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 전 총리가 16일 '대권도전 포기'를 선언했다. 갑작스런 그의 중도 하차에 정치권의 각 세력은 직간접적인 충격에 휩싸였다. 정치권은 고 전 총리의 대권 불출마 선언 배경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한편, 그의 퇴진이 향후 정계개편 시나리오와 대권구도에 미칠 영향을 분석하느라 분주해졌다.
왜 중도하차 했나?
최근 고 전 총리에게 불리하게 형성된 정치 상황이 중도 하차의 일차적 요인으로 풀이된다. 그가 '기존 정치의 벽'을 언급하며 "대결적 정치구조에서 저의 역량이 너무나 부족함을 통감한다"고 밝힌 대목은 이런 관측을 뒷받침한다.
이와 관련해 열린우리당 내 친(親)고건 성향의 의원들이 '고건 세력화'의 모태로 추진했던 '중도포럼'이 흐지부지된 점이 크게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고 전 총리 쪽의 한 관계자는 "중도포럼 등 정치권의 논의가 공중분해 되면서 고 전 총리가 상당히 실망했던 게 사실"이라고 전했다.
고 전 총리의 다른 측근은 "'실패한 경험'이 없는 고 전 총리에게 최근 상황은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관직 생활에선 승승장구를 거듭, 두 번의 국무총리와 서울시장 등을 두루 경험하며 '행정의 달인'이라는 별칭까지 얻었지만, 이를 기반으로 발을 디딘 정치권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고 전 총리의 유일한 무기였던 지지율이 이런 상황과 맞물려 급속한 하강곡선을 그은 것도 그의 중도 하차 결심을 앞당긴 요인으로 풀이된다. 고 전 총리도 "제 활동의 성과가 당초 기대에 못 미친다는 여론의 평가를 겸허하게 받아들인다"고 이를 인정했다.
지난해 말 노무현 대통령의 '잘못된 인사' 발언 논란을 거치며 고 전 총리의 심경이 크게 흔들렸다는 후문도 있다. 또한 햇볕정책의 변용을 주장해 온 고 전 총리는 김 전 대통령과 노선상의 불일치가 크다는 관측도 많았다. 열린우리당 내에선 김근태 의장 등이 심심치 않게 "(함께 할 수 있는 세력인지) 논쟁의 대상"이라고 냉대해 왔다.
이 같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지난해 연말부터 고 전 총리는 중도 포기를 심각하게 고민했고, 1일 이후 보름간 지속돼 온 장고 끝에 이를 공식화하기에 이르렀다는 게 주변 인사들의 전언이다.
범여권 정계개편 새 국면
고 전 총리의 중도 하차는 범여권 정계개편 과정에 직접적인 파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진통을 겪고 있는 열린우리당의 진로 논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됐다.
정치컨설팅 회사 민기획의 박성민 대표는 "범여권 정계개편의 유력한 주체가 사라짐으로써 단기적으로는 통합신당 논의가 주춤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 밖의 '깃발'이 꺾인 이상 열린우리당 내부의 이탈 조짐에도 일부 제동이 걸릴 것이라는 의미이다.
특히 친(親)고건 성향 의원들이 형성했던 원심력은 현저하게 힘을 잃을 것으로 전망된다. 염동연 등 일부 의원들이 탈당할 가능성은 물론이고 내달 14일 전당대회 이전에 대규모 집단탈당 사태가 벌어질 여지도 상당히 줄어든 셈이다.
범여권 통합과 대선 후보 선출 과정을 거쳐야 할 범여권에 역동성이 떨어지게 돼 장기적으로도 악재가 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우리당의 한 관계자는 "'너무 일찍' 고 전 총리가 무너짐으로써 오픈 프라이머리 흥행 카드 중의 하나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동안 우리당의 다수는 고 전 총리와 결합하는 정계개편의 '시너지 효과'와 그 이후 범여권 후보 선출 과정에서의 흥행 효과를 내심 기대해 왔다.
이에 따라 여권의 정계개편이 우리당과 민주당만의 결합으로 축소될 경우 '도로 우리당'. '도로 민주당'이라는 딱지를 굳히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반면 이목희 의원은 "애당초 고 전 총리는 오래 갈 수 없었던 후보인 만큼 당연한 결과로 본다"며 "우리당의 진로 논쟁이나 정계개편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고 일축했다.
장기적으로 오히려 득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만만치 않다. 보수적 성향인 '고건 변수'의 해체로 한나라당과 비교적 선명한 대결구도를 구축할만한 여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박성민 대표도 "민정당 출신, 호남지역 기반, 고령, 보수주의자라는 한계를 가진 고 전 총리는 범여권의 발전성을 가로막아 온 게 사실"이라며 "고 전 총리의 퇴진이 단기적으로는 타격이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명분 있는 정계개편의 활로를 열었다고 봐야 한다"고 인정했다.
박 대표는 특히 "고 전 총리로 인해 가로막혀 있던 개혁층 결집의 긍정적 요인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대권경쟁 춘추전국 시대로
범여권의 대권구도 역시 크게 흔들리게 됐다. 독보적인 지지율을 보이던 고 전 총리가 사라진 여파가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 정동영 전 의장 등 기존 주자들의 입지에 미칠 영향이 주목된다.
일차적인 관심은 호남권이 주축이었던 고 전 총리의 지지율이 우리당 주자들에게 이전될 것이냐다. 이런 맥락에선 호남이 정치적 기반인 정동영 전 의장이 가장 큰 수혜자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목포 출신의 천정배 의원도 그 언저리에 있다.
그러나 박성민 대표는 "호남이 기반이었던 고 전 총리가 빠짐으로써 호남 신당론이 타격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정동영 전 의장 등 호남권 주자들도 한계에 봉착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명분 있는 탈호남 후보가 될 가능성이 오히려 높아졌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에 따라 호남권 후보들은 물론이고 비호남 후보들과 잠룡 그룹의 물밑 각축이 본격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고 전 총리의 퇴진의 여파로 '기득권 세력'으로 지목돼 온 정동영 전 의장과 김근태 의장 등의 '2선 후퇴' 요구가 더욱 부각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상황 전개에 따라선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 등 새로운 대선 주자군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질 수도 있다.
민주당도 충격
민주당도 적지 않은 충격이 예상된다. 한화갑 대표의 퇴진 후 친고건 기류가 강하게 형성됐던 민주당에선 운신의 폭이 현저하게 좁아졌기 때문이다.
유종필 대변인은 "여러 면에서 훌륭한 분인데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가 평소 내세웠던 중도개혁세력 결집의 목표는 민주당의 방향과 일치하는 것인데 아쉽다"고 밝혔다.
이낙연 의원은 고 전 총리의 퇴진과 관련해 "안타깝다"며 "중도개혁세력의 소중한 구심점 하나를 잃고 더욱 큰 위기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이 의원은 "그러나 중도개혁세력 대통합은 결코 포기할 수 없고 오히려 더욱 강력히 추진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제3지대 창당을 주장했던 민주당 내 친고건파 의원들의 탈당 기류는 급속하게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대체적이다. 이에 따라 2월 전당대회까지는 내부 정비에 주력하는 한편 호남 지분을 쥐고 열린우리당과의 지난한 통합 협상을 모색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다양한 전망이 엇갈리는 가운데에도 범여권의 '제3지대 창당론'이 고 전 총리의 몰락과 함께 타격을 입게 된 것 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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