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권은 신자유주의경쟁국가로 가는 최종 마무리 단계
그렇다고 필자가 세계화 자체를, 개방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글로벌 자본의 이해가 중심에 놓여 있고, 신자유주의경쟁국가(neo-liberal competitive state)들에 의해 가속화되는 세계화를 부정할 뿐이다. 그것이 확대 심화시키는 각 지역, 각 분야의 비대칭적이고 억압적인 사회관계들, 그에 비례해 구축되는 민주주의와 그 위기를 문제시할 뿐이다. 동일한 작업장에서 동일한 형식과 내용의 노동을 하며 살아가면서도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에 따라 그들 노동의 가치, 나아가 인간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천양지차로 평가받는 사실을 일상 속에서 목도하면서 그것이 '더불어 사는 사회'로 나아가야 할 이 사회의 지배원리가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에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한다.
그런데 이제 그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한미FTA협상이 막바지 타결시점에 이르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참여정부' 수장인 노무현 대통령의 결정과 재가만이 남아 있다는 보도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입장과 태도를 가지고 있건 지금 모두가 조만간 나올 최종발표에 주목하고 있다.
물론 정치가 특정한 정치엘리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설혹 겉으로는 그렇게 보여도 결국 정치가 비대칭적인 사회관계들, 거기에 내재된 권력관계들 위에서 작동하는 객관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에 무엇보다 신자유주의 동맹에 맞서 각자의 생산영역에서,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자, 농민, 사회적 약자들, 지식인 등의 저항과 연대에 주목하고 소중히 여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 또한 '그 어떤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대통령의 최종발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노무현 정권이 FTA가 보장해 줄 것이라는 미래의 경제성장과 발전, 번영을 말하기 이전에 그 속에 똬리를 틀고 확대 재생산될 억압적이고 비대칭적인 사회관계들에 대해 한번쯤 숙고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다수의 양식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필자 또한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이른바 참여정부를 자임한 노무현 정권이 보인 그 동안의 정치적 행보가 그 닉네임과 무관하게 이러한 사회관계들을 재고하는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길을 따라 취해진 것이 아니라, 한때 그가 독재정권으로 규정하며 투쟁했던 정치권력의 발상이 고스란히 각인된 기존의 길을 변형하며 답습해 왔기 때문이다. 지금 노무현정권이 세 번에 걸친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집권 가운데 마지막 주자로서 과거 개발독재의 '성장지상주의적 발전국가'를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신자유주의경쟁국가로 완성해 가는 최종 마무리 단계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노무현 정권은 결코 실패한 정권이 아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많은 논자들이 평가하듯 신자유주의정권으로서의 노무현 정권은 결코 실패한 정권이 아니다. 실패한 정권이라는 평가는 노무현 정권의 개혁, 상대적 진보성에 대해 아직도 미련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발상이다.
물론 자유주의정치세력의 신자유주의로의 전화는 'IMF 위기'를 계기로 등장한 김대중 정권에 의해 최종 확인됐다. 따라서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경쟁국가로서의 발전은 집권 초에 이미 강하게 예견됐지만, 당시 대중이 노무현 정권에 건 개혁, 진보에 대한 기대는 '참여정부'의 행보를 미리 예측할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집권말기에 이른 지금, 그리고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 갔다'고 선언한 참여정부의 성격이 고스란히 확인된 지금, 여전히 집권 초 기대의 여진에 근거해 아직도 노무현 정권을 '실패한 정부'라고 규정하고, 한미FTA 협상 타결을 그런 실패를 최종 확인하는 증거로 삼고자 하는 발상은 이미 드러난 노무현 정권의 성격을 희석시킬 뿐이다.
4대 개혁입법 등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노무현 정권의 개혁성, 진보성을 평가할 수 있는 또 다른 어떤 의미 있는 준거가 존재하기에 아직도 노무현 정권을 '실패한 정권'으로 규정하는지 필자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발상이 더욱 난감한 까닭은 바로 그 간극에 조희연 교수의 표현대로 "신자유주의 정치세력과 혹독하게 단절하지 못하는" 이런저런 정치적 설왕설래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확언하건데 집권말기에 이른 신자유주의 경쟁국가로서의 노무현 정권은 실패한 정권이라기보다 오히려 '성공한 정권'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 노무현 정권이 헌법에 규정된 기본적인 민주적 권리를 파괴하고 밀실협상을 전개하는 것은 '성공한 정권'으로서 신자유주의경쟁국가 일반의 억압적 성격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주는 한국식 판형일 뿐이다.
모든 사회관계들을 '1인 1표'가 아니라 '1원 1표'가 지배하는 시장과 자본의 무한경쟁논리로 재편하고자 하는 신자유주의 앞에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으며, 한발 더 나아가 '더 많은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가. 경쟁력의 유일근거로 제시되는 생산성의 측면에서 볼 때, 거기에 장애자,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 인간과 환경 및 생태의 호환적인 교류가, 문화의 다양성 등이 어떻게 가능한지, 따라서 공공성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의미의 정치가 어떻게 숨쉴 수 있는지 필자는 전혀 알지 못한다. 노무현정권이 제시한 국가장기전략 '비전 2030-함께 가는 희망한국'에 대해 회의적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미 노무현 정권은 어떤 이들에겐 찬양의 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권이 '긴 호흡의 역사'가 자신들의 이런 행보를 제대로 평가해 줄 것이라는 자신감을 보이는 것은 그들 자신의 행보가 성공적이라는 나름의 확신에 근거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길고 짧음에 관계없이 역사는 어떤 단일한 층과 결로 이뤄지지 않는다. 이것은 '성공과 실패'라는 도식이 모든 사회구성원에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모순과 긴장, 갈등의 상이한 복합적 층과 결들이 존재하며 노무현 정권이 특정한 층과 결을 구성하는 세력들에 의해 긍정적 평가를 받게 될 것이란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이다.
바로 그렇기에 긴 역사의 흐름을 거론할 필요도 없이 지금 이 순간 한미 FTA를 '신자유주의라는 21세기 신의 소명(vocation)'으로 인식하며 타결시키려는 노무현 정권의 강한 의지와 행보는 국내외 거대 글로벌 자본, 그들의 이해를 사회정치적으로 대변하는 국내외 수구보수정치세력들에 의해, 나아가 노무현 정권의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행세하는 수구언론들에게조차 찬양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것이 그가 역설하는 '긴 흐름의 역사적 평가'라는 담론 속에 숨겨져 있는 'FTA 정치'의 실체이며, 오직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만 노무현 정권의 '성공'이 운위될 수 있는 것이다.
진정 그가 이 국가를 대표하는가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노무현 정권에 대해 '그 어떤 일말의 마지막 기대'를 갖고 그의 발표에 관심을 갖는 것은 대통령 개인의 선의를 기대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인정하느냐와 무관하게 신자유주의자로서의 그가 자신의 정치적 태도를 하루아침에 변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주의설적 믿음에 의지하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역설적인 것은 그가 말하는 국가, 민족의 번영이라는 담론 속에 감추어진 FTA정치의 비밀에 주목하고 그것을 비판하면서도, 지금 해외 순방을 마친 그가 이 국가사회를 대표하는 대통령으로서 말하고 행동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에 필자의 실낱같은 기대가 놓여 있다는 점이다.
진정 그가 이 국가사회를 대표한다면, 그 자신의 정치적 입장, 태도를 떠나, 이 국가사회 구성원 다수가 한미FTA 협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그것의 체결로 인해 그들 삶이, 그들 사이의 관계들이 어떻게 전변될지 심사숙고해 줄 것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는 것에 대해, 한번 쯤 귀 기울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일말의 희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아이러니하게도, 한편으로 국가는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불편부당하게 관계해야 한다는 '국가중립성테제'를 산산이 조각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국가의 존재이유라고 역설하고 있는 이 모순적인 신자유주의 경쟁국가의 수장이 '국가중립성테제'에 대해 한번쯤 진지한 눈길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일말의 기대를 걸고 있다. 이 사회구성원의 미래를 규정할 한미FTA 협상 내용과 형식 또한 그가 항상 역설해 왔던 바, '특권과 반칙 없는 사회구현'이라는 바로 그 모토, 그 정신으로부터 비껴갈 수 없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더 이상 대중들을 비준반대투쟁의 험한 길로 내몰지 마라
하지만 과연 이러한 최소한의 기대가 노무현 정권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 극도로 불투명한 그 가능성 여부를 떠나 지금까지 신자유주의의 과제를 성공적으로 추진해 왔으며, FTA협정 체결을 그 화룡점정의 대미로 삼고자 하는 노무현 정권에게 이 순간 필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권고는 블랙홀의 협정문에 서명하기 전, 그들의 존재 근거라고 내세우는 '국가중립성'에 대해 다시 한번 심사숙고하라는 것이다.
여전히 '참여정부'라는 닉네임이 단지 대중동원을 위한 정치적 수사만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믿는 많은 대중들에게 그 진정성의 일말을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미 신자유주의의 파고 속에서 삶에 고통 받고, 졸속으로 추진된 한미FTA 반대 투쟁으로 지친 대중들을 더 이상 비준반대투쟁의 험한 길로 내몰지 말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참여정부'를 자임하는 노무현 정권이 품위 있게 집권을 마무리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길이라는 점을 진정 숙고하길 바랄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최소한의 기대가 따스한 햇살의 봄날에 꾸는 한갓 꿈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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