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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운동의 상징, 백범과 경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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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통일운동의 상징, 백범과 경교장

<장규식의 서울역사산책> 정동 일대 역사공간①

정동(貞洞) 일대는 갑신정변 당시의 북촌(北村)에 이어, 대한제국의 성립을 전후한 시기 개화 개혁운동의 진원지로 새롭게 떠오른 지역이다. 당시 정동에는 신식학교와 개신교회, 그리고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 등 서구 열강의 공사관이 밀집해 있었다. 1883년 10월 조영수호통상조약의 체결에 따라 외국인들의 서울 도성안 거주와 통상행위가 사실상 허용되면서, 인천 - 양화진 - 서대문을 거쳐 도성 안으로 들어온 서양인들이 이 곳 정동에 둥지를 튼 결과였다. 그들이 서울로 들어올 때 관문 노릇을 하였던 양화진 나루터에는 지금도 외국인묘지가 그 시절의 흔적처럼 남아있다.

<사진 1> 양화진 외국인묘지

그래서인지 경향신문사에서 덕수궁에 이르는 정동길을 걷다보면 유럽 어느 고풍스런 도시의 거리를 걷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덕수궁 돌담길'이 한때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각광을 받았던 것도 아마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제는 그 자취조차 찾기 어려운 명동 일대의 중국인 거류지나 충무로 일대의 일본인 거류지와는 분명 다른 모습이다.

<사진 2> 덕수궁 돌담길

이렇게 정동은 서양사람들과 직접 대면하며 교류할 수 있는 서구문화 수용의 전진기지로 개항기 우리 역사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아관파천 이후로는 대한제국의 정치 1번지로 우뚝 서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해방후 김구 선생의 거처였던 경교장과 이기붕 사저가 있었던 곳의 4.19도서관 또한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그 길목 서대문(돈의문) 주변에 자리하고 있다. 말하자면 정동 일대는 한국근현대사의 화두라 할 수 있는 근대화와 자주독립, 민주화와 민족통일의 대표적인 상징공간이었던 셈이다. 이제 서대문에서 경운궁(덕수궁)에 이르는 정동 일대를 답사하며 파란많고 굴곡많았던 그 시절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사진 3> 1900년대의 서대문(돈의문) 주변

***백범과 경교장- 통일운동의 상징공간**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에서 내려 새문안길로 향하다 보면 왼편으로 적십자병원이 나온다. 과거 이 병원 정문앞으로는 독립문에서 서부역을 거쳐 용산으로 빠지는 만초천(蔓草川, 덩굴내)이라는 개천이 흐르고 있었고, 경교(京橋)라는 다리가 내를 가로지르며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북쪽에 경기감영이 있었는데, 1882년 임오군변 당시 무장봉기한 구 훈련도감 군인들이 경기도관찰사로 있던 전 선혜청 당상 김보현을 응징하기 위해 몰려들었던 바로 그 장소이다.

<사진 4> 옛 경기감영 자리에 들어선 적십자병원

여기서 100m쯤 올라가면 4.19도서관을 지나 경향신문 사옥 맞은편으로 강북삼성병원이 나오는데, 현재 이 병원 본관의 현관으로 쓰이는 2층 양옥 건물이 경교장(京橋莊, 종로구 평동 108)이다. 경교장은 1945년 11월 23일 환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이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질 때까지 집무실 겸 숙소로 사용한 장소로, 이승만의 돈암장․이화장, 김규식의 삼청장과 더불어 당시 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해방직후 우익 정치세력의 주요 거점 가운데 하나였다.

경교장은 금광갑부 최창학이 1938년 1,584평의 대지에 연건평 265평 규모로 지은 지상2층․지하1층의 양옥이다. 경교장이라는 이름은 김구 주석이 입주하면서 직접 붙인 것이라고 한다. 본래 이 건물은 일제시기 죽첨정(竹添町)이라는 이곳의 지명을 따 죽첨장이라 불렸다. 아래층 좌우의 창을 원형으로 돌출시키고, 현관 위 2층 중앙 부분에는 원주를 사용한 5개의 아치창을 내 한껏 멋을 부렸을 뿐만 아니라, 지붕 기와에서 마루 바닥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재를 외국에서 수입해 지은 초호화 주택이었다.

<사진 5> 강북삼성병원 본관의 일부가 되어버린 경교장, 오른쪽 끝에 표지석이 보인다.

해방이 되자 최창학은 자신의 과거 친일행적을 뉘우친다며 임시정부 환국 환영준비위원회에 죽첨장을 내놓았는데, 요즘 식으로 말해 정치권에 줄대기 내지 보험들기가 아니었나 싶다. 김구 선생이 돌아가신 뒤 건물을 도로 회수했으니 말이다. 아무튼 김구 선생이 입주하면서 죽첨장은 그 이름 또한 일본식 지명 대신 적십자병원 정문 앞에 있었던 다리 경교의 이름을 따 경교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우리는 보통 경교장 하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의 거처를 떠올린다. 그러나 경교장의 역할은 단지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당초 환국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경교장과 한미호텔을 숙소로 사용하면서, 정무처로는 덕수궁을 사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38도선 이남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자처하였던 미군정이 그것을 용인할 리 없었다. 그래서 경교장이 옹색하나마 임시정부의 정무처로도 쓰이게 되었다. 특히 1층의 응접실은 임시정부의 국무회의를 비롯해 백범이 당수로 있던 한국독립당의 각종 회의가 열리던 중요한 정치공간이었다. 말하자면 경교장은 2층의 백범 숙소와 1층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청(政廳)이라는 2중의 기능을 가진 역사공간이었던 셈이다.

<사진 6> 경교장 앞의 김구와 그 일행 (남북협상후)

경교장이 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해방직후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일어나면서부터였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한반도 신탁통치 결정 소식이 알려지자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은 1945년 12월 29일 오후 2시 경교장 1층 응접실에 모여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미․소․영․중 4대국에 대해 신탁통치를 절대 반대한다는 전문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 명의로 발송하였다. 나아가 12월 31일에는 전국의 경찰 및 행정기관을 임시정부 지휘하에 둔다는 포고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비록 그같은 포고는 미군정청의 압력으로 하루만에 취소되었지만, 이후 경교장은 반탁운동의 중심지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또한 경교장은 통일민족국가 건설의 비원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미소공위가 결렬된 이후 1947년 9월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여 남북분단의 위기가 고조되자, 김구는 1948년 2월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는 삼천만 동포에게 눈물로써 호소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통일문제를 논의할 남북지도자회담을 갖자는 서한을 김규식과 연서하여 이북의 김두봉과 김일성 앞으로 보냈다.

그러나 남북협상을 위한 김구의 평양행은 순조롭지 못했다. 당초 이북에서 회담 날짜로 정한 4월 18일이 되어서도 그는 북행을 반대하며 경교장을 에워싼 수많은 반공청년 학생들로 인해 집을 빠져 나갈 수가 없었다. 상황은 이튿날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때 그는 경교장 2층 베란다로 나아가, 통일만이 우리의 살 길이기 때문에 통일을 위해서는 그것이 공산주의자하고 하는 협상이라해도 마다해서는 안된다는 연설을 하는데, 그 장면이 지금도 한장의 사진으로 남아 보는 이의 마음을 시큰하게 한다.

<사진 7> 경교장 2층 베란다에서 연설하는 김구
<사진 8> 38선을 넘는 김구 / 백범기념관

4월 19일 김구는 저지하는 군중들을 피해 경교장 뒷문을 통해 북행길에 올랐다. 그러나 기대했던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5월 5일 38선을 넘어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이후 그는 통일 없이는 독립이 없다고 하여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불참한 채, 7월 21일 김규식과 함께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한다. 임시정부 주석에서 재야인사, 통일운동가로 변신한 것이다. 결국 그에 대한 보복테러로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일요일 11시 30분경 경교장 2층 남서쪽 끝에 위치한 응접실에서 서북청년단 출신의 포병 소위 안두희의 저격을 받아 숨을 거둔다.

당시 그의 곁에는 한 청년에게 주기 위해 쓴 '사무사(思無邪)'라는 친필 휘호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일신의 안일을 위해 그릇된 길로 나아가려는 유혹을 떨치라는,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백범의 친필 족자는 그 날의 피얼룩을 머금은 채 현재 효창공원 옆 백범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지난 2002년 10월 백범 사후 53년만에 비로소 문을 연 백범기념관에는 피격 당시 입었던 총탄구멍이 난 피묻은 옷이 선생의 데드마스크, 상하이 홍코우공원 의거 직전 윤봉길 의사와 맞바꾸어 가졌다고 하는 회중시계 등 다른 유품들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사진 9> 김구 선생의 시신

김구 선생이 돌아가신 뒤 경교장은 다시 원소유주였던 최창학의 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6.25전쟁 때 미군 특수부대의 주둔지로, 휴전후 베트남 대사관저로 사용되다가, 1967년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에 인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경교장은 건물 뒤편을 9층짜리 병원 본관에 연결시켜 온전한 형채조차 보전하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이 광복 이후 사시다가 서거한 곳'이라는 표지석만이 건물 한 구석에서 외롭게 그 시절의 아픈 역사를 대변해주고 있을 뿐이다. 우여곡절 끝에 2001년 4월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기는 하였지만, 이곳에서 경교장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듯싶다.

***경교장 앞의 4.19혁명기념도서관- 민주화와 민족통일의 이중주**

한편 경교장 남쪽으로는 4.19혁명기념도서관(종로구 평동 166)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4.19도서관은 해방직후 이시영 유동열 김상덕 등 김구와 함께 환국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잠시 머무른 곳이자, 4월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3.15 부정선거의 장본인 이기붕의 사저가 있던 자리이다. 자유당 독재정권 시절 '서대문 경무대'라 불리던 악명높은 장소였는데, 4월민주항쟁 직후인 1960년 5월 27일 4월혁명유족회에서 접수하여 희생자들의 유영봉안소를 설치하면서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사진10-1> 이기붕과 경찰간부

당시 이기붕의 집은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내고 사저인 이화장으로 이사한 4월 28일, 일가 4명이 경무대별관에서 집단자살을 함으로써 무주공산인 상태였다. 그 뒤 이기붕의 집은 1963년 3월 정부에 공식 환수되어 4.19혁명 단체에 무상으로 대여되었다. 그리고 유영봉안소가 수유리에 새롭게 조성된 4.19묘지로 이전(1963. 9. 20)한 다음해인 1964년 5월 1일 4.19도서관으로 변모하였다. 미처 피지도 못한 채 스러져간 학생들의 못다이룬 꿈이 담긴 보금자리로서 말이다.

이후 4.19도서관은 1971년 8월 지상 5층, 지하1층, 연건평 625평의 새 건물을 신축하였다. 이어 1982년 3월에는 도서관 대지와 건물의 소유권이 국가보훈처로부터 4.19의거희생자유족회와 4.19의거상이자회에 귀속되었다. 1970-8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이른바 386세대들에게 친숙하게 남아있는 4.19도서관의 이미지는 이 때의 모습이다. '문민정부' 들어 추진된 4.19묘역 성역화사업의 일환으로, 1995년 5월 재건축에 들어가 1998년 10월 준공을 하고 2000년 8월 다시 개관한 지금의 현대식 건물은 그 웅장함 못지않게 왠지 거리감이 느껴진다. 마치 이제는 기득권세력으로 변해버린 4.19세대의 초상을 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사진 10> 경교장 옆의 4.19혁명기념회관

그래도 위엄과 품격을 갖춘 도서관의 재건축은, 다소 권위주의적인 면이 여전히 남아있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그만큼 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화운동에서 시작해서 통일운동으로까지 발전한 4월민주항쟁의 또다른 얼굴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 뒤에 병원 현관으로 남아있는 통일운동의 상징 경교장의 초라한 잔영이 그것을 대변해주고 있지는 않은지 되물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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