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는 훈련하면서 구호를 외치는 것 같은데, 주말 되면 가끔씩 운동회 하면서 응원도 하고 그러더라고."
'미군기지 확장반대 팽성대책위원회'의 신종원 조직국장이 익숙한 듯 말했다. 마을 위로 가로질러 지나가는 미군의 헬기 소리가 구령 소리 위에 덧붙여졌다.
"신경안정제 드시는 분들도 많다"
미군기지 확장 이전에 반대하며 마을을 지켜 온 대추리 주민들과 정부 간의 협상이 지난 2일 재개됐지만 기자가 찾은 대추리의 주말 느낌은 '무표정'에 가까웠다.
일부 언론에서는 '정부와 주민들 간에 전격적인 합의가 이뤄졌다'고 보도했지만 주민 대표로 회의에 참석한 김지태 이장(팽성대책위원장)은 "아무 것도 합의된 것이 없다"고 강조했을 뿐이다. 회의 내용도 좀처럼 공개되지 않고 있다. 주민들에게 이번 대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859일째 촛불문화제에서 만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토요일에 주민총회가 있었어. 김지태 이장이 주민들에게 솔직한 의견을 말해달라고 한 모양이야. 주민들이 싸우겠다면 싸울 거라고도 말했어. 그 자리에서 어르신들이 말했대. 지난해 5월 행정대집행 보면서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걸 짐작했다고…."
2003년 이후 꼬박 3년 5개월. 165가구가 46가구로 줄어들 때까지 남아 '마을에 사는 것이 투쟁'이었던 주민들에게 국가는 점차 무거운 압박을 가했다.
"5월 행정대집행를 비롯해 워낙 많은 일들이 일어나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정신적 충격이 컸어요. 신경안정제 드시는 분들도 꽤 있고요."
'평택 지킴이'로 1년째 마을에서 살고 있는 솔부엉이 도서관의 진재연 관장은 그간 주민들이 국가의 폭력에 시달려 고통이 쌓일 대로 쌓였다고 설명했다.
대추리 주민들을 비롯해 당시 현장에 있던 이들에게 지난해 5월 행정대집행과 9월의 빈집 철거는 '전쟁같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행정대집행에서는 주민들이 직접 세웠던 대추분교가 파괴됐으며, 9월에는 이웃집들이 '빈집 철거'라는 이름으로 불도저와 포크레인에 의해 부숴졌다.
'창살없는 감옥'으로 변해간 대추리
정부는 남아 있는 주민들에게 '충격 요법'과 더불어 '고립 작전'을 함께 폈다.
"두세 달 전까지만 해도 마을 주민이 아니면 마을을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했어요. 국가인권위원회의 시정권고 이후 검문의 강도가 줄어든 편이죠."
진재연 관장은 전경들이 마을 입구를 막고 출입을 통제하면서 마을에 들어오는 손님들이 줄어들어갔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대추리를 '창살없는 감옥'이라고 불렀다.
"외부사람들에게는 대추리에 들어올 수 없다는 공포감이 컸죠. 서울에서도 멀고, 한번 찾아오기 힘든 마을을 겨우 찾아왔는데 전경에 막혀 되돌아가야 했다면 누가 다시 오고 싶겠어요?"
국가의 압박은 주민들의 일상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쳤다. 주민들이 전화를 통 안 받아 "기자 전화라서 전화를 안 받았냐"라고 서운한 듯 묻자 "우리도 이상해서 전화국 사람을 불렀다. 그랬더니 전경부대가 사용하는 무전기 전파가 방해해서 그렇다고 하더라"고 답했다.
"평택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당신은 정말 아는가"
주민들에 대한 정부의 '압박 정책'은 언론에 의해 한층 힘을 받았다. 미군기지 확장이전을 암묵적으로, 때로는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언론들의 왜곡보도와 무관심은 주민들의 상식을 뛰어넘었다. 마을의 상징과도 같았던 대추분교가 군인과 경찰, 용역 등 1만5000여 명이 동원된 가운데 파괴될 때도, 조·중·동을 비롯해 주요 매체들은 주민들의 아픔보다 '외부세력의 폭력행위'만을 부각시켰을 뿐이다.
지난해 11월, 팽성대책위 관계자는 "지금 대추리에 무슨 일이 있는지 정말 알고 있는가"라며 "지난 4년동안 우리들에게 비수를 꽂는 역할 한 것이 바로 언론이었다"고 답답한 마음을 호소했다.
이제 주민들은 할 말이 많아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예전에는 기자들이 인터뷰를 부탁하면 잘 응해줬지만 이제는 '믿지 못한다'는 분들이 많아졌다. 자진출두 후 지난 6개월 간 구속됐던 김지태 위원장 수감기간과 석방 이후에도 언론과의 만남을 대부분 거절했다.
지난해 12월 <한겨레21>이 대추리에 남은 46가구 중 28가구에 대해 설문조사를 벌였을 때 주민들은 "바깥 사람들의 무관심이 제일 힘들었다"고 말했다. 마을 밖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냐는 질문에 9명은 "무관심한 외부 사람들이 얄밉다"고 했고, 5명은 "매스컴이 왜곡돼 있으니, 직접 마을로 와서 보라"고 했다. 4명은 "제발 좀 도와달라"고 했다.
생계 막막한 주민들
사회적인 고립과 더불어 주민들을 괴롭혔던 것은 '먹고 사는 문제'였다. 지난해 국방부가 헬기를 동원해 들판에 철조망을 설치한 뒤, 대추리·도두2리 주민들은 더이상 농사를 짓지 못했다. 한평생 농사만 짓고 살아 온 고령의 주민들에게 '영농 금지'는 생존권을 빼앗긴 것과 다름없었다. 작년 한 해 그나마 팽성대책위 차원에서 285만 평의 논 중 10만 평을 경작했지만 46가구가 먹고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한겨레21> 설문조사에서 주민들은 "농사를 짓지 못한 1년 동안 말 못할 고통을 받았다"고 밝혔다.
28가구 가운데 부업 등으로 돈을 번 가구는 5가구에 불과했으며 아파트 경비원, 청소부, 재활용 분리 등으로 한 달에 70만~100만원을 벌었다고 답했다. 자식이나 친척들에게 의지한 사람은 6명, 은행에서 빚을 내어 생활한 사람은 4명, 법원 공탁금을 쓴 사람 5명이었다. 나머지 8가구는 있던 돈을 쓰거나, 이삭을 주워 돈을 벌었다고 답했다.
"지금 있는 사람들 만이라도 같이 모여 살아야 할 텐데…"
주민들과 지킴이들은 기자에게 무엇보다도 공동체 파괴가 가장 마음아팠다고 말했다. 미군기지 이전계획이 발표된 이후 떠나간 주민들과 남아 있는 주민들 사이의 앙금은 말로 설명하지 못하는 아픔이었다. 대추리는 팽성읍 가운데서도 돈독하고 인심 좋기로 소문났던 마을이었다.
이제 주민들의 가장 큰 바람은 지금 마을에 남아 있는 공동체가 깨지지 않는 것이다. 김지태 이장의 석방으로 주민들이 논의에 물꼬를 먼저 트면서 이주문제를 논의하자고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주민들은 기지이전 연기가 불가피하다는 사실이 밝혀진 만큼 이주단지가 마련되는 때에 맞춰 주거지를 떠나겠다는 입장이다. 국방부를 비롯한 정부측은 전세 자금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주민들에게 이달 안에 떠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혼자 사는 노인들이 많은 대추리 주민들에게 생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의 이주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다.
대화는 성공할 수 있을까?
정부와 협상을 다시 시작했지만 정부와 주민 모두 만족할만한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지난 1년간 정부가 평택 갈등을 대하는 과정을 지켜본 이들 사이에서는 회의론도 제기된다.
정부는 지난해 6월 1차 대화가 성사된 뒤 2차 대화를 앞두고 경찰에 자진출두한 김지태 위원장을 구속했으며, 지난 1일 주민들의 대화 제안에 응하면서도 "보상과 지원 수준을 넘는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못박았다.
이에 대해 김지태 위원장은 지난 4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여태까지 이주하겠다는 소리를 않다가 이주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겠다고 했을 때는 정부쪽도 (미군기지 이전계획) 재협상을 받아들이겠다는 양해 정도는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정부가 재협상에 대한 논의 여지도 닫아둬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또 국무조정실의 평택미군기지이전 기획단의 김춘석 부단장은 지난 3일 2차 대화를 시작하기 전 "이달 중순 내로 협의가 마무리되길 기대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자신들이 정한 시간과 주제 안에서 논의가 마무리되길 바라는 정부의 자세에서 주민들이 요구하는 '진정성 있는 태도'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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