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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정희-김대중-김일성을 넘어서라"

[2007 대선이야기·2]'미래'行 열차에 '과거'의 자리는 없다

2007년은 대한민국 역사에 어떤 해로 기록될까? 한국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엔 또 어떤 해로 기억될까? 역사의 기록이든, 개인의 기억이든 모든 해가 다 중요할 수는 없다. 역사가는 바빠서(?) 한 줄만 기록하고 개인은 머리가 나빠서(?) 다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2007년은 틀림없이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대통령 선거가 있기 때문이다. 개인에게도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대선은 삶의 변곡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정권의 성격(솔직히 말하면 대통령의 성격)은 개인의 성격에 아주 크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기자이자 작가인 장폴 뒤부아는 '프랑스적인 삶'에서 이런 사실을 기막히게 묘사해 냈다. 그는 이 소설에서 한 프랑스 남자의 자화상을 다섯 번이나 바뀐 정권의 변천사 속에서 밀도 있게 그려냈다. 소설의 목차 자체가 대통령의 이름으로 되어 있을 정도다. 이를테면 '한국적인 삶'이라는 소설의 목차가 1.이승만 2. 박정희 3. 전두환 4. 노태우 5.김영삼 6. 김대중 7. 노무현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그 소설에도 사이사이에 의미 없는 알랭 포에르 같은 권한 대행의 이름도 목차에는 올라 있다. 윤보선, 최규하처럼…. 그러고 보니 그런 소설을 쓰기에는 한국의 현대사가 제 격이다. 사실 개인의 내면적 자화상에 미친 영향을 생각해 보면 우리의 대통령들보다 더 훌륭한 소재도 찾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과연 누가 한국의 10번째 대통령이 될까?

2007년 12월 19일, 과연 누가 10번째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될 것인가? 한편으로는 무척 궁금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심히 걱정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가 누구든 상관없이 우리의 내면적 자화상에 심히 지대한 영향을 끼칠 사람임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의 정신적 건강을 위해 대선에 올인 할 수밖에 없다. 따지고 보면 꽤나 합리적인 투자인 셈이다.

정말로 누가 될까? 현재의 판세대로 한나라당이 10년 만에 정권을 되찾아 갈까? 아니면 또 다시 막판 역전승이 극적으로 재연될까? 만일 한나라당이 집권한다면 수개월 간 여론조사에서 압도적으로 1위를 달리고 있는 이명박이 되는 걸까? 그렇게 된다면 최초로 기업인 출신의 대통령이 탄생하는 것이다. 아니면 박근혜일까? 만일 박근혜가 된다면 최초의 여성 대통령과 아버지에 이어 2대에 걸쳐 대통령이 되는 역사적인 기록을 동시에 세우게 된다. 아니면 만년 '넘버 3'의 손학규가 기적을 만들어 낼까? 정말로 그런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 유명한 경기고-서울대의 이른바 'KS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정동영이 된다면 그 역시 최초의 방송인 출신이 될 것이고, 정운찬이 된다 해도 역시 KS와 최초의 서울대 총장 출신의 대통령이 탄생하는 것이다. 경기고-서울대 출신이긴 하지만 뭔가 분위기가 다른 느낌의 또 다른 주자인 '비운의 김근태'가 정말로 기적적으로 된다면 군사정권에 온 몸으로 저항한 정통 운동권 출신의 대통령이 탄생하게 된다. 혹 다른 누가 된다고 해도 김대중, 노무현 두 고졸 출신을 연속으로 당선시킨 파격성에 버금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다. 한국 대선에서 파격이 일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파격이 일상이 된다면 더 이상 파격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도대체 일상적 파격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이런 흐름에는 일정한 방향이 있는 것일까? 있다면 그것의 동력은 무엇일까?

얼떨결에 잠시 대통령이 되었던 최규하를 예외로 인정한다면 박정희 이래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의 대통령이 있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목숨을 걸고 군을 동원하여 정권을 잡았다. 노태우는 다수당의 다수파가 집권한 사례다. 김영삼은 다수당의 소수파가 집권한 사례다. 김대중은 소수당의 다수파가 집권한 사례다. 그런데 노무현은 놀랍게도 소수당의 소수파가 집권한 사례다.

노태우가 상식적 사례라면 노무현은 파격적 사례다. 이것은 뭘 말하는 것일까? 이제 더 이상 물리력과 조직력이 대통령이 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는 수십 명의 국회의원을 거느리고 있다거나 국회의원 선수가 높다는 것은 장식물도 못되는 장애물일 뿐이다. 오히려 선수가 낮거나 정치권과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참신함을 무기로 일거에 신데렐라로 떠오를 수 있다. 노무현도 그렇지만 오세훈, 강금실, 고건, 정운찬, 박원순, 문국현 모두 과거의 잣대로는 결코 후보로 거론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심지어는 이명박조차도 지지율이 올라가서 국회의원들이 줄을 선 것이지 그들 때문에 지지율이 올라간 것이 아니다. 다선의 국회의원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워진 세상이 됐다. 밖에 있었으면 대통령 후보로 영입되었을만한 인물들도 단지 국회의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구식 모델 취급을 받고 있다. 한마디로 '정치인 디스카운트' 시대다.

정치인의 위기와 리더십

정치인의 위기는 두 가지 방향에서 오고 있다. 하나는 지금이 정치의 시대가 아니라 경제의 시대라는 사실이다. 정치인의 시대, 혁명가의 시대가 아니라 기업의 시대, 기업인의 시대, 대중 스타의 시대다. 미국 대통령보다 마이크로소프트사와 빌 게이츠를 더 잘 안다.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정치인도 나라의 대표가 더 이상 정치인이 아니라 기업과 기업인이라는 사실을 눈치로나마 안다. 대중을 지배하는 것은 배우, 가수, 운동선수 같은 대중 스타들이다. 대통령의 인기는 대중 스타의 인기와 차마 비교할 수 없다. 더 이상 영웅은 정치에서 나오지 않는다. 지금은 정치 영웅이 탄생할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훗날 역사가들은 이 시대를 '빌 게이츠의 시대' 혹은 '이건희의 시대'로 기록할지 모른다. 전설과 신화가 만들어지지 않는 곳에서는 리더십이 나올 수 없다.

오늘날 전설과 신화는 기업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처칠, 루즈벨트, 드골, 아이젠하워는 모두 전쟁 영웅이다. 전쟁은 수많은 전설과 신화를 만들어낸다. 마오쩌뚱, 레닌, 체 게바라, 카스트로, 덩샤오핑은 모두 혁명 영웅이다. 혁명의 시대에도 영웅이 탄생한다. 쿠데타의 시대, 독재의 시대, 그리고 그에 저항하는 민주화의 시대 역시 마찬가지다. 만델라, 바웬사, 김대중, 김영삼, 하벨 등도 그렇게 국민 지도자가 되었다. 냉전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레이건과 고르바초프 역시 시대가 낳은 지도자들이다. 어쨌든 냉전이 종식된 1990년대 이후, 역사는 정치를 떠났다. 정치인들은 역사의 중심에서 조금씩 떠밀려가고 있다는 불안감으로 초조하다. 프리미어 리그 보는 눈에 K-리그가 들어올 리 없고 K-1 보는 눈에 권투가 들어올 리 있겠는가?

또 하나의 위기는 지금이 지도자의 시대가 아니라 대중의 시대라는 사실이다. 권위는 붕괴되었거나 분산되었다. 지도자와 대중이 구분되지 않는다. 학력, 경력, 경제력, 사회적 지위, 그리고 무엇보다 정보력에서 정치인은 대중과의 차별화에서 실패한다. 모든 대중이 모든 이슈에 대해 발언하는 시대다. 엘리트의 이슈와 대중의 이슈가 다르지 않다. '경영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피터 드러커가 예측한대로 '모든 엘리트가 대중이 되고, 모든 대중이 엘리트가 되는 사회'가 도래했다. 더 이상 대중은 통치되지 않는다. 아니 대중들은 통치하고 싶어 하고 실제로 정치인들을 통치하고(!) 있다. 대중을 두려워하는 정치인은 있어도 정치인을 두려워하는 대중은 없다.

3김 시대를 끝으로 대중을 동원할 수 있는 정치인은 이제 거의 없다. 대중들에게 단지 얹혀있는 정치인만 있을 뿐이다. YS와 DJ는 기본적으로 25% 정도의 대중을 동원할 능력이 있었다. 지금은 아마도 노무현과 박근혜 정도가 대략 15% 정도의 대중을 동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이들이 이 정도라도 대중 동원력이 있는 것은 '감정이입'이 된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정이입인 된 대중을 확보하려면 그 정치인의 '진정성'이 역사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럼 점에서 여론조사 1위인 이명박에 대한 대부분의 지지자들이 아직까지는 리더십에 대한 지지일 것이다. 충성도가 높은 견고한 지지층은 아마도 노무현과 박근혜가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지지율의 유동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3김 시대 이후 두드러진 특징이다. DJ 정부시절 야당의 강력한 후보였던 이회창에게 대항하기 위해 이인제에게 반(反)한나라당 지지가 몰렸다. 그러나 이인제로는 이길 승산이 없다고 하자 이번에는 노무현에게로 지지가 몰렸다. 그러다가 노무현의 지지율이 급락하자 정몽준에게까지 갔다. 결국 다시 노무현에게 돌아오긴 했지만 그러는 사이 지지율이 요동쳤다. 박근혜, 고건, 이명박 모두 대중의 유동성으로 인해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다. 대중이 딴 데로 눈길을 돌리는 순간 그 정치인은 끝이다. 한 때 1위였던 고건은 힘 한 번 못 써보고 퇴장했다. 대중 스타의 인기를 압도했던 박근혜 조차도 부동의 1위 자리를 내주고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이명박도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머지 후보들은 말할 것도 없다.

'대중'은 왜 바뀌는가?

그렇다면 도대체 대중들은 왜 이렇게 변덕이 심해진 걸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2007년 대선이 '진영 대 진영의 전쟁'이 되었기 때문이다. 보수 대 진보, 산업화 세력 대 민주화 세력, 혹은 영남 대 호남의 그 어떤 것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대선 후보 개인의 싸움이 아니라 집단 패싸움 형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과거의 선거가 권투와 같은 개인 간의 대결이었다면 금년 대선은 축구와 같은 단체전이 될 것이다. 정치권만이 아니라 언론계, 학계, 재계, 종교계, 시민단체 등 모두가 수비수, 공격수가 되어 경기에 참여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심판마저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할 것이다. 물론 여전히 골을 넣는 스트라이커는 정치권이 맡겠지만 골을 넣지 못한다면 언제든지 교체될 것이다. 축구는 한두 선수의 개인기로 이길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팀 전체의 조직력이 중요하다. 조직력은 체력·정신력·사기가 모두 갖추어져야 극대화 된다. 서포터즈의 응원도 승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경기가 과열되면 부상자가 속출하고 뜻하지 않게 퇴장당할 수도 있다. 벌써 고건은 퇴장당했고 부동의 주전이었던 정동영과 김근태는 교체 위기에 직면해 있다. 손학규는 막강한 투톱 때문에 경기에 나설 기회를 좀처럼 잡지 못하고 있다. 한 순간의 방심이 승부를 가르게 될 것이다. 이미 휘슬이 울리고 전쟁은 시작됐다.

다른 하나는 대중들이 정치인들에 대한 부채의식이 없어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산업화 세력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한나라당이 10년 전에 정권을 빼앗긴 것은 역설적으로 먹고 살만해졌기 때문이다. '자기 성공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민주화 세력을 자처하는 범여권이 지리멸렬한 것도 민주화가 상당히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민주화 세력이 '대중의 분노'를 일으킬만한 이슈를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아마도 90년대였다면 화염병 시위가 있었을 법한 '일해 공원'조차 지금은 그리 '뜨거운 공분'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사실 자기 성공의 희생자는 정치인의 숙명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처칠조차 전쟁 후에는 쫓겨났다. 사회주의를 몰락시키고, 독일을 통일시키고, 걸프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아버지 부시도 결국 재선에 실패했다. 독일을 통일시켰던 헬무트 콜의 기민당도 98년 슈뢰더의 사민당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군사독재에 저항했던 민주화 지도자인 YS와 DJ가 집권한 데에는 국민들의 부채의식이 상당히 작용했을 것이다. 웬만한 결격 사유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노무현은 박정희와 전두환에 맞섰던 운동권 세력에 대한 일종의 보상으로 탄생한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김근태를 비운의 정치인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 대목 때문이다. 확실히 노무현이 70~80년대 운동권 세력을 대표하는 적자냐 하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성서에 나오듯 야곱이 눈이 먼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인 에서 대신 장자의 축복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을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으로 한 번뿐인 축복이 끝났듯, 운동권에 대한 보상도 끝난 것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과거 실적에 대한 보너스는 이미 충분히 지불되었다. 이제 대중은 어느 정치인에게도 부채의식이 없다. 언제든 냉정하게 등을 돌릴 수 있는 것이다.

이명박의 높은 지지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나?

그렇다면 감정이입이 된 지지층이 많은 것도 아니고 대중의 부채의식이 있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명박의 지지는 이토록 높은 것일까? 그것은 그가 다른 후보들이 갖지 못한 뭔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자질을 갖고 있어야 한다. 정치가, 사상가, 운동가, 경영가적 자질이 그것이다. 네 가지를 모두 갖고 있다면 말할 것도 없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만이라도 확실히 있어야 유력한 후보라도 될 수 있다.

이명박은 다른 후보들보다 경영가적 자질에서 확실히 우위를 보이기 때문에 선두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도 다른 자질은 잘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네 가지 자질 중 한 가지라도 확실히 갖고 있는 후보가 없다는 점이다. 그 점이 이명박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정치가적 자질은 덕장의 이미지다. 사상가적 자질은 지장의 이미지다. 운동가적 자질은 용장의 이미지다.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한국의 현대 정치사에서 타협과 조정, 그리고 협상의 정치가적 이미지는 JP, 세계적 석학들과 다방면에 걸쳐 논쟁을 벌인 사상가적 이미지는 DJ, 박정희, 전두환 정권과 맞서 싸운 반독재민주화 운동가의 이미지는 YS,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CEO의 경영가적 이미지는 박정희가 상대적으로 많이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네 가지 자질은 대통령이 되려면 모두 갖추어야 할 자질이다. 모두 갖지는 못하더라도 가장 많은 자질을 갖고 있는 정치인이 당연히 경쟁력이 있을 것이다. 이들 자질과 조응하는 리더십은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통찰력, 속도전에 대응할 수 있는 결단력, 수시로 바뀌는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유연성, 흩어진 국민적 에너지를 하나로 모을 수 있는 통합력, 그리고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경영능력이다.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지도자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리더십이다.

익숙한 것과의 이별

2007년 한국 사회의 시대정신은 뭘까? 한마디로 말해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이다. 미래로 가는 열차는 절대로 '과거'를 태우지 않는다. 과거에 집착하면 결코 혁신을 이루지 못한다. 혁신 없는 사회는 발전할 수 없다. 혁신은 과거와의 이별이다. 과거가 찬란할수록 이별은 어려워지고, 미래는 어두워진다. '승리한 패러다임'은 '투쟁' 없이 결코 스스로 물러가는 법이 없다. 한국은 신화와 전설의 나라다. 신화와 전설은 영웅을 낳는다. 영웅은 사람을 지배하고 시대를 지배한다. 지배는 새로운 영웅이 오기 전까지 계속된다. 산업화 시대는 박정희라는 영웅을 낳았다. 민주화 시대는 김대중이라는 영웅을 낳았다. 북한에는 김일성이라는 영웅이 있다. 이들은 패러다임을 창조했다.

이들은 강력한 추종세력이 있다. 이들은 상징물도 있다. 박정희에게는 '현충원'이 있고, 김대중에게는 '망월동'이 있고, 김일성에게는 '주체탑'이 있다. 정치인은 선대 정치인의 '공'보다는 '과'를 더 많이 봐야 성공한다. 공을 더 많이 보면 극복할 동력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군인·기업인·정치인은 '좋은 사람'이 해서는 안 된다. '강한 사람'이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일들은 결단하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강한 사람만이 결단할 수 있다. 좋은 사람은 학계·언론계·법조계·종교계·시민단체 등이 어울린다.

노무현이 정치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힘은 자기에게 공천을 주고 장관을 시켜주고 대통령까지 만들어 준 YS·DJ의 과를 많이 봤기 때문이다. 노무현의 힘은 거기서 나온 것이다. 반면 김근태는 YS·DJ의 공을 더 많이 보는 사람이기 때문에 정치게임에서 승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지나친 표현인지 모르지만 배은망덕(?)해야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 정치인은 그런 숙명을 타고난 사람들이다. 오늘날 북한이 저 지경이 된 것은 그 사회에 김일성을 비판할 기제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국이 저리 발전한 것은 덩샤오핑이 "마오 주석이 잘 한 것은 70이요, 못한 것은 30이다"라고 비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혁명을 비판한 그 말로 덩샤오핑은 마오쩌뚱을 뛰어 넘었고, 그 힘으로 중국은 긴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오늘날 호남에서 큰 정치인이 나오지 못하는 것은 김대중을 넘어 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TK(대구경북) 역시 박정희를 비판하지 못하기 때문에 큰 정치인이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2007년 대선에서 산업화 세력과 TK는 박정희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민주화 세력과 호남은 김대중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해야 한다. 박정희 시대에 대해서는 두 가지 평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그 시대가 부끄럽고 잘못된 역사지만 경제적 공이 작지 않아 정상참작의 사유가 있다는 인식이다. 다른 하나는 그 시대가 자랑스럽고 찬란한 역사지만 일부 역사적 과오가 있었다는 인식이다. 이 인식을 둘러싼 보수의 내부 투쟁과, '호남 이니셔티브'를 둘러싼 노무현과 김대중 패러다임의 대충돌이 정계개편의 방향을 결정지을 것이다.

박정희-김대중-김일성의 패러다임 넘어서기

이것은 과거와 미래의 싸움이고, 지역주의와 탈지역주의의 싸움으로 비쳐질 테지만 사실 이것은 패러다임과 리더십을 둘러싼 신구의 전쟁이다. 예컨대 지난 60년간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가장 공이 큰 기업인 조사에서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아버지 이병철 회장보다 앞섰다. 이것은 그가 93년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모두 다 바꾸자"라는 '질 중심의 경영'을 부르짖고 나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선언이었던 것이다. 그것으로써 그는 아버지 이병철을 넘어선 것이다.

반면 정주영의 아들들이 정주영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를 극복할 패러다임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미래로 가기 위해서는 박정희 패러다임, 김대중 패러다임, 김일성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국가주의, 민족주의를 뛰어넘어 개인주의, 세계주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유럽 사람들에게 유럽의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유럽은 수천 년간 분열되어 있었고 늘 싸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싸우지 않는 상황, 즉 평화를 원했다. 유럽은 그것을 얻었다. 유럽은 지금 싸우지 않는다. 지난 수십 년간 전쟁이 없었다. 이제 하나의 유럽으로 통합된다면 전쟁의 위협은 사라질 것이다. 유럽은 지금 행복하다.' 그렇다. 유럽인들 개인이야 꿈이 다 다르겠지만 그리고 각 나라도 이해관계가 다르겠지만 유럽의 꿈은 평화였다. 이제 그들은 그것을 얻은 것이다.

'선진화'와 '평화'의 길목에서

대한민국의 꿈은 무엇일까? 한국 사람들에게 그것을 묻는다면 아마도 답은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는 것이다. 수십 년간 우리는 이 목표를 향해 쉬지 않고 달려 왔다(날아 왔다). 이제 목표 지점의 반쯤 왔을까? 산업화의 신화, 민주화의 신화, 정보화의 신화, 한류의 신화를 넘어 이젠 선진화의 신화로 가고 있다.

'선진화'는 단지 1인당 GDP가 3만 달러 혹은 4만 달러가 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유럽의 여러 나라들처럼 사회 전반이 말 그대도 선진화 되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사회 모든 분야가 몇 단계 '업그레이드' 되어야 한다. 사회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천박성'과 '폭력성'을 지뢰 제거하듯 깨끗이 제거해야 한다. 선진화는 모두가 함께 가는 번영의 길이어야 한다. 선진화의 꿈은 누구에게도 악몽이 되어서는 안 된다.

또 하나의 꿈은 수십 년간 짓눌려 왔던 전쟁의 불안으로부터 벗어나 '평화의 시대'를 여는 것이다. 평화를 말하지 않는 정치세력이 집권하기란 점점 요원해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보수는 레이건에게 배울 필요가 있다. 그는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까지 극단적으로 혐오했던 인물이지만 어느 지도자보다도 평화를 많이 말했고 실제로 가장 많이 대화함으로써 소련의 체제를 평화롭게 이행시켰다. 물론 그의 평화는 '힘을 가진 평화'라는 슬로건에 잘 정리되어 있지만 어찌 되었건 중요한 것은 그가 국민들은 '전쟁보다는 평화를 원하는 존재'라는 것을 잘 읽은 지도자였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레이건을 성공한 지도자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이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라고 하든, '자유 평화'냐 아니면 '노예 평화'냐 라고 선택을 강요하든 지도자는 평화를 말해야 한다. 평화는 만인에게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선진화와 평화는 단순히 먹고 사는 '빵'의 수준을 뛰어 넘는 것이고, 군사적 억지력에 의한 '안보 유지'를 뛰어 넘는 것이다. 언제까지 경제와 안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중요하다는 낮은(?) 차원의 타령만 할 것인가? 보수는 진보가 내놓은 아젠다인 '평화'를 말하라! 진보는 보수가 내놓은 아젠다인 '선진화'를 말하라! 누가 평화를 부정하고 선진화를 공격할 배짱이 있겠는가? 2007년에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과 정치인은 즉각 이를 위한 정책과 프로그램을 내놓아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정치에서 꿈이라는 단어가 사라졌다. 함석헌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했지만 나는 "꿈이 있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생각한다. 정략가는 다음 선거를 생각하고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고 한다. 다음 세대를 위해 꿈을 이야기하는 정치인만이 대통령이 될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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