손유형씨는 국내에 있던 가족들도 함께 연행되어 구속됨. 일본에서 유류절약용 첨가제판매회사를 경영하던 손씨를 비롯한 그의 가족들은 이 사건이 고문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고 주장.

1981.5.12. 김장길 사건
1970년 동경 엑스포 때 부친의 초청을 받고 도일, 일가친척도 만나보고 관광도 하고 부친으로부터 도장기계와 사업자금을 얻어 귀국하여 사업에 열중하던 김장길씨가 안기부에 연행됨. 김씨는 정식 구속영장이 발부된 그해 6월25일까지 약 45일간의 불법구금기간 동안에 “변호사에게조차 한동안 혐의사실이 모두 사실이라고 인정하다가 처의 메모를 보고서야 억울한 사정을 털어놓을 정도”의 고문을 당함.

1981.12.6. 안승윤 사건
1981.12.6. - 82.2.26까지 약 62일간 불법구금

1982.3. 차풍길 사건
안기부에 연행된 차풍길씨는 66일간의 불법감금과 고문의 결과 간첩혐의를 뒤집어 쓰게 되었음. 차 씨는 1975년경 일본에 거주하는 아버지의 초청으로 일본에 건너가 하수구일등 막노동을 하면서 지냈으나 돈도 못 번 채 귀국하였는데, ‘7년 전 일본체류 당시 조총련 공작원에게 포섭 당한 뒤 귀국, 간첩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음.

1982. 김준보 사건
김준보씨는 일본거주 아버지를 만나러 1967년, 1968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으로 건너가 아버지에게 인사드리고 경제적인 도움을 받은 것이, ‘조총련계인 아버지로부터 지령을 받고 국내에 지하당을 구축하려 한 간첩’으로 만들어짐.

1982.12.10. 김장호 사건
재일교포. 51일 동안 안기부에 불법구금.
구치소에 입소한 뒤에도 3번이나 안기부로 끌고가 검찰에서 부인 못하도록 협박함.

1983.3.10. 김성규 사건
제약회사 간부였던 김성규씨는 1980년 11월경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주선으로 일본 제약업계 시찰단으로 도일 중 자유시간에 잠시 육촌 누이내외를 만나 두 시간여 동안 점심을 함께 먹으며 가족의 안부를 전하고, 카메라, 양말, 시계 등 선물을 받고 돌아와 당숙모에게 전해준 일이 빌미가 되어, 안기부에서 59일간의 불법감금과 “필설로 형언키 어려운 심리적 육체적 고통”을 당하고 간첩이 되었음.

1983.9.13. 정영 사건
약 40일간 불법구금, 발가벗긴 상태에서 수갑을 채우고 전신구타 등 고문

1985.4.23. 김길욱 사건
성묘와 친척을 방문하기 위해 귀국하던 김길욱씨는 부산국제공항에서 입국 즉시 안기부에 연행. 40여일간의 불법구금과 고문 속에 자신의 범죄사실이 조작되었다고 주장.

1985.6. 구미유학생사건
김성만 : 미국 웨스턴 일리노이대 유학, 85년 6월 6일 연행, 60일동안 안기부에 불법구금, 부모님께 보내는 유서까지 쓰게한 상태에서 고문수사
황대권 : 미국 웨스턴 일리노이대 유학, 62일동안 안기부에 불법구금, 물고문, 성기를 책상위에 올린 다음 몽둥이로 내리치는 등 고문을 당함
양동화 : 미국 웨스턴 일리노이대 유학, 65일동안 안기부에 불법구금, 검찰로 송치되기전 안기부에서 기자회견을 하게 함.
강용주 : 전남대 의대 재학중, 35일동안 안기부에 불법구금, 성기를 몽둥이로 내리치는 등 고문 당함

1985.8. 민중교육지 사건
실천문학사에서 발행하는 부정기간행물 『민중교육』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실천문학사 주간 송기원씨와 필자 김진경(교사), 윤재철(교사) 등 3명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1986.7. 이병설 교수 사건
1973년 4월 일본문부성 초청 유학생시험에 함격하여 동경도립대학 기후학 박사과정을 이수한 뒤 1976년 귀국,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던 이병설 교수, 안기부로 연행되어 21일간의 불법감금과 고문 끝에 일본유학시절 조총련 공작원 김향술에게 포섭되어 잠입, 제자들에게 북한을 찬양하고 제자들을 포섭하는 한편 국가기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로 기소됨.

1986.7.15. 이병설 교수 간첩단 사건
유상덕(민주교육실천협의회사무국장, 전 성동고 교사)씨, “북한 공작원 이병설과 접촉, 「조선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재일조선인 교육론」, 「민족해방의 교육학」 등의 책자를 수령, 탐독, 보관해온 혐의”로 구속.

1987.9.4. 장의균 사건
안기부는 “민주화과정의 혼란을 틈타 정치권에 침투한 간첩 장의균 일당을 검거했다고 발표. 장의균씨는 한국고려사연구에 필요한 자료수집 등의 목적으로 도일하여 교토대학 우에다 마사하키 교수의 연사연구실 연구원 자격으로 있으면서 조총련계 인사들과 어울린 것이 간첩으로 몰리는 불운의 단초가 된 것임.

1988.5.3. 반제반파쇼한국민중전선 사건
안양노동상담소장 송운학, 배금주, 김점진 씨 등이 “노동계와 학원가에 침투, 좌경지하조직인 ‘반제반파쇼한국민중전선’을 결성하려 하였다”는 혐의로 ‘이적단체구성예비죄’가 적용되어 구속.

1989.4.12. 리영희 ‘한겨레신문’ 논설고문 사건
리영희 ‘한겨레신문’ 논설고문, ‘한겨레신문 기자단의 북한방문 취재활동을 주선해주고 가능하면 김일성과의 인터뷰를 주선해 줄 것을 일본인 야스에료스케에게 부탁하여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지배지역으로 탈출할 것을 예비음모 하였다’는 이유로 연행.

1989.4.13.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

1989.5.11. 평화연구소 사건
안기부는 평화연구소가 ‘반전반핵운동을 표방하는 이적단체’라며 조성우 소장과 김창수 연구조사부장을 구속.

1989.6.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사건
89년 6월26일 신구전문대 교수, 월간 『농민』의 발행인이며 민자통의 전 대변인인 김준기 교수가 구속되고 6월29일에는 민자통 상임의장 이현수, 대외협력위원장 이천재, 대의원총회 공동의장 박창균, 조직국장 이규영, 7월2일에는 대의원총회 공동의장 이종린 등이 차례로 구속. 안기부는 민자통이 대단한 이적활동을 전개한 ‘이적단체’로 발표했으나 막상 이들은 대체로 60대의 노인들인데다가 이들의 활동은 “결성대회 후 보증금 300만원짜리 사무소를 개설하고 회원들로부터 월회비를 징수하여 통일지향적인 성명서 네 건을 발표한 것이 전부”였음.

1989.6.27. 서경원의원 방북사건

1989. 카톨릭성직자들의 ‘불고지죄’ 논란 사건
서경원의원 방북사건과 관련하여 서의원이 귀국 후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가 방북사실을 털어놓음으로서 김추기경과 당시 참석하였던 함세웅 신부 등에 대한 불고지죄 혐의를 두고 수사. 특히 함세웅 신부에 대해서는 “김수환 추기경의 방북추진과 관련, 북한쪽과 어떠한형태로든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함신부의 주변조사를 벌였”으나 고백성사에 가깝다는 이유로 입건은 하지 않음.

1989.7.2. 윤재걸 ‘한겨레신문’기자 불고지죄 사건
‘한겨레신문’ 윤재걸 기자, 서경원 의원의 방북사실을 사전에 인터뷰과정에서 알고도 수사기관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연행.

1989.7.30. 한미문제연구소 사건
안기부는 전민련 국제협력부 간사 고현주씨와 1982년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의 문부식씨, 그리고 전 고대총학생회장 김윤태군 등 3명을 평양축전 북한측 준비위와 전대협 간의 전문을 수신, 전달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이어 같은해 8월20일 전민련 국제협력국장 김현장, 김영애씨 부부가 구속되면서 위 사람들과 함께 한미문제연구소를 설립하려 했다는 혐의 추가.

1989. 임수경 방북 주선,지원,파견과 관련된 사건

1989.8.15. 임수경,문규현 방북사건

1989.8. 평양축전에 보낸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 사건
안기부는 “1988년부터 서울, 전주, 대구, 부산, 광주 등 5개지역에서 갑오경장으로부터 현재의 조국통일운동기까지의 민중운동과정을 묘사한 「민족해방운동사」라는 대형걸개그림 11컷을 나누어 만든 뒤 이를 슬라이드필름에 담아 1989년 6월 미국 로스엔젤레스 ‘민족학교’를 통해 평양축전 축하작품으로 북한에 보낸 혐의‘로 홍성담씨를 구속. 이 그림은 5개 지역 민족민술운동전국연합(민미련) 회원 30여명이 분담해 제작한 것으로 밝혀져 공동제작에 가담한 화가 차일환, 정하수, 백운일, 전승일씨 등이 연달아 구속됨.

1989.9.4. 귀국유학생 구속 사건
미국유학을 마치고 7월말 귀국한 박태훈씨, 1983년 1월 미국유학을 떠나 귀국할 때까지 재민한국청년연합 및 재미유학생단체 ‘석암회’에 가입, 미군철수 등을 주장해왔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

1989.10. 북한기행문 게재 사건
황석영씨의 북한기행문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게재했다는 혐의로 『창작과비평사』 주간 이시영 구속. 당시 이 글은 『신동아』에 1,2회 게재되었으나 ‘창비’의 게재분만을 문제삼음.

1989.12.1. 이승환의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 사건
‘이재화’라는 필명으로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를 집필하고 서울대 및 전남대 학보 등에 「항일무장투쟁사」에 관한 글을 기고한 혐의로 이숭환씨를 구속.

1990.1.17. 박태호의 사회구성체논쟁 사건
‘사회구성체논쟁의 중심논객’ 박태호(필명 이진경)씨, 1987년 집필한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과 무크 『현실과 과학』제4집에 실린 「왜곡으로 빚어진 PD파의 오류와 무지가 연출한 NDR론의 복권」 및 1989년3월 서울대 「대학신문」에 기고한 글 등이 국가보안법의 이적표현물 제작으로 구속.

1990.1.23. 노동계급 사건
박태호(필명 이진경) 씨 구속된 후 이어 안민규씨가 연행되면서 2월12일 안기부가 사건전모를 발표. 안기부는 “지난해 3월부터 맑스․레닌주의에 입각, 남한사회주의 혁명투쟁을 위해 전국적 규모의 ‘혁명적 노동자계급 전위당’을 건설키로하고 서울, 인천, 부산 등 전국의 노동현장과 학원가 등에 기관지 『노동계급』을 제작배포해 왔다”고 발표. 구속된 두사람은 안기부에서 고문 등 불법수사를 받았다고 주장.

1990.11. 자주민주통일그룹 사건

1990.11.5. ‘통일노래 한마당’ 사건
경희대 성악과 졸업생이며 전대협 간부를 지냈던 허정숙씨, 1990년 3월초 전대협 의장 송갑석군의 지시로 연세대에서 열린 ‘8․15 범민족대회성사투쟁’에서 ‘통일노래 한마당’을 개최하는 등 풍물노래패 등을 동원 문화행사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구속.

1990.11.10. 반미유인물 배포 사건
북한의 대남비방선전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구입, 배포했다는 혐의로 전 전대협 간부 전상현씨 등 3명을 구속.

1990.11.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사건
1990년 11월29일 독일 베를린에서 북한측․해외동포측과 함께 3자회담을 가지고 범민련을 결성한 다음 귀국하는 조용술, 이해학, 조성우 세 사람에 대해서 사전영장이 발부되어 11월30일 공항에서 곧바로 연행, 구속됨. 이어 범민족대회추진본부 본부장 이창복, 정책기획실장 김희택씨도 위 베를린 3자회담 및 범민련남측본부준비위원회를 개최, 구성하였다는 혐의로 1991년 1월24일 구속.

1991. 사노맹 사건 13명 구속

1992. 사노맹 사건 27명 구속
중부지역당 사건 57명 구속, 김낙중, 손병선 등 6명 구속

1993. 김천태 사건
김삼석, 김은주 남매 구속 , 사민청 사건 9명 구속, 안윤정 사건

1994. 구국전위 사건 6명 구속
남총련 투신국 사건 5명, 박창희 교수 사건, 대종교 방북 사건 2명 구속 정민주, 이혜정 방북 사건, 김동식 관련 불고지 사건 4명(박충렬, 허인회 등)구속, 범민련 사건 6명 구속

1995. 박용길 장로 방북 사건 사건, 황석영 방북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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