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동아일보> 논설이다. 비슷한 시기 <개벽>지의 기사는 또 이렇다. "어렸을 때부터 업혀 길러지고 꿇어앉는 습관 때문에 다리가 짧고 양복을 입어도 폼이 안 난다…등이 구부러지고 얼굴이 창백하고 늘 겁에 질리는 문약의 조선인"이라고 스스로를 평한다. 하여튼 당시 조선인은 일단 등부터 구부러져야 서로를 알아보지 않았을까 싶다.
1916년 <매일신보>에 실린 개화기 지식인 이광수의 조선인 묘사는 그의 문장력을 엿보게 한다. 무시무시하리만치 명쾌하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나로 하여금 거울을 다시 보게 만든다.
"조선인은 눈동자가 풀렸고 입은 벌어졌으며 팔다리는 늘어졌고, 가슴은 새가슴에 걸음걸이에 기력이 보이지 않고 안색도 누렇다. 조선인의 용모에는 쇠퇴, 궁색, 천함이 찍혀 있다."
식민지인들은 지적으로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열등했다. 아니, 열등해야 했다. 조선인이 같은 조선인을 보면서 조선인의 눈이 아닌 서구인의 눈으로, 즉 '타자의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스스로를 멸시했다. 전형적 오리엔탈리즘의 내면화다. 이는 개화기 수많은 계몽적 지식인들의 동일한 인식이었는데 유길준, 윤치호, 이광수, 서재필, 이승만에 이르는 친일·친미파든, 안창호, 한용운, 신채호에 이르는 민족주의자·아나키스트든 별 차이가 없었다.
"뛰지 말아라"에서 "황인종의 자랑"까지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너무나도 철저하게 부정했다. 그러나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었다. 조선시대 양반은 절대로 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뛰는 것을 천하게 생각했다. 잘 뛰려면 다리가 길어야 하지만 조선시대 양반은 다리가 짧아야 했고 길면 상놈 취급 당하던 시절이었다. 갑신정변 주역들과 가까웠던 신기선 같은 개혁적 인물조차도 더운 날 테니스를 시범 보이는 미국 영사에게 "아니, 아랫 것들 시키지 왜 직접 뛰어다니시오"라고 나무랄 정도였다. 양반은 양반이라서 안 뛰고, 천민은 먹은 거 아끼느라 안 뛰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할머니들은 "배 꺼진다, 뛰지 말아라"며 손자들 쫓아가 붙들어 세우던 그런 시절이었다. 하여튼 부자도 가난뱅이도 모두 뛰면 안 되는 우리의 '옛날'이었다.
개화기 초기 서구의 국가들은 종교를 앞세워 조선 땅에 발을 내딛는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미개한 나라에 진출할 때 항상 내세우는 것은 하드웨어로는 학교요, 소프트웨어로는 스포츠였다. 학교를 통해, 그리고 YMCA 같은 청년단체를 통해 스포츠를 확산시켰고 이 신식문물에 조선인들은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신문물을 갑자기 받아들인 당시 상황에서 조선인들의 한계는 (당연히!) 명백했다. 예를 들어 1922년 미국 프로야구 올스타팀의 내한 경기에서 조선인 선발팀은 3만 관중 앞에서 23 대 3으로 패한다.
사실 조선인들이 스스로의 왜소한 체구를 발견하고 재확인 하게 한 것이 바로 스포츠였기에 이 콤플렉스의 치유도 스포츠에서 가능했다. 1896년 <독립신문>의 사설 제목이 '조선이 암만 하여도 나라가 되겠다'였는데 그 이유는 한국 학생들이 축구를 일본 학생보다 잘 하고 백인 학생만큼 하기 때문이었다. 또 윤치호는 손기정이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자 "광의로 보아 황인종의 자랑이며 백인의 종 우월성을 타파한 일"이라고 치하했다 한다.
'민족 개조'의 완결판(?)이 나타나다
스포츠는 우리를 일본과, 그리고 서구와 비교하는 잣대였고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서구의 선진문명 자체와 동일시됐다. 그래서 요절한 천재 작가 이상(1910~37)이 스스로를 '20세기의 스포츠맨'이라 칭한 것이다. 사실 그는 운동을 즐기지도, 단단한 몸을 가지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결핵에 시달리다 요절했다. 그러나 그는 스포츠와 근대를 동일시했고, 그래서 '스포츠맨'이 되길 원했던 것이다. 스포츠는 근대적 정책이자 근대의 상징이었다.
윤치호와 이광수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민족개조'의 꿈이 박정희 시대를 거쳐 이제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열여덟살 소년에 의해 완성되고 있다. 포스트모던 민족개조 프로젝트가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똑바로 보라. 우선 아래위로 참으로 길다. 열여덟 청년의 키가 6척 장신이라 한다. 저 떡 벌어진 어깨! 벗은 몸이라 두 눈 뜨고 보기가 망측하긴 하지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참을 가야 한다. 그리고 하늘로 비상하듯 위로 똑바로 치솟은 역삼각형 '등판'을 보아야 한다. 역시 한 세기 전 조선인의 몸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멸시하던 몸이 아니다. 이 청년이 온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무대에 함께 오른 '코쟁이' 놈들의 코들(!)을 모조리 납작하게 했던 것이다.
색다른 종목, 색다른 우승…백년만에 이룬 '꿈'
우리는 이제 100년 전 지식인들이 그렇게 갈망하던 체력도, 기개도, 투지도, 그리고 기술도 모두 갖췄다. 이미 1960년대에 복싱 세계챔피언이 나왔고 1970년대에 탁구도 세계정상에 올랐으며 이후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챔피언들과 우승자들이 쏟아졌다. 생각해 보면 5년 전 축구대회 4등에 우리가 왜 그렇게 광분했는지 도통 이해가 안 갈 정도다. 그럼에도 박태환의 우승은 각별하다.
한국이 이제까지 그렇게 많은 우승을 했어도 이른바 기초종목이라는 수영에서의 우승은 처음이다. 그 기초 종목이라는 육상과 수영에서의 열세는 스포츠강국 한국의 치부였다. 그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투자가 부족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하다. 100년이 넘는 한국 스포츠 역사에서 수많은 종목들이 '투자' 여부와 상관없이 당당한 국제성적을 거둬왔다. 그리고 같은 육상 중에서도 마라톤은 손기정의 올림픽 우승 전부터 세계적 강국이었다.
우리가 이른바 '기본 종목'에 취약했던 이유는 그 기본 종목들이 결정적으로 '사이즈'를 요구하는 종목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프레임', 즉 '하드웨어'가 비슷한 수준에도 이르지 못했으니 쳐다보기만 해도 주눅 들고 결국 지레짐작 포기하지 않았을까. 이번에 박태환이 '넘어서겠다'고 각오를 다졌던 호주의 그랜트 해켓은 사실 '물 속'이 아니면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인간'이다. 신장 197cm! 현존 최고의 수영선수 마이클 펠프스는 193cm, 펠프스 직전의 세계 최고 이언 소프는 195cm였고 88올림픽 3관왕 서독의 미카엘 그로스는 무려 2m 하고도 2cm였다.
육상도 똑같다. 노골적 힘, 스피드, 파워를 요구하는 100m 경기를 머리 속에 그려보자. 올림픽 100m 결승. 결승선에 서 있는 여덟 명의 선수들. 그들이 몸을 푼다. 그들의 사이즈와 근육을 보라. 키는 당연히 190cm를 기본으로 하고 근육은 엄청난 웨이트 트레이닝을 견뎌 낸 터질 것만 같은 근육들이다. 스테로이드 복용을 의심 받는 근육이다. 총소리와 함께 튕겨 나가는 이들의 모습은 아라비아산 준마를 보는 듯하다.
이제껏 '한국형 종목'은 따로 있었다
잠시 시간을 타고 넘어 올림픽 마지막 날 오전으로 가보자. 마라톤 출발선. 수십 명의 선수들이 복작 거린다. 저기 황영조도 보이고 그 옆에 이봉주도 보인다. 그 옆의 선수는 아마도 김이용인 듯하다. 황영조는 168cm에 56kg, 이봉주는 167cm에 역시 56kg이다. 그 옆의 선수들도 모두 막상막하다. 이들보다 더 작지도, 별도 더 크지도 않다. 이렇듯 우리는 이제까지 마라톤처럼 머리와 '악'이 필요한 종목, 아니라면 '연장'을 쓰는 종목(양궁)이나 손재주(골프)와 발재간(쇼트트랙)이 필요한 종목에서 강세였다. 사실 제일 편한 건 '체급' 종목이고 말이다.
육상과 수영은 '신체조건론'이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종목이다. 박태환은 그런 수영에서 181cm의 단신(?)의 불리함을 딛고 우승한 것이다. 다른 선수들에게도 주목해야 한다. 김연아는 우리 민족의 적성에 맞지도 않는 '아름다움'으로 승부하는 선진국형 종목 피겨스케이팅에서 세계적 선수가 됐다. 이강석은 박태환과 마찬가지로 하드웨어가 중요한 스피드스케이팅 500m 세계 기록 보유자가 되는 경이로움을 보였다. 한국과 중국의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머리' 써가며 하는 경기가 아니라 거대한 허벅지를 지닌 서양의 아저씨(?)들과 속도의 '진검승부'를 겨루는 종목에서 말이다. 여기에 장미란이 빠질소냐. 우리에게도 세계랭킹 1위 역사(力士)가 있단 말이다.
'1935년 여운형'이 '2007년 박태환'을 찬양하다
70여년 전 서정권. 일명 '독침'. 전 일본 아마추어 권투선수권자이자 프로권투 세계랭킹 6위. 1935년 귀국 때 카퍼레이드를 할 정도의 인기였다. 동대문에서 귀국 환영경기를 하는데 몽양 여운형이 경기 전 6000여 관중 앞에서 일장 격려연설을 하기도 했다 한다. 그런데 그를 찬양하는 신문 기사는 오늘에 더욱 적절하기만 하다. 솔직히 그때는 약간 '오바'였다. 그러나 이 문장은 지금 우리가 청년 박태환에게 바치기에 조금의 손색이 없다.
"이 5척(박태환은 6척이다) 어린 청년 앞에 전 세계의 코끼리 같은 양키들이 피하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음에 우리들은 그와 피와 산천을 같이 하였음을 영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이리하여 아, 동방에도 우리 반도에는 세계적으로 우러러보는 새로운 영웅 한 분이 나타났다."
필자의 머리는 원래 엘리트 스포츠나 국제대회에 대해서는 '좋은' 소리가 절대로 나오지 않도록 설계돼 있는데 지난 25일 있었던 박태환의 막판 역전 스퍼트에 맛이 갔다. 오늘만 '오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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