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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 분리제출' 문제, 국민 눈높이에서 생각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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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 분리제출' 문제, 국민 눈높이에서 생각해야

[기자의 눈] 검찰은 법원과 줄다리기 할 일이 아니다

이용훈 대법원장의 공판중심주의 선언이 국민의 호응을 얻자 검찰은 '증거 분리제출'을 전면적으로 시행하겠다고 나섰다.
  
  검찰이 시도하는 증거분리제출의 내용을 언론 보도를 바탕으로 살펴보면, 검찰은 기소할 때 기소장만 제출하고, 수사기록과 검찰조서는 본 재판이 시작될 때까지 법원이나 피고인 측 변호인에게 제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검찰 측 증거로 판사에게 선입견을 주지 않겠다는 것이 증거분리제출의 원래 취지다. 그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피의자에게도 재판이 개시될 때까지 검찰 측의 자료와 증거를 하나도 제공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공판중심주의의 원래 취지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영국법원의 공판중심주의와 증거제출
  
  공판중심주의가 몇 백 년 동안 시행되어 온 영국법원에서는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검찰이 가진 모든 자료를 피고인 측에 제출해야 한다. 검찰의 수사기록도 여기에 포함된다. 증인의 진술서도 마찬가지다.
  
  원고가 피고인 측에 제출하는 자료는 물론 법원에도 한 부 제공되지만 판사들은 재판 전에 그 자료를 읽지 않는다. 검찰에서 서명한 증인의 진술서는 해당 증인이 법정에 출두했을 때만 증거로 채택될 수 있다. 증인이 외국으로 이주하거나 법정 출두를 거부할 때는 해당 증인이 수사과정에서 확인 서명한 진술서가 법정에 제출되지 못한다. 만약 그것이 피의자의 유죄를 입증할 유일한 증거였을 경우에는 검찰의 기소는 '증거 없음'으로 기각된다.
  
  피의자는 법정에서 본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할 의무가 없다. 그러므로 검찰이 피의자의 진술 외에 독립된 증거를 하나도 제시하지 못할 경우에는 형사피의자가 유죄를 선고 받도록 할 방법이 없다.
  
  물론 피의자의 진술조서도 법원에 증거로 제출되긴 한다. 이 경우에는 조서를 작성한 수사관이 나와서 그 조서를 소개한다.
  
  수사관이 그 조서를 소개한다고 해서 그 조서 내용이 모두 사실인 것으로 인정되지는 않는다. 피의자의 변호사는 조서를 작성한 수사관을 상대로 그 조서가 작성될 때의 상황, 강압 여부, 피의자의 조서 내용 숙지 여부 등을 따짐으로써 조서 내용의 신빙성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고문을 통해서 작성된 조서는 이 과정에서 증거능력을 거의 혹은 대부분 상실한다. 유신, 5공 시절의 고문수사가 재발하지 않게 하려면 공판중심주의가 도입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재판은 '신속하고 공정하게' 이뤄져야
  
  법원의 과제는 '재판의 신속성과 공정성'이라는 두 가지 대립된 가치를 동시에 실현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가치가 상충될 경우에는 '공정성'이 우선한다.
  
  소송을 신속하고 공정하게 진행하기 위해서 확립된 원칙 중의 하나가 '재판 전 모든 자료의 공개' 원칙이다. 형사에서는 검찰 측에만, 민사에는 원고 피고 양 측 모두에 이 원칙이 해당된다.
  
  또 검찰 측 자료는 기소장뿐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증거물과 수사기록, 진술서 등이 모두 포함된다. 사전에 피고인에게 제공되지 않은 증거물은 재판이 시작되고 난 뒤에는 증거로 사용되지 못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런 원칙이 확립된 논리적 배경은 첫째, 피의자가 검찰이 가진 증거를 모두 알면 불필요하게 무죄를 주장해서 법원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된다, 둘째, 피고인이 자신을 방어할 권리를 최대한 행사하기 위해서는 검찰의 증거를 사전에 알아야 한다.
  
  검찰이 사전에 자료를 제시하지 않고 재판 중에 기습적으로 가하는 공격은 피의자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된다. 만약 재판 도중에 이미 공개되지 않은 공소사실이나 증거물을 검찰이 제출하면 재판장은 두 가지 길 중의 하나를 선택한다. 검찰 측 증거를 무시하거나, 피고인이 그 증거를 검토하고 방어를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을 갖도록 재판을 연기하는 것이다.
  
  지금 검찰이 시행하겠다고 하는 있는 '증거분리제출'은 영국 법원의 눈으로 본다면 피고인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검찰이 가진 증거와 기록을 법원에는 제출하지 않더라도 피고인 측 변호인에게는 처음부터 공개해야 한다.
  
  만약 검찰이 계속 재판 개시일까지 증거를 피고인에게 공개하지 않는다면 영국법원에서처럼 피고인이 충분히 검토하고 방어를 준비할 수 있도록 재판을 연기하는 것이 마땅하다. 처음에는 재판이 지연되는 문제가 발생하겠지만, 여기에 대한 법원의 입장이 확고하면 검찰도 처음부터 피고인에게는 모든 자료를 제공하게 된다.
  
  영국 법정에서는 수백 년 동안 그렇게 해 온 것을 21세기의 한국 법정에서 하지 못할 이유를 생각하기 어렵다. 검찰도 '증거 분리제출' 제도가 피의자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아닌지 잘 생각해 볼 일이다. '공정한 재판'이란 법원과 검찰의 줄다리기가 아니라 피의자, 나아가 국민의 눈높이에서 따질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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