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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는 어디에 있는가?

[김명인 칼럼]여수의 비극과 한류 사이에서

우리 사회의 각종 현안에 대한 '잠들지 않는' 예민한 지적과,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 자신의 환부를 드러내 보일 정도의 치열한 자기성찰을 계속해 온 문학평론가 김명인 인하대 교수가 <프레시안>을 통해 그의 사유의 일단을 선보이게 됐다.
  
  <김명인 칼럼>이라는 문패 아래 대략 격주 간격으로 선보일 이 칼럼은 세상의 크고 작은 일들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걱정하며,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는지를 조근조근 따져보는 형식을 취할 예정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함께 만들어나가야 할 세상은 과연 어떤 것인지 함께 고민해보자는 초대의 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이 이 일련의 칼럼들을 통해 우리가 늘 친숙하게 생각하는 화두 속에서 어느날 낯선, 다시 곱씹어봐야 할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
  
  여수 출입국사무소의 불법체류자보호소 화재로 그곳에 '보호'되고 있던 불법체류 외국인 아홉 명이 죽고 열여덟 명이 부상을 입는 참사가 발생했다. 그들은 가까이는 중국, 멀리는 스리랑카, 우즈베키스탄에서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을 찾은 아시안 이주노동자들이다. 그러나 아시아의 새로운 기회의 나라 대한민국이 가난하고 힘없는 그들에게 준 것은 결국 비참하게 죽을 기회뿐이었다.
  
  언론은 사건 이후 연일 보호시설의 열악한 인권실태와 가혹한 불법체류 이주노동자대책을 비판하고 있지만 획기적인 대책은 여전히 난망이고 죽은 이들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사건은 곧 닥칠 추방의 운명에 지레 절망한, 한 재중국동포의 자포자기적 자해 방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그의 영혼은 육체적 죽음 이전에 이미 절망과 고통으로 먼저 질식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은 이들 모두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여수에서의 절망과 이 땅의 아시아 담론
  
  아시아….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 나라에는 아시아 담론이 꽃을 피우고 있다. 세계사의 피해자, 아시아의 지정학적 희생자라는 사실을 특권화하면서 오랜 일국적 피해망상과 과대망상 사이를 왕복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 결엔가 아시아를 자연스럽게 입에 올리는 형편이 되었다. 세계화와 개방화의 덕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아시아를 입에 올릴 때는 세계를 입에 올릴 때와는 다른 뉘앙스가 있다. 세계는 아직도 따라잡지 못한 어떤 것으로서 여전히 선망을 수반하는 대상인 데 반해, 아시아는 우리와 대등하거나 우리에 못 미치는, 혹은 우리가 이미 앞질러버린 것에 대한 우월감을 수반하는 대상인 것이다.
  
  그것은 이제 좀 먹고 살만해졌다는 것, 한국자본주의의 초과이윤 획득 혹은 이윤보전에 대한 욕망이 아시아의 상대적 저개발국으로 향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아시아는 이제 훌쩍 커버린 한국자본주의의 구체적 경쟁대상이거나 착취대상으로서 떠오른 것이다. 이른바 '한류 담론'이 대한민국을 발신자로 하고 아시아 각국을 수신자로 하는 새로운 문화전파론의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선진국' 일본에 대해서는 각축자의 포즈를 취하고 다른 아시아 각국들에 대해서는 전파자의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은 바로 한국자본주의의 이런 사정과 정확한 아날로지를 이루고 있다.
  
  지식인사회의 아시아 담론도 그 내밀한 맥락은 이와 그리 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식민지시대에서부터 오랜 동안 일국적 사유의 질곡 속에 갇혀 있던 진보적 담론들이 아시아를 발견하고 획득하게 된 맥락 역시 한반도를 이른바 '세계 근대사적 모순의 결절지점'으로서 인식론적으로 특권화하고, 그 토대 위에서 아시아를 관념적으로 대상화한 데서 가능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대한 대안담론 구성이라는 맥락에서 한국의 지식인들이 아시아를 논할 때 무의식적으로 일본과 중국을 일차 파트너로 상정하고 그 나머지를 부차화하는 것, 즉 아시아를 관념 속에서 위계화하는 것이 한류를 포함한 한국자본이 아시아를 위계적으로 사유하는 것과 얼마나 다를까.
  
  반면에 지식인 간의 네트워크의 수준을 넘어서 아시아 민중의 연대를 사유하고 행동하는, 보다 실천적인 아시아 담론들도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사유의 중심은 한반도에 놓여 있게 마련이고 네트워크의 이니셔티브 역시 한국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 경험을 '수출'한다는 발상과 같은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아시아 담론에선 왜 식민주의의 냄새가 날까?
  
  이처럼 한국에 있어서 아시아는 일종의 신개지이자 프론티어리즘의 대상으로 다가와 있다. 그리고 이런 신개지론, 프론티어리즘의 배후에는 알게 모르게 내셔널리즘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고, 그것은 조금 더 발전하면 일종의 식민주의의 논리와도 맥을 같이하게 된다. 식민주의의 본질은 차별화이며, 차별화는 상호주체성 없는 대상화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아시아 담론의 무의식에는 많건 적건 식민주의적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어떤 자리에서 나는 아시아의 연대라는 것은 '고통의 연대'여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제국주의 지배와 식민주의의 질곡이라는 공통의 역사경험이 현재의 아시아 민중의 삶을 여전히 위협하고 식민화하고 있다면 아시아적 연대의 토대는 바로 그러한 식민화가 산출하고 있는 삶의 구체적 고통들을 함께 나누고 그에 대항하여 함께 싸우는 데에 있다는 뜻이다. 그럴싸한 말이다.
  
  하지만 그런 말도 여전히 관념적이고 어쩐지 성에 차지 않는다. 왜냐 하면 아시아적 고통은 어디 평양에 있고, 오키나와에 있고, 반다아체에 있고, 스리랑카에 있고, 티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여기 바로 한반도의 바로 내 코 앞에서 먼저 드라마틱하게 펼쳐지고 있는데 정작 나는 그것을 제대로 나의 문제로 삼아 씨름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시아는 우리 눈 앞에, 우리 코 앞에 있건만…
  
  북한사람, 조선족, 중국인, 몽골인, 베트남인, 필리핀인, 인도네시아인, 미얀마인, 네팔인, 방글라데시인, 스리랑카인, 우즈베키스탄인…. 이처럼 수많은 아시아 민중들이 지금 바로 우리 곁에서 살인적 초과노동을 하고 착취당하고 손가락 잘리고 사기 당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도망다니고 밀입국하고 단속되고 '보호'되고 추방되고 때론 도둑질도 하고 살인도 하고 방화도 하고…, 그리고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다. 바로 여기 아시아 속의 '대한민국'이 있고, 대한민국 속의 아시아가 있는데 우리의 아시아 담론들은 어디를 방황하고 있는 것일까.
  
  아시아 담론을 운위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속의 아시아와 아시아 민중을 똑바로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시아의 신흥강국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식민과 피식민 관계가 매일매일 연출하고 있는 이 적나라한 수라도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이 안에서 아시아적 고통에 대한, 아니 세계적 규모와 차원의 고통에 대한 감각을 일깨운 바탕 위에서 아시아적 연대를 수행하지 못하는 한, 우리의 모든 아시아 담론은 본질적으로 식민담론과 다를 바 없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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