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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적어도 민망한 줄은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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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그때는 적어도 민망한 줄은 알았는데…."

[인터뷰]〈대한민국史〉시리즈 완간한 한홍구 교수

"피로 쓰여진 역사"라는 말은 그저 문학적 수사(修辭)일 따름이다. 하지만 "역사의 기록이 피를 부른다"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조선 시대 가장 끔찍한 사화(士禍)로 기록된 무오사화가 이런 경우에 속한다. 사관 김일손이 성종실록에 적어 넣은 몇 줄의 글이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훈구 세력의 눈에 거슬렸다. 결국 유자광 등 훈구 세력이 연산군을 추동하여 숱한 선비의 목숨을 앗아갔다.

현대로 넘어오면서 역사 기록 몇 줄 때문에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경우는 찾기 힘들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첨예한 정치적 쟁점이다. 최근 뉴라이트 성향의 학자들이 현대사 교과서를 다시 쓰겠다고 나서면서 불거진 사태도 마찬가지다.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얻어맞은 사람은 제법 있었다.

하지만 뉴라이트 교과서 파동을 무오사화에 비유하는 것은 사실 무리다. 지배 권력의 눈 밖에 났던 무오사화 당시 선비들과 달리 뉴라이트 학자들은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주류세력의 환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애당초 사태의 규모와 의미가 전혀 달랐다.

폭력을 각오하고 역사를 기록한 경우에 조금 더 가까운 예를 찾는다면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살상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 사실을 알린 언론사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예비역 군인들의 난입으로 쑥밭이 됐다. 그러나 이런 폭력으로 진실을 가릴 수 없었던 것은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려는 이들의 노력 때문이다. 그것은 부끄러운 역사도 외면하지 않겠다는 용기에서 비롯됐다.
▲ 최근 완간한 <대한민국史>시리즈, 그리고 <한홍구의 현대사 다시 읽기>. ⓒ프레시안

베트남전 파병에 얽힌 부끄러운 역사를 기록해 온 이들 가운데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가 있다. 한국 현대사를 전공한 한 교수는 〈한겨레21〉에 베트남전 참전, 양심적 병역거부, 노근리 사건, 한국의 화교 차별 등 민감한 주제를 다룬 글을 꾸준히 기고해 왔다. 2001년 1월부터 올해 8월까지 이어진 그의 연재물은 다시 〈대한민국史〉시리즈로 묶여 나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대한민국史〉시리즈는 최근 제4권을 내면서 완간됐다.

〈대한민국史〉의 완간과 함께 그는 또 다른 책을 냈다. 〈한홍구의 현대사 다시 읽기〉가 그것. 국제민주연대가 발행하는 격월간지 〈사람이 사람에게〉에 실린 글을 모은 것이다. 한 교수는 이 잡지의 편집위원이기도 했다. <사람이 사람에게〉에 실린 글들은 〈한겨레21〉에 기고한 글보다 독자들에게 덜 알려진 것이지만 그가 쏟은 애정은 덜하지 않다.

〈한홍구의 현대사 다시 읽기〉를 낸 출판사 사장은 "〈한겨레21〉에 실린 글들이 예복이나 정장이 아닌 캐주얼복 차림으로 쓴 것이라면, 〈사람이 사람에게〉의 글들은 여름날 반바지와 '난닝구'에 부채 하나 들고 평상에 퍼질러 앉아 쓴 듯한 글"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한홍구의 현대사 다시 읽기〉에 실린 글은 보다 편한 마음으로 쓴 것인 만큼 한 교수의 최근 문제의식이 보다 더 진솔하게 담겼다는 평을 받았다. 현대사 학자로서의 한 교수의 면모가 〈대한민국史〉시리즈에 담겼다면, 〈한홍구의 현대사 다시 읽기〉에서는 베트남전 참전에 대한 사과와 반성, 이라크 파병 반대, 국가보안법 폐지, 양심적 병역거부 등을 주장하며 뛰어다니는 그의 최근 생각이 잘 드러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史〉시리즈의 완간과 〈한홍구의 현대사 다시 읽기〉의 출간으로 정기적인 글쓰기의 부담에서 풀려난 한 교수는 요즘 국가정보원을 자주 드나든다. 1980년대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던 그였지만 이번에는 다행히 조사를 받는 입장은 아니다. 오히려 조사를 하는 입장이다. 그는 2004년부터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발전위원회'(국정원과거사위) 민간위원 업무를 맡아 왔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음지에 자리잡았던 정보기관의 기록을 살피면서 그는 현대사의 부끄러운 대목들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부끄러운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반성은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것. "거대한 전쟁기념관은 있지만 정작 이 땅 어디에도 '평화'를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그런 박물관은 없다"며 안타까워하던 그는 요즘 평화박물관 건립운동에도 열심이다.

한홍구 교수를 13일 서울의 한 찻집에서 만났다. 이 자리에서 한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못 다한 이야기를 마저 털어 놓았다. 〈편집자〉


'젊은 형님'이 된 386에 대한 책임, '김근태 세대'에게 물어야

프레시안 : 최근 나온 〈대한민국史〉4권의 부제가 '386세대에서 한미FTA까지'다. 상당히 의미심장한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최근 노무현 정권에 참여한 386 정치인들이 한미FTA, 평택 미군기지 이전 등의 문제에 대해 보수 진영과 차별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어서 더욱 그렇다.
▲ 한홍구 교수. ⓒ프레시안

한홍구 : 노무현 정권의 공과(功過)를 통해 386세대 전체를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현 정권을 386정권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무리다. 내가 78학번이니까 386세대보다 조금 선배인 셈인데, 나를 포함한 70년대 학번 세대 그리고 그 윗세대의 잘못이 총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본다. '386'은 특정 정치인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민주화를 이끈 세대를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대로서의 386'은 젊은 나이에 너무 무거운 역사의 짐을 져야 했다. 그래서 오히려 386세대에 대해서는 미안하고 짠한 마음이 있다.

잘못을 따지자면 김근태까지 올라가는 게 맞다. 김근태로 대표되는 민주화 운동의 주류, 그들이 과연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제대로 된 정치적 구심점을 만들지 못했다. 이런 책임을 먼저 물어야 한다.

프레시안 : 〈대한민국史〉 4권에도 실린 '철들지 않고 사는 즐거움'이라는 글이 잡지에 처음 소개됐을 때, 논란이 빚어졌었다. 1980년 5월, 계엄군이 진주할 것이라는 소문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서울대 학생회관을 지키던 유시민 장관에 대한 기억을 담은 글인데, 유 장관을 일방적으로 옹호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한홍구 : 윗세대로서 386에 대해 짠한 마음이 있다고 했지만, 386정치인들을 모두 두둔할 마음은 없다. 한때 386정치인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유시민 장관을 비판한 적이 있는데, 난 쉽게 수긍할 수 없었다. 유시민은 역사의 결정적 고비마다 결단을 망설이지 않았다. '철들지 않고 사는 즐거움'이라는 글은 열린우리당의 386정치인들을 겨냥한 것이다.

지난 2002년 나와 함께 〈사람이 사람에게〉편집위원을 맡고 있던 유시민이 갑자기 그만 뒀다. 그리고 "다시 화염병을 들고 바리케이트 앞에 서는 심정"으로 위기에 처한 노무현을 구하러 혼자 나섰다. 자신의 역할이 필요한 때라고 본 것이다.

물론 유시민에게도 잘못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는 결단이 필요한 국면에서 최소한 물서서지는 않았다.

그런데 유시민을 "싸가지 없다"며 비난하던 386정치인들을 보자. 국가보안법, 대추리 강제철거 등 자신들의 역할이 요구되는 자리에서 어떤 태도를 취했나? 그들은 뒷짐 지고 서서 '젊은 형님' 노릇에 머물렀을 뿐이다. 그리고 화해, 상생 운운하며 폼만 잡았다. 하지만 화해와 상생을 이야기하는 것은 순서가 맞지 않는다. 먼저 철저한 개혁을 한 뒤에 그런 이야기를 해야 한다.

386정치인들은 너무 웃자랐다. 한마디로 너무 빨리 어른이 돼버렸다는 이야기다.

80년대 전대협 의장, 무등 태웠던 기억이 '악몽'이 될까 두렵다

프레시안 : 386정치인들의 조로화(早老化)에 대한 지적인 셈인데, 원인이 뭐라고 보나.

한홍구 : 정치인들이 동세대와 함께 자랐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 했다. 나무가 같이 자라야 하는데 꽃만 따다 놓으니 금세 시들어버린 격이다.

우리가 그때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평생 나가자"고 노래하지 않았었나. 그런데 지금 어떤가. 사실 나도 그렇지만 그때 함께 노래하던 이들이 지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다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분들 말고 정말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기지 못한 386들'을 봐야 한다. 운동 차원에서 노동현장에 들어갔는데, 이제는 생활 차원에서 노동현장을 근근이 지키는 이들 말이다. 386정치인들은 이들과 너무 멀어져버렸다.

1980년대를 떠올려 보자. 그때 전대협 의장 등을 맡았던 친구들이 나타나면 '의장님, 의장님' 연호하기도 했고, 무등 태우고 돌아다니도 했다. 그런 모습이 지금 보면 좀 어색할 수도 있고, 비판받을 부분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필요한 일이었다. 민주화 운동 내부에서 지도자를 키워야 했으니까.

그런데 세월이 흐른 지금, 무등 탔던 이들이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나. 그리고 과거 '의장님'을 연호했던 이들, 무등을 태웠던 이들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물론 정치인에게 시민단체 활동가와 같은 역할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과거 무등 태웠던 기억이 악몽으로 남아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노 마크 찬스'에서 골 못 넣은 민주화 세력…외환위기, 탄핵 당시 뭐 했나

프레시안 : 노무현 정권이 조·중·동과는 원래 사이가 안 좋았지만, 요즘은 개혁 성향의 매체와도 척을 지게 된 듯하다. 함부로 단언할 수는 없지만 민주개혁을 표방하고 집권한 세력의 총체적 위기라는 목소리가 나올 법 하다. 역사학자로서 이런 위기를 어떻게 해석하나?

한홍구 : 위기가 생긴 것은 당연하다. 역사에도 계기가 있는데, 골을 넣어야 할 때 못 넣으면 한 골만 먹어도 지는 것 아니겠는가. 지난 십 년을 돌아보면 '노 마크 찬스에서 골을 넣을 수 있는 기회'가 적어도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1997년 외환 위기였다. 당시의 위기가 재벌과 관료가 무능했던 탓이지 서민과 민주화 세력이 못난 탓에 생긴 것은 아니지 않았는가. 심지어 아주 보수적인 IMF마저도 한국의 관료들을 비판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됐나. 관료들은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을 습득하여 그것으로 무장했다. 반면 민주화 세력은 당시의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내용을 제시하지 못 했다.

또 한 차례의 기회는 2004년 탄핵 정국이었다. 당시 49석에 불과하던 열린우리당은 순식간에 의석수를 세배 이상 늘렸다. 이런 일은 전쟁이나 혁명이 아니고서는 역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기회를 통해 국회에 진출한 386정치인들은 과연 무엇을 했나. 국가보안법 철폐를 비롯한 개혁 과제를 제대로 손대지도 못 했다. 과거를 제대로 정리한 뒤에 화해나 상생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들은 역사의 페이지를 제대로 넘기지 못 했다.

물론 탄핵 후폭풍으로 국회에 들어간 의원들 중에 '함량 미달'인 사람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차례의 기회를 모두 놓친 것에 대해서는 김근태로 대표되는 민주화 세력의 한계가 드러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역사학자니까 하는 질문인데, 주어진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은 우리 역사에서 여러 차례 있었던 일 아닌가. 과거의 역사에서 배울 점이 있다면?

한홍구 : 1987년 6월항쟁, 해방정국 당시, 그리고 그보다 더 과거…. 이렇게 계속 소급될 수 있겠다. 하지만 앞서의 두 기회는 좀 다른 면이 있다. 과거의 기회들은 대부분 외세의 영향이 주요 변수로 작용했다. 그래서 한국 사회 내부에서 형성된 독자적 역량이 발휘되기 힘들었다. 그리고 독자적인 역량 자체가 취약했다. 1987년 6월항쟁은 외세가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는 없지만 민주화 운동 세력의 역량이 취약했던 경우다.

하지만 외환위기와 탄핵은 다르다. 그간의 세월을 통해 축적된 민주화 운동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데 그 기회를 놓쳤다. 이런 생각을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화가 난다. 우리는 왜 기회를 놓쳤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바닥에 떨어진 상황을 일찍 탈피하려는 강박관념도 한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위기가 왔을 때 진하게 반성하고 내부에서 고칠 것을 고쳤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사실 다음 정권을 박근혜가 잡으면 어떻고, 이명박이 잡으면 어떻겠는가. 과거를 돌아보자. 민주화 세력은 박정희, 전두환 정권도 이겨내지 않았던가. 긴 호흡으로 차분히 반성할 때다.

60년대 이후 남한사회 분석 포기한 북한, 추종한 주사파의 오류

프레시안 : 386정치인이라는 소재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런데 386세대와 뗄 수 없는 문제 중 하나가 북한, 그리고 남한 내의 자생적 주사파다.

더구나 최근 발생한 '일심회' 사건은 과거 한국의 사회운동에서 북한은 어떤 존재였는가를 근본적으로 되짚어보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북한이 민족해방 성향의 사회 운동에 대해 부분적으로나마 개입하거나 혹은 개입하려 했던 것에 대해 이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때가 됐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전공한 입장에서는 할 말이 많을 것 같다.

한홍구 : 북한을 통일운동의 동반자로 여기는 것을 넘어 남한 변혁 운동의 지도부로 여기는 편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이런 오류에 대해 설명하려면 좀 돌아가는 길을 택해야 할 것 같다. 1990년대 초반 학번이 요즘 대학생들을 보면 어떤가? 십수 년의 세월이 지났으니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이해할만 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보다 훨씬 선배들이 보면 어떻겠나. 아마 잘 이해가 안 될 거다. 북한이 남한 사회를 보는 시각이 그랬다.

1960년대까지 남한을 다룬 북한의 사회과학 연구 자료를 보면 수준이 상당히 높다. 반면 남한에서는 사회과학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 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간단하다. 북한의 연구자들이 남한 사회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20대 청년이었던 연구자라면 1960년대에 30~40대의 나이에 해당한다. 남한 사회를 마지막으로 본 것으로부터 20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20년 정도의 세월은 사실 금세 지나간다. 그러니까 20대 시절에 본 남한 모습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고, 또 그것이 상당히 정확했다.

하지만 196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이런 변화를 북한의 연구자들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남한 사회에 대한 이해도는 계속 떨어졌다. 이처럼 북한의 남한에 대한 이해와 실제 현실 사이의 간극은 점점 멀어져 갔다. 이런 상황에서 터진 게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이다. 하지만 북한의 의도는 빗나갔다.

통혁당 역시 마찬가지다. 북한이 개입하려 했지만 별 성과를 내지 못 했다. 이 사건을 거치며 김일성 주석은 "남한 혁명은 남한 인민의 힘으로"라고 발표했다. 북한이 남한의 변혁운동을 지도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그리고 북한은 남한의 사회운동에 개입하려는 시도를 실질적으로 포기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1980년대가 되자 한국 내에서 자생적 주사파가 등장했다. 맑스, 레닌, 모택동 등을 거쳐 온 사상적 흐름이 결국 주체사상에 다다른 것이다. 주체사상이 쉽게 받아들여지고 확산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쉽고, 한국 현실에 가까워 보이는 데에다 메마른 이념이 아닌 '사람'을 이야기한다는 점이 주효했다.

하지만 남한 내 자생적 주사파들은 가장 '비주체적인 방식으로' 주체사상을 받아들였다. 성경책을 달달 외운 기독교 신자가 정작 예수를 만난 뒤, "예수도 성경을 잘 모르더라"는 말을 듣는 것과 닮았다.

이렇게 교조적으로 주체사상을 수용한 이들이 북한 방송을 듣고, '밑줄 좍' 그어가면서 그것을 달달 외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북한은 1960년대 이후 남한에 대한 연구를 제대로 하지 못 했던 탓에 "남한은 '식민지반봉건사회'"라는 일제 시대에나 통하던 분석틀에서 벗어나지 못 했다. 하지만 어떻게 자본주의가 고도로 팽창하던 1980년대의 한국을 '반봉건 사회'라고 규정할 수 있겠는가. 결국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라고 한발 물러섰지만 북한의 한국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낮았다.

이런 수준의 인식을 갖고 있는 북한이 남한 변혁운동을 제대로 지도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주사파들은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부분 이런 오류를 깨닫고 합리적인 태도로 돌아섰다. 하지만 당시에도 어리석었으면서 여전히 어리석은 태도를 취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뉴라이트'를 자처하는 부류다. 그들은 주사파였던 이들이 아직도 과거의 자신들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여긴다. 참 답답한 노릇이다.

인권 침해 없이 '일심회' 수사, 의미 있는 변화

프레시안 : 묘한 우연인데, 일심회 사건 직전에 〈빛의 제국〉이라는 소설이 나왔다. 소설가 김영하의 작품인데 소재가 간첩이다. 그것도 일심회 사건의 주인공인 장민호 씨와 꽤 닮았다. 성균관대 81학번인 장 씨는 미국을 오가며 IT(정보기술)관련 사업을 했는데, 소설의 주인공은 연세대 수학과 85학번이며 학생운동을 하다 졸업 후에는 영화 수입 사업을 한다. 이 소설에 간첩의 세계가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과거 갖고 있던 전통적인 간첩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른 듯하다. 장민호 씨도 그렇고, 일종의 신세대 간첩이라는 느낌이 든다. 전통적인 간첩의 경우, 상당수가 한국에서 체포된 뒤 비전향 장기수로 지냈다. 비전향 장기수들을 많이 만났다고 들었다. 이런 입장에서 최근의 '일심회' 사건을 보면 느낌이 남다를 것 같다.

한홍구 : 소설은 읽어보지 않았다. '일심회' 사건의 경우, 아직 사실관계의 전모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여서 함부로 이야기하기는 조심스럽다. 하지만 적어도 '장민호'만큼은 북한과 연계돼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이들은 드문 것 같다. 확실히 간첩도 변했고, 간첩을 대하는 우리 사회도 변했다. 적어도 일심회 사건 조사 과정에서는 인권 침해에 대한 지적은 나오지 않고 있다. 이런 부분은 의미 있는 변화라고 본다.

장기수들을 만나게 된 것은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 서승(1971년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재일교포 형제간첩단 사건 연루자. 그는 중앙정보부의 고문에 항의하여 분신을 시도하고, 19년 간 수감생활을 했다) 선생의 권유에 따른 것이다.

비전향 장기수들의 경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비록 몸은 남한에 있지만 정말 다른 생각, 다른 신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사실 이념이나 신념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한 장기수는 감옥에 있을 때 "밥알이 전구 알만하게 보였다"라고 이야기했다. 열악한 식사를 뜻하는 말이다. 조사 과정, 그리고 수감 과정에서 그들이 겪었던 인권 침해는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인권 침해 없이 간첩 사건을 조사하게 된 지금, 과거 장기수들이 겪었던 인권 침해에 대한 조명이 필요한 때가 된 것 같다.

"다시 파병국가의 국민이 되어"…"국익이면 만사형통?"

프레시안 : 몇 년 전부터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살상 등에 대해 환기하는 활동을 해 왔다.

한홍구 : 그렇다.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면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저지른 인권 침해에 대해서도 반성하자는 취지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오랜 군사 문화가 한국 사회에 남긴 상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배경이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저지른 폭력과 살상에 대해 침묵하는 것을 보며 대부분의 남성이 군대를 경험한 사회는 얼마나 무서운 곳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런 생각으로 양심적 병역 거부 운동도 하게 됐고, 평화박물관 건립 운동도 시작했다. 사실 내 경우도 항일무장투쟁을 전공했으니 온전한 평화주의자는 못 되는 셈이다. 제국주의에 맞서는 폭력은 인정하는 셈이니까.

또 지금 양심적 병역 거부나 평화박물관 건립 운동 등을 하는 이들 중에는 과거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었던 분들이 종종 있다. 어쩌면 이런 운동은 과거의 성향과 조금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분들은 자신의 운동을 성찰한 끝에 지금의 운동에 도달한 것이다. 이런 성찰의 과정이 참 중요하다고 본다.

원래는 베트남에 평화박물관을 지으려 했었다. 하지만 고민이 깊어지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가해자가 먼저 반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충분한 반성이 선행되지 않은 채, 베트남에 박물관을 짓는다면 오히려 과거의 상처만 덧나게 될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한홍구의 현대사 다시 읽기〉의 경우 원래 부제는 "다시 파병국가의 국민이 되어"였다. 그런데 출판사에서 "파병국가의 지식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으로 바꿨다.

1964년부터 8년에 걸친 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 연구하면서 당시와 현재를 계속 비교하게 된다. 처음 파병을 결정했을 때 당시 재무부 장관이 이런 말을 했다. "남의 나라 전쟁에 가서 다리 지어준다는 게 사실 민망한 일이지만, 그래도 생기는 게 좀 있습니다."

적어도 '민망한 일'인 줄은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40년 가까이 지난 2003년, 이라크에 파병할 때는 어땠는가. 민망하다는 말조차 없었다.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게 통과됐다.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됐는가. 40년 동안 경제도 훨씬 성장하고, 민주화도 되지 않았나. 그런데 왜 '국익'앞에서는 '민망함'조차 사라진 곳이 됐는가. "다시 파병국가의 국민이 됐다"는 문제의식은 이런 질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앞서 386정치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민주화 세력의 '위기'를 말했다. 진정한 위기는 어쩌면 "국익이면 만사형통"이라는 '상식'에 대해 다들 무감각해져 있다는 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하던 시절, 주로 이야기했던 것은 '민주화'와 '민중 생존권'이었다. 민주화는 어느 정도 되고, '민중 생존권'이 남은 셈인데. 20년 새 변한 게 있다.

과거에는 어려운 사람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 사회적으로 꽤 반향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안 그런 것 같다. 오히려 약자를 돕자는 주장을 하는 게 어색한 분위기다. 민주화 세력의 위기를 이야기하는 이들이 주목하고 극복해야 할 변화는 이런 게 아닌가싶다.

긴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는 한 교수에게 향후 계획을 물었다. "하던 일 계속 해야죠"라는 대답과 함께 그는 평화박물관 건립 후원회원 모집 안내문을 기자에게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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