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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20주기…"그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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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20주기…"그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군사정권 종식됐지만, 참된 민주주의 아직 요원"

509호로 향하는 복도는 좁고 어두웠다. 어깨를 마주치며 옆을 지나던 이가 "위압감을 주려고 일부러 그렇게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위압감'을 위해 지어진 이 건물은 그 역할에 충실했다. 이름만으로도 사람들을 움찔하게 했으니까. 과거 '남영동 대공분실'이 있던 건물이다.

20년 전, 마음 여린 한 청년의 죽음

20년 전 이 건물 509호에서 한 청년이 죽었다. 얇은 옷으로 겨울을 나는 후배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그렇게 마음이 여린 청년이었다. 그의 이름은 박종철.
▲ 옛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 앞에서 '고 박종철 20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뉴시스

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이던 박 씨의 죽음은 한동안 그저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만 설명됐다. 물론 이런 설명은 거짓이었다. 1987년 1월 14일 새벽, 이 건물 509호에서 벌어진 일이 알려지기까지는 시간과 용기가 필요했다. 같은 해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소속 김승훈 신부가 미사 도중 "경찰이 박종철 씨 사건의 진상을 조직적으로 조작·축소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박 씨를 부검한 의사의 증언도 뒤따랐다.

경찰의 고문으로 박 씨가 죽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면서 군사정권은 최소한의 정당성조차 주장할 수 없게 됐다.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총칼을 들이대며 체육관 선거로 집권한 정권은 같은 해 6월 결국 직선제를 수용했다.

박 씨가 숨진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은 지금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쓰인다. 하지만 과거의 어두운 이미지를 털어내지 못 한 까닭인지 평소 찾는 이가 드물었다.

그의 죽음으로 변한 세상, 변한 사람들

그런데 14일 오후, 이 건물 안팎이 사람들로 붐볐다. 고(故) 박종철 씨 사망 20주기를 맞아 그를 기리기 위해 모인 이들이다. '6월민주항쟁20년사업추진위원회'가 이날 주최한 '박종철 열사 20주기 추모식'에는 고인의 유족과 친구, 선후배 및 시민사회단체 관계자와 정치인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이 중 상당수는 1987년 당시 권력에 의해 묻힐 뻔했던 박 씨 죽음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애썼던 이들이다.

1987년 당시 민주화 운동으로 영등포교도소에서 복역하던 중 박종철 사건의 범인으로 수감된 고문경관들로부터 사건의 정황을 받아적은 '비둘기 편지'를 세상에 전해 경찰 고위층의 고문 은폐 기도를 폭로했던 이부영 씨도 이날 추모식에 참석했다. 이 씨는 그 뒤 재야운동을 거쳐 제도 정치권에 진입했다. 열린우리당 당 의장을 지냈던 이 씨는 최근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며 중도 노선을 모색하겠다는 취지로 결성된 '화해상생마당'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수사 검사였던 안상수 한나라당 의원도 참석 했다. 안 의원은 박 씨 사건을 수사할 당시 '관계기관대책회의'라는 이름의 권력 상층부로부터 외압이 있었음을 폭로한 뒤 검찰을 나왔다.

박 씨 사망 당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창립을 주도했던 노회찬,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활동가였던 심상정 등은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돼 추모식에 참석했다.

1987년 거리에서 박종철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 부도덕한 정권을 규탄하던 젊은이들은 중년의 회사원, 입시학원 원장, 중소기업 사장, 출판사 편집자 등의 모습으로 이날 행사에 모였다.

하지만 지난 20년 세월의 무게를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은 고인의 아버지 박정기 씨였다. 1987년 당시 "철아, 이 아버지는 할 말이 없데이"라며 흐느끼던 평범한 공무원이었던 그는 그 이후 민주화실천유가족협의회(유가협) 회장 등을 거치며 거리에서 아들의 뜻을 이어갔다.

그는 각종 사회단체가 마련한 집회에 꾸준히 참석했고, 지난해 9월에는 청와대 앞에서 2005년 경찰의 시위 진압 도중 사망한 포항건설노조 조합원 하중근 씨 사건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하기도 했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해 희생된 미선·효순 양 사건 때도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섰다. '억울한 죽음'이 남긴 슬픔을 절실히 체험한 그가 또 다른 '억울한 죽음'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날 박정기 씨가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연단에 오르자 행사장에 모인 이들은 일제히 고개를 떨궜다. 젖은 눈으로 옛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을 바라보던 그는 "그(고 박종철)가 죽어서 민중의 함성을 알리는 깃발이 됐다"며 "20년이 지난 지금, 살아 있는 이들이 작은 깃발이나마 가슴에 간직해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살아남은 이들의 책임'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들이 죽은 뒤에도 또 다른 '억울한 죽음'을 외면하지 않았던 그였기에 이런 호소는 절절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여전히 이어지는 억울한 죽음들, "20년 전과 무엇이 다른가"
▲ 고 박종철 씨가 고문을 당했던 옛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를 방문한 고인의 부친 박정기 씨. ⓒ뉴시스

박정기 씨가 연단에 오르기에 앞서 박중기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의장이 낭독한 추모사 역시 이런 내용이었다. 박 의장은 이날 추모사에서 "나는 오늘 당신(고 박종철) 앞에 추도나 추모하러 온 것이 아니다. 사죄하러 왔다"고 말했다.

박종철 씨의 죽음이 군사 정권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됐지만 "정치꾼들이 군부의 잔존세력과 타협함으로써"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 살아 있는 이들의 몫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사죄였다.

이어 박 의장은 "얼마 전 포스코 건설 하청 근로자 하중근 씨가 시위 도중 경찰에 죽임을 당했지만 진실이 규명되지 않았다"며 "경찰이 국민을 살해하고도 은폐하기에 급급하다면 20년 전 박종철 열사의 목숨을 빼앗고 은폐하려 한 그 경찰과 무엇이 다르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박 의장의 이런 호소에 대한 반응은 이날 행사에 모인 정치권 인사의 면면만큼이나 다양했다.

고 박종철 씨의 대학 후배라는 회사원 이 모 씨는 "하중근 씨 사건 등 아직 규명되지 않은 일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기폭제가 된 6월항쟁 이후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는 질적으로 다른 단계에 올라섰다. 현재의 군, 경찰, 검찰 등 권력기관을 과거의 잣대로 재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반면 오랫동안 시민단체에서 일하다 지금은 출판 관련 일을 한다는 또 다른 참가자는 "1987년 6월항쟁 이후 어느 정도 민주화가 이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인권'의 가치는 더 떨어졌다. 그리고 여기에는 우리(과거 학생운동을 경험한 세대)의 책임도 있다. 박종철 열사의 기일은 이런 책임을 되돌아보는 자리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민주화 이후 떳떳한 삶 사는 게 우리 숙제

한편 이날 추모식이 끝난 뒤, 참가자들은 박종철 씨 고문 현장인 옛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에 일일이 헌화했다.

비좁은 복도를 따라 길게 줄지어 있는 행렬 사이로 아이들의 모습이 간혹 눈에 띄었다. 올해 중학교에 입학하는 딸과 함께 왔다는 김 모 씨는 "어제 저녁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낸 박종철 열사 전기를 딸에게 읽어보라고 권했는데, 얼마나 읽었는지 모르겠다"며 허허롭게 웃었다. 김 씨의 딸에게 이날 행사를 지켜본 소감을 물었다. 딸은 "제가 태어나기 전에 옳은 일을 하다 돌아가신 분들이 많이 있었다"고 느꼈다고 짧게 대답했다. 딸의 대답을 들은 김 씨는 "1990년대 중반에 태어난 딸이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 다만 나는 내 딸에게 20년 전 나와 내 동료들이 품었던 뜻을 잊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1987년 당시 거리에서 구호를 외쳤던 김 씨는 지금 작은 사업체를 운영한다. 김 씨는 "과거 민주화 운동을 한 세대에 대해 다양한 평가가 나오고 있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큰 싸움은 끝났어도 작은 싸움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업을 하면서 원칙을 깨려는 유혹이 들 때마다 20년 전을 떠올린다. 이게 나의 싸움이다. 민주화 운동을 한 세대에 대한 평가는 이런 작은 싸움들이 끝난 뒤에 해도 늦지 않다"고 덧붙였다.

훗날 박종철 50주기 추모식이 열리면 김 씨의 딸은 흰 국화를 들고 줄지어 서 있던 이날을 기억할까. 그때 그는 아버지가 평생 해 온 '큰 싸움'과 '작은 싸움'을 과연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평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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