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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나라로 돌아가신 故 채규철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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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고향나라로 돌아가신 故 채규철 선생님

[추모] 자연과 아이들을 평생 사랑했던 'ET 할아버지'

"황 선생, 책 잘 받았어. 그리고 나 결심했는데 홍성에 은퇴자 마을이 생긴다고 하니 그리로 갈거야."

얼마 전 신간이 나와 채규철 선생님께 보내드렸더니 잘 받았다는 안부전화를 주시면서 앞으로의 계획과 포부를 말씀하셨다. 목소리는 여전히 낭랑하고 쾌활하셨다.

그런데 통화를 한 지 며칠이 안 되어 돌아가셨다는 문자가 날아왔다. 문자를 읽는 순간 누가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선생님의 음성이 생생히 떠올랐다.

그러나 발신인을 보니 '철부지 대장'이신 문홍주 선생님 이름이 찍혀 있었다. '철부지'는 채규철 선생님께서 상임대표로 있는 사회봉사 공동체다. '아, 사실이구나!' 가슴이 뛰었다. 공연히 눈물이 나려고 했다. 잡지사의 원고마감에 쫓겨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는데 다 틀려버렸다. 부랴부랴 쓰던 원고와 옷가지들을 챙겨들고 천리 한양길에 올랐다.

전혀 다른 두 사진에 담긴 하나의 삶

저녁 늦게 빈소에 당도하니 하얀 국화향기가 코를 찌른다. 화환이 주욱 늘어선 복도를 지나 영정이 모셔진 방에 들어서니 사모님께서 다소곳이 맞아주신다. 국화꽃 한 송이를 영전에 바치고 나서 단 위에 나란히 놓인 생전의 선생님의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화상으로 일그러진 사진을 볼 때는 늘 보던 얼굴이라 그저 그랬는데 그 옆에 젊은 시절의 잘 생긴 사진을 보니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오른쪽의 멀쩡한 얼굴과 왼쪽의 일그러진 얼굴이 과연 같은 사람일까? 오래 서 있다간 아무래도 눈물을 쏟아낼 것만 같아 슬그머니 돌아서 나왔다. 사모님 말씀으론 지난 토요일 가슴에 통증을 느껴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진찰결과 심장동맥이 막혀 있어 수술준비를 하고 있는 사이에 그만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임종 전에 고통스런 순간은 별로 없었다고 하신다. 그야말로 '홀연히' 가신 것이다.
▲ 온몸 화상을 딛고 농촌계몽 한 길을 걸어온 채규철씨의 화상 전 모습.

손님방으로 들어서니 여기 저기 안면 있는 '철부지' 회원들이 수인사를 건낸다. 저만치에 풀무학교의 홍순명 선생님이 손님들과 담소를 나누시는 게 보였다. 그리로 가서 인사를 올리고 자리를 잡았다. 홍 선생님은 나이가 들수록 더 왕성하게 활동을 하시는 영원한 청년이시다. 그러나 가까이서 살펴보니 몇 년 사이에 많이 늙으셨다. 채 선생님과는 젊은 시절 풀무학교 동지로 보통 인연이 아니셨던 모양이다.

"내가 풀무학교에 온 게 1961년인데 채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온 게 1962년이야. 내가 그 때 24살이고 그 분은 23살이었지. 샤프하게 잘 생기고 활달하셔서 당시에 젊은 학생들을 다 휘어잡았어. 여기 앞에 앉아 계신 분들이 모두 그 때의 제자분들이셔."

그러고 보니 사모님과 사별하고 나서 화상으로 거의 불구가 된 몸을 수발하고자 나선 지금의 사모님도 풀무학교 제자였던 것이다. 당신께서 인생의 마무리를 홍성에서 하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선생님을 몰라 뵈 그만 간첩이 됐습니다"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2000년 12월 8일 대구에서 있었던 녹색평론 10주년 기념식장에서였다. 그날 나는 녹색평론과 함께 했던 여러 원로 분들의 축사에 이어 강연을 했다. 나로서는 오랜 옥고 끝에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서는 무대인지라 축사를 하는 분들이 누구신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도무지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어르신 한 분이 연단에 올라서서는 "대한민국에서 이 채규철이를 몰라보는 사람은 간첩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 누구든지 한 번 보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끔찍한 얼굴을 하고 계셨다. 그러나 말씀을 얼마나 유창하게 하시는지 금방 매료되었다. 다음 차례로 연단에 올라선 나는 긴장도 풀 겸 채 선생님의 유머에 장단도 맞출 겸 해서 내 소개를 이렇게 했다.

"제가 채규철 선생님을 몰라 뵈어 그만 간첩이 된 황대권입니다."

장내에선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나는 제법 진지했다. 간첩죄로 13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나온 마당에 그냥 조작간첩이었다고 소개하기엔 멋쩍었던 것이다.

그 때의 내 조크가 재미있으셨던지 선생님께서는 툭하면 전화를 하시어 술 한 잔 하자고 조르셨다. 정말 술을 잘 하셨다. 어떤 때는 함께 마시다가 선생님의 입에서 "한 잔 더!"라는 소리를 막을 수 있는 핑계거리를 찾느라 한참이나 머리를 굴리기도 했다. <야생초 편지>가 베스트셀러가 된 뒤로는 만날 때마다 당신께서 내 책의 홍보대사이니 술 한 잔 사라고 을러대셨다. 얘기인즉 명강사로서 전국에 안 다니시는 데가 없는데 그 때마다 강연을 시작할 때 "간첩 황대권이 쓴 <야생초 편지>에 소개되어 있는 사람이 바로 나"라고 얘기를 시작하신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누구는 감옥을 살아도 날짜만 죽이고 나오지만 황대권이 같은 사람은 오히려 날짜를 배로 불려서 나온다"고 칭찬을 하신다는 것이다. 천형같이 들씌워진 간첩 죄명이지만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소중한 인연들이 맺어졌던가! 채규설 선생님은 그 가운데 단연 보석과 같은 존재이셨다.

평생을 재야의 사회교육자로서 사셨던 선생님은 농촌지역에 공동체 마을을 만드는 일에도 관심이 지대하셨다. 한번은 긴히 할 얘기가 있다며 나오라고 하시더니 책을 한 권 주셨다. <라파시티를 만듭시다>라는 제목이 붙은 책인데 공동체 연구를 전문으로 하고 있는 나로서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책이었다. 들여다보니 은퇴한 노인들로 구성된 일종의 공동체 마을, 아니 공동체 도시에 대한 이야기였다. 정말 대단한 구상이기는 하나 문화수준이 높은 서양에서나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공동체 마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알고 은퇴노인들의 문제를 함께 고민해 보라고 숙제를 내주신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나의 행보에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도 계셨을 것이나 지지부진한 형세를 보고서는 젊은 시절 당신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홍성으로 가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철들지 않은 사람들의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 채규철 전 두밀리자연학교 교장

말년에 선생님께서 정열적으로 관여하신 "철들지 않은 사람들(철부지)"은 그야말로 선생님의 낭만과 이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모임이다. 철이 들지 않았다는 것은 세상적 가치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모여 있는 분들은 살면서 한 번쯤은 바보처럼 순진하다는 소릴 들어본 사람들일 것이다. 이 각박한 세상에 조금씩이나마 가진 것을 내어 서로 나누고 봉사하며 아름다운 삶을 살기로 맹세한 분들이니까. 현재 "길 떠나는 책", "불우이웃돕기", "아름다운 사람 서약" 등의 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보통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풀뿌리 공동체운동이다.

선생님께서는 행사가 있을 때면 내게 연락을 하셨지만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또 다른 대중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나로서는 마음으로만 함께할 뿐이었다.

선생님은 화상만 아니었다면 영웅호걸의 반열에 올랐을지도 모를 위인이시다. 두뇌 명석하지, 언변이 청산유수지, 일도 잘 벌이시지, 술 좋아하시지, 여자 좋아하시지, 성격 활달하시지…. 만약 잘 생긴 외모에 이 모든 것들을 다 갖추고 평생을 살았다면 어쩌면 자만에 찬 삶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느님께서 이를 걱정하셨는지 시퍼런 젊은 나이에 그만 'ET'로 만들어버리셨다.

그래서 그랬을까? 참으로 어린아이들을 좋아하셨고, 또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사시다 가셨다. 아무래도 나는 선생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 지구인의 사는 모습에 몹시 궁금해 하던 외계인이 인간의 모습으로 잠시 오셔서 한바탕 재미지게 놀고 홀연히 가버리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고향나라로 돌아가신 채규철 선생님, 지구라는 곳이 그런대로 살만한 곳이라고 말씀하실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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